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41. 잘려나간 밤(2)
뚝.
쩌억.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먹물처럼 새까만 물이 흘러넘친 건 기억하고 있는데, 눈을 뜨니 하얀 설국이 나를 반기고 있다.
회색 하늘에서는 가랑눈이 하늘하늘 떨어졌다. 공기는 봄처럼 따뜻했지만 숨을 내뱉자 입김이 솔솔 나왔다.
여긴 어디지?
“……라고!”
멀지 않은 곳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익숙해서 가기 싫고, 익숙해서 반가운 목소리였다. 풍경이 바뀌기 직전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방 안에 있는 백주연은 어떻게 됐지? 무사한가? 그 안에서 어떤 사고가 있어서 이런 데까지 오게 된 거지?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발을 내디뎠다.
쩌억.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가 아래에서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니 하필이면 서 있는 곳이 또 얼음이다. 눈이 소복이 쌓여 있긴 하지만 꽁꽁 언 호수 위다.
쩌어억.
얼음이 갈라지는 건 나 때문이 아니다.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부터 갈라져서 그 금이 나에게까지 닿았을 뿐이다.
천천히 발을 옮겼다. 발자국이 생기지 않았다.
“이건 그 대가라고!”
누군가 고래고래 악을 쓰고 있다. 아는 목소리.
“뭐? 왜 자길 추락시켰냐고?!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다!”
백주하? 백주연? 어느 쪽이지.
“알고 있었고, 막을 힘이 충분히 있었으면서도 손 놓고 있었잖아!”
새빨간 피가 얼음을 적시고 있다. 서리가 낀 유리 같은 비늘을 가진 뱀이 호수의 중심에 쓰러져 있다. 그 주위부터 얼음이 깨지고 있었다.
뱀의 몸 위에는 붉은 술이 달린 검과, 하얀 술이 달린 검이 잔뜩 꽂혀 있었다. 피는 거기서 흐르고 있었다.
“너희는…….”
이무기는 호수처럼 짙은 푸른색 눈으로 세 명의 인간을 보았다. 모두 아는 얼굴이다. 박서원, 백주하, 백주연. 박서원의 얼굴에는 점 두 개가 있지만, 백주하나 백주연의 얼굴에는 점이 없다.
“네놈 같은 것들이, 업이 묻는 게 무섭다며 도망쳐 버렸잖아.”
아마 백주연일까. 무시무시할 정도로 화를 내고 있다. 가까이 걸어갔지만 아무도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마 이건 과거의…….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건 말리지 않아. 하지만 책임은 져야지.”
그는 이무기의 몸에 꽂힌 검 중 하나를 빼 들었다. 쌍둥이의 다른 한쪽이 박서원의 몸을 잡고 있지 않으니 그는 순수한 육체의 힘으로 이무기의 목에 칼을 박아 넣었다. 이미 추락하여 죽어 가고 있는 이무기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인간에게 목을 내어 주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놈을 막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을 거잖아. 너 같은 놈들이 단지 더럽다고 피해 버려서, 어? 이 사달이 났잖아. 너희 일은 너희가 해결했어야지.”
피가 흐른다. 새빨간 피는 세 남자의 발에 닿자 검게 변했다.
“그럼 우리 부모님도 안 죽고, 쟤 여동생도 안 죽고……. 그 수많은 사람들이 안 죽었을 거라고.”
“야, 백주연. 나와.”
“뭐야.”
방해를 받은 백주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백주하는 백주연을 밀치고 대신 검을 잡았다.
“연장자 우대야.”
“뭔 개소리야?”
“내가 너보다 두 시간 일찍 태어났으니까 나부터라고.”
“씨발, 그런 게 어디 있어. 줄 서.”
백주연은 벌컥 화를 냈다. 백주하는 코웃음 쳤다.
“나이도 어린 게 까불어.”
“두 시간 차이잖아!”
“주민번호도 내가 너보다 숫자 하나 빠르거든.”
“지랄한다, 진짜!”
그러나 백주하는 백주연 대신 손을 뻗었다. 시뻘건 피가 얼음 위로 투둑 떨어졌다.
“어차피 더 모을 건데, 뭐. 다음엔 네가 먹어.”
백주연은 백주하를 노려보다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백주하가 검을 잡고 있는 동안 백주연은 이무기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고한다, 백련화. 너는 이무기다. 하늘에서 추락하여 땅에 떨어진 추악한 뱀.”
이무기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백주하는 그대로 새하얗게 빛나는 구슬을 꺼냈다. 이무기가 새까만 피를 울컥 토했다.
백주연은 백주하의 손에서 여의주를 빼앗는 대신 싸늘한 눈으로 이무기를 바라보았다.
“이건 죽은 인간들의 복수다. 기억해 둬.”
“……인간은, 그, 걸, 감당할 수, 없… 을, 것이다.”
“안 보여?”
백주연은 발을 살짝 들었다. 새까만 타르 같은 것이 백주연의 발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래서 업 쌓고 있잖아. 네가 신경 쓸 거 없어.”
백주연은 즐거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쪽으로는 등을 돌리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그렇게 도망친 놈이 용이 될 수 있었겠어? 다 업보지, 업보. 네놈의 업.”
백주하는 여의주를 삼켰다. 왼쪽 볼에 점이 떠오르는 걸 보며 박서원이 부적을 던졌다. 지하국에서 보았던 글자가 똑같이 써 있는 부적이다.
소나무 송(松).
백주연은 검은 물이 묻은 발을 얼음에 비볐다. 이무기는 눈을 감고 얼음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무기가 죽었기 때문에 이무기의 세계 또한 무너진다.
이무기에서 흘러나온 검은 피가 내 발치에 닿았다. 무너진 얼음과 함께 내가 서 있는 얼음도 아래로 꺼졌다.
얼음 사이로 보이는 백주연의 얼굴이 뇌리에 꽂혔다.
울고 있지 않지만 울고 있는 얼굴이다.
* * *
인공적인 빛이 보인다. 형광등이다.
“미친 새끼!”
대뜸 쏟아지는 욕설도 들린다. 마찬가지로 아는 목소리다. 고개를 들자 넓은 병실 안에 하나 있는 침대와, 침대에 누운 이에게 욕을 퍼붓고 있는 쌍둥이가 보인다.
이번에도 두 사람의 얼굴에 점이 없다. 아까 백주하의 얼굴에 점이 생겼던 걸 보면……. 이건 과거의 기억인가.
아까는 얼음 때문에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인다. 그림자처럼 발밑에 고여 있는 검은 업이 저 세 사람의 발밑과 엮여 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업’이 얽혔다. 안쪽 방의 부적이 백주연이 삼킨 여의주를 막지 못했고 그 반동으로 일어난 일인가? 무언가 깨졌던 소리가 들린 것도 기억이 났다.
“야, 백주하. 얘 환자야.”
“……씨발.”
백주하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주먹이라도 날릴 것처럼 보였는데, 의외로 백주하는 금방 손을 내렸다.
그 이유는 백주하의 시선이 닿아 있는 곳, 침대 위의 박서원을 보고 깨달았다.
“씨발, 어디서 뭘 하고 있든 간에 숨만 붙어 있다고 멀쩡한 건 아니라고…….”
박서원이 붕대를 둘둘 감고 있는 모습으로 시선을 피했다.
“됐어.”
“뭐가 됐어, 미친 새끼야!”
박서원은 좀 더 어둡고, 말이 없다. 쌍둥이는 이를 악물었다.
백주하는 자신을 말리는 백주연의 손을 떨쳐 냈다.
“넌 그게 문제야.”
박서원은 입을 꾹 다물었다.
“왜 너 혼자 다 하려고 그래?”
백주연도 말을 보탰다.
“우리가 우습냐?”
“……그런 게 아냐.”
“그럼?”
박서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때는 아직 서천꽃들이 없었을 시절인가. 세 명 전부 내가 알고 있는 모습보다 어려 보인다.
“하연이 때문에?”
“…….”
“야, 이…….”
백주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연이가 어린 나이인 거 알고, 보호자가 필요한 것도 맞는데……. 너도 우리 가족이거든.”
백주연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 얼마 전에 초능력 각성했어.”
“뭐?”
“주하랑 얘기해 봤는데, 네 능력이랑 합해지면 꽤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 같아. 우리도 이제 너 도울 수 있다.”
박서원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쩐지 울 것 같은 얼굴이다.
“개새끼야, 그러니까 너 혼자만 짊어지려고 하지 마.”
“하연이는…….”
“지금 걔보다 니가 더 지 앞가림을 못 하니까 하는 말 아냐!”
백주하가 속이 답답한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백주하가 할 말을 못 찾고 있는 동안 박서원을 다시 보았다. 좀 더 어려 보이고, 인상이 어두운 걸 빼면 지금과 크게 다른 점은 없지만…….
주의해서 봐야 하는 점을 알고 있다면 다른 게 눈에 띄는 법이지.
눈 밑의 점이 하나뿐이다.
저게 여의주고, 저걸 얻다가 지금 부상을 입은 거라면…. 조금씩 시계열이 맞춰진다.
초능력을 각성한 쌍둥이가 박서원에게 합류하면서 이들은 좀 더 쉽게 이무기 사냥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호수 위, 얼음을 닮은 이무기가 세 번째 사냥감이었다.
“너 존나 이기적인 새끼야. 아냐?”
“…….”
“집 구할 때 너 후원금 내놓으면서 뭐라 했냐? 가족이니까 이 돈 맘껏 쓰라며?”
“그건….”
“씨발, 닥쳐 봐. 넌 입이 열 개라도 닥치고 있어야 해.”
백주하는 격하게 말했다.
“가족이라며?! 씨발, 가족이라며!”
백주하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백주연은 백주하의 고함을 들으며 얼굴을 숙였다. 숙인 얼굴 아래로 작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난 다시 내 가족을 잃고 싶지 않다고…….”
결국 백주하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박서원은 아무 말 않고 이불을 꽉 쥐었다. 손가락에도 붕대가 묶여 있어서 제대로 쥐어지진 않는 모양이었지만.
“너 말릴 생각 없어.”
손등으로 눈가를 대충 훔친 백주연이 말했다.
“그 새끼를 찢어 죽일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
부릅뜬 눈이 결연하게 빛났다.
“우리도 같이할 거야.”
“……나로 족해.”
내내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박서원이 물러날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죽는 건, 나로 족해.”
백주하가 울컥한 얼굴을 했지만 박서원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연이. 걔 이제 중학교 들어가잖아. 네 말대로 나도 걔 내 여동생으로 생각해. 근데 적어도 친오빠는 걔 곁에 있어 줘야지.”
“……좋아.”
백주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누구 하나 죽게 되면, 그건 네가 죽어. 그다음은 나야.”
“뭐? 왜 너야?”
“연장자순이야.”
백주연이 순간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됐지? 대신 너도 나랑 약속 하나만 하자.”
“……어떤 거.”
“죽으려면.”
백주하는 박서원을 똑바로 내려 보며 말했다.
“적어도 죽으려면 눈앞에서 죽어.”
반대는 듣지 않겠다는 듯 딱 자른 말이었다.
“우리 엄마 아빠처럼 시체도 없이 죽지 말고.”
다시 발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병실 바닥이 검은 그림자에 허물어졌다.
백주연, 백주하.
이게 과거의 기억이고, 업이 얽혀서 내게 보여지는 것이라면… 남은 것은 박서원.
내 몸이 어둠 속으로 잠기는 와중에, 박서원이 백주하의 말에 답하는 것이 들렸다.
“최대한 노력해 볼게.”
* * *
“그렇군…….”
어둡다.
어둠에 눈이 적응하느라 주위를 인식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다. 어차피 현실 공간도 아닌데 이런 현실적인 부분까지 고려하다니. 지랄 맞다.
눈을 몇 번 더 깜빡인 후에야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둡고 습한 곳. 동굴인가.
동굴 안쪽으로 촛불이 흔들리는 듯 은은한 빛과 함께 흔들리는 그림자가 보였다. 어차피 내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지만 어쩐지 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가만히 숨을 죽이고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걸어갔다.
“나는 너를 알고 있다…….”
어둠 속에서 낮고 느린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리고 그 맞은편에서 아직 어린 목소리가 울렸다.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흔들리는 불빛 아래에 어린 티를 막 벗어 던진 듯한 얼굴이 있었다.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얼굴에서 크게 차이가 없는 얼굴이다. 다만 차가워 보이는 인상과는 다르게 두 눈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한훈열이 표현하길, 독기만 가득 남아 있는 시절의 어린 박서원이다.
“네가 왜 왔는지도 알지…….”
박서원은 거북을 노려보았다. 동굴 가장 안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큰 거북이다.
거북의 단단한 바위와 같은 등딱지는 윤기를 잃고 하얀 버짐으로 뒤덮여 있었으며, 주름지고 축 처진 덕분에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딱 봐도 이미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느껴졌다.
늙은 거북은 숨만 겨우겨우 쉬며 말했다.
“어린 인간이여……. 네게는 우리에게 복수할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