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44화 (144/202)

# 144

41. 잘려나간 밤(1)

“다음에 또 보아요!”

해님과 달님 오누이는 수수를 품에 안고 우리를 배웅했다. 또 보자고 순진한 얼굴로 말한다 해도, 버드나무 근처의 용이 다신 얼씬도 하지 말라고 했으니 앞으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웃는 얼굴에 대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어서 우리도 따라서 웃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뒤로는 왔던 길을 되돌아 걸을 뿐이다. 동굴 속의 빛은 완전히 사라져 있다. 월식이 끝났기 때문이다.

어두컴컴한 동굴 속을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서 더듬더듬 걸어갔다. 앞에서 타박타박 걸어가는 까치 두 마리가 없었다면 나가지 못하고 길을 잃고 죽었지 않을까. 처음으로 까치가 길잡이다웠다.

걸어가는 내내 인간으로 둔갑한 동생 쪽 까치가 누나에게 배신감을 토로하긴 했지만 그 정도야 애교지. 귀가 좀 피곤했을 뿐이지 지상에는 아무 문제 없이 도착했다.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분명 내려올 때는 깊은 구덩이를 통해 반쯤 떨어지다시피 했지 않았는가? 그래서 올라갈 때는 어쩌나 했는데, 새끼 까치는 아예 다른 길로 안내해 주었다. 뒤를 돌아보니 방금 지나온 길은 온데간데없고 축축한 돌만 만져졌다.

아래에서는 다 하나로 통하지만 입구 자체는 여러 개라고 했었지만……. 이거 처음 안내할 때 고생하라고 그런 길을 알려 준 거 아냐?

제법 타당한 의심에 새끼 까치를 보고 있으니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다.

“드디어!”

나왔으니 상관없나. 나무와 흙냄새를 한껏 맡으니 아무래도 좋아졌다.

“나와도 어둡네. 이거 사실 시간이 얼마 안 지난 거 아냐?”

지상은 밤이다.

산 위에서 내려다본 서울은 불빛으로 가득하다. 도시의 소음이 전해지지 않아서인지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 같은 묘한 괴리감이 느껴진다.

휴대폰을 꺼내자 이제 정상적으로 시간이 표시되는 게 보였다. 새벽 2시. 시간이 이 모양이니까 사람이 괜히 감성적이게 되잖나.

“며칠이야?”

내가 휴대폰을 보고 있자 백주하가 다급하게 물었다.

“21일이요.”

“7월?”

“네.”

“아, 다행이다.”

백주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왜요?”

“그 날에 하연이를 혼자 내버려 둘 순 없지.”

“그 날이요? 아.”

한 박자 늦게 백주하가 어떤 날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7월 23일. 10년 전 산함박이 서울에 나타났던 날.

* * *

“누님, 저런 미친 인간들이랑은 더 어울리지 마세요.”

욱리는 긴장이 풀렸는지 코를 훌쩍이며 작매에게 당부했다. 미친 인간들은 그런 욱리가 귀엽기만 했는지 헤실헤실 웃었다.

“작매님, 그렇다는데?”

“애 놀리지 마라!”

“아니, 우리가 뭘 어쨌다고…….”

작매는 쌍둥이를 노려봤고, 쌍둥이는 딴청을 피웠다.

산 아래로 내려가자 연락을 받고 나온 성아영이 있었다. 욱리는 여우를 피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나도 가 볼게!”

작매도 욱리를 따라 날아올랐다. 성아영은 아쉬운 얼굴로 밤하늘을 날아가는 까치를 보았다.

“귀여운 새가 두 마리나 있었는데. 아까워라.”

“……그런 말을 하니까 까치들이 무서워하는 건 본인도 알죠?”

백주하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성아영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달달 떠는 게 더 귀여운 거라고요.”

정해영과 비슷한 과의 여자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각자 댁에 내려 드려요?”

“아뇨.”

버들의 말이 있었기에 한시라도 바삐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박서원이 좀 더 빨랐다.

“제집으로 가요.”

“그 창고요?”

“창고 말고, 제집이요.”

“에이, 그게 그거죠.”

“……어쨌든 거기로 가요.”

성아영은 자동차를 출발시켰다.

“근데 거긴 왜요? 밑에서 뭘 만났어요? 사지 멀쩡한 걸 보니 그 강철이 놈을 만난 것 같진 않은데.”

여기 놈들은 말을 예쁘게 포장할 줄을 모른다.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말은 적용되지 않는 걸까? 아주 지 좋을 대로구만.

성아영은 코를 킁킁거렸다.

“조금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평소보다 짙긴 한데……. 앗, 백주연 씨구나!”

“네.”

백주연은 씩 웃으며 손을 펼쳐서 하얀색과 붉은색 술을 잔뜩 보여 주었다.

“지금은 이걸로 억누르고 있어요.”

“와, 지독한가 봐요? 낙인은 어디에 나타났어요? 역시 얼굴?”

“얼굴이죠.”

백주연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뺨을 톡톡 쳤다.

“얼굴이 아니면 섭섭하다고요.”

생각해 봤는데 등짝 한 대로는 안 되겠다. 돌아가면 정해영의 등짝을 아주 걸레짝으로 만들어 놔야지.

아무도 내 심란함을 알아주지 않은 채 성아영은 서울의 새벽 도로를 질주했다.

‘그래도 우리 한 번쯤은 다 까놓고 이야기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박서원은 나를 의심하고 있다.

이제 와서? 물론 의심스러워서 의심한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나. 뭔가 거슬리는 게 있었나 보지. 버들과 이야기한 것 때문인가?

“그쵸? 그만한 죄를 저질렀으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야 해요. 숨기는 쪽이 더 죄악이라니까.”

“역시 아영 씨는 뭘 안다니까.”

이러나저러나 박서원은 이 팀의 리더 같은 존재다. 쌍둥이가 ‘정해준’보다 박서원을 더 오래 보아 왔단 걸 잊으면 안 된다. 박서원이 저 말을 했을 때 뻔히 듣고 있던 쌍둥이도 별말 않고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던가.

날 의심하는 것도 일견 당연한 사실이다.

나도 내가 수상해 보인다는 걸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박서원은 대놓고, 쌍둥이들은 티 나지 않게.

그렇게 수상하게 여기면서도 이들은 중요한 사건에 나를 아무렇지 않게 껴 준다.

왜?

‘정해준’과의 유대 때문에?

“그래도 어떻게 한 마리가 있었나 봐요?”

“이야기가 좀 긴데…….”

그만한 개소리도 없지.

‘정해준’과 저들이 함께했던 건 겨우 2년 남짓. 어려운 시절을 같이했다고 애틋함을 느껴 봤자, 10년 넘게 함께 한 친구에 비할쏘냐.

산 채로 뱀을 갈라 구슬을 찾아내는 걸 보고 깨달았다. 쌍둥이가 아무리 가벼워 보여도 자신들의 계획에 방해되는 이를 가만히 놔둘 멍청이들은 아니다.

“저야 괜찮은데 피곤하지 않아요? 나중에 삼촌이랑 같이 들을게요.”

무려 10년 동안 계획한 복수 아닌가.

‘나’ 같아도 누가 방해하게 두지 않는다. 그건 ‘정해준’도 마찬가지겠지.

‘나’와 ‘정해준’을 포함해서 다섯 명은 은근히 닮은 구석이 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필요하니 놔둔다.’

그만큼 자신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지. 내가 어디로 튀든 막을 자신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을 바꿨다면, 그건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과연 ‘나’의 어떤 점이 저 세 놈의 신경을 거스른 걸까.

성아영은 내가 언젠가 와 본 적 있는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저는 서원 씨네 창고에는 못 올라가니까 가 볼게요. 무슨 일 있으면 부르고요.”

그러고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차, 삼촌 돌아왔으니까, 정리되면 연락하세요. 너무 애태우진 말고요.”

성아영이 가 버리자 백주연은 팔을 휘적휘적 흔들며 앞서 걸어갔다.

“여긴 여전하네.”

집주인보다도 먼저 집에 들어간 백주연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백주하도 이어 감탄했고, 나도 동의했다.

살벌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집이다. 이곳에서 박서원에게 살해당할 뻔했다고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전기는 들어와요?”

“…창고 아니라니까요.”

백주하가 비웃었다.

“먼지 굴러다니는데?”

백주연의 말에 박서원은 정색했다.

“잡소리 말고, 이리와.”

“누구 명이신데 가야죠.”

백주연은 킬킬 웃다가 박서원이 열어 주는 방으로 향했다. 가장 안쪽 방. 박서원이 절대 들어가지 말라는 그 방이었다.

“말하는 거 하곤…….”

박서원은 얼굴을 찌푸렸다.

“다 너 살리려고 하는 거거든?”

“당연히 알지.”

방문이 열리며 안에 든 것이 보였다. 시체라도 숨겨 놨나 싶었는데, 그보다도 더 살벌한 풍경이 나왔다.

아니, 물론 시체는 없었고.

방의 모습과 굳이 비슷한 걸 찾자면, 특수과 연구소의 지하에 있는 부적이 잔뜩 붙은 그 방을 말할 수 있다.

섬뜩한 걸로 따지면…… 이쪽에 한 표를 주고 싶다. 거긴 그래도 연구소였지 가정집이 아니잖은가. 적어도 마음의 각오를 할 만한 시간은 주어졌었다고.

강변의 고급 아파트답게 안방은 넓었다. 탁 트인 창문에서는 원래 한강이 보였을 것이다. 지금은 빈틈없이 부적으로 뒤덮여있지만. 시뻘건 부적에는 그보다도 더 붉은색으로 한자가 적혀 있었다. 알아볼 수 있는 글은 별로 없었지만, 몇 가지 읽을 수 있는 글자는 있었다. 귀(鬼), 혼(魂), 악(惡), 죄(罪)……. 보고 있으니 속이 메슥거렸다.

욕실과 연결되어 있는 문도 부적으로 막혀 있었고, 보통 안방에 있을 만한 가구는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방 중앙에 소나무 분재 하나가 있는 것 말고는.

새까만 솔잎을 가진 소나무다.

“안정되면 나와.”

백주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형제를 보았다. 백주연은 장난스럽게 경례를 해 보이며 웃었다.

“오케이.”

문이 닫혔다.

찰칵.

박서원은 문을 잠갔다. 안에서 잠그는 것이 아니라 특이하게 바깥에 잠금장치가 있는 문이다.

백주하는 이 집에 있는 유일한 음식인 물을 꺼내서 마시고 있었고, 박서원은 소파에 앉은 먼지를 대충 털어 내고 그 위에 드러누웠다.

“저기, 박서원 씨.”

“네.”

“여기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나는 딱 잘라 말했다.

“집에 가겠습니다.”

“왜?”

부엌에 있는 백주하에게서 반문이 들려왔다.

“지하국까지 갔다 왔는데 쉬어도 되지 않아요? 노동법 위반이에요.”

“초능력자는 그런 거 없어.”

백주하는 뜯지 않은 물을 박서원과 나에게 하나씩 던져 주었다.

“생각해 봐, 해준아.”

“생각하기 싫은데요, 선배.”

“보통 이 타이밍에서는 속 깊은 얘길 꺼내지 않겠냐고.”

그렇게 나오면 이쪽도 할 말이 있지.

“그런 말을 하면 속 깊은 얘길 못 하게 되는 거 알죠?”

“부정 타게 왜 그런 말을 하냐.”

백주하는 크게 상처받은 표정을 했다. 아주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

“그래도 그동안 기억상실이었으면 힘든 일 많았을 거 아니냐.”

“기억상실이어서 오히려 잘 살게 되더라고요.”

“기억을 찾을 생각은 없고?”

“글쎄요……. 찾을 방법이 있을지도 잘 모르겠는데.”

“머리 때려 줄까?”

나는 질색했다.

“선배도 역시 형제였네요.”

“……욕이지?”

“사실적시죠.”

“사실적시 명예훼손?”

“그거 아직 안 없어졌어요?”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속 깊은 얘기든 제 기억 찾는 방법이든 나중에 하면 안 될까요? 저 진짜 좀 쉬고 싶거든요.”

이건 진심이다.

“지하국에서 제대로 쉰 적이 별로 없잖아요. 금강산도 자고 일어나서 봐야죠.”

“밥 먹고 겠지.”

“밥도 잠을 잘 자야 입에 들어갑니다.”

박서원은 몸을 반쯤 일으켜 물을 마시다가 말했다.

“보통 이렇게 피곤할 때 사람이 실수도 하고 그러잖아요.”

“무슨 범죄자 취조합니까?”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그건 아닌데 털어서 먼지 나오는 사람 없다잖아요.”

그게 지금 여기서 나와야 하는 말인가.

나는 미친놈 보는 눈으로 박서원을 보았다. 원래 미친놈이니 별로 타격은 없어 보였다.

“무죄 추정의 원칙 모릅니까?”

“내가 경찰도 아닌데 그게 왜 필요해요.”

“여긴 대한민국이거든요.”

그리고 이놈들, 자꾸 어물쩍 넘어가는데.

“그리고 저 기억상실이라니까요? 기억 안 나요.”

나도 알고 싶다, ‘정해준’의 기억.

도대체 무얼 하다가 ‘업’을 쌓았는지, 무얼 위해서 ‘업’을 쌓았는지.

답답해서 돌아 버리는 쪽은 나라고. 내가 왜 여기서 이 지랄을 해야 하고 있는지 누가 제발 좀 알려 달라고.

쨍!

“어?”

“잠깐…….”

박서원이 몸을 번쩍 일으켰다.

“백주연?”

백주하의 멍한 목소리가 들렸다.

백주연이 들어간 방 안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안에 깨질 만한 물건이 없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꽉 닫힌 방문에서 시커먼 물이 뚝뚝 떨어졌다. 지하국의 오염된 강물과 비슷하다. 점성이 강하고, 지독한 악취가 난다.

“젠장, 부적이 깨졌어. 송 할머니께 연락을……!”

방 안에서 백주연이 외쳤다.

하지만 그렇게 말해도 말이지, 이미 그 검은 물은 거실까지 흘러나와 발을 질척하게 적시고 있는 중이다. 냄새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본능적으로 그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업.

새까만 업(業).

바닥이 푹 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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