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41. 잘려나간 밤(4)
온갖 방송에서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기가 왔다. 휴대폰, TV. 어딜 봐도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광화문 광장에 만들어진 새하얀 국화꽃 장식에 대해서도 떠들썩하다. 집 근처에도 무언가 생겼다.
하얀 꽃. 향. 포스트잇. 누군가는 사진을 가져다 놓기도 했고, 누군가는 전해지지 못할 선물을 가져다 놓기도 했다.
전부 지하국에 있을 때 생긴 것이다.
차라리 지하국에서 삼 일만 더 있을 것을.
백주하는 여동생을 혼자 두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업이 뒤섞여 아래로 떨어지면서 정신을 잃은 세 명은 꼬박 하루가 지나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세 명은 송 할머니, 한진열에게는 나무라고 불리는 송희선이 내가 허둥거리는 동안 성아영에게 연락하여 척척 처리했다.
‘이 아이들이 깨어나면 그때 보자꾸나.’
그 할머니에게서는 소나무 향이 났다.
“오빠.”
백하연이 메뉴판에 얼굴을 박고 있다가 나를 불렀다.
“왜?”
“진짜 먹고 싶은 거 다 시켜도 돼요?”
“다 시키라니까.”
“진짜요?”
최나라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너희 사 줄 돈 정돈 있거든.”
“나도 나 먹고 싶은 거 사 먹을 정도의 돈은 있는데.”
최나라는 깔깔거리며 말했다.
“그럼 너희가 내던지. 난 안 말려.”
백하연과 최나라는 어깨를 움츠리다가 배시시 웃었다.
말문이 트인 백하연은 밝았다. 백하연과 최나라는 메뉴판 하나 가지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자기들끼리 쑥덕거리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정해영은 저 나이 때 내 운동화도 씹어 먹었는데 얘네는 그래도 좀 더 먹는 양이 사람 같다. 이게 보통인가? 더 먹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럼 지금 너 혼자 있어?”
백하연과 최나라의 대화를 듣다가 문득 생각이 나서 물었다. 백주하와 백주연은 지금 아마 병원에 있을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해외에 있는 걸로 되어 있던 것 같았다. 구민석이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고등학교 삼 학년 여자애가 보호자 없이 혼자 지내는 게 걱정되어 연락했었는데, 백하연은 최나라와 함께 나왔다.
“아뇨, 나라네 집에서 지내고 있어요.”
“그래?”
“나라랑은 중학교 때부터 같은 반이었거든요. 나라 부모님께서 오빠들이 자주 집을 비우는 걸 알고는, 그때마다 자고 가라고 해 주셨어요.”
주위에 그런 어른이 있는 건 좋은 일이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쌍둥이를 감싸 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백하연이 아무것도 모른 채 웃고 있는 걸 보니 가슴 한편이 쿡쿡 찔렸다. 얘는 자기 오빠들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평생 모를 것이다.
백하연은 포크에 파스타를 둘둘 말았다.
“늦어도 오늘까진 돌아온다고 했었긴 한데……. 사실 저주 풀린 지가 얼마 안 됐잖아요?”
솜씨 좋게 파스타를 입에 넣은 백하연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엄청 바쁠 거라 예상해서 놀랍지도 않아요.”
최나라도 고개를 끄덕였다.
“맨날 이땐 집에 오겠다 하는데, 그렇게 말해도 초능력자 각성 이후에는 바빠서 같이 있던 적은 별로 안 돼요.”
백하연은 담담하게 말했다. 구운 토마토를 한입에 쏙 넣는 모습이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거기에 투정할 만큼 저 어리지도 않고요.”
백하연의 성장 과정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어른스러워질 이유가 있다. 오빠들에게 걱정 끼치기 싫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는 나이기도 했다.
가만히 백하연을 보고 있자 눈이 마주친 백하연은 음료수로 목을 축였다.
“있죠, 오빠. 저 사실요, 우리 부모님 그렇게 막, 기억 안 나요.”
10년 전이면 백하연은 아홉 살이다.
“이런 말 하면 어른들은 상담받아 봐라, 그러는데 그런 건 아니구요. 오빠는 오빠 아홉 살 때 일 많이 기억해요?”
“기억하는 건 기억하고, 못 하는 건 못 하지.”
“그쵸? 저도 그래요. 부모님을 잊었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런 거예요.”
백하연은 어깨를 으쓱였다.
“부모님이 보고 싶냐고 하면, 당연히 보고 싶죠.”
빈 포크가 괜히 마늘 조각을 괴롭혔다.
“근데 올해가 어떤 해냐면요.”
백하연은 소리 없이 웃었다.
“여태까지 제가 살아왔던 시간 동안에, 엄마 아빠가 있었던 것보다 오빠들과 같이 있던 게 더 길어지는 해예요.”
백하연은 잘 컸다. 정말로.
쌍둥이를 떠올려 보건대, 아마 혼자서 이렇게 잘 컸겠지. 아직 웃는 모습은 어린아인데 오빠 얘기를 하는 얼굴은 그렇게 의젓할 수가 없었다.
아닌 척해도 일찍 어른이 된 티가 날 수밖에 없었다.
“오빠들이 딱 지금 제 나이에 아홉 살짜리 여동생을 키우게 된 거잖아요. 바꿔서 생각해 보니 너무 절망스러운 거 있죠? 난 절대 그렇게 못 할 텐데.”
열아홉이면 아직 성인이 아니다. 강제로 어른이 되어야만 했던 아이는 10년 전에도 있었다.
옆에 있던 최나라는 백하연의 말에 맞장구쳤다.
“너네 오빠들이 너한테 좀 지극정성이긴 했지?”
“반년 동안 저주에 걸려서 다 까먹긴 했지만.”
“그건 앞으로 평생 우려먹어도 돼.”
최나라와 함께 키득거리던 백하연은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그러니까 내일이 어떤 날이든 저한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오빠들이 무사히 돌아오는 게 더 중요하니까.”
훔쳐본 기억 속에서 정작 그놈들이 뭘 노리는지는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박서원은 그 둘을 백하연의 곁으로 돌려보내고자 했었다. 그 점이 이해가 돼서 할 말이 없어졌다.
“선배들도 그게 최고 목표일걸.”
“아니면 집에서 쫓아낼 거예요.”
회장에서 보았던 백하연의 실력을 떠올리면 쌍둥이는 종이인형처럼 팔락거리며 쫓겨날 것이다.
“그래, 그런 일이 생기면 나도 도와줄게. 근데 너희 좀 부족해 보이는데 더 시켜 줘?”
“음…….”
테이블 위의 빈 그릇들을 가리키자 최나라가 히히 웃었다.
“먹고 카페 가야죠.”
“그래……. 먹는 게 남는 거지.”
정해영이 먹던 걸 생각하면 아직 한참 부족하다. 정해영은 그렇게 먹고서도 두 다리로 걸어 다닐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근처에 케이크가 맛있는 곳이 있다는 최나라를 따라 일어난 백하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이렇게 오래 연락을 안 한 건 처음이라 좀 걱정되긴 해요.”
쌍둥이는 진짜 나가 죽어야 한다. 저런 착한 동생을 두고 지금.
“괜찮을 거야.”
“그렇겠죠? 서원 오빠랑 같이 갔다고 했으니까.”
둘이서 또 뭐가 그리 재밌는지 깔깔거리는 여고생들 옆에서 지갑을 꺼내며 계산했다. 백하연은 그런 날 돌아보며 불렀다.
“아, 해준 오빠.”
“응?”
“오빠는 내일 어쩌실 거예요?”
“내일?”
백하연은 비 오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추모식 가요?”
* * *
대서(大暑)는 절기 중 하나로 일 년 중 가장 무더운 시기를 말한다.
보통 양력으로는 7월 23일 무렵이다.
올해의 대서도 7월 23일이며, 2009년의 대서도 7월 23일이었다. 그다지 특이한 일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이, 대서는 대개 그 날짜였다.
그래도 서울은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그런지 생각보다 덥지는 않았다. 비에 젖은 하얀 꽃잎은 광화문 광장을 더럽히고 있었다.
해태는 세종대왕상의 무릎 대신, 발치에 앉아 추모식을 거행하는 인간들을 보았다. 촛불 대신 LED 촛불을 든 사람들이 조용히 묵념했다.
제일 앞줄에는 그 날 놈을 막기 위해 맨몸으로 달려들었던 초능력자들의 유족들이 있다. 그중에서 아는 얼굴을 보았다. 한진열과 한평원은 새까만 양복을 입은 채 처음 보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다.
추모연설이 시작되었다. 택시 기사는 추모식 중계 화면을 보고는 혀를 찼다.
“우리 사돈도 저기 휘말려서 죽었어.”
죽거나 다친 사람이 워낙 많다 보니 몇 다리 건너면 금방 희생자가 나온다. 나는 택시 기사의 말에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은 다신 일어나면 안 되는데.”
“그렇죠.”
병원에 도착했다. 택시비를 계산하고 내렸다.
박서원과 쌍둥이는 기어이 하루를 꼬박 정신을 잃고 있었다가 오늘 아침에서야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역시 말을 조심해야 한다. 백주하가 여동생을 혼자 내버려 두기 싫다는 말을 한 직후에 생긴 일 아니던가. 백하연은 오늘 최나라의 집에서 지낼 것이고, 그 집은 TV를 켜지 않을 것이다.
날짜가 이 모양이라 쌍둥이가 바로 백하연에게 달려갈 줄 알았는데 그보다 나를 먼저 호출했다. 내가 먼저 일어났다고 짜증 내는 건 아니겠지? 그러게 누가 업을 그따위로 쌓으랬나.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최악을 생각하면, 내가 그놈들의 기억을 보았듯이 그놈들이 내 기억을 보았을 경우다. ‘나’나 ‘정해준’의 기억. 업이 얽혔다고 했으니 ‘정해준’의 업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역시 답은 기억상실이다.
병원 로비의 TV에서도 추모식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어어어?”
“저게 뭐야?!”
직원에게 병실을 확인하려고 하는데, TV 앞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저거! 저저저, 저거!”
비명 소리가 들린다.
다들 TV 앞으로 모였다. 나도 뭔가 해서 근처에 있는 TV를 보았다. 비 내리는 광화문 광장과 비에 젖은 채 바닥으로 떨어지는 흰 국화들이 보였다.
“꺄아아악!”
그 비명은 TV 앞에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TV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광장 바닥에서 도가 불쑥 튀어 올라왔다. 다행히 추모식 때문에 사람들이 없던 부근이라 다친 사람은 없었다.
반 정도 튀어나온 도가 스윽스윽 움직였다. 아래로 살짝 들어갔다가, 다시 위로 올라온다. 그때마다 바닥이 갈라졌다. 누군가 아래에서 톱으로 바닥을 썰고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해태가 자세를 낮추며 몸집을 키웠다. 으르렁거리며 경계하고 있었다. 몇몇 익숙한 얼굴의 초능력자들이 벌떡 일어났다. 추모식 진행을 위해 도로를 통제하고 있던 경찰들이 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불길함에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도, 왠지 익숙한데.
익숙하면 안 되는데 익숙하다.
카메라가 흔들린다. 땅이 흔들리는 거다. 도가 땅속으로 불쑥 들어갔다.
쿵!
흔들린다.
쿵!
심장이 불안에 요동친다.
쿵!
갈라진 틈으로 도를 쥔 손이 보인다. 딱 봐도 평범한 인간의 손 크기가 아니다. 나는 저런 도를 쥔 커다란 인간을 알고 있다. 인간, 은 아니고. 머리가 아홉 개 달린 괴물을 알고 있다.
“컹!”
구두 장군은 상체를 걸친 채 손을 휘적거렸다. 거리가 멀고 카메라가 많이 흔들리긴 했지만 구두 장군 등 쪽의 머리에 매달린 검은 개 한 마리가 선명하게 보였다.
아니, 한 마리가 아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해도 세 마리다. 구두 장군의 뒤를 따라 틈을 빠져나온 불개가 구두 장군이 휘두르는 검을 피해 몸을 물고 늘어졌다. 구두 장군은 귀찮은 얼굴로 솥뚜껑만 한 손으로 불개들을 쳐냈다.
“깨갱!”
불개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위로 구두 장군의 도가 내리꽂혔다.
그때, 금빛과 푸른빛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호랑이가 구두 장군의 도를 물어 막았다. 푸른빛의 해태는 그 틈을 타서 구두 장군의 목을 노렸다. 불개들이 잽싸게 도망쳤다.
화면이 바뀌었다.
“기, 긴급 속보입니다.”
스튜디오가 나타났다. 당황한 얼굴의 앵커가 추모식 도중 일어난 사건에 대해 읊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병원 밖으로 나갔다. 천천히 옮기던 걸음이 빨라졌다.
쾅!
“어, 어, 뭐여?”
“아저씨, 광화문으로 빨리 가 주세요!”
택시 기사는 작은 타블렛 PC 화면으로 흘러나오는 뉴스 속보를 한번 보고, 내 얼굴을 한번 보았다.
“저길 가자고?”
“빨리요!”
“아니 아니, 잠깐, 진정하고, 난 못 가, 죽을 일 있어?!”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 지갑. 지갑 안에는 신분증이 있다. 주민등록증 말고, 초능력자 등록증.
택시 기사의 눈앞에 등록증을 들이밀었다.
“저기 가야 해요!”
“어, 그, 아, 알았어! 꽉 잡어!”
택시 기사는 떨떠름한 얼굴로 차를 출발시켰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속보를 전하고 있는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현재 광화문에 있는 걸로 파악되는 초능력자 명단이 넘어왔습니다! 어, 한평원….”
제일 앞줄에 있었으니 제일 먼저 이름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추모식이라 그런지 모르는 이름들이 많았지만 사이사이 아는 이름도 들렸다.
“서다흰, 김재수…… 현장에서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앵커가 종이를 건네받으며 소식을 전달했다.
“북천의 손요운 초능력자가 저지선을 넘어 합류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