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43화 (143/202)

# 143

40. 한 그루의 버드나무(3)

버들은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알기 쉬운 내용이다. 곤경에 빠진 용왕의 아들을 구해 주거나 돌봐 주어, 용궁의 보물을 손에 넣어 선비가 부자가 되어 잘 먹고 잘살았다는 이야기.

이건 멀리 갈 것도 없이 경북도지사의 일이 있지 않은가. 그물에 걸렸던 사자를 닮은 새끼용이 그 증인이다.

“아, 그렇죠. 이목은 최근까지도 인간의 운명에 손을 댔으니까요. 이쪽에 비하면 그, 누구? 우리 조카를 구해 준 인간에게 축복을 준 건 양호한 편이지요.”

조카?

눈을 끔뻑이고 있자 버들은 다른 이야기도 했다.

“옛날에 어느 나무꾼이,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숨겨 주었죠.”

맘씨 좋은 나무꾼이 사슴을 구해 주었다가 사슴의 조언을 듣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와 결혼하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

“음, 세 명 죽었죠.”

선녀는 날개옷을 잃어버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을 돌봐 주는 나무꾼이 싫지 않았다. 사슴의 말을 들은 나무꾼이 자신의 날개옷을 숨긴 줄 모르고.

만약 선녀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무꾼과 사랑에 빠졌을까?

아이를 낳은 이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선녀는 나무꾼과 사슴을 저주했다. 피눈물을 흘리며 날개옷을 품에 안고 산으로 들어간 선녀는 다시는 나무꾼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나무꾼은 크게 후회하였다. 그러나 쏟은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고, 나무꾼은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그 뒤를 이어 나무꾼의 늙은 어미마저 아들을 잃은 시름에 잠겨 죽었다.

“다행히 나무꾼의 아이들은 사슴이 거두어 주었습니다. 사슴은 가벼운 마음으로 혀를 놀렸던 게 이런 비극을 가져올 줄 몰랐죠. 그는 크게 후회하고 남은 생애 동안 말을 하지 않기로 하였어요. 다시는 인간사에 끼어들지 않기로. 그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나무꾼과 선녀는 우연히 마주치고 평범하게 사랑에 빠져 아이 셋을 낳고 백년해로했을 테니까요.”

어차피 이루어질 인연이라고, 아무 생각 없이 입에 담았다가 죄 없는 목숨을 앗아 가고 말았다.

“그래서 백록담의 흰 사슴이 말을 하지 못하는 거랍니다.”

버들은 싱긋 웃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이 이야기를 해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인간사에 끼어드는 게 꼭 좋은 결말만 있지 않다는 걸 기억해 두라고요.”

이산래가 아사달을 만나러 가는 길목에서 청룡과 다투던 게 이것 때문인가? 하지만 결국 이산래도 인간들 틈에서 지내고 있잖은가. 그것도 인간사에 간섭하는 거 아냐? 본인이 인간으로 지내고 있으니 또 다른 문제인가.

어렵다, 이 세계. 정해영은 분명 반도 못 알아먹었을 건데 이런 드라마를 무슨 재미로 본 거지. 주인공 스토리에서는 이런 게 안 나오려나?

“이건 인간사에 관여하는 거 아닙니까?”

“운명을 바꾸거나 하지 않았잖아요? 모든 선택은 당신이 하게 될 테니까.”

버들은 찻잔에 다시 차를 채워 주었다. 저 차는 없어지지가 않는다. 하다못해 버들잎이라도 좀 치워 주지.

버들잎을 피해 차를 홀짝였다.

“잘 기억하세요, 인간. 생명을 살아가면서 업을 쌓을 수밖에 없어요.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 그 어느 것에 업이 없는 것은 없죠. 인간사란 업과 덕이 가득해요.”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버들은 나를 돕고 있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생명은 살아가면서 덕을 쌓기도 해요. 거창한 선행이 아니어도 돼요. 화분에 물을 주거나, 우울한 이에게 던지는 위로로도 충분해요. 선행이 쌓이고 덕이 모이면 업을 상쇄시켜요. 업과 덕의 굴레는 완전히 일치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어느 한쪽이 더 커질 수도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모르는 건 모르겠는 거다. 요컨대, 착한 일 하며 살아라. 이거 아닌가? 무슨 말을 이렇게 어렵게 빙빙 돌려서 말해.

“하지만 인간, 당신은……. 이 세계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난 존재지요.”

역시 용들은 ‘내’ 존재를 안다. 단순히 볼 수 있기 때문에? 인간사에 관여할 수 있어서?

…아니면, 내가 이곳에 온 일과 관련이 있어서일 수도 있지. 크기가 좀 크고 비늘이 빛나서 그렇지 용도 뱀이라니까. 뱀은 다 별로다.

“그래도 당신이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서는 이 법칙을 어느 정도 알아 둘 필요가 있어요. 후회하지 않으려면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도록 하고, 만약 돌아보지 않으려면 아예 보질 마세요.”

“그냥, 말해 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네, 안 돼요.”

버들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부분은 ‘이곳’의 ‘인간사’에 포함되는 거니까요.”

버들은 차를 마시며 천천히 말했다.

“나는 그 흐름에서 완전히 발을 뺐으니 인간에게 얘기해 줄 수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 이상은 힘들어요.”

“그럼 누가 말할 수 있습니까?”

“누군지 알잖아요?”

머리에 스치는 인물이 있다. 잠실 타워를 감고 있는 청룡, 이목. 그리고 그의 막내아들.

“이미 일어났고, 이제 일어날 일들을 감당하는 건… 이목과, 그와 함께 감내하기로 한 다른 용들의 몫이죠.”

다른 용들이라고 해 봤자…….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한반도에 용이라고 할 것들이 몇이나 있던가. 이산래의 가족들은 죽었다고 했다. 애초에 청룡 말고는 목격된 용도 없다.

아, 그나마 최근에 다리화가 있었지.

“다리화는요?”

“그는… 그 애는 좀 불쌍하게 되었군요. 지금쯤이면 이목에게 불려 갔겠는데……. 모르긴 몰라도 용이 된 걸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용이 되고 싶어 했었는데요?”

“삶이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 건 용도 마찬가지니까요.”

“하지만 용이 된 것 자체를 후회하는 건 다른 말이잖습니까…….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그것도 저와 관련된 일입니까?”

관련된 일이겠지. 안 그럼 내게 말했겠어?

“갈대처럼 흔들렸던 놈들은 다 망한 거죠.”

“그러니까 누굴 말하는지 제대로 좀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

참지 못하고 용기 내서 말했다. 자연 재해에게 이런 말을 하려면 크나큰 결심이 필요하다.

버들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쯧,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낡아빠진 사고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니 그 모양이 나지. 차라리 나처럼 일찌감치 놔 버리면 오죽 편했겠어?”

깔끔하게 무시당했다.

“흠, 어디 보자.”

작게 중얼거리며 투덜대던 버들은 갑자기 손을 쭉 뻗었다. 길쭉길쭉하고 부드러운 손가락이 내 턱을 쥐고 요리조리 돌렸다.

“그 인간들이 같이 난리 쳐 준 덕분에 업도 적당히 쌓였네요. 합치면 백에 쌓인 업을 감당할 만큼은 되겠다.”

방금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백에 쌓인 업이라뇨?”

“자세한 건 올라가서 우리 귀여운 아가한테 들어요. 알죠? 우리 산예. 이목 그 뺀질거리는 놈한테서 어쩜 그리 귀여운 아이가 나왔는지. 경이 애라서 그런가? 큰애들은 안 그랬는데.”

특수과 팀장의 명예를 위해 못 들은 걸로 하겠다. 더 급한 것도 있고.

“버들님, 백의 업이 뭡니까?”

“아니지, 조금 불안한가? 하나 정도 더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버들은 내 얼굴을 놓으며 얇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씩 웃었다.

“이 정도는 내가 감당하죠. 신라의 장군이 손을 댔던 그 수호부, 안전한 곳에서 한번 써 봐요.”

* * *

“인간들, 내가 봐주는 건 이번뿐이에요. 또 지하국에 오면 그땐 죽일 거예요.”

백주연은 손을 번쩍 들었다.

“마당에 불살계가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원래 간이 큰 놈인지, 뱀 처먹고 돌은 건지 모르겠다. 둘 다겠지. 미친 새끼.

“업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그런 소릴 하는 건가요?”

버들은 부드럽게 웃었지만 그게 더 무서웠다. 강바닥에 누워 있는 버들의 본체를 생각해라, 백주연. 간을 내놓는 짓은 혼자 있을 때 하라고.

“그만한 업을 처리하면 오히려 덕이 쌓일 판인데.”

버들의 눈이 잠깐 나를 스쳤다.

“그대들이 죽인 선한 이무기를 내가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것 같나요?”

“아, 아는 사이였어요?”

백주연은 아직도 얼빠진 소리를 했다. 저것도 뱀 여의주의 영향인가 싶었지만 눈은 그대로다. 백주하나 박서원이 백주연의 뒤통수를 치지도 않았다.

“정신이 나가 있다는 건 잘 알겠군요. 그러니 업이 얼굴에 찍히지.”

버들은 코웃음을 쳤다.

“콩이야, 저것들에게 다가가지 마렴.”

“어, 뭐……. 좀 제정신은 아닌 것 같지만 어차피 떠날 애들이잖아?”

공주는 아까 내게 건네받은 금화 주머니를 다시 뒤적거렸다. 주머니에서 꺼낸 낡은 금화를 박서원과 백주하, 백주연에게 하나씩 주었다.

“나중에 입에 물게 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가져가.”

입에 동전을 무는 건 노잣돈이다. 눈살을 찌푸렸다. 박서원이 한마디 할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박서원은 금화를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쌍둥이의 손에서 금화를 가져갔다.

“이건 저만 필요할 것 같아서요, 공주님.”

나는 그 모습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눈을 가늘게 떴다.

기억상실 컨셉, 이 아니라. 실제로도 기억이 없으니 컨셉이 아니다. 딱히 ‘정해준’의 기억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은 없지만 이럴 때 답답한 건 어쩔 수 없다.

‘정해준’은 저 세 명이 노리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었을까? 복수를 포기하고 먼저 돌아섰으니 ‘정해준’도 모르려나?

어쩌면 그 계획을 알았기 때문에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정해준’의 목적은 ‘살아 있는 가족을 만나는 것.’ 저들의 복수가 그 목적에 위배된다면…….

‘정해준’은 복수를 포기한 게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저들을 버렸던 것일지도.

“썩 꺼져요.”

버들은 손을 팔랑팔랑 저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공주는 그 옆에서 활짝 웃으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박서원이 전한 여우의 경고를 생각하면 의외로 싱겁게 끝났다. 지하국에서의 패턴을 보면 이런 생각 하면 뭔가 튀어나올 수도 있지만…….

버들이 있는 강을 건너올 만큼 간이 배 밖에 나온 놈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올라가서가 문제지.

“야, 백주연. 상태는 어때?”

“가끔 꿈틀거리기는 하는데 버틸 만해.”

백주하는 해님과 달님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잡으며 말했다.

“다른 여의주는 그렇게 안 튀어나왔는데.”

“이건 업으로 만들어진 거니까.”

“그동안 잡은 건 얌전한 이무기였지?”

박서원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밌었는데.”

백주연이 옆에서 히죽거리며 말했다.

“용에 가까운 지고한 놈들이 이무기다! 라는 외침 하나에 땅에 처박히잖아. 인간사 공평하다는 걸 그때마다 깨닫는다니까.”

“인간이 아니잖아.”

“음, 그럼 인생? 이것도 인(人)이 들어가는데. 그냥 삶이라고 해야 하나?”

백주연과 박서원이 태연하게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니 버들이 무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인간사와 업의 굴레.

인간에게 관여하지 않고 조용히 수행하던 이무기를 억지로 타락시키고, 사냥하고, 여의주를 빼앗은 인간들.

그 목적이 생(生)과 관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업은 지워지지 않는다. 초능력자로 근무하면서 사람을 해하는 걸 한두 마리 잡은 게 아닐 텐데도, 덕이 업을 쫓아가지 못한다.

“난 안 그런데 쟤는 왜 저 모양이냐.”

백주하를 보았다. 투덜거리는 모습이 조금 희망을 가지게 한다.

하지만 저놈도 거기서 거기겠지.

“괜히 약 올리면 미안하잖아. 어차피 뭘 해도 죽일 건데.”

정해준, 항상 되새겨라. 정해영의 취향은 뭐 같다는 걸……. 걘 어렸을 적 만화영화를 볼 때도 항상 최종보스와 사천왕을 사랑했던 애다.

“그런데 정해준 씨.”

“네?”

“버들님이랑 무슨 얘기 했어요?”

박서원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삐뚜름하게 걸린 미소의 진의를 알 수 없다.

“그냥.”

“그냥?”

“같이 놀지 말라던데요.”

“우리랑?”

“네.”

“흠.”

박서원은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정해준 씨는 뭐가 특별해서요?”

“전 박서원 씨와 다르게 열심히 업을 안 쌓았거든요.”

아가 용…… 이 아니라, 이산래에게 물어보라는 백의 업이 걸리긴 하지만 ‘내’ 업은 아니니 거짓말은 아니다.

“같이 놀지 말라는 말을 그렇게 오래 해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이야기도 했죠.”

“어떤 거요?”

“개인적인 얘기 물어보는 건 예의가 아니죠, 박서원 씨.”

박서원은 씩 웃었다. 나도 웃었다.

“선후배 사이잖아요?”

“이래서 대한민국은 안 돼요. 그런 권위주의식 사고 때문에 망할 거라고요.”

“같은 장례식장에, 같은 고아원에도 있었는데.”

“잊었어요? 저 기억상실이에요.”

박서원은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거 진짜 편하다니까. 그래요, 기억상실.”

까아아악. 횃대에 앉은 까치가 까마귀도 아니면서 불길하게 울었다.

“그래도 우리 한 번쯤은 다 까놓고 이야기해 봐야 하지 않겠어요?”

* * *

검은 불개들이 끄는 썰매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공주는 썰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언니, 이야기한다는 건 다 이야기했어?”

“다는 못 했지.”

공주는 이름을 버린 용의 옆에 앉았다. 맑아진 강물이 한결 보기 좋았다.

“이제 시간 안에 그 인간이 도망치길 빌어야지.”

“흐응, 언니는 너무 착하다니까.”

공주는 용을 꽉 껴안아 주고는 활짝 웃었다.

“그럼 이제 뭐 할 거야?”

“글쎄, 강을 마저 정화하고…… 버드나무나 더 심을까?”

“시간이 많진 않다며?”

“버드나무 한 그루 심을 시간은 충분히 된단다.”

“……사과나무 심어야 하는 거 아냐?”

“뭐 어떠니. 버드나무든 사과나무든.”

버드나무가 된 용은 소매에서 빗을 꺼내어 공주의 풍성한 금발을 빗겨 주기 시작했다.

“이미 끝나 버린 세계라도 좋아하는 나무 한 그루쯤은 심을 수 있는 거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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