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39. 쟁탈전(6)
인간은 위기를 직면하면 종종 새로운 재능에 눈을 뜬다고 했다. 백주하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다.
백주연이 고집스럽게 불개와의 교감은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에 그를 제외하곤 아무도 썰매를 몰지를 못했다. 누가 나서기라도 하면 백주연이 표독스럽게 노려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 질주하는 이 썰매는 백주하가 난생처음 몰아 보는 개썰매 되시겠다. 평소라면 여기서 내리겠다고, 내 목숨은 이런 데 소비될 만큼 보잘것없는 게 아니라고 했겠지만…….
“크어엉!”
어둠 속에서 괴물들이 울부짖고,
“내놓거라……!”
머리 아홉 개 달린 거인이 쿵쿵 발을 울리며 뛰어오고,
“쏴라!”
화살통이 화수분이라도 되는지 끊임없이 활을 쏘는 병사들이 쫓아오고 있다면 초보운전이든 뭐든 아무래도 좋은 게 되어 버린다.
“달려요, 선배!”
“여기서 더 어떻게 달리라고?!”
“알아서 잘요!”
“너, 네가 달리는 거 아니라고 막말하지 마라!”
그렇지만 머리 위로 화실이 스쳐 지나가면 누구나 나처럼 말하게 될 것이다.
괴물들은 괴물들이고, 구두 장군도 구두 장군이라지만 나이가 엿가락처럼 늘어날 뿐 외관상으로는 인간과 별 차이 없는 병사들이었다. 그러나 말도 타지 않고 오로지 두 발로만 불개들의 속도를 쫓아오는 이들을 누가 인간으로 볼까?
“잡아라!”
“크아아악!”
심지어 달리면서 다른 괴물들을 공격해서 잡아 버린다. 생김새가 인간에 가까운가, 아닌가의 문제일 뿐 결국 전부 괴물들이다.
애초에 지하국은 인간에게 허락된 공간이 아니었다. 그런 곳에 기어이 벌레처럼 기어들어 왔으니 이건 그래, 벌을 받는 거다. 역시 이놈들과는 엮이지 않아야 했는데!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까치가 하나 있었다.
“이, 이건, 미친 짓이에요, 누님!”
성인 남성 네 명이서 빠듯하게 탔던 썰매는 어린아이 두 명이 더 는 것으로 삐걱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요, 누님!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요!”
그 어린아이 중 하나가 입술을 파닥거리며 발악하고 있으면 더욱 그렇다.
“작매님, 사촌 동생 좀 어떻게 해 봐!”
백주하는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이 있는 오빠답게 해결책도 말했다.
“차라리 까치로 있으라고 해! 지금 썰매에 너무 많이 탔어!”
작매는 어떤지 득도한 것처럼 보이는 얼굴로 백주하의 말을 전했다.
“들었지, 욱리야?”
“누님, 이런 까치 아니었잖아요!!”
“모든 존재는 이렇게 더 나은 존재가 되어 가는 거란다.”
박서원과 쌍둥이는 진짜 작매한테 사과해야 한다.
“까악!”
어쨌든 썰매가 좁아터진 것도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위험한 소리를 내는 것도 사실이었다. 백주하가 한 번 더 닦달하고 나서야 작매와 욱리는 둔갑을 풀고 까치 모습이 되었다.
박서원은 거기에 한술 더 떴다.
“횃대 말고 날아서 오는 건 어때요?”
진짜 사과해라…….
가여운 까치들은 박서원의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횃대에도 앉지 않았다.
이 난장판 속에서 횃대 위도 안전하지 못하다 여겼는지 큰 까치는 구석에 박혀서 끙끙거리고 있는 백주연의 품으로 들어갔다. 작은 까치는 괴상한 소리를 내더니 차마 백주연의 품속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그 주위에 앉았다.
“꽥!”
앉았지만 백주연이 붙잡았다. 까치 두 마리를 품에 안은 백주연은 두 마리를 보호하려는 듯 제 등으로 감쌌다.
백주연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언뜻 노란빛으로 빛났다가 가라앉곤 했다. 그때마다 욱리는 화들짝 놀라며 백주연에게서 멀어지려다가 실패했다.
괴물 목에 깊숙이 칼을 박아 넣은 박서원은 그런 꼴을 보더니 혀를 찼다.
“검에서 장식 술 빼서 물고 있어.”
“아! 그렇네, 그게 있었네.”
백주연은 손을 까딱 움직이려다가 백주하가 고삐를 잡고 있는 걸 보고 멈췄다. 어쩐지 정신 하나가 빠져 있다. 그 꼬라지에 한 번 더 혀를 찬 박서원이 손가락 하나를 대신 움직여 줬다. 하얀 술을 단 단검이 백주연의 손가락 사이에 푹 들어갔다.
“까아아악!”
까치가 다시 비명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지만 당사자들은 태연했다. 백주연은 썰매 바닥에 박힌 단검에서 술을 풀었다.
“너 정신 똑바로 차려. 실패할 것 같으면 말해.”
백주연은 킬킬 웃었다.
“너 날 죽일 수 있겠냐?”
“백주하보다는 자신 있는데.”
“에이, 거짓말.”
“고통 없이 단번에 죽여 줄게.”
백주연은 하얀 술을 입에 물며 말했다.
“부끄러워하지 말라니까.”
이 상황에서까지 저런 개소리를 듣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다리화가 내게 넘겨주었던 여의주에는 저런 부작용이 없었다. 아마 강제로 뺏어 먹은 탓이겠지.
젠장, 교위 말대로 땅에 떨어진 걸 함부로 먹은 게 맞잖아! 이미 손에 넣은 여의주가 있다고 했을 때 그것들을 어떻게 얻었을지 생각했어야 했는데!
“둘 다 힘들면 제가 대신 죽여 드릴 테니까 입 다물고 있어요!”
썰매를 몰고 있던 백주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재수 없는 소리 할 거면 닥쳐!”
나도 코웃음을 쳤다.
“누군 죽어라 보호막 치느라 바쁜데 힘 빠지는 소리 하잖아요.”
타이밍 좋게 병사들의 창이 보호막에 부딪혔다.
젠장, 저건 왜 줄어들지가 않는 거야? 좀 줄어든다 싶으면 다시 던져 댄다. 도대체 어디서 생겨나는 거지, 진짜!
“아, 망했다.”
그리고 백주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백주하가 급하게 고삐를 잡아당겼다. 썰매가 옆으로 쓰러질 듯 기울었다.
“뭐야?!”
중심을 잃고 반쯤 넘어졌던 박서원이 벌떡 일어났다. 백주하는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강이야.”
“뭐?”
“강이라고.”
지하국의 어둠 너머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우리가 강을 건너왔으니 강이 있는 게 이상하진 않다. 그러나 백주하는 껄껄 웃었고, 나와 박서원은 눈을 찌푸렸다. 백주연은 뒤에 쫓아오는 괴물들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망했네!”
“닥쳐 봐요!”
“망했다고!”
지하국의 강은 다리가 하나뿐이다. 우리가 건너온 버들과 공주가 있는 돌다리.
그 다리에 도착하지 못한 건 백주하의 잘못이 아니다. 급하게 달리느라 아무도 방향을 신경 쓰지 못했으니까.
백주하는 눈앞에 있는 강을 보고 급히 방향을 틀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뒤로 돌아갈 수도 없다. 강 하류를 향해 방향을 틀었지만 뒤쫓아 오던 괴물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능력으로 강 못 건넙니까?”
“무게 때문에 안 돼요!”
박서원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불개들과 썰매, 성인 남성 네 명까지.
“들 수 있다 쳐도, 백주연은 지금 능력 못 쓰니까 강 위에서 공격받으면 끝이에요.”
맞는 말이다.
괴물들이 방향을 틀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거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일단 달려!”
“달리고 있다고!”
백주하가 악을 썼다.
“정해준 씨는 공격 계속 막아요!”
나 없으면 다 죽었다. 그건 확실하다. 추가 수당이 필요하다. 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
“위험수당 좀 쳐주세요.”
“초능력자한텐 그런 거 없는 거 알죠?”
“이거 어차피 비상근무도 아니잖아요.”
“그럼 올라가서 회장님한테 말해 봐요.”
점점 다가오는 괴물들을 보며 박서원은 태평하게 말했다. 얼굴에 있는 저 점이 여의주가 맞는다면, 여의주 두 개를 얼굴에 박아 넣은 저 새끼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게 틀림없다. 눈 하나 끔뻑하지 않고 몸을 세워 썰매에 걸터앉는 게…….
믿음직함과 재수 없음이 동시에 느껴졌다. 저것도 진짜 재주라니까.
“우뭄므.”
백주연이 입에 하얀 술을 문 채로 웅얼거렸다.
“뱉고 말해.”
백주연은 여전히 어미 새처럼 까치 두 마리를 품에 품은 채 말했다.
“그럼 결국 그놈은 어디에 있는 건데?”
“그놈이요?”
“산함박.”
이런 상황에서도 목적을 잊지 않는 모습이 보기 좋다. 뭘 해도 될 놈이다. 도중에 이상한 소리만 하지 않으면.
“허물까지 벗은 놈이 뭐가 됐을지 짐작이 안 간다고!”
“그걸 알면 내가 여기에 이러고 있겠냐?”
박서원은 신경질을 부렸다. 구두 장군에게 날아갔던 검 하나가 돌아오지 않는다. 뒤에서 험한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야, 그래도 좋은 소식이 있어.”
힐끔 뒤를 돌아보며 괴물들과의 거리를 재던 백주하가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도 돗자리는 깔았잖아!”
“매번 맞는 것도 아닌데 무슨 돗자리야!”
“틀린 적이 있긴 해?!”
“족족 다 맞췄으면 내가 백주하보다 수능 성적이 높았겠지!”
이 상황에서조차 저런 걸로 다투고 싶은 건가. 무슨 미취학 아동들도 아니고.
백주하가 이를 으득으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불쌍한 백주하. 그나마 저 셋 중에서는 제정신을 가지고 있는 게 불쌍해서 나라도 말을 받아 주었다.
“좋은 소식요?”
백주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씨발, 말을 받아 줘도 꼭.
“해님이 나왔어.”
백주하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아직 천장의 수정까지 빛이 닿지 않았지만 강 너머로, 저 끝부터 환한 빛이 퍼지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나쁜 소식은요?”
“나쁜 소식?”
“보통 좋은 소식 다음엔 나쁜 소식이 따라오잖아요.”
“음…….”
백주하는 가볍게 긍정했다.
“해님이 나온다고 해도 저놈들이 딱히 돌아갈 것 같지는 않는다는 거?”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수준이 아닌데.
“그럼 좋은 소식은 소용없는 거 아니에요?”
“기분 내자는 거지.”
“무슨 기분요?”
우릴 쫓아오는 게 어떤 건지 더 자세히 보자는 건가?
“그래도 밝아지면 우리도 제대로 보고 공격할 수 있겠지.”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퍽이나 좋은 소식이네요.”
역시 백주하도 제정신이 아니다. 됐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 사는 거다. 이놈들에게 내가 뭘 기대하고 있었을까.
몸을 세워 뒤를 보았다. 백주하의 말대로, 해님이 밖으로 나오면서 우릴 쫓아오는 놈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는 볼 수 있는 게 한계가 있으니까.
중년인의 모습이 된 병사들은 펄쩍펄쩍 뛰면서 구두 장군과 괴물, 우릴 공격하고 있었다. 구두 장군은 붉은 얼굴로 벼락같은 노성을 내며 거대한 도를 휘둘렀다. 병사들은 날쌘 몸놀림으로 도를 피하며 지나가는 괴물의 목덜미를 붙잡아 그 위에 올라탔다. 병사를 떨어뜨리기 위해 날뛰는 몸부림에도 아랑곳 않고 목덜미에 칼을 박아 넣은 채 공중에서 한 바퀴 돌아 구두 장군의 등에 매달렸다. 구두 장군의 등 쪽에 있는 머리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괴성을 질렀다.
역시 괴물들이다. 그리고 박서원도 그 못지않았다. 술을 단 검이 날카롭게 날아다녔다. 어느 쪽도 우릴 도와주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에 박서원의 손속에는 자비가 없었다. 인간을 해하려는 괴물들에게는 봐주는 게 없다.
삑! 교위는 여전히 피리를 불어 병사들을 제어하고 있었다. 모자에 달린 공작 깃털이 휘날렸다. 교위의 피리 소리에 병사들이 이쪽을 향해 창을 던졌다. 난 저게 어디서 자꾸 생겨나나 했는데 병사들이 갑옷에서 지푸라기를 하나씩 빼고 있었다. 그 지푸라기는 병사들의 손에서 훌륭한 창이 되었다.
“사기 아냐, 저거!”
그러나 날아오는 창을 어떻게 하겠는가. 막아야지.
손을 뻗어 익숙하게 보호막을 만들었다. 요괴들의 직접적인 공격이 아니라서 그런지 병사들의 공격을 막는 건 큰 충격이 없었다.
그렇지만 거리는 점점 좁혀지고 있다. 강에 막혀 진로가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불개들이 지치고 있다는 증거다.
“…….”
아직 내 주머니에는 묵주가 있다. 이걸 쓰면 저놈들을 막을 수 있을 만한 차단막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런 영문도 모를 지하 세상에서 죽을 순 없다.
그걸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내하여야 한다.
사는 것은 본래 그런 법이니까.
“우리 공주 자는데 시끄럽게 굴지 말아 주겠어?”
그렇다.
본래 그런 법이다. 자신의 삶에 어떤 거지 같은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말도 안 되는 드라마 세계에 들어온 것처럼.
머리 아홉 개 달린 괴물이어도, 곡식으로 만들어진 병사들이어도, 욕심에 눈이 먼 괴물, 혹은 인간들이어도.
아무도 한 치 앞을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