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42화 (142/202)

# 142

40. 한 그루의 버드나무(2)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공주는 눈을 비비며 걸어왔다.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야?”

하품을 쩍 하지만 목소리는 또렷하다. 버들은 버드나무가 아니라 벚꽃 잎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시끄럽게 구는 것들이 있어서 쫓아냈단다. 더 자지 않구.”

“으응…….”

공주는 미적지근한 눈으로 버들을 보았다. 그 눈을 보니 역시 공주를 깨운 건 괴물들이 아니라 버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난리를 쳤는데 못 들었을 리가 없지.

물론 공주는 현명하게도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어차피 일어날 시간인걸.”

그리고 말머리를 우리에게로 돌렸다.

“근데 쟤네 안 죽었네?”

머리 색만큼이나 싹수가 노란 발언이다.

화를 내야 하나 고민하다가 슬쩍 작매 쪽을 보았다. 노잣돈에 그렇게 화를 내던 작매는 버들이 무서운지 백주연의 품에서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작매가 버들에 대해 말을 아낀 걸 보면 까치들은 버들의 존재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작은 까치 쪽은 친근하게 굴었지만 작매가 벌벌 떤 걸 보면 그 벌이라는 것과 관련이 있겠지.

“덕분에 안 죽었습니다.”

버들이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괴물들을 쫓아낼 정도로 아끼는 공주다. 예의상 그렇게 대답하자 공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노잣돈 쥐여 줬는데?”

버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다. 욕하지 말자, 욕하지 말자…….

“필요 없으면 다시 돌려줘.”

공주는 손을 내밀며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집에서 가져온 것 중에 남은 몇 안 되는 물건이라구.”

그렇다고 줬다가 뺏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노잣돈이랍시고 쥐여 준 거 아닌가. 계속 들고 있는 것도 기분이 이상한데.

정중하게 거절해야 할지 아니면 낡은 금화 주머니를 돌려주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동안 공주는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더 있을 거구나? 그럼 계속 들고 있어야겠네!”

“돌려드리겠습니다.”

말을 해도 꼭 재수 없게.

공주의 손에 금화 주머니를 올렸다. 버들이 괴물들을 돌려보낸 덕분에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그 값이라 하자. 비록 받은 건 노잣돈으로 받았지만.

내가 노잣돈을 돌려주는 동안 백주하는 혀를 빼물고 헥헥 거리는 불개들을 쉬게 하였다. 상한 곳이 없나 썰매를 둘러보던 박서원은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야, 가방이 왜 하나뿐이야? 백주연, 네 가방은?”

“작매님, 가방은?”

“까아아아아…….”

작매는 뒤뚱거리며 불개들 틈에 숨었다.

“작매 씨?”

박서원이 방긋 웃으며 작매를 불렀다.

“거기 숨으면 숨어질 것 같아요?”

놀랍게도 숨어졌다. 불개에 비해서 한참 작은 까치의 검은 깃털은 불개의 까만 털에 파묻혀서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 숨었는지 뻔히 아는 상황에서는… 더 말하지 않겠다.

작매는 인간 모습으로 변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그치만, 너무 급했다고!!”

그렇게 말하면 이쪽도 할 말이 없다. 박서원도 똑같이 생각했는지 더 말하지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

작매가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물었다.

“거기에 중요한 거 있었어?”

“그건 아니고요. 작매 씨가 좋아하는 고구마말랭이와…….”

작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약이 있어서요.”

“야, 약?”

“됐어요. 아픈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약이래 봤자 진통제니까.”

박서원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리다가 손을 뗐다.

“어디 아파?”

“머리가 조금. 밤새우는 건 몸에 안 좋아요. 작매 씨는 꼬박꼬박 잘 잤죠?”

“그 난리 통에 어떻게 자!”

작매가 꽥 고함을 내질렀다.

머리가 아픈 건 나도 마찬가지다. 솟아날 구멍이 구두 장군이 아니라 버들이 될 줄 누가 예상했을까. 따지고 보면 구두 장군이 쫓아왔을 때는 타이밍이 그래서 그렇게 느껴졌을 뿐, 상황 자체는 더 개판이 되었다. 버들이 모두 돌려보내긴 했지만…….

그럼 지금 상황은 괜찮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 이유 없는 친절은 없는 법이다. 옛날이야기에서 인간이 아닌 대단한 존재가 인간을 돕는 이유는 보통 대가를 요구했다.

“그럼, 인간.”

히히거리며 금화를 세는 공주를 어머니의 눈으로 바라보던 버들이 고개를 돌렸다.

“나와 잠깐 이야기를 해 볼까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교수님한테 불려 가는 기분이다. 이런 거, 좋지 않다.

눈에 백주연이 밟혔다. 말라붙은 회색 피가 보였다.

…음. 잘못한 게, 있던가?

* * *

한가롭다.

강물이 흐르는 소리와, 멀리서 깍깍대는 까치와 마찬가지로 꺅꺅거리는 공주의 목소리가 들린다. 간혹 불개들이 짖기도 하고, 두런거리며 박서원과 백주하가 이야기하는 소리도 들린다. 백주연은 버드나무 집을 하나 만들더니 그 안에 들어가 버렸다. 낮잠이라도 자려는가 보지. 팔자가 좋다.

그러나 나는 그 평화로운 전원풍경에서 다소 동떨어져 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다. 정확히 말하면 돌비늘을 가진 용이면서도 나무의 이름을 가진 버들 말고는 없다. 버들이 나만 지목했기 때문이다.

‘지난번엔 억누르고 있었지만 지금은 탁, 터져 나와 버렸네요. 그런 몹쓸 발로 우리 집에 들어올 생각은 말지요?’

버들은 살벌한 눈초리로 박서원과 쌍둥이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여기서는 좀 더 얌전히 굴 줄 알았지, 그런 무식한 방법을 쓸 줄 누가 알았담.’

투덜거리기까지 했다.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인간들 같으니라고.’

거기에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인간들이 결정한 일, 나는 관여하지 않을 거지만요.’

아니, 거기서는 좀 말려 줘야지. 왜, 천벌. 그런 거 있지 않은가. 업을 엄청 쌓았다며? 보통 그러면 천벌 같은 거 받지 않냐고.

쟤네가 서울을 멸망시킬지도 모르는데.

“나는 말이지요.”

버들은 노성을 지르며 괴물을 쫓아냈던 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버들은 편하게 앉으라고 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담력은 내게 없었다.

버들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다기를 꺼내 왔다. 백자로 만들어진 아무 무늬 없는 새하얀 찻잔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대접받았던 찻잔과 같다.

“버드나무가 참 좋아요.”

차를 따르는 손짓이 너그럽다.

찻물 위에 버들잎 하나를 퐁당 빠뜨리는 것까지, 물 흐르듯 부드럽고 눈물이 날 만큼 다정하다. 눈앞에 이는 분명 인간을 싫어한다. 그런데도 이 느낌은 무엇인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버들은 냉랭한 눈으로 인간들을 보았다.

나는 어쩐지 송구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꾸벅였다.

“네, 버드나무. 좋지요.”

“비록 내 업이지만.”

또 업이 나왔다.

“업, 입니까.”

그놈의 업. 대충 죄라고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점점 더 모르겠다. 단순히 죄라고 생각하기에는 산함박이 걸린다.

산함박을 보아라. 강물에 들어가 있던 그 꼬리말이다. 업을 그렇게 쌓아서 새까만 물을 질질 흘렸고, 그걸 마신 괴물들이 미쳐 날뛰었다.

산함박이 벗어 던진 허물에 업이 남아 있었고, 그걸 먹은 새끼 뱀이 여의주를 만들어 냈다.

도대체 업을 쌓으면 뭐가 되는 거란 말인가?

……업을 쌓고 있다는 박서원과 쌍둥이는 무엇이 되려고 하는 거냐고.

“저 버드나무들은 내 업의 증거예요.”

내 머리가 핑글핑글 돌아가는 건 저 용에게는 아무래도 좋을 일이겠지. 버들은 슬쩍 강 건너편의 버드나무를 보았다. 나도 따라서 버드나무를 보았다.

업의 증거라는 그 버드나무 아래에서 쉬고 있는 이들이 눈에 밟혔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업을 쌓고 있는 이들.

청룡의 아들인 이산래는 입에 담는 것만으로 피를 뱉었다. 교위도 한눈에 알아봤었지.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배제하지도 않았다.

이산래는 아예 나보고 덕을 쌓는 게 힘들면 박서원처럼 업이라도 쌓으라고 했다. 그걸 보면 마냥 경시하는 것도 아니다. 아니면 업도 조건이 있는 건가? 교위가 날 들먹인 걸 보면 다리화의 여의주가 어느 정도 커버 친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보는 눈’이 없으니 알 길이 없다. ‘정해준’은 차라리 ‘보는 눈’을 소원으로 빌지 그랬냐. 그쪽도 쓸모가 많았을 것 같은데.

“네. 옛날에, 그런 이가 있었지요. 벌을 받아 마땅한 일을 저지르고서, 그걸 인정하지 못해 엉뚱한 이에게 화풀이하던 어리석은 이무기가요.”

버들은 희미하게 웃었다.

기세가 누그러진 버들은 버드나무의 화신처럼 보였다. 마치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나무 향이 물씬 풍기는 초가집 마루에 앉은 여인. 등 뒤로 바닥이 비쳐 보이는 맑은 강과, 오래된 돌다리가 보인다. 강 건너편으로는 낡은 우물과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가 있다. 이미 그 자체로도 수묵화였다.

“어린 공주를 병들게 하였다가, 된통 혼이 난 채로 쫓겨났죠. 그게 퍽 짜증 나서 난동을 피웠는데, 그걸 또 일러바친 놈이 있지 뭐예요?”

내용만 들어보면 화를 내야 할 것 같은데, 말투는 온화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그놈을 골려 주기 위해 어여쁜 버드나무로 변해 그자의 집 앞에 섰어요. 조금 흥이 많이 나 버린 바람에, 그자는 나를 지키기 위해 왕명을 거역하다가 결국 목이 잘려 죽고 말았죠.”

수묵화 같은 여인의 입에서 나올 만한 말은 아니다. 그러나 버들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뒤로도 독이 가득 찬 이무기는 사람을 해치며 살았다. 이전에 이미 한 번 이무기를 쫓아낸 적이 있는 고승(高僧)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나를 붙잡고 억지로 불살계를 쥐여 준 고승을 욕하기도 하고, 저주하기도 하고 난리도 아니었죠.”

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버들도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는지 가라앉은 눈으로 초가집 울타리에 서 있는 장승을 보았다. 한자로 또박또박 쓰여 있는 불살계.

“하지만 내게 부여된 업에서 도망칠 순 없었어요. 나는 매일매일 버들잎을 손질하여 강물에 뿌렸지요.”

그것이 버드나무로 화해 죄 없는 이를 해친 버들에게 주어진 벌이었다. 버드나무를 가꾸며 지하국의 하나뿐인 강을 정화하는 일. 버드나무는 강의 정화뿐만이 아니라 이무기의 업마저 사한다는 의미였다.

버들은 퍽 감성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이게 감동받아야 하는 타이밍인가? 지은 죄가 있어서 벌을 받은 거 아닌가? 내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차만 들이켰다. 입 안으로 자꾸 버드나무 잎이 들어오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깨달음을 얻었어요. 어떤 깨달음인지 얘기해 줄 순 없지만, 그로 인해 나는 용이 되었지요.”

억울하게 죽은 이들이 알면 억울해서 두 번 죽을 이야기다.

내 생각을 알았는지 버들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깨달음을 얻었기에 나는 내 속죄가 끝나지 않음을 알았어요. 그만큼 무서운 것이에요. 죄 없는 이를 죽인 업은.”

“……만약 용이 되지 않았으면 어떡합니까? 속죄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몰랐을 거 아닙니까?”

“그게 바로 업의 굴레이지요.”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다.

버들은 설명을 요구하는 내 표정을 무시한 채 빈 찻잔에 찻물을 채웠다. 용이 손수 채워 주는 차다. 지난번에는 우리가 스스로 채웠었지. 도무지 이게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벗어나자면 벗어날 수 있지만, 나는 천천히 내 죄를 씻기로 했어요. 그래서 이름도 버렸죠. 가끔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콩이가 오면서 즐겁기도 했어요.”

그 공주, 역시 애완동물 같은 거였나?

“본래 주어졌던 속죄의 시간은 곧 끝나지만, 그래도 멀리 떠날 생각은 없었어요. 콩이는 순전히 날 위해 여기 있어 주는 거니, 그 아이를 위해 지상을 구경하러 가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요. 하지만…….”

버들은 강 하류를 흘깃 보았다. 위쪽처럼 완전히 투명하진 않지만 어렴풋하게 바닥이 보일 정도는 되었다. 본래 산함박의 꼬리 때문에 빛이 반사되지도 않던 새까만 물이었던 걸 떠올리면 장족의 발전이다.

버들이 무얼 말하려는지 알아차렸다.

“산함박이 나타난 거군요.”

“인간사에 손을 대지 않기로 했지만 강물을 더럽히고 날 먹으려 드는 건 놔둘 수 없었어요. 그것과 이건 다른 문제니까.”

업에 대해서는 여전히 모르겠으니 다른 거라도 물어보자.

다른 이도 아니라 나만 데려와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한 거니 저쪽도 무슨 생각이 있겠지.

하나씩 더듬어 가다 보면 인간이 아닌 것들의 뜬구름 잡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까부터 말씀하셨는데, 인간사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로 쓰시는 겁니까.”

하나씩, 기본적인 것부터. 엉킨 실타래의 끝을 따라가 볼 수 있도록.

단순히 인간의 역사를 뜻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인간사란 인간의 운명을 말하는 걸까. 이산래도 그런 말을 했었다.

어디 이산래뿐일까. 청룡과 난쟁이같이 인간이 아닌 존재들도 비슷비슷한 말을 한 번씩 했었다.

“좋은 질문이에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겠지요.”

버들은 꽤 즐거운 기색으로 웃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저 여자는 ‘나’를 어디까지 보고 있을까.

“인간의 손으로 자아내는 모든 것을 말하지요.”

“모든 것이요?”

업과 덕. 업의 굴레. 카르마.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인간.

인간사. 인간의 운명. 인간의 시대.

“태양처럼 눈부시고 달처럼 환하며, 별처럼 반짝이는. 인간이 나아가는 모든 길. 운명.”

버들은 차로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우린 그걸 인간사(人間史)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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