# 153
43. 16화로 가는 길(2)
드라마의 엔딩에 대해 생각하자 자연히 이 빌어먹을 드라마 스토리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지금은 드라마 몇 편쯤 되었을까. 설마 아직 1편도 안 되었다, 이런 건 아니겠지.
나는 쌍둥이를 보았다.
“왜 말을 하다 맙니까?”
쌍둥이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동시에 어깨를 으쓱이는 게, 똑같은 얼굴뿐만이 아니라 행동거지도 형제다웠다.
“이걸 네가 안다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말해 줘도 상관은 없긴 한데.”
백주하는 삐딱하게 서서 말했다.
“그럼 너도 네 정체를 말하라니까?”
이야기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정해준이라니까요.”
“안 지겹냐?”
“선배도 계속 묻는 거 안 지겨워요?”
눈이 마주쳤다. 셋이서 다 같이 히죽 웃었다.
본래 인간은 자기 패는 보여 주기 싫어하면서 남의 패는 죽어라 보고 싶어 하는 동물이다.
“원래 이런 건 나이가 어린놈이 먼저 말하는 거지.”
“연장자가 모범을 보여야죠.”
“나이 가지고 그러는 거 너무 모범적인 꼰대 발상 아니냐.”
“슬프게도 아직 대한민국에서 나이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잖습니까.”
그렇지만 이야기가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이렇게 탐색전을 벌여서 알아낼 수는 없다.
결국 대화가 필요하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했다. 말했듯이, 자기 패를 까고 싶지 않아 해서 문제지.
그러나 상황은 예상치 못한 사람의 참전으로 바뀌었다.
“다들 즐거워 보이니 다행이군.”
노크도 없이 ‘드라마’의 재벌, 악당들의 든든한 후원자 구민석이 뚜벅뚜벅 병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구민석은 병실 안에서 투덕거리고 있는 나와 쌍둥이, 그리고 자고 있는 박서원까지 훑어보았다.
“이래저래 일이 있어서 사지 잘 붙어 있을지 걱정했는데…….”
저 남자가 여우란 말이지.
“아주 건강해 보이잖나.”
건강해서 유감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구민석은 우아하게 냉장고에서 병으로 된 음료수를 꺼냈다. 깜찍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렸다.
“난 말이지, 요즘 일이 너무 잘 풀려서 참 즐거워.”
그런 말을 하면 잘 풀리던 일도 망한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여우를 보았다.
박서원은 인간이 아닌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다니는 것은 아니었고 나름대로 기준은 있다.
인간을 해하거나, 해하려고 하는 것들에게는 자비가 없다.
작매만 봐도 영물이지만 옆에 두고 있지 않은가.
다만 구민석으로 오면 기준이 애매해진다. 다른 것도 아니고 대기업 회장이다. 아무리 기업을 청렴하게 운영한다고 해도 피해를 보는 인간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직접적으로 해하는 게 아니니 인간의 영역 내의 다툼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만은……. 찝찝하다고. 일단 전혀 선량해 보이는 분위기도 아니고. 무엇보다, 정해영의 취향이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는가?
우리 엄마는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 본인도 인정했다. 손요운 같은 스타일을 좋아하게 된 건 너네 아빠 이후로 처음이라고.
“전부 자네들이 수고해 준 덕분이지.”
“그거…….”
백주연은 대놓고 인상을 썼다.
“엄청 기분 나쁘니까 하지 말아 주시죠.”
“허어.”
구민석은 안쓰러운 눈으로 쌍둥이를 보았다.
“자네들 내게 빚 있는 거 알지?”
“…….”
“나는 다 받아 내야 직성이 풀리거든.”
“돈도 많은 양반이 치사하게.”
“돈이 많으니 이런 소일거리에서 재미를 얻는 거지.”
백주연이 말문이 막힌 표정을 했다. 그걸 보고 있으니 나도 조금 즐거워졌다. 오래가진 못했지만.
“어쨌든……. 내가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서 왔는데, 저 친구는 잘도 자는군.”
구민석은 창가 자리의 박서원을 보았다. 딱히 깨우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슬슬 감당하기가 좀 어려워졌나? 순조롭군.”
태평하게 내뱉은 말에 쌍둥이는 얄미워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구민석의 눈이 다음은 날 향했다.
“정해준 씨도 생각 이상으로 잘 해 주고 있고. 사실 이렇게까지 분발해 줄 줄은 몰랐어. 서원 씨가 수상한 놈이 있다고 해서 집으로 데려가길래 시체 치울 생각만 하고 있었거든.”
이 이야기는 질리지도 않고 잊을 만하면 계속 나온다. 슬슬 지겹기까지 하다. 이 얘길 들을수록 정해영의 인성이 의심스러워진다. 좀 제대로 된 애를 좋아하지 그랬냐.
하지만 어차피 멸망한 세상인데, 무슨 상관이냐는 싶은 마음도 있다. 여기서 나갈 수 있긴 한 건가.
“확실히 알고 나니 조금 다른 게 느껴지는군.”
구민석은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철제 의자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지만 무리 없이 장신의 남자의 무게를 받아 냈다.
“인간의 몸에 들어온 건 이래서 불편하단 말이야. 제대로 보이지가 않아.”
“자업자득이죠.”
백주연이 놓치지 않고 한마디 했다. 구민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부분은 나도 변명의 여지가 없지.”
아내가 산함박에게 죽어서 그 복수를 하기 위해 구민석이 박서원 패거리에 합류했다던가?
아니지, 반대일 수도 있다. 구민석이 이들을 모았을지도 모른다.
“아영이는 꼬리가 적어서 제대로 보지 못하고. 친척 중에서 꼬리가 많은 녀석들은 정계 쪽으로 나갔으니 별수 없고.”
대한민국 사회에 있는 여우는 구민석과 성아영뿐일 거라 생각했는데, 다른 가족이 정계까지 나가 있다니.
드라마의 최종 악당은 여우가 아닐까? 한진열도 도시에서 여우 냄새가 많이 난다고 했었다.
재벌에 정치인. 드라마 속 악당으로는 이보다 더 적합할 수 없다.
“그 무당이 아니었으면 지금보다 계획이 늦어졌겠지.”
아무렇지 않게 정보를 툭툭 내뱉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핵심 정보는 말하지 않는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리다가 물었다.
“도대체 그 계획이 뭡니까.”
“해준 씨는 아직 모르나?”
“뱀 새끼 죽이는 것까지만 얘기했어요.”
백주하의 대답에 구민석은 턱을 쓰다듬었다.
“썩 거짓말은 아니지만……. 중요한 설명이 빠졌는데.”
“그걸 말해 줘도 되겠습니까? 저 자식 정체도 모르는데.”
“그래 봤자 허접스런 잡귀 정도 되겠지.”
듣는 잡귀는 무척이나 기분이 나빴다.
“그리고…….”
분명 조명이라곤 파리한 형광등뿐인데 구민석의 얼굴은 짜증 날 정도로 환하게 빛났다.
“해준 씨, 혹시 뱀 좋아하나?”
즉답했다.
“아뇨.”
“봐, 싫다잖아.”
당연히 백주하는 기가 막혀 했다.
“누구나 말할 수 있는 말입니다?”
“확인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고.”
구민석은 여유로운 얼굴로 웃었다.
“내가 아무리 인간 몸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그거 하나 구분 못 할 것 같은가? 날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왜 인간 몸에 들어와 지내고 있는지 알아서 무시하는 건데요…….”
백주연이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구민석은 허허 웃었다.
“해준 씨는 모르지? 내가 왜 이렇게 지내고 있는지.”
구민석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날 보았다. 여우는 갯과였지. 간식이라도 던져 주고 싶었다.
“궁금하지 않나? 응?”
궁금하긴 한데, 궁금하지 않았다.
“알고 싶지?”
예전에 저 비슷한 말에 긍정했다가 괜한 가족사만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구민석에게는 내 대답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냐…… 30년쯤 된 이야기지.”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해 버렸으니까.
* * *
한반도 여우의 우두머리, 유일하게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는 색시를 맞이하고 아들을 하나 낳았다. 이건 작매에게도 들었던 이야기다. 아내가 뱀에게 잡아먹히고, 혼자서 아들을 키우고 있다가…… 그 아들이 어떻게 됐더라?
“로드킬 당했지.”
……아버지 된 입장에서는 가슴이 찢어질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아들이 죽었다는데 단어를 그걸 써?
“아들이 어려서 인간으로 둔갑하지 못했을 때였으니까.”
구민석은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쌍둥이는 인상을 썼다.
“또 감성팔이 시작하네.”
“어허, 우리 아들이 죽은 이야기인데?”
“조의는 충분히 표했거든요? 근데 그것도 한두 번이지, 허구하면 그 얘기 하면서 내가 이렇게 불쌍하고 기구한 운명이다 노래를 부르는데, 어떻게 안 지겨워합니까?”
“인정머리 없는 인간들이라니까.”
“회장님은 인간 아니잖아요.”
“부회장이라네.”
생글생글 웃는 낯짝을 보니 지겨워할 만도 했다. 작매도 진저리 쳤었다. 거긴 그냥 동물 간의 상성상 여우를 안 좋아하는 것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어쨌든 아내도 죽고, 아들도 그렇게 가 버리니 너무 화가 나지 뭔가.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든 인간을 잡아 죽이기로 맹세하고 쫓아갔는데…….”
여기까지는 불행한 여우 인생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다. 쌍둥이가 자업자득이라 노래를 부를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 아들을 친 놈들이 이미 사고를 당했지 뭔가.”
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안에 타고 있던 인간들이 죽진 않았더군. 앞에는 젊은 부부가 있었고, 뒷좌석에는 어린 아들이 타고 있었지.”
구민석은 손을 움직였다. 작은 불꽃이 손끝에서 피어오르더니 부서진 자동차 모양을 만들어 냈다.
“운전자인 남자가 아직 숨이 붙어 있었어. 그래서 그놈만큼은 죽이기 위해 손을 쓰려 했는데…….”
자동차 앞에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가 나타났다.
“조수석의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찾더라고.”
여자가 필사적으로 뒷좌석을 돌아보았다. 남자에게 달려들던 여우가 멈칫했다.
“내 부인님도 마지막까지 우리 아들을 도망치게 하려고 필사적이었지. 다만 우리 아들은 도망치는 데 성공했지만, 이 인간 부부의 아들은 사고의 충격으로 내가 봤을 땐 이미 죽어 있었다네.”
여우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뒷좌석을 보았다. 축 늘어진 아이가 있었다.
“부인과 아들이 생각나서, 적어도 인간 여자가 마지막은 아들의 얼굴을 보고 가라는 생각으로 그 어린 것의 모습으로 둔갑했네.”
눈을 깜빡였다. 이거 어쩐지…….
“그런데 그 인간 여자가 안 죽었지 뭔가! 내 손을 꼭 잡고 있는 바람에 구급차가 올 때까지 벗어나지도 못했네.”
구민석은 혀를 쯧쯧 찼다. 설마 인간 몸에 들어왔다는 게…….
“어쩌겠나. 결국 꼬리 하나를 대가로 인간의 몸에 들어갔지.”
“자업자득이네요.”
“그렇지?”
내 말에 백주연이 킬킬거리며 말했다.
“그렇게 매정한 소리 말고.”
구민석은 손을 저어 불로 만들어진 자동차와 인간들을 없앴다. 매캐한 냄새가 잠깐 코끝에 스쳤다.
“꼼짝없이 70년은 인간의 몸에 매여 있게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잘되었지 뭔가.”
악당 같은 웃음이다. 너무나도 좋지 못한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 얼굴.
……정해영만 욕할 게 아니다. 자식 된 도리로 차마 욕은 못 하겠다마는, 어머니도 좀 더 정의롭고 선량한 캐릭터를 좋아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정계 쪽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우투리를 각성시킬 기반을 마련하기에 딱이었거든.”
“……우투리요?”
“영물과 인간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운 놈을 우리끼리 없앨 수 있을 것 같나?”
불을 없앴던 손이 병실에 있는 인간 네 명을 가리켰다.
“업을 먹어치워서 영혼을 불려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일이지. 그러니 인간의 영웅을 각성시켜 뱀 죽이기에 동참시키기로 했네.”
“…….”
“반정(反正)의 영웅은 억압된 사회일수록 큰 힘을 발휘하는 법이니까.”
입을 달싹이다가 가까스로 말했다.
“인간의, 운명을…….”
“멋대로 주무른 벌은 기꺼이 치를 걸세. 모든 일이 끝나면 나는 내 죗값을 치를 것이고, 이 사회 또한 인간의 손에 돌려주기로 했네. 가족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이니 갑자기 정치인들이 대거 죽더라도 놀라지 말게.”
“……산함박을 죽이면 다 끝납니까?”
“그래. 정확히 말하면 두 번 죽이기로 했네.”
구민석은 영문 모를 말을 했다.
“첫째로, 지금 이 땅 어딘가에서 숨죽이고 있는 뱀 새끼 대가리를 친다.”
잘 먹고 잘 자란 죽은 인간 안의 여우는 눈을 번들거렸다.
“둘째로, 그동안 모은 여의주와 내 여우 구슬을 박서원에게 때려 박아 40년 전, 뱀 새끼가 내 아내를 죽이기 전으로 보낸다.”
여덟 개의 여우 꼬리가 형광등 불빛에 비쳐 바닥에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눈에 보이는 꼬리는 없었다.
“지금의 뱀이라면 몰라도, 당시의 산함박 정도는 여의주를 가진 서원 씨라면 잡을 수 있을 거거든.”
구민석은 웃었다. 과연, ‘드라마’의 악당다운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