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48화 (148/202)

# 148

41. 잘려나간 밤(5)

광화문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도중부터는 택시에서 내려서 경찰차를 얻어 탔다.

“바로 저 앞입니다!”

그거로도 부족해서 광화문 길목에서 한 번 더 순찰용 모터사이클로 갈아탔다. 수능 때도 해 보지 못한 걸 지금 해 보네. 사람들 때문에 속도를 높이진 못했지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움직였다.

나를 태워다 준 경찰이 더 초조해했다. 순찰용 모터사이클은 저지선 앞에서 멈췄다.

“감사합니다!”

내가 인사하기도 전에 경찰관이 먼저 인사했다. 도대체 뭐가 감사하다는 거야? 이를 악물고 사람들 사이를 헤쳐 나갔다.

비가 내려서 거동이 힘들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황급히 빠져나가고, 경찰들이 그를 돕고 있었다. 경찰들이 급히 만든 저지선 너머로 우비를 쓴 기자들이 소식을 전달하고 있었다.

저 멀리 땅이 울리고, 고함 소리, 짐승이 우는 소리가 함께 들린다.

“어, 어, 저기!”

리포터 중 하나가 저지선을 통과하는 나를 발견하고 고함쳤다.

“누구, 누구야? 얼굴 봤어?”

“못 봤어요!”

“방금 들어간 초능력자 어떤 분입니까!”

“뒤로 물러나세요! 여기도 비워야 해요!”

모든 게 다 엉망이다. 구두 장군이 왜 여기에 온 거지? 어떻게? 곡식 병사들은? 버들은?

다른 괴물들은 없나? 불개들은 왜 여기 있고?

“누구라고요?”

“비켜요!”

“바, 방금 정해준 초능력자가 합류했습니다! 정해준 초능력자는 우리나라에 둘밖에 없는 보호 능력자로…….”

아주 그냥 돌아 버릴 것 같다.

저지선을 넘어 광장 쪽으로 달렸다. 비와 땀에 젖은 옷이 기분 나빴다. 그렇잖아도 무더운 날씨에 비까지 내리니 아주 미쳐 돌아갔다.

“미쳤어, 미쳤어, 나 집에 가면 안 돼? 집에 갈래!”

“지금 집에 가면 사진 찍혀요.”

제일 먼저 보인 건 후방으로 빠져 있는 초능력자들이었다. 부상을 당했는지 낑낑거리는 불개들을 돌보는 초능력자들이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아, 왜! 난 여기에 도움 되는 능력도 아니잖아! 등급도 낮은데!”

그렇게 우는소리를 해도 초능력자는 불개들의 상처를 돌보았다. 초능력자의 몸에서 희미한 금빛이 났다. 손이 스칠 때마다 불개들의 신음 소리가 줄어들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인 걸 보면 비상근무에 나올 만큼 높은 등급의 초능력자는 아닌 것 같았다. 검은 정장을 입고 있는 게…… 추모식에 참여했던 것 같고. 익숙한 얼굴도 그 사이에 있었다.

“그러지 말고요. 누나 덕분에 그래도 불개들이 쉬고 있잖아요.”

“정작 사람은 못 쉬게 해 주잖아!”

한평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주위의 말에 맞장구치고 있었다. 하기야 비가 오니까 한평원의 능력이 필요 없긴 하지.

하얀 국화꽃이 한평원의 발밑에 엉망이 된 채 흩어져 있다.

“이세빈 씨는요? 어디까지 왔어요? 단청이랑은 연락됐습니까?”

“근처랍니다! 경찰에 요청해서 오고 있답니다!”

“대피는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어요?”

“일반 시민은 거의 다 대피했습니다!”

“거의 다로는 안 돼요!”

다른 쪽에서는 요괴대책팀의 임상규를 비롯한 공무원들이 휴대폰을 붙들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모두가 피해야 한다고!”

현재 서울의 현역 초능력자들은 이삼십 대가 많다. 그 이상은 10년 전 뱀을 막다가 대부분 사망했기 때문이다.

어린 초능력자들은 뱀이 할퀴고 간 아픔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며 자랐다. 박서원이나 쌍둥이처럼, 그 속에서 버티고 선 이들도 있었다.

아픔을 겪은 이들은 다른 이들이 아픔을 겪지 않길 바랐다. 초능력이 없는 세상을 살아온 현대인의 감성으로는 이해할 듯 말 듯 아리송한 이타주의였다. 단지 그 이유만으로 자신을 사지에 몰아넣다니.

아주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완벽히 공감하기도 힘든 일이다.

바꿔 말하면, 완전히 공감하지는 못해도 이해는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그 사람들을 좋아했다.

“비켜주세요! 저희 지나가야 해요!”

“잠깐만요, 저희 저기 가야 해요!”

“비켜! 비켜드려!!”

……비상근무는 강제다. 분명 강제다. 그렇지만 초능력자 본인이 정말 못 하겠다고 하면, 정신감정 같은 몇 개의 테스트를 거친 후 명단에서 이름을 뺄 수 있긴 하다. 혜택이 줄어들고, 최저임금을 받는 건 변함이 없지만 정말 못 해 먹겠다 싶을 때 도망갈 구석이 있기는 하다는 거다.

그렇기에 비상근무 명단에 오른 초능력자들은 뒤로는 어떤 개인적인 이유가 있을지 몰라도, 어느 정도 각오를 한 사람들이다.

즉, 소집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속보를 듣고 자진해서 이곳으로 모이는 이들은 예전부터 괴물들에게서 인간들을 지키기로 마음먹고 있었다는 뜻이다.

“김재현 초능력자가 합류했습니다!”

“이세빈 초능력자가 도착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 * *

“커흥!”

호랑이가 울부짖었다. 호랑이의 금갈색 털이 물과 피에 젖어 있다. 그새 불개 중 절반은 나가떨어졌고, 해태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부리부리 뜬 채 구두 장군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젠장, 저런 놈은 어디서 나온 거야?!”

이다혜는 잠깐 뒤로 빠져 숨을 골랐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씨발!!!”

이다혜는 악을 쓰며 움직였다.

이다혜가 손요운을 향해 달려갔다. 손요운은 경찰에게서 빌려 온 전술방패를 들고 자세를 낮추었다. 손요운을 향해 내려치는 구두 장군의 도는 김재현의 가시가 쳐 냈다. 구두 장군이 땅속에서 기어 올라오느라 광장을 박살 낸 덕분에 김재현이 제한 없이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

구두 장군이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밀려난 도를 다시 휘두르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지만 어디선가 뻗어 온 나무뿌리가 구두 장군의 도를 단단히 붙잡고 있었다. 처음 보는 능력이었다.

나무는 어디서 나왔나 했는데 광장에 있는 나무 화분들이 박살 나 있었다. 내가 알기로 원래 저렇게 큰 나무가 아니었는데, 그 짧은 사이에 무슨 숲처럼 자라나 있었다. 나무들은 구두 장군의 팔과 다리에도 엉켰다.

“뛰어!”

“알았다고!!”

그 틈을 타 이다혜가 손요운이 들고 있는 전술방패를 밟고 높이 뛰어올랐다. 구두 장군이 다른 쪽 손을 들어 이다혜를 쳐 내려고 했지만 이번엔 몸을 낮추고 있던 호랑이가 튀어 올라 팔을 물었다.

“죽어!!!!”

이다혜는 구두 장군의 목에 검을 찔렀다. 구두 장군은 팔을 휘둘러 호랑이를 떨쳐 내고 이다혜를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언니!”

임상규가 쥐여 준 확성기를 들고 있던 이세빈이 비명을 질렀다. 이다혜는 본능적으로 검을 놓고 아래로 떨어졌다. 손요운이 이다혜를 받아 광장을 데굴데굴 굴렀다.

“위!”

구두 장군이 자신의 발을 붙잡는 나무를 끊어 냈다. 커다란 발이 손요운과 이다혜를 향했다. 손요운은 이를 악물며 이다혜를 감쌌다.

이건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드라마’에 나올 법한 사건이다. 보호 능력자가 없으면 과연 몇 명이 이곳에서 죽을까.

아마 주인공인 손요운은 저 공격을 버틸 것이다.

그렇지만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쾅!

“보호막이다!”

“정해준?!”

구두 장군의 공격은 지하국에서 몇 번 견뎌 보았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그 경험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는데.

“네놈은!”

그리고 구두 장군이 알은체를 안 해 주었으면 한다. 우리에게 원한을 가지고 지상으로 기어 올라왔다는 소리도 안 해 주었으면 한다.

구두 장군의 아홉 개 머리가 나를 노려본다. 뒤쪽에 있는 머리 몇 개는 신체 구조의 한계로 보지 못하지만 대충 느낌은 그랬다. 목에 꽂혀 있는 이다혜의 검이 무슨 장난감 검처럼 보였다.

“네놈!”

“크헝!”

그 틈을 타 해태가 뛰어올라 이다혜가 꽂아놓은 검을 물었다.

“크아악!”

꼴좋다, 씨발.

해태도 피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해태 또한 부상을 입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초반부터 싸우고 있던 초능력자 몇몇은 이미 부상을 입고 빠지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이 사람들은 겁도 없이 구두 장군에게 달려간다.

해태의 무게가 실린 덕분에 검은 구두 장군의 목에서부터 겨드랑이까지 쭉 내려왔다.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어쩐지 거무튀튀한 색이다. 업이 섞인 건가? 검은색만 보면 예민해지는 병에 걸렸다, 아주.

“이 개새끼가!”

해태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는지 입에서 검을 놓고 아직 손요운과 이다혜를 감싸고 있는 내 보호막 위를 사뿐히 밟았다.

“크응.”

사뿐히는 아니었고, 힘에 부쳤는지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확실히 해태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다.

구두 장군이 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불개 한 마리가 뛰어올라 구두 장군의 귀를 물었다.

“아악!! 개새끼가 너무 많구나!!”

구두 장군은 날파리를 잡는 것처럼 손을 휘저었다. 아차, 하는 순간 불개가 구두 장군에게 뒷다리를 잡혔다.

“깽! 깨갱!”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불개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붙잡혔던 다리가 처참하게 꺾였다.

구두 장군은 해태에게 시선을 돌렸다.

나무뿌리가 다시 한번 장군의 발목을 붙잡았지만 아까와 비교해서 확연히 힘을 잃은 채였다. 반대편에서 고깃집 사장을 부축하고 있는 서다흰이 보였다. 나무는 저쪽 능력이었군. 구두 장군의 주위가 분산된 틈을 타서 한평원과 함께 후방으로 빠져 있던 초능력자들이 이를 악물고 달려와 불개를 빼냈다.

나는 그 사람들이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리고 구두 장군이 도를 휘두르기 직전, 해태 위로 보호막을 한 겹 더 쳤다.

쾅!

“버틸 수 있어요?!”

“몰라요!”

누군가 내게 물었다. 얼굴을 보고 대화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악을 쓰며 대답했다.

“최대한 버텨 볼게요!”

“다들 어떻게든 저놈을 공격해!”

다른 쪽에서 초능력자들이 뛰어갔다. 제일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지네잡이와 닷발이 때 보았던 허재환은 이를 악물며 능력을 썼다. 그때는 무서워서 벌벌 떨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색이 하나도 없다.

허재환의 뒤를 이어 김재현의 가시가 공격했고, 화살 모양의 불꽃이 꽂히거나 염력 능력자가 있었는지 날붙이가 날아가기도 했다.

쾅!

그러나 구두 장군은 해태를 최고 위협으로 생각했는지 보호막을 다시 내려쳤다. 손요운과 이다혜를 감싸고 있던 보호막을 풀고 해태 위로 커다랗게 보호막을 만들었다.

“젠장, 버텨요, 해준 씨!”

임상규가 비명을 질렀다.

지난번 괴조 때는 딱 이 타이밍에 박서원이 나타났었지. 지금은? 씨발, 지금보다 그놈이 필요할 때가 어디 있다고! 정신은 차렸다고 들었는데, 거동을 못 할 정도는 아닐 거 아냐! 기어서라도 나오라고!

쾅!

이를 악물었다.

김유신이 손을 댄 묵주가 품속에 있다. 버들의 말도 있었고,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어지간하면 챙겨 다니고 있다.

버들은 안전한 곳에서 사용해 보라고 했지만…….

쾅!

씨발, 이런 상황에 그걸 어떻게 따져!

다음번에 깨진다. 괴조 때처럼 하나가 깨지면 하나를 다시 씌우고 같은 짓은 하지 못한다. 초능력자들의 공격을 모두 무시한 채 도를 찍어 누르는 놈을 상대로 그런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

“꺄아악!!”

비명 소리가 귀를 때린다. 저 사람들을 향해서, ‘손요운은 주인공이니까 죽지 않아. 하지만 이다혜는 모르겠네.’

그따위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드라마’다. 드라마. 드라마. 드라마.

실제로 이곳이 어떤 세상이든지, 적어도 ‘나’에게 만큼은 드라마여야 했다.

그래야 나는 돌아보지 않고 떠날 수 있을 테니까.

‘돌아보지 않으려면 아예 보질 마세요.’

버들님. 하지만 저는 이미 발목이 붙잡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세계, 에서는…… 우, 우리, 엄, 마, 아빠, 도…… 사, 살아 있을, 까…… 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이미 붙잡혔다.

차라리 미친놈이라 욕했더라면 모른다. 그런데 그런 말을, 그런 말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붙잡히지 않을 수 있겠냐고! 차라리 이곳이 ‘드라마’여서, 부모님이 살아 있는 세계가 ‘진짜’이길 바라는 그녀한테, 내가 뭐라고 해야 했을까.

이곳은 드라마여야 한다.

그렇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언니!!”

“요운 형!!!”

처음 오늘이 내게 주었던 묵주를 꺼냈다. 은색 십자가가 흔들렸다. 생각할 겨를은 더 없다.

버들님, 한 번은 막아 준다고 했지요?

분명, 한 번은 ‘정해준’이 ‘나’에게 씌는 걸 막아 준다고 했습니다?

구두 장군이 도를 내려치기 직전, 묵주를 팔목에 찼다.

시야가 반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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