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49화 (149/202)

# 149

41. 잘려나간 밤(6)

물결 아래로 빛이 비쳤다. 문득 고개를 들자 연꽃잎이 물결에 찰랑거렸다.

물 아래를 걷는 건 좋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기분이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곳. 방해할 수 없는 곳.

이대로 숨을 죽이고 있으면 세상에서 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울한 충동에 휩쓸리면서도 정해준은 물속으로 들어온 이유를 잊지 않았다.

사람을 피하기 위해 한참을 기다리다가 겨우 들어왔는데, 잊어버리면 큰일 나지. 정해준은 작게 노래를 부르면서 늪 바닥을 걸었다. 좀 더 깊이, 깊은 곳으로.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마지막까지 유지했던 세계를 억지로 찢어 침입자가 되도록 하자.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는 돌이 되어 물속에 잠겼다. 많은 이들이 여의주를 노리고 돌이 된 이무기를 찾아 나섰지만 실패했다. 아무도 이무기를 찾지 못했고, 그렇게 이야기는 전설로만 남았다.

“그것도 내가 찾아오기 전까지 얘기지.”

침입자를 공격하는 이무기의 사념은 하얀 막에 가로막혔다.

정해준은 이무기의 잔재를 보며 웃었다.

“죽은 몸도 지키는 건가? 다 죽어서 그런 데 힘쓰지 말자, 우리.”

정해준은 보호막의 크기를 더욱 키웠다.

“……여의주 힘만 닳는다고.”

역시 난쟁이에게 이 힘을 달라고 한 건 정답이었다. 능력을 사용하는 데 요란하지도 않고, 사용할 수 있는 곳이 많다. 박서원 같은 능력이었으면 좀 더 활동반경이 넓어졌겠지만, 반대로 그 능력이었으면 물속을 걷는 짓은 하지 못한다.

정해준의 눈앞에 한때 이무기의 머리였을 거대한 돌이 나타났다. 정해준은 목 아래의 돌 틈에서 이끼가 껴 있는 작은 돌멩이를 꺼냈다.

쿠우웅…….

늪 아래 이무기의 세계가 무너진다. 연꽃잎이 다시 찰랑거렸다.

정해준은 물 밖으로 나왔다. 물속에서 잠깐 잊고 있던 무더위가 몰려왔다. 햇빛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인가.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아닌데 벌써 밤이 되었다. 죽은 이무기라 그런지 늪 속에 있었던 시간이 조금 이상하게 흘렀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젠장. 한 소리 듣겠네.

정해준은 혀를 차며 휴대폰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부재중 전화가 한 통 있었다.

액정 위에 떠오른 이름은 크게 놀랍지 않다.

“선배, 전화했어요?”

“뭐 하느라 이제 전화해?”

다만 상대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친근하다. 나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정해준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일이 좀 있어서요.”

전화 상대는 혀를 찼다.

“일은 우리도 있거든? 너 내일 쉬지? 나와.”

정해준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선배가 회사 다녀 본 적 없어서 모르나 본데, 저 지난주에 쉰 게 마지막 연차거든요.”

“오늘도 쉬었잖아.”

“와, 선배. 오늘은 반차였고요. 근데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요?”

“김 아저씨가 말해 주던데.”

“차장님, 진짜…….”

“어쨌든 내일도 쉬잖아. 그럼 된 거 아냐?”

“아니, 내일도 원래 쉬는 건 아니거든요?”

정해준은 기가 막혀 대답했다. 그러나 상대는 귓등으로도 처 듣지 않았다.

“그러게 누가 초능력자 등록 하지 말래? 지금이라도 해.”

“내가 진짜 등록하면 선배가 더 아쉬워할 거잖아요.”

“너 요즘 쌍둥이랑 어울리더니 말이 많아졌다?”

정해준은 못 들은 척했다.

“내일은 또 왜요. 쉬는 거 아니었어요? 무슨 일인데요?”

“우리가 지하국에서 놓쳤다고 했던 새끼 뱀 기억나?”

“그게 며칠이나 됐다고 잊어버립니까. 달래였나? 그 이름 맞죠?”

“아직 그걸 안 잊을 정도의 머리는 남아 있나 보네. 까치가 그 새끼 찾았다니까 잡으러 간다.”

“저 직장인이라서…….”

“내일 쉬잖아.”

“저도 좀 쉽시다, 선배.”

의미 없는 실랑이가 계속되었다. 상대는 비죽거리며 말했다.

“이참에 회사도 그만두지?”

“아직 안 돼요.”

“왜, 아직도 그게 필요해?”

정해준은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어떻게 입사했는데. 아깝잖아요.”

반쯤은 진심이었다. 새날에 입사했던 건 다른 목적 때문이었지만, 입사 자체는 정공법이었다. 자소서 쓴다고 고생했던 걸 생각하면 입사 반년 만에 관두는 건 아까웠다.

정해준의 진심이 전해졌는지는 몰라도 수화기 너머의 상대 잠깐 침묵했다가 말했다.

“서로 참견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별말은 안 하는데, 어쨌든 쉬는 거 아니까 나와.”

“별말 했잖아요……. 아니, 회사도 이렇게 부려먹진 않는다고요. 노동법 위반입니다.”

“초능력자한테는 그런 거 없는 거 알지?”

“저 등록 안 했거든요?”

상대는 코웃음 쳤다.

“알 게 뭐야. 추모식이라도 갈 거야? 그럼 빠지던지.”

추모식?

“아, 진짜…….”

정해준은 머리를 벅벅 긁으려다가 손에 쥔 여의주 때문에 멈췄다.

“알아서 해. 굳이 너 없어도 되니까.”

“그런 사람이 지금 전화했어요? 나 없어서 지하국에서 뱀도 놓쳤다면서요.”

“입 다물고.”

“……주하 선배와 주연 선배가 저주 푼 이후로 선배 입 험해진 거 아시죠?”

“입 다물라니까. 어쨌든 안 되면 말라니까? 업은 우리끼리 쌓을 테니까 추모식 나가라.”

전화 속의 남자, 박서원은 비죽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해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 꼭 말을 해도, 진짜. 알았어요. 나도 업은 필요하니까…… 어디로 가면 돼요?”

“병원으로 와.”

아까 내가 찾아갔던 병원 이름이 나왔다. 머릿속이 더 엉켰다.

정해준은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정해준은 손에 쥔 여의주를 보며 망설이다가, 입을 가져갔다. 단단한 돌처럼 보였는데, 여의주는 쉽게 깨졌다. 바스스 흙이 되어 흩어지고, 작은 구슬들이 손바닥에 남았다. 정해준은 그걸 한입에 털어 넣고 꿀꺽 삼켰다.

“죽은 이무기 여의주라 그런지 낙인은 안 찍히네.”

입맛을 쩍쩍 다시던 정해준은 이번에야말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문무왕을 만나려면 새날에 계속 붙어 있어야 하는데……. 계속 이런 식이면 힘들 것 같은데.”

정해준은 휴대폰 캘린더를 열었다.

“회사 잘리기 전에 어떻게 동해 용왕을…….”

정해준은 캘린더를 보며 입술을 곱씹었다. 딱히 저장되어 있는 스케줄은 없었지만 눈에 띄는 점은 하나 있다.

날짜.

7월 22일 월요일.

……이상하잖아.

‘나’는 캘린더의 날짜를 다시 보았다.

2019년 7월 22일.

‘박서원’과 ‘정해준’의 대화도 대화지만, 날짜부터가 아예 안 맞는데? 뭐야, 이건? 7월 22일? 어제? 어제 난 백하연과 최나라에게 밥을 사 주었다. 그럼 이건 뭐지?

‘정해준’의 기억이 아닌가? 이게 ‘정해준’의 기억이라고?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설마, 이건…….

* * *

“언니!!”

“요운 형!!!”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이 머리를 쳤다. 빗줄기가 멎을 법도 하건만, 잘도 내린다.

비를 고스란히 맞고 있지만 입에서는 단내가 났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정해준’의 기억을 곱씹을 틈은 없었다.

빌어먹을 새끼, 머리가 아홉 개면 다냐?

김유신이 원치 않은 친절을 베푼 묵주는 과연, 쓸모가 있긴 했다. 단숨에 보호막의 빛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쾅!

도를 내려친 구두 장군이 오히려 비틀거리며 물러날 정도다.

잠깐 틈이 생겨 보호막의 모양을 바꿨다. 저대로 두면 도망칠 수가 없다. 돔 형태에서 뒤쪽을 없애 방패처럼 만들었다. 구두 장군의 크기를 상대하기에는 조금 작은 것 같아 크기를 좀 더 키운 후 보호막을 덧댔다. 한 겹, 두 겹, 세 겹, 네 겹.

“이 틈에 물러나요!”

“아, 네!!”

손요운이 이다혜를 부축해서 일어났다. 해태의 눈이 잠깐 나를 스쳤다. 구두 장군이 성난 얼굴로 도를 휘둘렀지만 보호막을 깨진 못했다.

“단청은!”

임상규가 발작적으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박서원은?! 설마 아직도 한국 안 들어왔어?!”

“어제 들어왔다고는 했습니다!”

“한국이면 왜 연락이 안 돼?!”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랍니다!”

임상규는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젠장, 이래서 초능력자를 해외로 돌리지 말라고 계속 건의한 건데!!”

“크아아아악!”

임상규의 마지막 말은 구두 장군의 고함 소리에 묻혔다.

챙그랑!

보호막이 하나씩 깨져 나갔다.

초능력자 수십 명이 어떻게든 저지하려고 달려들고 있었지만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았다.

지하국에서 무사히 살아서 돌아온 게 용할 지경이다.

생각해 보면 그때는 도망치는 데 집중해서 그나마 괜찮았던 거다. 게다가 우투리의 곡식 병사들도 있었다. 우리에게 화살을 쏴 대긴 했지만 구두 장군을 비롯한 괴물들을 방해하기도 했었다.

‘정해준’의 기억에서도 지하국은 거론되었…… 아니다. 이건 나중에 생각하자. 다른 데 정신 팔 틈은 없다. 한순간이라도 잘못하면 저 사람들 목숨이 날아간다.

능력을 완전히 거두고 다른 사람들을 보조하는 데 발을 맞추었다. 구두 장군이 발을 구르는 데에 교묘하게 보호막을 집어넣어 비틀거리게 만든다거나, 호랑이가 뛰어오를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어 준다거나.

‘정해준’이 능력을 쓰던 방식이다.

“크아아악!”

다만, 나에게도 ‘정해준’의 경험치가 넘어오면서 못 보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구두 장군의 움직임이, 점점 단순해지고 있지 않나?

구두 장군을 보았다. 처음에는 자신을 방해하는 이들에게 간간이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것도 길지 않았다. 애초에 말이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지하국에서는 개 같은 억지를 쓰긴 했지만 제법 길게 말했었고, 버들과 이야기할 때도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것처럼 말했었지 않은가. 지금은 네놈, 네놈 거리다가 짐승처럼 울부짖을 뿐이다.

……저래 봬도 장군이지 않은가. 오래전 지하국의 괴물을 관리했다는 까막나라의 장군. 괴물 같은 모습이긴 하지만 그만한 위엄도 있었다.

“크으윽!”

그런데 지금은 뭔가, 턱 막힌 기분이 든다. 오래된 태엽인형을 보는 것 같다.

움직임이 단조로워져서 그런가? 도를 휘두르고 발을 구르고. 어쩐지 지하국에서 처음 봤을 때만큼의 위세가 없다.

구두 장군이 지쳤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내가 괜히 사서 걱정하는 거면 좋겠는데.

“왼쪽! 다음은 오른발, 재수 아저씨!”

이세빈이 확성기를 꽉 잡은 채 쉴 새 없이 외쳤다. 처음 우왕좌왕하던 건 해태와 호랑이, 불개들이 막아 냈고, 초능력자들이 속속들이 도착하면서 현장에서도 어느 정도 숨 돌릴 틈이 생겼다. 10년 전 오늘 나타났던 놈처럼 사람이 어떻게 손을 쓸 수도 없게 생기진 않았으니 그 점은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으악!”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던 이다혜가 빗물에 미끄러졌다. 속도가 있던 터라 어떻게 하지 못하고 구두 장군에게 쭉 미끄러지는 걸 보고 급하게 보호막을 쳤다. 보호막에 부딪히기야 했지만 구두 장군에게 가는 것보다는 낫지.

“땡큐, 해준아!”

이다혜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일어났다. 신체강화 능력이 있다고 해도 이다혜는 이제 한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을 손요운도 그런 판단을 내렸는지 이다혜에게 외쳤다.

“뒤로 빠져요!”

“뭐?”

“더 있다가는 다쳐요!”

“나 말고 제대로 유효타 넣는 애 없잖아!”

이다혜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손요운이 이다혜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보호막으로 구두 장군의 발을 걸어 넘어지게 했다. 구두 장군이 넘어지는 방향에 있던 호랑이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손요운은 이다혜의 손에서 검을 뺏었다. 임상규가 어디선가 가져와서 초능력자들에게 주었던 검 중 하나였다.

“제가 할게요.”

손요운은 덤덤히 말했다.

“아무도 안 죽을 겁니다.”

별 장식 없는 검을 손에 쥔 채, 손요운은 이다혜에게서 등을 돌려 구두 장군에게 뛰어들었다. 아주 드라마틱하고, 주인공적인 대사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책 없이 튀어나가서 어쩌려고……. 물론 손요운이야 능력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튼튼하긴 하지만 그게 살상 능력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다혜처럼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허재환이나 김재현처럼 다른 자연물을 이용하는 것도 아니다.

손요운이 하나 내세울 수 있는 점이 있다면, 주인공이라는 점?

“야, 손요운!”

그래.

최소한 ‘이 세계’는 원래 ‘내 세계’에서 ‘드라마’로 보여졌다.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 손요운이라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

이세빈이 확성기를 꽉 쥔 채 탄성을 내질렀다. 어쩐지 넋이 나가 있는 목소리는 비 내리는 광화문 광장에 크게 울려 퍼졌다. 이세빈이 당황하여 확성기를 내렸다.

그러나 아무도 이세빈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풍경이다.

손요운의 주위로 바람이 모이기 시작한다. 빗물이 작은 소용돌이가 되고, 마침내 빛이 되었다.

붉고, 푸른 깃이 흔들린다. 활짝 펼쳐진 날개는 불을 머금은 것처럼 따스했고, 여름처럼 뜨거웠다. 꿩의 날개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무늬는 없었고, 다른 비슷한 새의 날개를 떠올려 보아도 생각나는 게 없다.

손요운은 장식도 이름도 없는 철검을 손에 바투 쥔 채 구두 장군을 향해 날아올랐다. 오색빛깔로 찬란하게 빛나는 날개가 손요운의 어깻죽지에서 펄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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