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51화 (151/202)

# 151

42. 비극으로 끝나는 이야기(2)

비가 그쳤다.

하늘이 맑게 개기 시작했다. 새파란 하늘이 반쯤 폐허가 된 광화문 광장을 비추었다. 광장 양 끝의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폐허 위에 서 있는 인간과 인간의 영웅, 영물과 괴물의 목을 굽어보았다. 피로가 몰려왔다.

손목에서 달랑거리는 묵주를 뺐다. 버들이 약속했던 한 번은 끝났다. 안전한 곳에서 묵주를 차 보라는 게 생각이 많아질 거라는 의미였다면 알맞은 조언이었다. 머리가 짜증 날 정도로 복잡해졌으니까.

……그래도 후회하진 않는다. 묵주가 아니었으면 최소 중상자 댓 명은 나왔다.

한진열은 턱을 매만지며 광화문 광장에 생긴 구멍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두 장군이 기어 올라오고, 도망간 곳이지만 어찌 된 게 그냥 흙만 채워져 있다. 파손된 수도관에서 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이상하지?”

“크릉.”

“와, 알았어, 알겠어요. 됐습니까?”

“크르릉.”

“에이 씨, 꼰대같이…….”

강아지만 한 크기로 줄어든 해태가 거칠게 꼬리로 바닥을 쳤다. 한진열은 어깨를 움츠렸다.

“어쨌든 할머니. 이상하잖아요.”

불행히도 한반도에 사는 놈들은 이상한 데서 유교적인 집단이었다.

물론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해태와 태어난 지 기껏해야 100년 정도 된 호랑이 사이에는 인간으로서는 짐작 못 할 간극이 있기야 하겠지. 인간도 아니면서 별걸 다 따진다 싶은 감상이었다. 인간이나 영물이나 꼰대는 존재한다.

아빠한테 일조권으로 항의하는 아들도 존재하는 마당에, 더 놀랄 건 없지.

“저, 해태님, 호랑이님…….”

“응?”

임상규는 울상을 지으며 다가왔다. 이쪽은 행정체계의 희생자다. 책임자는 이래서 귀찮은 법이다. 청룡 때는 이산래에게 이것저것 떠맡길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도 무리고. 임상규는 덜덜 떨며 말했다.

“사, 사람들이 접근해도 되겠습니까?”

“음…….”

한진열은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리다가 구멍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며 대답했다.

“다친 사람 많아?”

“대부분 경상자입니다만…….”

“그럼 잠깐만 기다려.”

한진열은 코를 킁킁거리고 발끝으로 흙을 살살 파며 구멍을 살폈다.

두 영물이 구멍을 보며 컹컹 짖고 있는 동안, 초능력자들은 손요운의 날개를 둘러싸고 감탄했다.

“그거 안 무겁냐?”

감탄 사이로 서다흰의 부축을 받고 있던 김재수가 대뜸 물었다. 축 늘어진 날개는 가까이서 보니 더 크고 길었다. 반짝반짝 빛나기도 하는 게 깃털 하나 뽑아다가 팔면 비싸게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보기보다 가벼워요.”

“아까 저놈 후려치는 거 보니 무거워 보이던데?”

김재수는 턱 끝으로 땅에 떨어진 구두 장군의 머리를 가리켰다.

손요운은 말을 정정했다.

“제가 느끼기에는요.”

김재수는 영 못 미더운 눈으로 손요운을 보았다.

김재수는 부상으로 은퇴한 초능력자다. 절뚝거리는 발이 의족인 걸 보면 왜 은퇴했는지는 분명하다. 내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만난 40대 이상의 서울 지역의 초능력자이기도 하다. 저 부상을 어디서 입게 되었는지도 안 봐도 뻔해서 할 말이 없다. 그러니 추모식에 참석했던 거겠지.

“그 날개는 계속 꺼내 놔야 하는 거냐? 그거 달고 있다가는 집에도 못 들어갈 것 같은데?”

김재수는 계속해서 현실적인 부분을 지적했다. 마냥 날개에 감탄하고 있던 초능력자들도 그 질문에 서서히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도 손요운은 크게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나도 심드렁하게 있었다.

드라마 내내 주인공이 커다란 날개를 다니고 뒤뚱뒤뚱 걸어 다니면 정해영이 그 성격에 한마디 안 하고 못 배겼을 것이다.

“이대로면 그렇겠죠. 그런데 좀 집중하면 넣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물리법칙 위배하는 거 아냐?”

어디서 구해 온 타월로 피가 나는 이마를 꾹 누르고 있던 이다혜가 끼어들었다. 어차피 인간이 중력도 조절하고 다니는 세상인데 이제 와서 물리법칙을 걱정하는 거냐고.

……여기선 저런 농담이 보통이겠지.

이다혜의 말에 다들 낄낄거리며 웃었다.

손요운이 날개를 집어넣기 위해 인상을 쓰며 파닥대고 있는 동안 나는 왼쪽 편에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초능력자 무리를 보았다.

“진짜 괜찮아요, 형?”

김재현은 울상을 지으며 박서원에게 물었다.

“괜찮다니까.”

“이거 환자복이잖아요.”

“그렇긴 한데…….”

“병원은요?”

박서원은 귀찮은 티를 팍팍 냈지만 김재현은 물러나지 않았다. 쌍둥이는 그런 박서원을 비웃으며 구두 장군의 머리를 보았다. 근접 전투를 하는 능력이 아니라고 슬리퍼를 신고 있는 게 아무리 잘 봐줘도 병원에서 도망친 환자다.

“이놈이 왜 여기 있을까.”

주위에 눈이 있으니 대놓고 말하진 못하지만 나는 생략된 말들을 똑똑히 알아들었다.

이놈이 지하국에 안 있고, 왜 여기 기어 나왔을까.

“뭔가 문제가 생겼다거나?”

“어디에?”

“어딘가에.”

“아! 나 그 전설 알아요.”

벌레는 못 잡으면서 괴물의 머리는 징그럽지도 않은지 유심히 들여다보던 허재환이 아는 체했다.

“지하에는 까막나라가 있고, 까막나라 임금님은 지하의 괴물이 지상에 올라오지 못하도록 관리한다.”

전설이긴 전설이다. 까막나라도, 까막나라 임금님도 모두 사라졌으니까.

구두 장군은 총 세 개의 머리를 잃고 달아났다. 두 개는 손요운이 잘랐고, 하나는 박서원이 잘랐다. 덤으로 호랑이가 왼손도 끊어 놨다. 처음 기세에 비해서는 너덜너덜해진 꼴로 도망쳤다.

숨을 끊어 놓지 못한 건 아쉽긴 하지만, 올라왔을 때처럼 땅으로 꺼진 놈을 쫓는 건 불가능했다. 구멍은 다시 흙으로 차올랐고 한진열도 다른 걸 발견하지 못했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왔다.

한진열은 해태에게 투덜거리다가 박서원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둘 다 눈이 마주쳤는데도 알은체하지 않았다. 무슨 애들도 아니고.

“어, 해준아.”

“……안녕하세요.”

그리고 고래 같은 애들 싸움에 불쌍한 내 등만 터져 나간다. 생각하고, 해결해야 할 건 산더미 같은데 현실이 도와주질 못한다.

“너 능력 재밌게 쓰더라.”

한진열은 박서원을 아예 모른 체했다.

아는 척하지 말아야지.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뭐, 그냥요.”

“훈열이나 수현이는 크고 단단하게는 만들어도 작고 단단하게는 못 만들었거든. 작은 건 금방 부서진대.”

“아, 네…….”

“그래서 그렇게 쓸 수도 있구나, 감탄했어.”

한진열은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 호랑이는 지치지도 않나.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뭐를요?”

“훈열이는 인간치고 오래 살았으니까……. 얼마 안 지나서 네가 이 땅의 유일한 보호 능력자가 되겠지.”

한진열은 명치를 훅 치고 들어왔다.

“수현이는, 아, 수현이는 평화랑 평원이 아빠야.”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

한진열은 어깨를 으쓱였다.

“수현이는 요령이 없는 애라 다 짊어지고 가려고 했지만 넌 수현이 같은 애는 아닌 것 같으니까. 적당히 놀면서 해.”

“……영물이 그런 말 해도 됩니까?”

“뭐, 어떠냐.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한진열은 담배가 피고 싶었는지 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나오는 건 먼지뿐이었다. 축 처진 호랑이가 불쌍해서 내 담배를 주었다. 한진열은 깜짝 놀란 얼굴로 날 보았다.

“담배 안 피운다며?”

“피우게 됐어요.”

한진열은 코를 킁킁거렸다.

“많이도 피우네.”

“그냥 평범하게 피웁니다.”

“아닌 것 같은데……. 흠? 너 어디 바다 갔냐?”

“바다요?”

“물비린내가 나는데.”

그러고 보니 옛날에 한진열이 나보고 복숭아와 사이가 나쁘냐고 물었었지.

“복숭아 냄새는 안 나고요?”

“그거? 안 나는데.”

한진열은 코를 몇 번 더 킁킁거렸다.

“대신 바다 비린내가…….”

복숭아보다 바다는 짐작 가는 곳이 있다. 심지어 이쪽은 좀 더 안심되는 쪽이다.

나는 왼손을 말아 쥐었다. 다리화가 있던 세계는 해무에 뒤덮여 있었지.

“그건 괜찮습니다.”

“응?”

“왜 그런 냄새가 나는지 알고 있거든요.”

“그래? 그럼 됐고.”

한진열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저번처럼 불길한 냄새는 아니니까 넌 알아서 잘 하겠지.”

한진열의 눈이 박서원을 스쳤다.

“꼭 혼자서 못 하는 애들이 사고 치더라고.”

그 말에 그냥 어색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네?”

“너도 박서원이랑 같은 일 하냐?”

한진열의 눈동자가 바뀌었다. 호랑이처럼 금빛으로 번뜩였다. 이 사람도 영물이니 볼 수 있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

“어쩌다 보니 좀 얽혔습니다.”

“흠…….”

한진열은 눈을 깜빡였다. 눈이 다시 인간의 것으로 돌아왔다.

“요즈음에 혜사 누나가 많이 가르쳐 줘서 나도 알아보는 눈이 좀 생겼거든.”

청룡의 아들인 이산래도 어머니에게 배우지 못한 영역의 주술에는 약했다. 다른 산주인들이 모두 죽고 인간의 손에 길러진 한진열은 호랑이라면 몰라도 영물로서의 자각이 약한 편이었다. 처음에 곰 영물인 혜사가 무시했던 것만 봐도 어떤 수준이었는지 짐작이 갔다.

어린 산주인의 교육 때문에 혜사가 강원도에서 지내더니, 그 곰에게 교육을 받은 건 황일 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하실 말씀이라도?”

겨울잠 자던 곰도 나를 봤을까? 까치인 작매가 내게 별말을 던지지 않은 걸 보면 영물이라도 모두 내 혼을 꿰뚫어 보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산주인이라 불리는 호랑이는 민간에 산신령이라 불릴 정도로 신묘한 존재이니 알아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용호상박(龍虎相搏)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낮말은 새가 듣는 세상에서 그 말을 무시하는 건 좋지 못한 태도다.

“네 사정을 다 알지 못하니까 말이지. 맑은 보주를 가지고 있는 애가 허튼짓을 할 것 같지도 않고.”

한진열은 담배를 물며 말했다.

“네가 평화와 평원이에게 어디까지 들었을진 모르겠는데, 서원이 놈이 허튼짓하면 옆에서 좀 말려.”

“……박서원 씨가 제 말을 들을 것 같습니까?”

“네가 힘들면 저 쌍둥이한테 말하던지. 서원이 때문에 몇 번 만난 적 있는데 쟤넨 그나마 말이 좀 통할 것 같더라고.”

저 셋이 함께 업의 구렁텅이로 손잡고 들어갔다는 얘긴 하지 말자. 호랑이의 동심을 지켜 줘야지.

내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 한진열은 긍정적인 대답이라 생각했는지 씩 웃었다. 한진열은 다른 쪽에서 웅성거리고 있는 초능력자들을 보았다.

“재밌는 게 또 나왔네.”

한진열은 씩 웃었다. 초능력자들이 당황한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어? 어어, 뭐야, 뭐야, 이거?”

“민주 누나, 뭘 한 거예요?!”

“뭐? 아냐, 나 아무것도 안 했어!”

몸이 금색으로 빛나던 여자가 한평원의 말에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그럼 왜 얘 다리가 없어졌어요?”

“나도 몰라!”

초능력자는 울상을 지었다.

“다리를 너무 다쳐서, 나을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게 다란 말야!”

“아니, 그래도…….”

“너도 내 능력 알잖아! 내 능력은 평범하게 동물들 기력 회복시켜 줄 뿐이라고!”

“컹!”

당황한 사람들 사이로 기운찬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큰 부상을 입지 않았던 불개 대여섯 마리가 꼬리를 거세게 흔들며 흥분했다.

뭔가 싶어서 보고 있으니 아까 구두 장군에게 붙잡혀 다리를 다쳤던 불개가 세 발로 껑충껑충 뛰고 있었다. 한진열은 킥킥 웃었다.

“불개가 삼족구가 됐잖아.”

“삼족구요?”

“보기 힘든 신묘한 녀석인데, 이렇게도 될 수 있구나. 집 가면 혜사 누나한테 말해 줘야지.”

한진열은 재밌어 하는 얼굴로 말했다.

“도시에 여우 냄새가 많이 난다고 했는데, 이제 망했네.”

아는 여우가 두 마리나 있다. 나는 두 여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삼족구는 여우 잡는 개로 유명하거든.”

“너 혹시 똘이야?”

“컹!”

한평원의 목소리를 들으니 조금씩 톱니바퀴가 맞아떨어진다.

지하국이 악당, 박서원 일당의 스펙 업 구간이었다면, 구두 장군은 주인공들의 스펙 업 구간이었던 거다.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손요운은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착실히 나아간다.

그로 인하여 이 세계는 천천히 멸망을 향해 가고 있다.

아니, 이미…….

“…….”

가설을 한번 세워 보자.

‘정해준’이 늪 속에서 여의주를 찾았던 2019년 7월 22일.

‘내’가 백하연과 최나라와 함께 보냈던 2019년 7월 22일.

이미 이 세계는…….

이미 이 세계는 한 번 멸망하고, 돌아온 게 아닐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