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41화 (141/202)

# 141

40. 한 그루의 버드나무(1)

지하국의 강은 폭이 그리 넓지 않다. 한강에 비하면 냇가 수준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속이 느린 건 아니다. 백주연이 온몸으로 증명했었다. 빠지면 자력으로 올라오기 힘들 정도다.

깊이도 꽤 깊다. 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맑고 투명해서 별로 깊어 보이진 않지만 마찬가지로 백주연이 온몸으로 증명한 결과, 성인 두 사람을 세로로 세워 둘 정도의 깊이는 된다.

지상이라면 당연히 이름이 있을 강이다. 그러나 지하국의 강에는 이름이 없다. 원래 없는 것인지, 아니면 있었지만 지금은 잊혀진 것인지 알 수 없다. 물어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지하국에 있는 강이 단 하나라면, 굳이 이름은 필요 없다. 어떤 강을 말하든 하나밖에 없으니까.

“시끄럽다고.”

그리고, 그 하나뿐인 강 아래에서 돌덩이가 데굴데굴 굴러간다.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라면 이토록 경악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덩이들이 위로 구른다. 저게 돌인가? 아니다, 강바닥이 움직이고 있는 거다.

쿠르릉…….

여기 와서 지진을 많이 겪는다. 지하와 지상이 완전히 맞닿아 있는 세상이 아니라 다행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상에서 지진이 나도 수십 번은 났다.

“우리 콩이는 잠자리에 예민하단 말이야!”

들은 적 있는 목소리가 짜증을 냈다.

댁네 공주는 당신 소리에 더 깰 것 같은데. 아무리 그 공주가 아침잠이 적다 해도 말이지.

저 멀리 보이는 다리가 움직였다. 불길한 움직임이다. 돌다리는 부르르 떨리더니 덕지덕지 붙은 쓸모없는 자갈과 돌멩이들을 강물로 떨어뜨렸다. 그리고 땅속으로 쏙 들어갔다.

“내가, 여기까지, 기어 나오지 말라고 했던 것 같은데!”

강바닥이 위로 솟았다. 돌로 된 지렁이, 아니, 돌비늘이 달린 뱀이 물속에서 나타났다.

“너!”

이끼가 낀 돌비늘 사이로 버드나무처럼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가 우리를 향했다.

“역시 인간들이란!”

이건 차별 발언이다. 인간이 아닌 것들에게도 인권 교육이 필요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저런 구시대적인 발언이라니.

“나는 더 이상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그렇게 약속했다고!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개인적인 복수로 생명을 빼앗지 않기로!”

버들이 고함쳤다. 뱀은, 뱀인가? 생긴 건 뱀과 비슷하지만 뱀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보다는 좀 더…… 고귀하고, 괴이한 존재다.

이미 느껴 본 적 있는 기분이다.

다리화를 만났을 때, 잠실 타워의 청룡을 보았을 때.

“이목 그놈이 다시 세웠을 때도 그래서 넘어가 줬다고! 난 인간사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어! 그냥, 내 벌을 끝낸 뒤에 우리 콩이와 같이 마지막까지 버드나무를 가꾸고 싶었단 말야!! 알겠어?!”

돌비늘의 용은 몸을 뒤틀며 화를 냈다. 푸른 눈이 번뜩였다.

방금 전까지 요란하게 싸우고 있던 괴물들이 용의 눈길이 닿자 흠칫거리며 멈췄다. 심지어 머리가 아홉 개 달려서 위아래가 없을 것 같은 구두 장군도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버드나무를 가꾸던 돌비늘의 용은 몸을 굽혀 구두 장군과 괴물들을 보았다.

“나는 이름을 버리고 버드나무가 된 용. 버드나무가 자라난 곳에는 그 더러운 발을 들이지 말라고 했잖아!”

“끼이이이익!”

괴물들은 괴상한 신음 소리를 내며 달아났다. 그러나 구두 장군만큼은 크게 침음하며 두 발을 버티고 섰다.

“안녕하시오, 버드나무여.”

뒷마당에 쌓인 시체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떼를 쓸 때는 별 미친놈이 다 있다 싶었는데 지금은 제법 점잖은 흉내를 낸다. 덩치에 안 맞게 좀스러운 구석이 있다. 그만한 덩치를 가지고 있으면 언제나 강하게 굴어야지. 용 앞에서 약해지면 어쩌나.

“어쩐 일로 그대가 여기까지 내려온 거지?”

“내 뒷마당에 멋대로 시체를 쌓아 놓고.”

아, 그 문제야?

“도둑질까지 한 놈들이 있어 쫓아왔소.”

갑자기 왜 두발짐승처럼 말하는 건데.

“도둑놈은 손목을 잘라 버려야지.”

구두 장군의 말에 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여긴 형벌만 저 모양이고.

“그렇지만 그게 정말 도둑놈인가?”

“그럼 뭐겠소?”

“그 도둑놈은 그대의 무얼 훔쳤지?”

“……내 뒷마당에 있는 걸 훔쳤소.”

“뒷마당에 있는 무얼?”

쿠르릉…….

용이 조금씩 움직였다.

햇빛에 반짝이던 청룡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구름과 같았고, 해무에 휩싸여 있던 다리화가 태풍 전의 고요한 바다와 같았다면 이쪽은 깎아지른 절벽이 눈앞에서 움직이는 느낌이다.

“무얼 훔쳤다는 거지?”

강을 잇고 있던 다리였던 꼬리가 살랑살랑 바닥을 긁었다.

움직임은 확실히 살랑살랑 이라고 표현될 만했으나 결과는 아니었다. 저기요, 공주 주무시는데 불편하다고 뛰쳐나온 거 아닙니까? 그 공주님 지금쯤 깨고도 남았겠는데요.

“옛날, 임금님이 그대에게 허락했던 땅은 밭 한 마지기였지. 그걸 야금야금 늘리는 것까진 못 본 체해 주었지만, 이렇게 난동을 피워서야.”

버들은 혀를 쯧 찼다. 구두 장군은 눈을 찌푸렸다.

“임금님은 돌아가신 지 오래요!”

“그렇지. 하지만 그날, 그대는 복수를 맹세했었지 않나? 복수 대상을 뒷산에 꽁꽁 숨겨 두고, 허물을 탐하려던 것에 대해선 무어라 설명할 것이지?”

구두 장군의 아홉 입이 다물렸다. 개수가 하나 부족하긴 하지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말이 눈앞에서 훌륭하게 증명되었다.

“그 허물은 그대 것이 아니지. 그러니 소유권을 주장할 순 없어.”

“그럼 저 인간들은! 저 인간들도 마찬가지 아니오!”

“저 인간들은 다르지.”

버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청룡이나 다리화처럼 길게 솟은 뿔은 없었다. 그러나 울퉁불퉁한 돌비늘은 흡사 뿔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에 젖어 있던 비늘이 마르기 시작했지만, 비늘 위의 이끼들은 아직 물에 젖어 짙은 푸른색이었다. 물기가 마른 비늘은 수정의 빛이 비칠 때마다 보석처럼 반짝였고 비늘 위의 이끼는 버들이 움직일 때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그 모습이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를 보는 것 같았다.

“저 인간들은 그대와는 다르게 포기하지 않았거든.”

바람이 불었다. 강 건너편에서 버드나무가 흔들렸다.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든 인간의 노력은 보답 받는 것. 그대는 포기했기에 목소리를 낼 수 없다.”

버들의 말에 백주연이 히죽 웃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눈이 다시 노랗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버들은 그런 백주연을 쓱 보더니 말했다.

“실패한다면 그 또한 인간들이 감내해야 하는 것. 거기에 그대의 몫은 없다.”

마지막 말은 구두 장군을 보며 말했다. 구두 장군은 얼굴이 시뻘겋게 되어서는 콧김을 거칠게 내뱉었다. 구두 장군은 성질을 못 이기고 괴성을 한 번 질렀다.

“알겠소, 알겠소! 버드나무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포기하겠소!”

그러나 구두 장군은 끈질겼다.

“네놈들이 다시 내 눈에 보이거든 그땐 무슨 일이 있어도 갈기갈기 찢어 뱀 먹이로 줄 것이다.”

역시 좀스럽다. 덩치만큼이나 마음 좀 넓게 쓰지.

쿵. 쿵.

구두 장군은 심술이 돋았는지 발을 커다랗게 굴리며 돌아갔다. 덩칫값 못 하네, 진짜.

“…….”

구두 장군의 초라한 뒷모습이 작아질 때 즈음, 버들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우리를 보았다. 돌비늘이 돋은 뱀의 얼굴이지만 용케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용이라서 가능한 재주인가.

“사이좋게 지내라고 보냈더니 이 난장판을 벌여?”

이건 내가 답할 게 아니지. 나는 박서원을 보았다. 백주연을 볼까도 했지만 박서원이 더 맞는 것 같았다.

과연, 박서원은 자연 그 자체를 눈앞에 두고서도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노력은 보답 받는 것이라면서요?”

그냥 내가 나서는 게 낫지 않았을까?

“…….”

버들은 마치 이 작은 인간을 지금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는 듯한 눈으로 박서원을 내려다보았다.

“그 노력이 누구의 노력인지는 모르잖나?”

“누군가의 노력이기는 하겠죠.”

박서원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버들님께서 관여하실 일은 아닙니다. 그건 인간의 일이니까요.”

“……그래.”

버들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딱딱하게 굳은 용의 얼굴은 표정을 읽기 힘들었다. 커다란 눈에 그늘이 져 있다.

반응이 영 찝찝하기는 해도 불살계를 받고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고 했으니 우릴 죽이진 않겠지. 저 병사들 쪽은 모르겠지만.

공작 깃털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있는 교위는 이제 얼굴에 어울리다 못해 없으면 허전할 것 같은 수염을 쓰다듬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모자와 갑옷은 화려해졌다. 이젠 함부로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은 외관이다. 그래도 목에 걸린 피리는 그대로였다.

“실례하겠습니다, 버들님.”

버들은 구두 장군이나 우리를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로 교위를 맞이했다.

“무슨 일이지?”

버드나무가 흔들거리는 것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다. 소름이 돋았다.

“우린 저자들이 업을 가지고 지상으로 돌아가게 둘 수 없습니다.”

교위는 딱딱하게 말했다. 버들은 바람에 나뭇잎이 움직이는 것처럼 나긋나긋한 몸짓을 하며 답했다.

“지상에는 어린 장군님이 계십니다. 우리 장군님을 업에 휘말리게 할 순 없습니다.”

교위는 박서원과 쌍둥이를 노려보았다.

“저건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업이 아닙니다.”

버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은 우리가 관여할 수 없는 인간의 일이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우리의 업이라고 할 수 있지. 그대들에게는 억울한 일이 될 수 있겠군.”

버들은 머리를 강물로 돌렸다. 꼬리는 다시 강의 저편과 이쪽을 이었고, 몸이 강 아래로 잠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대가를 치를 것이다. 우리도 피해 갈 수 없지.”

머리마저 물속에 잠겼다. 푸른 눈이 감기자 용의 몸은 그저 평범한 강바닥처럼 보였다.

“그대들의 장군은 충분히 보호받고 있어요.”

버들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일전에 강가에서 보았던 키가 큰 여인이 다소곳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지하국이 쇠락한 만큼 지상이 번창하였죠. 어쩌면 이번 생애에서는 그대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요.”

“우리를 부르지 않을 수도 있다고요?”

교위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버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답은 못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지요.”

“하…….”

교위는 한숨을 내쉬었다. 용마를 기르며 열심히 훈련하고 있었는데 부르지 않는다면 실망스럽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위는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교위가 울기 시작하자 뒤에 줄을 맞추어 서 있던 병사들도 하나둘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수염을 길게 기른 아저씨의 울음에는 면역이 없다. 저도 모르게 흠칫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교위가 코를 훌쩍일 때마다 나이가 조금씩 어려졌다. 전립의 깃털이 공작에서 꿩으로, 그마저도 사라지고 붉은 장식만 남았다.

“장군님이 우릴 부르지 않는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지요…….”

아기장수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난다. 부모가 아기를 배신하고, 아기장수는 대의를 이루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는다.

그것이 아기장수에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그를 지켜봐야 하는 병사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렇다면 됐습니다. 저들이 어떤 일을 불러올진 모르겠지만, 우리 장군님이 이번에야말로 부모님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충분합니다.”

어려진 교위는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았다.

기세가 완전히 죽은 병사들은 우리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좋았는지 전부 코를 훌쩍이며 수수밭으로 돌아갔다. 수십 명의 군사들이 울면서 걸어가는 게 그,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우릴 죽이려고 했던 이들이기는 한데, 수십 명이나 되는 애들이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마음이 편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감상도 속 편할 때 할 수 있는 얘기다.

병사들이 떠나자 버들은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릴 하나씩 훑어보더니 싱긋 웃었다.

“콩이야, 일어났니?”

그럼 그렇지. 우리한테 웃어 주었으면 이번에야말로 장르가 바뀌었을 것이다.

스릴러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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