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52화 (152/202)

# 152

43. 16화로 가는 길(1)

“여기!”

“괜찮으십니까?”

“이쪽 먼저 출발시켜요!”

해태와 호랑이의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구급대원들이 다가와서 초능력자들을 살폈다.

내 어깨에도 모포가 하나 둘러졌다. 부상을 입은 건 아니지만 경험상 이대로 병원으로 옮겨질 게 뻔했다. 그보다는 집에 가고 싶은데.

“해준아.”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고.

쌍둥이가 다가와서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뭔가 얘기 좀 하려면 일이 터진다니까.”

백주하가 말했다. 김재현에게서 풀려난 박서원도 어슬렁어슬렁 우리에게 다가왔다.

“송 할머니랑은 인사했죠?”

“……네.”

“나는 귀찮으니까 두라고 했는데, 얘네는 그래도 확인해야겠다잖아요.”

박서원은 쌍둥이를 가리켰다. 백주하는 오히려 기막힌 얼굴로 박서원을 보았다.

“그럼 그걸 그냥 둬?”

“야야, 백주하. 괜히 열 내지 말고, 쟨 그냥 입 닥치고 있는 게 우리 도와주는 거야.”

백주연이 한술 더 떴다. 박서원은 눈을 잠깐 찡그렸지만 가만히 있었다. 이미 자기들끼리 이야기가 끝난 눈치였다.

“송 할머니가.”

백주하가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별의별 놈을 다 만나 봤는데, 너처럼 혼과 백이 선명하게 따로 노는 놈은 처음 봤다더라.”

백주연이 말을 받았다.

“백에는 업이, 혼에는 그걸 아슬아슬하게 감당할 만한 보주가.”

역시 그 할머니도 보는 사람이다. 내가 가진 여의주를 꿰뚫어 볼 만큼 잘 보는 사람.

박서원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인간이 아니었다면 죽여서 먹어 치우라고 했을 텐데, 그래도 인간이니 그 방법은 못 쓰겠다고 하셨죠.”

……취조당하고 있군.

나는 묵묵히 세 사람의 말을 들었다.

아직 이들이 꺼낼 패는 하나 더 있다. 업이 얽혀 보게 된 기억. 상황 좋게 내가 저들의 기억만 읽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보통 인간사는 아니었으면, 하는 방향으로 굴러가는 법이다.

그래. 이 세계처럼.

“그리고 업에 빠졌을 때 말이지.”

“너도 우리 기억 봤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우리도 네 기억 봤거든.”

백주연이 쐐기를 박았다.

“네가 악마와 계약하는 날.”

갑자기 억울해졌다. 그건 나에게도 필요한 기억인데. 왜 스스로의 업에 대해서는 보여 주지 않은 거지? 좀 더 그 속에 있었더라면 나에게도 보였을까?

“너, 대가로 혼을 걸었더라고요?”

“……그래요?”

자고로 악마와의 거래에서 악마가 요구하는 것은 항상 영혼인 법이다. 이상할 정도로 놀라지 않았다.

“야. 남 일 듣는 얼굴로 듣지 말고.”

남 일이 맞다.

“기억상실이라고도 하지 말고.”

기억상실은 아니지만 기억이 없는 것도 맞다.

“안타깝게도 인간은 죽이지 않기로 다짐해서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방법은 몇 개 없거든.”

쌍둥이는 당당하게 협박했다. 그렇지만 의외로 충격은 크지 않았다.

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아서일지도 모른다. 본래 충격은 더 큰 충격으로 덮는 법.

이 세상이 이미 한 번 멸망을 겪었을지도 모르는데, 이 녀석들이랑 입씨름해 봤자 도움이 되는 게 있을까?

“그러니 일단 이것부터 시작하자.”

나의 지고한 뜻도 모른 채 양옆에서 쌍둥이가 재촉했다.

“너 누구야?”

* * *

나는 결코 박서원과 쌍둥이를 무시하려던 게 아니다. 그렇잖은가.

하다못해 어젯밤에 ‘정해준’이 악마와 거래를 했고, 그 대가로 자신의 영혼을 갖다 바쳤다는 말을 들었다면 나도 심각하게 대응했을 것이다. 가족 보겠다고 인생을 말아먹었다는 말인데 어떻게 심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이미 인생 말아먹은 놈을 세 명 정도 알고 있고, 거기에 휘말리거나 동조해서 수렁에 함께 걸어가는 이들도 몇 명 알고 있다. 그러니 ‘정해준’ 개인에게 일어난 비극은 중요하지 않다. 아니, 중요하긴 한데, 우선순위에서 살짝 밀린다.

‘정해준’의 영혼이 사라졌기에 내가 이 몸에 들어왔을 수도 있다. 그렇지. 그럴 가능성이 높지.

하지만 우선적으로 생각해 봐야 하는 사실이 하나 더 있다.

‘정해준’의 기억.

그것이 환상이 아니라는 증거를 얻기 위해서는 그 늪에 직접 가 보는 수밖에 없다. 눈앞에 버들이 있었다면 감히 자신의 보증을 믿지 못하겠냐고 펄펄 날뛰었을 것 같지만……. 원래 없으면 나라님도 욕한댔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도 기억상실이라고 하면 죽는다, 진짜.”

단청에서는 이번에 4인실 병실을 준비해 주었다. 기왕 네 명을 한 번에 넣을 거면 거실이 딸려 있다는 VIP 병동을 주면 안 되는 건가? 아, 그건 1인실이라?

구민석 이 좀생이 같은 여우 새끼. 돈도 많은 놈이 돈을 아끼다니. 그 새끼가 흑막인 게 분명하다.

“목숨에 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진실을 털어놓게 하는 방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정해준.”

백주연은 싱긋 웃으며 협박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선배들이 알아야 할 게 하나 있는데요.”

분명히 할 건 분명히 해야지.

“전 정해준이 맞습니다.”

거짓말하진 않았다. 진짜다.

그러니까 그렇게 개소리 듣는 얼굴로 나를 보지 않았으면 한다. 어이, 알겠냐, 백주하.

“정치인 같은 소린 집어치우고.”

병원에 도착한 뒤로 이것저것 검사받고 치료를 받느라 그렇잖아도 지쳤던 심신이 완전히 나가떨어졌다. 백주하는 내 대답을 듣고는 요상한 표정을 짓더니 병실을 나갔고, 박서원은 침대로 기어들어 갔다.

백주연은 딱히 날카로운 기세를 보이진 않았지만 살갑게 이야기를 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어쩌겠나. 다 ‘정해준’의 죄다. 나는 TV를 켰다.

TV에서는 연신 광화문 광장을 비추고 있었다.

도망간 구두 장군의 흔적을 쫓고, 광장에 굴러다니는 머리를 처리하기 위해 특수과 사람들이 현장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흐릿하긴 했지만 익숙한 얼굴들이 있다.

턱을 매만졌다. 버들의 귀여운 조카님에게도 들어야 할 이야기가 있지. 퇴원만 하면 할 일이 쌓여 있다.

그 전에 이 사람들부터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데.

“야, 이것 좀 마셔 봐.”

병실로 돌아온 백주하는 대뜸 컵을 내밀었다. 병원 로고가 그려진 컵 안에 든 건 물이다. 투명하고, 별 냄새도 나지 않는다.

변기 물이라도 떠 왔을까 봐 망설이다가 입만 살짝 댔다.

“믿을 만한 신부님이 축성한 성수거든?”

“……마셔도 건강에 이상이 없는 거 확실해요? 위생적으로요.”

“네가 악마가 아니라면.”

나는 한숨을 내쉬며 성수를 단숨에 마신 후 손목을 흔들었다.

“저 묵주 들고 다니는 거 안 보여요?”

“짭이겠지.”

“바티칸에서 파는 교황님 축성 묵주거든요.”

“누가 너한테 약 판 거 아니고?”

나는 정색했다.

“그런 사람 아닙니다.”

“흠…….”

백주하는 빈 컵을 보고 아니꼬운 표정을 지었다.

백주하가 준비해 온 수단은 성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때?”

“아파요.”

“역시! 이 악마 놈!”

나는 백주하의 손에 들린 소금 봉투를 뺏어서 백주하에게도 소금을 뿌렸다.

“누구나 이렇게 맞으면 아프거든요?”

성수에 소금에, 알 수 없는 부적이나 마법진 비스무리한 것까지.

백주연까지 가담해서 난리를 쳤다. 내가 도중에 지겨워서 한숨 자고 일어날 때까지 쌍둥이의 야매 악마감별법은 계속되었다.

“아니, 정해준 맞다니까요?”

“믿을 수가 있어야지.”

“선배들이 안 믿으면 어쩔 거예요? 본인이 맞다는데.”

백주하는 내 손에서 소금 봉투를 다시 가져갔다. 어차피 빈 봉투다. 나는 옷에 묻은 소금들을 털어 내고 침대 밑에 있는 빗자루로 바닥에 떨어진 소금도 쓸었다.

백주하는 창가 쪽 침대에서 이불을 돌돌 만 채 자고 있는 박서원을 흘깃 보곤 입을 열었다.

“백과 혼이 다르다잖아.”

이건 송희선의 증언 때문이다. 이래서 볼 수 있는 사람은 곤란하다. 여태 해 왔던 것처럼 기억상실로 얼버무리려다가 말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기억상실이라 하는 게 나았을까…….

“말한다고 다 말 아니다, 정해준.”

“봐요, 선배도 정해준이라고 부르잖아요.”

백주하는 얼굴을 찌푸렸다.

“정해준 맞다니까요? 사람 좀 믿고 사세요.”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니까.”

“뚫려 있으니까 말해야죠.”

이러다 진짜 한 대 맞을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백주하는 소금이 담겨 있던 봉투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린 다음 음료수 병 하나를 까서 마셨다.

“야.”

구두 장군 이후로 내내 저기압이다. 나도 일조하기는 해서 얌전히 대답했다.

“네.”

백주하는 의자에 앉아 턱으로 박서원을 가리켰다.

“솔직히 말해서 박서원 쟤는 머리에 든 게 하나밖에 없거든.”

백주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에 든 게 복수밖에 없는 놈은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저놈 침대 아래에 부적이 붙어져 있는 걸 안다. 업으로 뒤덮인 여의주 두 개에, 살해당한 수많은 영물들.

백련화가 외쳤던 것처럼 인간이 감당할 만한 게 아니다.

“그거 말곤 좀 덜떨어져서 네가 뭐든지 크게 신경 안 써.”

백주하는 악담인지 뭔지 모를 말을 했다. 그러나 표정은 어두웠다.

“제가 인간이니까요?”

“인간인 걸 고맙게 여겨라. 아니었으면 진작 죽었어, 너.”

박서원의 입장은 처음부터 일관되었다.

첫째, 인간은 죽이지 않는다.

둘째, 자기 일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박서원에 비해 쌍둥이들은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쟤는 쟤고, 우린 우리지.”

백주연은 내가 정해영을 볼 때 짓는 눈빛과 비슷한 눈으로 박서원을 노려보았다. 한심하고, 밉고, 웬수지만, 어쨌든 가족이긴 한 놈.

“우린 쟤 곁에 정체불명의 괴생명체를 둘 수 없거든.”

“……괴생명체라니. 말이 좀 심하신데요.”

“너라면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을 옆에 두고 싶냐?”

“중의적인 표현인데 저한테 도움만 된다면 상관없을 것 같은데요.”

박서원이 딱 이런 마인드였지. 일부러 같은 말을 했다. 원래 사람은 좀 빡쳤을 때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니까.

“근데 선배들이 그렇게 말하면 저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거든요.”

‘정해준’은 가족과 만나겠다는 목적이 있었다. 계획도 있었다. 저 세 사람에 못지않게 길고 긴 계획이다.

능력을 얻은 것도, 새날에 입사한 것도. 악마와 계약해서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기억이 돌아올 걸 알면서도 박서원과 접촉하고. 모두 ‘정해준’의 계획이다. 네 사람은 서로의 목적을 이해했고,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네 명 모두 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만나는 영물마다 하나같이 선배들 못 죽여서 안달이던데. 선배들이 뭘 하고 다니는지는 아는데…….”

‘정해준’에게는 물을 수 없지만 눈앞에 있는 이들에게 질문할 거리는 있었다.

“왜 그러고 다니는지는 모르거든요.”

“…….”

백주하와 백주연의 입이 거짓말처럼 닫혔다. 괜히 불안해졌다. 말 없는 놈이 말 많아지는 것보다, 말 많은 놈이 말 없어지는 게 더 무서운 법이다.

“나와 주연이 목적은 산함박 그놈을 잡아 죽이는 거야.”

“그걸 누가 모르나.”

“너 점점 막 나간다?”

“악마가 씌어서 그래요.”

“지랄하네, 진짜.”

백주하가 콧방귀를 꼈다.

산함박을 잡아 죽이는 건 너무 예측하기 쉽다. 계속 복수하겠다고 난리 치는데 당연하지.

하지만 그것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뿐이라면 이렇게 지독하게 업을 쌓아 대진 않았겠지.

“일단 우리는 그렇거든?”

“그럼 박서원 씨는요?”

백주하와 백주연은 대답이 없었다. 제대로 짚었군.

자, ‘이 세계’가 한 번 멸망했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드라마’에서 악당이었던 박서원과 쌍둥이가 그 멸망에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더 생긴다.

과연 멸망하기 직전의 세계에서 ‘정해준’은 목적을 이루었는가?

모르지.

아직 비어 있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 ‘정해준’은 난쟁이에게 어떤 대가를 주었는가. 난쟁이는 어떤 식으로 ‘정해준’에게 가족이 살아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는가.

수년간 집념으로 똘똘 뭉친 ‘정해준’이라면 난쟁이와의 계약을 허투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 공사장에서 마주쳤을 때 충동적으로 했다면 모를까, 그 녀석이 소원을 빈 건 좀 더 뒤였지 않은가. 그럼 생각을 정리하고 난쟁이가 사기 치지 못하도록 철저히 했을 것이다.

그럼 중간 과정을 잠깐 건너뛰고, 결론만 보자.

‘이 세계’는 멸망한다. 최소한 서울은 확실하게 멸망한다. 그걸, ‘모두’가 실패했던 세계라고 가정해 보자.

정해영이 쳐 봤던 드라마가 실패한 세계를 그려 냈다고 해 보자.

……그 빌어처먹을 드라마의 주인공, 손요운도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

손요운, 그러니까 우투리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난다.

이 ‘드라마’의 세계는 15화에 서울이 멸망하고 끝난다.

이 두 가지 논제에 연관성이 없다면 그게 더 이상하다.

그렇지만 말이지, 주인공의 실패로 끝나는 드라마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정해영이 보던 그 ‘드라마’는 16부작이었다.

15화에서 서울이 멸망했다면 16화에는 어떤 내용이 나왔을까.

16화에서, 15화의 엔딩을 뒤집는 내용이 나오지 않았을까? 한 시간 동안 주구장창 멸망한 서울만 보여 줄 게 아니었다면 말이지.

인간적으로 날 이 고생을 시키고 있는데, 양심이 있다면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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