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38화 (138/202)

# 138

39. 쟁탈전(4)

물론 지하국까지 와서 탐문조사만 하다 집으로 돌아갈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힘들게… 는 아니지만 고생해서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드라마적으로 생각하면 사건이라도 하나 일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정해영이 봤던 그 드라마, ‘빌더쓰’에서 박서원과 그 부하들이 지하국에 내려가는 이 이야기가 나올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빌더쓰’에서 백조 이야기는 시각적인 충격을 줄 수 있으니 몇 번 나왔겠지만 인간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그다지…… 주인공들과 엮일 일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내가 모르는 얼굴들인 걸 보면 저쪽 세상에서도 별로 유명하지 않은 놈들일 게 뻔하다.

솔직히 박서원도 정해영이 귀에 딱지가 앉게 떠들어서 그렇지 내가 모르는 얼굴인 걸 보면 신인 아니었을까? 신인 주제에 이런 파격적인 역할이라니. 저쪽 세계의 박서원이나 소속사나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

아니, 이야기가 딴 데로 잠깐 샜는데.

어쨌든 주인공도 없는 이 지하국 탐방기가 ‘빌더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것 같진 않았다. 그렇지만 ‘박서원과 그 부하들’에게 지하국은 무언가의 분기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지하국 얘길 들었을 때 나는 여기가 악당의 레벨업 장소가 될 거라 생각했다.

“막아!”

백주연이 급하게 외치며 뒤에서 내 어깨를 잡았다. 하늘 높이 떠 있던 하얀 술의 단검들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당연히 저 막아, 라는 소리는 나를 향한 것이 아니다.

쾅!

백주하가 친 보호막에 무언가 거세게 부딪쳤다. 어두워서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조금 전에 병사들과 우리를 공격하던 게 두더지였으니 그놈일 것이다.

백주연은 내 어깨를 놓고 손을 움직였다. 아래로 떨어지고 있던 단검들이 다시 움직였다.

병사들이 들고 있는 횃불에만 의지하고 있는데도 박서원과 백주연은 어떻게 된 게 괴물을 잘도 난도질하고 있었다. 역시 덩치가 크면 안 된다. 그림자로도 대충 위치를 파악할 수 있지 않은가. 우리에겐 좋은 이야기지만.

박서원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놈들을 공격하고, 병사들을 향하는 공격들을 견제하고 있다. 나도 병사들을 향하거나 이쪽을 향하는 공격들을 막느라 바쁘다.

진짜 정신이 없는 쪽은 백주하와 백주연 쪽이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들을 노려보며 번갈아 가며 손을 뻗는다. 박서원을 노리는 것들이 있으면 백주연이 내 어깨를 붙잡고 백주하가 보호막을 치고, 박서원 쪽이 괜찮으면 백주하가 박서원의 어깨를 잡고 백주연이 괴물들을 공격한다.

솔직히 쌍둥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 번이라도 행동이 엉키게 되면 망하지 않는가. 둘이 합쳐서 10등급이라 놀리긴 했지만 저런 게 가능한 인간이 10등급이 아니면 오히려 더 놀랐을 것이다.

삑!

그리고 그 사이로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들렸다. 다시 청년의 모습이 된 교위는 고함을 버럭 질렀다.

“두더지!! 두더지부터 잡으라고, 멍청이들아!!!”

다들 열심히 사는 모습이 좋구나.

쿠웅.

결국 두더지는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다. 병사들은 부러지지 않은 창과 화살을 수거했다. 두더지의 옆에는 머리가 세 개 달린 거인이 쓰러져 있었다.

둘 다 낮에 보았던 놈들처럼 새까만 피를 흘리고 있었다.

교위는 횃불을 비추어 까만 피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나설 필요는 사실 없는데…….”

교위는 머리를 마구 긁적였다.

“그래도 엉망이 될 걸 뻔히 두고 볼 순 없지. 안 그러냐, 얘들아!”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대답은 한 번만 해라!”

“네!”

“네!”

교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콩대가리들한테 뭘 바라냐.”

괴물들의 시체는 다시 활활 타올랐다. 허허벌판이라는 점이 이럴 때는 좋았다. 맘 놓고 불을 붙여도 옮겨붙을 게 없다.

병사들이 다시 열을 맞추어 서자 교위는 피리를 불어 출발시켰다. 교위와 우리는 병사들의 뒤에서 따라갔다.

“이제 곧 꽝철이 놈 허물이 있는 곳에 도착해.”

교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마나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새끼 뱀은 살을 내어 주고 뼈를 취하는 방법을 택했다.

다른 놈들을 견제하며 산함박의 허물을 먹을 자신이 없었는지 아예 놈들에게 일정 부분을 내어 준 다음 흉폭해지도록 만들었다. 이성을 잃고 포악해진 놈들은 평소라면 쉽게 건들지 못했을 병사들을 공격했다.

교위는 단숨에 상황을 깨닫고 우리에게 달려왔다. 그래. 돕기로 했으니 그건 어쩔 수 없지……. 여기 와서 자꾸 밤중에 산을 오르는데, 이거 진짜 위험한 짓이니까 제발 시키지 않았으면 한다.

교위는 천장을 보았다.

“빨리 해님이 나와야 할 텐데. 어두우면 발밑이 안 보여서 위험하다고.”

위험하다는 자각이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또 자긴 괜찮다고 연약한 인간들을 밤 산행에 데려온 줄 알았지.

수수밭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총 여섯 놈을 죽였다. 모두 새까만 피를 질질 흘리는 놈들이었다. 허물을 좀 먹었다고 이성을 잃고 피가 새까매지다니. 도대체 업을 얼마나 쌓아야지 그만한 영향을 떨칠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껏 만난 괴물들보다도 허물을 더 많이 처먹은 새끼 뱀은 지금쯤 어떤 괴물이 되어있을까.

그 새끼 뱀을 통해 산함박이 뭐가 되려는지 유추해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히히.”

활활 타오르는 괴물 시체의 반대편에서 어린아이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쪽은 어둠에 잠겨 있다. 달님의 영향으로 별빛을 잔뜩 머금은 수정도 그쪽을 비추진 못했다.

“히히히.”

다시 선명하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박서원과 백주연이 동시에 손을 움직였다.

“우와아, 아무 죄 없는 아이면 어쩌려구?”

어린아이는 웃으며 말했다. 어둠 속으로 날아간 검은 돌아오지 않았다.

“앗, 이거 꽤 신경 써서 만든 장식이구나. 이렇게 먹으면 미안한데.”

우웨엑…….

역겨운 소리가 들리면서 어둠 속에서 장식 술이 툭 튀어나왔다. 알 수 없는 액체에 질퍽하게 젖은 채였다. 그래도 원형 자체는 유지하고 있었다. 빨간색과 하얀색 술은 박서원과 백주연의 검 장식이었다.

“그거 먹으면 몸에 안 좋을 것 같더라? 왜 그런 걸 들고 다녀? 웅, 난 별로지만 형한테는 필요한가 봐. 형은 인간이라 몸이 약하잖아.”

아이는 깔깔 웃었다.

“그러니 그런 거라도 있어야지.”

어린아이 특유의 높고 맑은 웃음소리다.

“깨끗하게 씻으면 다시 쓸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듣고 있으니 이상하게 소름이 돋았다. 살아 있는 생물체가 말하는 것보다는 녹음된 카세트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야.”

박서원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지긋이 노려보았다.

“너 그놈이지.”

“히히.”

“아직 이름도 없는 어린놈이라 보내 줬더니 이따위로 굴어?”

“그치만 계속 이름이 없으면 형처럼 무서운 사람이 찾아오잖아?”

아이는 삐죽거리며 말했다.

“그래서 생각해 봤는데, 적어도 이름은 있어야겠더라구.”

“그래?”

박서원은 근처에 있는 병사의 화살통을 넘겨받았다. 화살들이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화살은 차례대로 어둠 속을 향해 날아갔다.

“그래서 이름을 뭘로 지었는데?”

“많이 고민했었는데…… 달래, 달래 어때?”

날아간 화살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 참, 내가 말하고 있는데 왜 자꾸 이런 걸 보내는 거야.”

“많이 먹으라고.”

“에이, 거짓말.”

콰직.

활이 반 동강이 난 채로 장식 술 옆에 뱉어졌다.

“있지, 형. 저번에 까치랑 같이 나 찾아왔을 때 내 배를 가르려고 했었잖아.”

“안 갈랐잖아.”

성질머리하고는……. 본인 말로는 죄가 없으면 안 죽인다고는 했지만, 저건 그냥 안 죽이기만 하는 거잖아. 질이 나쁜 건 마찬가지다.

“내가 뭘 먹었다면 갈랐을 거지?”

동물이나 곤충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박서원이 즉답하는 걸 보면 인간을 뜻하겠지.

“당연하지.”

“응,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엄청 기분 나쁜 거야.”

“그런데?”

“내가 기분 나쁜 만큼 형도 기분 나빴으면 좋겠더라구.”

아이는 툴툴거렸다. 박서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그런 쓰레기를 주워 먹었다고?”

“쓰레기라니! 어르신이 나한테 꼭꼭 씹어서 먹으라고 남겨 주신 거란 말야.”

어르시인? 어이가 없다 못해 뒷목이 당긴다. 박서원이나 쌍둥이도 마찬가지였는지 코웃음을 쳤다.

“어쨌든 내 이름 어때? 귀엽지 않아?”

박서원은 어린 뱀의 말을 무시하고 양손으로 방향과 범위를 지정했다. 화살이 전부 삼켜진 곳, 삼켰다가 뱉어진 곳, 부러지기만 했던 곳, 그대로 지나친 곳. 그간의 경험은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박서원은 능숙하게 새끼 뱀의 크기와 위치를 추측했다.

박서원의 손짓을 백주연은 곧바로 알아들었고 교위는 조금 버벅거리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뭐…….”

박서원은 천천히 검을 띄웠다. 백주연도 마찬가지였다. 하나씩 줄어들어 여덟 자루가 되었다.

“봄은 지났지만 달래 나물 생각나고 좋네.”

거기서 튀어나오는 감상이 겨우 달래 나물이야? 도대체 박서원의 기준을 모르겠다.

박서원은 아이를 향해 검을 던지며 말했다.

“그거 맛있거든.”

* * *

어린 뱀은 아직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는 것들은 약하다. 약한 것들은 보통 일찍 죽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생명체가 그렇듯이, 이름 없는 어린 뱀은 죽기 싫었다.

그래서 땅꾼이 찾아왔을 때, 겨우 인간이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분노였다. 눈앞의 인간이 얼마나 많은 뱀을 죽였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치기 어린 분노.

땅꾼이 떠난 후 어린 뱀은 당장의 분노에 휩쓸려 검은 뱀을 찾아갔다. 그 어르신이라면 재수 없는 인간을 단숨에 죽여 줄 것이다.

‘땅꾼이 날 찾고 있다고?’

분명 몇 년 전에 먼발치에 보았을 때만 해도 자신과 같은 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크기가 크고 무언가가 뚝뚝 떨어지고, 떨어진 것이 몸통을 붙잡으려고 하긴 했었지만 그래도 뱀이었다.

‘히익, 네, 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이는 그저 거대한 먹물 덩어리처럼 보였다. 혹은 진흙 덩어리거나. 빛 한 점 들지 않는 새까만 덩어리는 입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땅꾼을 잡아먹으면 거의 완성될 테지만……. 아직은 아냐. 조금만 더……. 그리고 그놈은 마지막에 먹어야 해. 그래야 탈이 나지 않거든.’

눈이 있어야 할 자리가 움푹 들어갔다. 보일까 싶었지만 한때 뱀이었고, 이무기였고, 용에 근접하였던 이는 아직 이름 없는 뱀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좀 더 익혀 먹어야 맛있겠지……. 아가야, 나는 곧 허물을 벗을 거란다.’

덩어리는 다정하게 말했다. 다정스러운 척 말했다.

‘네가 그 허물을 먹거라. 그럼 단숨에 자랄 수 있을 거란다.’

입으로 보이는 부분이 가느다랗게 찢어졌다. 웃고 있는 듯했다.

‘물론 네 하기에 달렸지. 네가 열심히 소화시킨다면 그 땅꾼을 혼내 줄 만큼 자라게 될 거란다. 어쩌면, 그래. 이름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지.’

그 달콤한 말이 모순되어 있고,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만큼 뱀은 경험이 없었다. 그저 이름을 가질 수 있다는 말에 혹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네, 어르신!’

‘만약 괜찮다면 내가 이름을 지어 줄까?’

업 그 자체가 된 이가 지어 준 이름이 어떤 의미일지도 모르고.

‘달래, 달래가 좋겠구나.’

그건 참 맛있는 이름이거든. 땅꾼은 널 아주 맛있게 먹을 거란다. 땅꾼이 얼른 익었으면 좋겠구나. 누가 널 먹게 되든, 나는 그 세 명을 모두 먹을 생각이니까.

어린 뱀에게는 닿지 않을 목소리였다.

앞으로도 영원히 닿지 않을 목소리였다.

“끄, 끄윽…….”

어린 뱀은 울컥 피를 토했다. 이미 주위가 피로 흥건했기 때문에 아무도 어린 뱀이 피를 토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이번엔 내 차례야.”

땅꾼 중 하나가 말했다. 어린 뱀은 부들부들 떨었다. 앞이 보였다면 덜 무서웠을까? 아니면 더 무서웠을까? 눈에 박힌 창이 아팠다.

약한 것들은 죽기 마련이다.

약한 것들은 먹히기 마련이다.

땅꾼은 휘파람을 불었다.

어린 뱀은 고통에 울부짖었다. 몸도 커지고, 이름도 생겼는데! 구슬도 생겼는데! 그런데, 왜! 왜, 인간들에게!

“찾았다.”

백주연은 오색빛깔로 빛나는 구슬을 손에 쥐었다. 짙은 회색의 피를 뒤집어쓴 구슬은 거무죽죽하게 빛났다. 백주연은 망설이지 않고 그걸 입에 넣었다. 시꺼먼 피가 입가에 번졌다.

“우웩, 엄청 맛없네.”

“그럼 맛있을 줄 알았냐?”

“아니, 너넨 잘만 먹길래.”

백주연은 회색 피에 젖은 머리를 쓸어넘겼다.

오른쪽 뺨에 희미하게 떠오른 점은 금방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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