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41. 잘려나간 밤(3)
“네놈 허락 따윈 필요 없어!”
박서원은 목소리를 높였다. 저 녀석이 저렇게 악을 지르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러니까 박서원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는 거다. 오로지 복수를 위해 살던 날들.
…지금과 달라진 건 없나?
“그래……. 그렇지…….”
늙은 거북은 사뭇 다정하게 느껴질 만큼 느리게 말했다. 주름에 가려진 눈동자는 불빛 때문인지 부드럽게 일렁거렸다.
“네 자유고말고…….”
어쩐지 사춘기 어린애 다루는 것 같은 말투인데.
박서원이라면 더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싶어서 얼굴을 바라보니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직 어려서 거기까지 알아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인간이 아닌 자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는 건지……. 저 박서원에게는 더 중요한 게 있었겠지.
박서원은 입술을 비죽였다.
“널 죽일 거다.”
“너는…….”
늙은 거북은 기침을 쿨럭쿨럭 했다. 그는 이미 생의 끝에 다다랐다. 박서원이 죽이러 오지 않았더라도 오래 살진 못했을 테다.
“너는, 분노할 이유가 있지…….”
박서원은 다시 눈을 찌푸렸다. 몇 살쯤 되었을까. 옷차림이 가벼운 걸 보면 겨울은 아닌 것 같고. 눈 밑에도 점이 없다.
“우리는 그가 인간을 먹으러 가는 걸 알았다…….”
주먹을 꽉 쥐었다. 이무기를 잡던 백주연도 같은 말을 했었다.
“알면서도 막지 않았어…….”
‘알고 있었고, 막을 힘이 충분히 있었으면서도 손 놓고 있었잖아!’
백주연의 울부짖음.
“인간의 일이라는 변명……. 그러나 다들 그저 무서웠을 뿐이지……. 수많은 영물을 잡아먹은 놈의 힘에 자신이 먹힐까 두려웠기에…….”
늙은 거북은 슬픔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이것은 우리의 업……. 나의 업.”
늙은 거북은 천천히 일어났다. 거북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박서원에게 다가갔다. 태산이 이동하는 느낌이었다.
박서원은 그런 거북을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
“만약 네가 이것을 업고 갈 생각이라면, 알아 두려무나…….”
박서원의 앞에 도착한 거북은 무릎을 굽혔다. 말하는 것만큼이나 느리게. 마치 항복하는 것처럼.
“그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면 남길 것을 만들지 말거라…….”
박서원은 이를 악물었다.
“우리에게 연민을 품지 말거라…….”
“연민?”
박서원은 코웃음 쳤다.
“웃기지 마, 연민은 얼어 죽을.”
박서원은 바닥에 꽂혀 있던 검을 잡았다. 붉은 술은 아직 달려 있지 않았다.
“그럼 되었다…….”
그렇게 늙은 거북은 머리를 숙였다. 눈앞의 소년이 자신의 목을 베기 쉽게 도와주기 위해서.
“나를 송두리째 먹어 치우렴…….”
거북은 목을 쭉 뺐다.
박서원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베이고, 떨어진다. 질퍽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먹고 있다. 마시고 있다. 뚝뚝 흘러내리는 피. 영물이 오랫동안 수련한 증거, 정순한 기(氣)의 모음.
몇 번이고 구역질을 해 대면서도 박서원은 멈추지 않았다. 어떤 것이 저 소년을 여기까지 내몰았던 걸까.
그 이유를 알고 있어, ‘정해준’은 박서원을 이해했다. 이해했기 때문에, 그 길에 합류하는 걸 거부했다.
노리는 것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그 길은 겹치지 않는다.
“박서원!!!”
업의 기억은 끝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박서원을 불렀다. 아까 내가 걸어온 통로에서 네발짐승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호랑이 한 마리가 자세를 낮추며 뛰어왔다가 목이 잘린 거북이의 모습에 경악했다. 박서원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입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기어이……!”
한진열은 이를 으득으득 갈다가 인간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기어이 잡아먹었구나!”
박서원은 입가를 닦다가 포기했다. 손등만으로는 제대로 닦을 수 없었다. 얼굴에 피가 번졌다.
“왜요, 형. 그렇게 놀랄 일이에요?”
“그만큼 말했으면 말귀를 들어먹은 줄 알았지!”
한진열은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한진열의 기세 때문에 살갗이 따끔거린다. 한진열은 가슴을 퍽퍽 치며 외쳤다.
“하고 많은 길 중에 왜 굳이 그런 길을 걸어가려고 하냐고!”
답답하다 못해 참담한 감정이 묻어나는 얼굴이다.
“네가 이 길을 걷지 않도록 훈열이랑 내가 얼마나…!”
“저기, 형.”
박서원은 한진열의 말을 가로막았다.
“난 처음부터 말했잖아요. 그 새끼 죽일 수 있도록 능력을 쓰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새끼가 하는 말을 누가 다 믿냐?”
“원래 어린애들은 하나에 꽂히면 그것만 보거든요.”
박서원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이해가 안 돼요.”
“……뭐가.”
“평화가 아직도 매일 악몽 꾸는 거 알잖아요. 걘 평생 할아버지랑 형 원망할 거예요.”
“…….”
“그 날 아빠 살리려고 숨살이꽃 피우려는 거, 그거 막은 것 때문에요.”
한진열이 잠깐 멈칫했다.
“……수현이는 먹혀서 시체도 남지 않았어. 평화가 꽃을 피워 냈어도 어차피 못 살렸어.”
“그렇겠죠. 하지만 마음이란 게 이해했다고 해서 납득할 수도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평화도 원망은 해도 미워하진 않는 거고요.”
“걔는……. 아니, 걔랑 너는 다르지.”
“네, 달라요. 나는 평화 같은 능력은 없으니까.”
박서원은 거북의 목 아래에 꽂혀 있는 검을 뽑았다. 피투성이다.
“그러니까 이해를 못 하겠다는 거예요.”
박서원은 말간 얼굴로 한진열을 보았다.
“형도, 할아버지도 가족을 잃었잖아요? 그런데 왜 화를 안 내요?”
“…….”
“왜 복수하려고 하지 않아요?”
한진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네가 어린애라는 거야.”
“그래서 더 이해가 안 된다는 거예요.”
박서원은 처음부터 이해할 생각도 없었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내가 대신 복수할 거예요.”
“누굴 대신해서?”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요.”
“네가 뭔데?”
“인간이죠.”
박서원은 얌전히 대답했다. 순하게 웃는 꼴이 어린애 같았다.
“할아버지를 비웃는 건 아니에요. 나 같은 놈이 있으면 할아버지 같은 분도 계시겠죠. 근데 나는 그렇게 못 해요. 나는 그 새끼를 죽여야 분이 풀릴 것 같아요.”
“……그래선 너도 남아나지 않을 거다.”
“애초에 그런 거 남길 생각도 없었어요.”
한진열은 인상을 팍 썼다.
“어린애가 그런 말 하지 마라!”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고맙긴 한데.”
박서원은 검을 쥔 손을 바라보았다. 새빨갛게 물든 손이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거 알죠?”
“젠장, 서원아!”
호랑이의 노성이 동굴 벽을 때렸다.
“이 방법은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억지로 데려가려고요? 그럼 팔이나 다리 잘라요. 내 발로 갈 생각은 없으니까.”
“방법이 없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한진열의 눈이 번쩍였다. 으르렁거리는 울림이 들렸다.
“그만하세요, 큰아버님.”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막는 목소리가 있었다.
체구가 작은 노부인이다. 짙은 회색 조의 한복을 입고, 빨간 술이 달린 노리개를 하고 있다. 틀어 올린 머리는 새하얗다. 꽉 다물린 입매는 완고하다.
한진열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아이는 제가 돌보겠습니다.”
노인은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아버님께 전해 주세요.”
“나무야?”
“제가 앞으로 그리로 돌아갈 일은 없을 거라고.”
“나무야, 너 지금 무슨 소리 해?”
“서원이라고 했지? 우리 아버님 댁에서 얘기했었지.”
한진열은 처음 듣는 이야기인지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박서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한 대로 내가 도와주마.”
“나무야!”
한진열이 경악해서 외쳤다. 노부인은 음울한 얼굴로 대답했다.
“큰아버님. 내 아들이 죽었어요. 하나뿐인 내 아들. 그 착한 녀석이.”
아.
그 말에 노부인이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한진열이 왜 저렇게 경악하는지도.
“그것도 남을 구하다 죽었어요. 멍청하다고, 미련하다고 욕하고 싶어도 수현이라면 당연히 그랬을 거니… 내가 그렇게 키웠으니까……. 어미로서는 슬프고 원망스러워도 참았습니다.”
노부인은 소나무처럼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말했다.
“그렇지만 그 뱀은 용서하지 못해요.”
무채색의 노부인은 호랑이에게 선언했다. 두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내 아들을 죽인 만큼, 죗값을 치르게 할 겁니다.”
“나무야.”
“내가 다 지고 갈 겁니다. 평화와 평원이의 몫까지. 아버님과 큰아버님의 몫까지.”
“나무야!”
노부인은 가까이 다가온 박서원의 입가를 고운 항복이 더러워지는 것에도 아랑곳 않고 손수 닦아 주었다.
“얘야, 가자꾸나.”
박서원은 한진열을 한번 보고는, 아무 말 없이 노부인을 따라나섰다. 한진열은 안절부절못하며 다시 한번 노부인을 불렀다.
“나무야,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된다고!”
“큰아버님께는 죄송한 일뿐입니다.”
“다른 방법도 있잖아! 왜 그런 길로 가려는 거야!”
노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게 유일한 방법입니다.”
바닥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한진열과 노부인의 대화가 점점 작아졌다. 귀가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아까 전처럼 바닥이 무너지려나 싶었지만, 그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손끝이 저릿해졌다. 새까만 그림자가 내 몸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만히 두었다간 먹힌다. 먹혀 버린다. 그러면 돌아갈 수 없다. 어떻게든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보호막? 여기서 보호막을 쓸 수 있으려나?
이를 악물었다. 발부터 올라온 그림자는 좀 더 올라오다가 멈칫거렸다. 손에 걸린 묵주가 빛나고 있었다. 오늘이 주었던 거다.
손바닥에 있는 다리화의 여의주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릿한 손가락을 움직여 묵주를 손바닥에 감았다. 여의주의 힘을 받은 묵주가 좀 더 환하게 빛났다.
그래. 이거라면.
“……요.”
어떻게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쓰는 사이에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제대로 전달되진 않았다. 다만 소나무 숲에 들어온 것처럼 청량한 향이 맡아졌다.
“일어나세요.”
몸을 타고 올라오던 그림자가 화르륵 불타올랐다. 세계가 흔들리고, 물밑에 잠겨 있던 정신이 끌려 올라간다. 소나무 향이 짙어졌다.
“일어나세요.”
눈이 번쩍 뜨였다.
방금 전까지 한진열과 설전을 나누던 얼굴이 눈앞에 있다. 틀어 올린 하얀 머리카락과 꽉 다물린 입. 어두운 회색 한복을 입은 우아한 노부인.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서 급하게 왔더니, 큰일 날 뻔했구나.”
한진열이 나무라고 부르는 한평화와 한평원의 할머니.
“다른 아이들은 업이 깊어 너처럼 얕은 곳에 있지 않아. 꺼내 올리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하겠어.”
노부인은 어두운 표정으로 쓰러져 있는 박서원과 백주하를 보았다. 새까만 물이 흘러나온 흔적은 온데간데없다. 아무것도 없어 썰렁하기만 한 박서원의 집이다.
노부인은 걱정 어린 얼굴로 안방을 보았다.
“주연이가 제일 깊게 잠겼다마는……. 그 아이는 의지가 확고하니 길만 잡아 준다면 금방 나오겠지.”
한복에는 붉은 술과 하얀 술로 만들어진 노리개가 있다. 박서원과 백주연의 검에 달린 술과 같은 문양이다.
“무슨 일이…….”
“주연이가 여의주를 소화시키다가 부적이 깨져 버렸지. 이번에는 꽤 죄가 큰 아이를 잡아먹었더구나.”
노부인의 음울한 눈이 안쪽 방을 향했다가 돌아왔다.
“내가 만든 부적이 깨져 업이 넘쳐서 이런 일이 생겼단다.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업이 얽혀서 큰일이 생겼을지도 모르지.”
노부인은 박서원과 백주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나를 보았다.
“네가…… 해준이구나. 아이들에게서 네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
내 영혼까지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날카로운 눈이다. 이 사람 또한 ‘볼 수 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노부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너도 많은 사연이 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