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
39. 쟁탈전(5)
“그걸 왜 먹어!”
대학생을 지나 이제 어엿한 사회인이 된 교위가 버럭 외쳤다. 드디어 그럭저럭 수염에 걸맞은 모습이 되었다.
“이봐, 아무래도 잘 모르는 것 같아서 한마디 하는데. 혹시 부모님이 땅에 떨어진 건 주워 먹지 말라고 안 하시든?”
백주연은 손등으로 입 주위를 벅벅 닦았다. 제대로 닦이지 않고 진회색 피가 번졌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어, 그… 미안해.”
교위는 고개를 숙였다. 사실관계를 따지면 맞는 말이긴 한데…… 맞는 말이긴 한데!
왜 이렇게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드는 걸까.
“아무래도 고된 어린 시절을 보낸 모양인데, 땅에 떨어진 건 함부로 주워 먹는 게 아냐. 지금이라도 알아 두는 게…….”
“땅에 떨어진 건 아니잖아요?”
백주연은 얄밉게 말했다.
“뱀 배 속에 있던 거지.”
교위는 어처구니없어하며 말했다.
“그게 더 문제지!”
교위는 횃불을 든 손을 거칠게 움직였다. 그 탓에 백주연에게 그림자가 길게 졌다.
“그 여의주…… 아니, 여의주가 맞는지도 모르겠는데, 여하튼 그거. 아무리 봐도 여의주를 만들 만큼 수련을 한 뱀이 아니었잖아, 그놈!”
“걱정하세요, 교위님. 이거 여의주 맞아요.”
백주연은 태연하게 얘기했다. 말을 한다고 다 말을 하는 건 아니다. 교위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그는 개소리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은 걸 참고 있었다.
“무슨 멍청한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고!!”
1초 참았다.
“딱 봐도 허물이 안에서 뭉쳐서 구슬이 된 거잖아! 내가 허물이라고 해서 우습게 보였나? 허물이라고 다 같은 허물이 아냐! 그건 꽝철이 놈이 소화시키지 못하고 뱉어 놓은 거야!”
교위는 악을 쓰며 외쳤다.
“업이라고, 업!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힌 생명체라면 아무도 감당하지 못해!”
업을 감당할 수 있는 건 대개 두 종류의 인물이다. 업이라곤 티끌도 모르는 순수한 존재거나, 전래동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지나가는 스님같이 깨달음을 얻은 존재.
그래. 어딜 봐도 백주연이나 백주하, 박서원이 속할 것 같지는 않다.
교위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가 아는 사실을 교위라고 모를까. 그래도 그는 나름대로 이 못 배워 먹은 인간을 걱정해 주고 있었다. 곡식 주제에……. 착한 곡식이다.
“우리도 그 정도는 압니다.”
박서원이 말했다.
교위는 전혀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데, 라는 눈빛을 했다. 둘 다 말은 하고 있는데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현상이다. 현대 사회의 슬픈 일면 아닌가. 지하국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다만 교위는 겉과 속이 같은 인물이었다. 교위는 솔직하게 말했다.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알고 있다니까요.”
박서원은 백주하에게 작은 종이를 건네받았다. 붉은 종이를 복주머니 모양으로 접은 것이다. 다만 福 대신 다른 한자가 써져 있다.
박서원은 그걸 백주연에게 던졌다.
“지상으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이걸로 어찌 될 겁니다.”
“……대단한 부적이군. 누가 얼마만큼의 수명을 대가로 바쳤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분이 남은 밤을 조금씩 잘라 만들어 주셨습니다.”
백주연은 부적을 건네받고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교위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냐, 그래도 이건 아니지!”
교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지 시름에 잠긴 표정을 했다.
“대관절 그걸 인간이 먹어서 어떻게 하려고? 피냄새 나는 인간들이 찾아오길래 죽일까 하다가…….”
교위가 나를 보았다. 왜 날 봐? 나 말고 저놈들이나 봐라.
교위가 어떻게 나올지 아직 몰라서 보호막을 칠까 말까 간만 보았다. 난 평화주의자라 싸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다리화에게 인정받은 이가 이끌고 있길래 넘어갔더니……. 악행을 씻기 위한 고행길도 아니었구나.”
교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박서원은 씩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상상력이 풍부하시군요.”
지금으로서는 같은 편이지만 같은 편이래도 재수 없는 건 재수 없는 거지. 나는 이런 부분에선 거짓말하지 않는다.
“네놈들이 무슨 일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호칭이 너희에서 네놈으로 격하되었다. 좋은 징조는 아니다. 박서원도 손을 움찔거렸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이 떨렸다.
“장군님이 자라고 계실 지상으로 돌려보낼 순 없다!”
설마하니 이유로 그걸 댈 줄은 몰랐다.
이유야 어쨌든 곡식 병사들과 전면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싸움은 기본적으로 숫자놀음이다. 압도적인 무력 차이가 있지 않은 이상 머릿수 많은 놈이 이기게 된다.
아기장수의 부름을 기다리며 용마를 키우고 있는 곡식 병사들의 수는 두 자리. 일부는 용마와 불개, 까치를 돌보느라 수수밭에 남아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두 자리다.
박서원은 교위가 피리를 불지 못하게 검을 날렸다. 교위는 피리를 부는 대신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뽑아 박서원의 공격을 막았다. 박서원도 자신의 공격이 성공할 거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는지 그대로 몸을 내빼며 외쳤다.
“달려!”
그 말을 하기도 전에 이미 나와 쌍둥이는 달리고 있었다.
삑! 삑!
뒤이어 피리가 울렸다.
“저놈들을 잡아라! 구슬을 깨부숴야 한다!”
씨발, 그놈의 구슬, 구슬, 구슬…… 여의주!
주먹을 꽉 쥐었다. 손가락 끝에 다리화가 준 여의주가 만져졌다.
백주연의 볼에 생긴 점. 백주하의 볼에 있는 점. 박서원의 눈가에 있는…… 점. 전부 여의주인가?
10년 전에는 없던 점들인가? 씨발,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정해준’의 기억이 떠올랐을 때도 그냥 눈앞에 있는 게 박서원이고 쌍둥이구나 했었지, 얼굴에 점이 있고 없고를 보진 않았다고!
“정해준 씨!”
박서원의 고함에 반사적으로 능력을 사용했다. 보호막에 병사들이 날린 화살이 부딪쳤다.
“우리 살아서 돌아갈 수 있습니까?!”
병사들에게 잡혀서 죽는 게 빠를까 돌산을 내려가다가 발을 삐끗해서 죽는 게 빠를까.
“내가 어떻게 압니까.”
박서원은 매섭게 검을 날려 병사들을 견제했다.
“그걸 모르면서 그따위로 말했다고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잖아요.”
나는 그 하늘을 가리켰다.
“여긴 하늘이 없거든요!”
“예리한 구석이 있네요, 정해준 씨.”
미친놈 아냐!
“음, 아냐. 하늘은 없지만 솟아날 구멍은 있을 것 같은데.”
백주연은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평소에도 나사가 좀 빠져 있는 사람이지만 지금은 말투가 이상하다. 비눗방울처럼 둥실둥실 떠오르다가 팍, 터져 버릴 것 같은, 부드럽지만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은 목소리다.
“응?”
백주연과 눈이 마주쳤다. 뱀처럼 샛노란 눈이다.
탁!
백주하가 백주연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정신 똑바로 잡아! 먹히지 말고!”
백주연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거 독하긴 한가 보네. 송 할머니 부적으로도 다 안 막아지는 거 보면.”
백주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연히 사람 눈깔이 갑자기 뱀 눈깔이 되면 걱정이 되겠다만은,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일이 많다.
쾅!
“쟤네부터 어떻게 해 봐요!”
화살과 창, 그것도 모자라서 검까지 던지고 있는 수십 명의 병사들.
솟아날 구멍은 개나 줘라!
쿠웅!!
“뭐, 뭐야?!”
……저번부터 타이밍이 좀 묘한데 말이지. 누굴 놀리는 것도 아니고, 진짜.
쿠웅!!
땅이 울렸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으아악!”
그건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는지 한데 뒤엉켜서 넘어지기 시작했다. 솟아날 구멍… 이라.
쿠웅!!
“웬 놈이냐…….”
솟아날 구멍일까.
“웬 놈이 남의 집 뒷마당에서 이리 소란이냐……”
쿠웅!!
키가 산만 한 남자가 걸을 때마다 땅이 흔들렸다. 키만큼이나 거대한 도를 질질 끌고,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 거리가 한참 남았는데도 남자는 모든 원근감을 무시한 채 산처럼 크기만 했다.
“남의 집에 시체를 버려 두고 그대로 도망갈 셈이더냐……?”
쿠웅!!
걸을 때마다 철을 덧댄 신발이 커다란 소리를 냈다. 옷 위에 걸치고 있는 건 녹이 잔뜩 슨 갑옷이었고, 머리에 쓰고 있는 건 반쯤 깨진 투구였다. 손에 들고 있는 도도 이가 빠져 있었다.
정정한다. 다른 건 다 맞는 설명이지만, 머리에 쓰고 있는 건 깨진 투구가 아니다. 머리‘들’이 쓰고 있는 게 깨진 투구다.
남자의 아홉 개의 머리가 병사들과 우리를 보았다. 아홉 쌍의, 총 열여덟 개의 눈이 시퍼렇게 빛났다.
* * *
구두 장군의 아홉 개의 머리 중 말을 하는 건 정면에 있는 머리 하나뿐이었다. 나머지도 눈을 뜨고 있긴 한데, 입을 열진 않았다. 그러면 뇌는 정면에 있는 머리에만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정면에 있는 머리만 공격하면 되는 것 아닌가? 너무 뻔한 약점이지 않나.
아니면 뇌가 아홉 개의 머리에 조금씩 나누어져 있을 수도 있다. 정면에 있는 머리는 언어를 담당하고, 나머지는 대충, 뭐…… 감각이나 그런 걸 담당하는 거지. 그럼 머리 하나를 잃을 때마다 기능이 하나씩 멈추는 건가? 그런데 애초에 머리 하나가 없으면 과다출혈로 죽지 않을까?
“정해준 씨!”
보호막을 쳤다.
사공이 많은 배는 산으로 가지만 구두 장군의 말하는 머리는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산으로 가는 대신 쿵쿵거리며 병사들과 우리를 쫓아왔다. 구두 장군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병사들이 벼 껍질처럼 날아갔다.
이제 완전히 수염에 어울리는 얼굴이 된 교위는 바쁘게 피리를 불었다.
“콩들은 저 미친놈을 막아라!”
콩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구두 장군에게 달려들었다.
“팥들은 저 미친놈들을 막아라!”
팥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우리에게 활을 쏘기 시작했다. 우린 잊어 줘도 괜찮았는데.
“보호막!”
보호막을 쳤다.
“이 도둑놈들이!”
구두 장군이 주장하는 바는 이렇다.
‘그 허물은 내 집 뒷마당에 있었으니 당연히 내 것이다.’
뭐…… 그렇다 치자.
‘그런데 그 뱀 새끼가 허물을 훔쳐 먹었으니 당연히 그 뱀 새끼도 내 것이다.’
물건을 도둑맞으면 화가 나서 좀 억지를 부릴 수도 있다. 그 물건이 자기 건지 아닌지는 둘째치고.
‘그 뱀 새끼를 저 인간이 먹었으니 나는 저 인간의 소유권을 주장할 권리가 있다.’
지하국의 비범함을 인간이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저 인간의 배를 갈라 구슬을 빼 가겠다.’
허물에 대한 소유권 주장이 왜 이 모양이 됐는지 모르겠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가만히 백주연을 바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죽어라 뛰었다.
“화살!”
보호막을 쳤다.
이 인간들, 나 없으면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했을까? 사실 내가 없었으면 상황은 이미 끝났지 않을까? 전원 죽음으로. 원래 ‘빌더쓰’에서도 박서원과 쌍둥이가 지하국에 오긴 했을 텐데, 그땐 어떻게 살아남았던 걸까. 아예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려나…….
돌산을 내려와 수수밭으로 들어섰다. 이 난리는 주변에 있는 다른 괴물들까지 불러들였다. 박서원이 입을 크게 벌리는 괴물의 눈에 검을 박아넣는 동안 백주하는 큰 목소리로 작매를 불렀다.
“작매님! 작매님!!”
“까악!”
머리 위에서 익숙한 까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가서 썰매 준비해! 바로 달릴 수 있게!”
“까아아악!”
저 울음소리가 알았다는 뜻인지, 아니면 비명 소리인지 모르겠다.
겨우겨우 수수밭을 벗어나 까치들과 불개들이 쉬라고 만들어 놓은 버드나무까지 도달했다. 버드나무 아래에는 남은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상태로 서 있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야?”
아직 피리 소리가 도달하지 않았다. 이 틈에 우리는 썰매에 올라탔다.
“까악!”
횃대에 앉은 까치 두 마리가 요란하게 울어 댔다.
여의주를 억누르느라 신경을 쏟고 있는 백주연을 대신해서 백주하가 고삐를 잡았다.
삑!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 건 그때였다.
“보호막!”
“말 안 해도 압니다!”
버드나무 아래에 있던 병사들이 창을 던져 댔다. 교위가 수수밭을 나왔다.
두 무리로 나뉘어 하나는 이쪽을 쫓고, 하나는 구두 장군을 상대한다. 지성이 없는 괴물들은 모두를 공격한다. 장관은 장관이었다. 내가 거기에 속하지만 않았다면.
“미, 미, 미, 미쳤어, 이건!”
어린 남자아이 목소리가 썰매 구석에서 들렸다.
은박 문양의 검은 복건을 쓴 남자아이가 횃대 위의 까치를 향해 울상을 지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까치는 온데간데없고, 횃대 위에는 작매만 있었다.
“누, 누님, 이건 무슨 일입니까! 저, 저 집에 갈래요, 이런 얘긴 못 들었어요!”
덜덜 떠는 사촌 동생을 위해 작매도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작매는 온화한 목소리로 사촌 동생을 달랬다.
“욱리야, 집에 가려면 저것들부터 해결해야 한단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곤 말씀 안 하셨잖아요!”
“그래서 물건을 살 땐 설명을 잘 들어야 하는 법이지.”
박서원과 쌍둥이가 까치를 완전히 버려 놨다.
이건 변명할 수도 없이 유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