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36화 (136/202)

# 136

39. 쟁탈전(2)

눈처럼 새하얀 망아지가 절뚝거리며 투레질을 했다. 짧은 갈기는 새까만 색이다. 꽤 근사한 색 조합이다.

“에구, 쉬라니까!”

교위는 두 팔을 번쩍 든 채 망아지를 반겼다.

“히히잉.”

망아지는 교위 주위를 빙글빙글 날았다. 잘못 말한 거 아니다. 날았다. 난 게 맞다.

“저거 그리스, 그거 아냐?”

쌍둥이 중 하나가 중얼거렸다. 어느 쪽인지는 모르겠다. 목소리만으로는 쌍둥이를 구분할 수 없다.

“페가수스?”

“그래, 그거.”

“1800년대에 멸종하지 않았나.”

오늘의 잡지식: 페가수스는 1800년대까지 존재했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이런 잡지식들은 머릿속에서 깡그리 지워 버려야지. 돌아가서 이런 소릴 지껄였다가는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다.

망아지는 귀여운 날개를 파닥거렸다. 교위는 망아지를 마구 쓰다듬었다.

“아이구, 우리 용마님!”

용마? 그런 거창한 이름을 붙이기엔 너무 깜찍한 크기인데.

망아지의 앞다리에 감겨 있는 붕대가 보였다. 저게 뱀한테 물렸다는 다리인 모양인데… 생각보다 귀여운 상처인데?

지하국에 남아 있는 뱀의 흔적을 보면 이해할 수가 없다. 저건 그냥 평범한 뱀에게 물린 자국이다. 아니면 저렇게 작게 변할 수도 있었다는 건가?

슬쩍 박서원을 보았다. 슬슬 나설 때가 됐는데 왜 얌전해. 불안하게.

박서원은 심각한 얼굴로 용마만 보고 있었다.

“히힝, 히히잉?”

용마는 순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나는 말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있다. 저런 얼굴에 속으면 안 된다.

물론 그쪽은 원래 평범한 말이었지만 죽어서 이상하게 된 경우지만 말에 대한 편견을 가지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용마, 날개 달린 저 말은 평범한 말이 아니니까.

다시 한번 교위에게 확인했다.

“뱀이 얘를 괴롭혔다고요?”

교위는 성이 난 얼굴로 긍정했다.

“다리를 콱 물었다니까.”

나는 군사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건 그 뱀을 잡는 훈련이라고요?”

아까부터 신경에 거슬렸다. 병사들이 상대하는 인형의 크기가 이상했다.

크기가 너무 작다. 보통 뱀에 비하면 물론 큰 크기기는 하다. 하지만…….

하지만 그 어느 것도 지하국에 있는 산함박의 자국에는 미치지 못했다.

“어떤 뱀입니까?”

목표물이 제대로 겹치는 게 맞는지부터 확인해야지.

“응?”

“잡으려는 뱀이요. 저희도 뱀을 찾고 있거든요.”

“그래?”

“네. 검은 뱀인데. 보신 적 있습니까? 버들님께서는 여기 분들이 봤을 거라 하시던데.”

“버들님이? 음, 하긴 여길 오려면 강을 지나왔어야겠군.”

교위는 수염을 매만졌다.

“그 검은 꽝철이는 구두 장군의 뒷마당으로 기어들어 갔지. 꼬리가 잘린 채 검은 물을 질질 흘리는데, 그걸 주워 먹은 다른 괴물들이 난동을 부리는 덕분에 우리도 골치 아팠어.”

새로 만들던 짚 인형이 완성되었는지 병사들이 장대로 인형을 높이 세웠다. 앞서 사용하던 것보다 훨씬 크다.

“그놈이 얼마 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소린 들었는데…….”

교위는 북쪽을 보았다. 여긴 별이 없어서 북두칠성을 보고 방위를 알 수는 없지만, 강의 상류, 북쪽으로 갈수록 천장의 수정이 더 많아졌다. 수정이 빼곡히 박혀 있는 천장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구두 장군이 뒷마당에 작은 출구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었으니 그리 갔을지도 몰라.”

박서원이 돌다리 위에서 산함박과 마주치지 않을 것 같다는 말을 한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사실 박서원은 초능력자가 아니라 어디 대학가에서 점집이나 차리고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애들 훈련도 시키고 구두 장군을 혼내 줄 겸 그쪽으로 가다가, 겸사겸사 그놈도 확인하려 했거든? 근데 그놈이 거기에 허물을 벗어 놨더라고.”

“허물?”

박서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놈이 저럴 때마다 심장이 안 좋다. 안 좋은 일이 생길 거란 방증 아닌가.

“그래, 허물.”

교위는 뒷짐을 지며 커다란 뱀 모양 짚 인형을 찌르고 있는 병사들을 보았다. 어딘가 불만스러운 얼굴이다.

“느려, 이 굼벵이들아!”

듣지 못한 척했다.

“그 뒤로 검은 뱀은 사라졌는데 그 허물을 그대로 놔두면 큰일 날 게 뻔하잖아?”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모양이다. 그렇다고 하는데 어쩔 건가. 그러려니 해야지. 이 부분은 자신 있다. 이곳에 온 뒤로 항상 하는 거니까.

“그래서 치우려고 했는데…….”

“히이힝.”

용마가 울자 교위는 다시 용마에게 관심을 쏟았다. 한참을 용마를 쓰다듬으며 예뻐하던 교위는 겨우 주제로 돌아왔다.

“그 쪼그만 뱀 새끼가 우리 용마님 발을 콰직 물어서 우리 신경을 거기로 쏠리게 하더라고. 영리한 놈이야. 우리 눈을 피한 놈은 그대로…….”

“히힝.”

용마가 이야기를 끊어내는 솜씨가 절묘하다. 중간에 광고시간이라도 가지면 딱 맞을 것 같군. 용마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허공에서 발을 굴렀다. 교위의 관심이 용마에게 쏠려서 급하게 교위를 불렀다.

“그래서요?”

중요한 부분에서 이야기가 끊겼다고. 나는 짜증을 감추고 교위를 재촉했다. 다행히 교위는 순순히 입이 열렸다.

“응? 아, 그놈이 허물을 처먹기 시작했지.”

“허물을, 먹었다고요?”

“워낙 크기가 커서 아직도 먹는 중이지만. 그걸 다 먹으면 그놈이 뭐가 될지 모르겠어. 꽝철이 찌꺼기라고는 해도 워낙 어마어마한 놈이라…….”

교위는 용마의 짧은 갈기를 쓰다듬었다.

“그 찌꺼기만 해도 보통이 아니거든.”

교위가 이마를 찌푸렸다.

“안 그래도 구두 장군이 노망이 났는지 이 부근이 엉망이 돼서 골치 아팠거든. 그런데 그런 놈까지 나타나면 우리 용마님 자라기가 힘들어져. 그래서 그 전에 정리를 하려고 했었지.”

용마는 자기 얘기가 나오자 커다란 눈망울을 깜빡거렸다.

“교위님.”

“응?”

“그 뱀 새끼 말입니다.”

박서원의 눈이 흉흉하게 빛났다.

“혹시 비늘이 녹색이 도는 회색입니까? 좀 어둡고?”

교위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어? 어떻게 알았어?”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쌍둥이는 박서원의 말을 알아들은 눈치였다. 썰매에서 뽑아 온 횃대에 앉아 있던 작매도 알아들었는지 깍깍 울어 댔다.

뭐야? 나도 알려 줘.

“이래서 뱀 새끼는 안 돼…….”

박서원은 땅을 걷어차며 욕을 읊조렸다.

“그때 새끼 뱀 목을 벴어야 했는데.”

이제 나도 알아들었다.

실컷 날 불러 놓고 이것저것 말을 늘어놓더니, 결국은 혼자서 산함박에 대한 증언을 듣기 위해 새끼 뱀을 찾아갔다던 박서원이다. 그때 만난 새끼 뱀 이야기가 분명하다.

“아는 뱀인가?”

“뭐 좀 알아본다고 찾아갔던 뱀입니다. 아직 어리고 누굴 잡아먹지도 않아서 그냥 보내 줬었는데,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요.”

“항상 예기치 못한 곳에서 그리운 이를 만나게 되는 법이지.”

박서원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눈으로 교위를 보았다. 교위는 껄껄 웃었다.

“이 경우 그리운 이는 아니겠지만.”

성격이 좋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정신이 나갔다고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정신이 나갔다고 하자. 나 빼고 다 미친 곳이다.

쿠르릉…….

“아이고, 또 지랄 났네.”

교위는 한숨을 푹 쉬며 목에 건 피리를 잡았다. 끝에 빨간 표시가 된 피리 말고도 두 개의 피리가 더 있다. 노랗게 표시가 된 것과 하얗게 표시가 된 것.

교위는 그중 빨간 것과 노란 것을 불었다.

“네!”

“네!”

콩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이들이 다가왔다. 팥으로 만든 갑옷을 입은 이들도 옆에 줄을 맞추어 섰다.

“큰 놈이 하나 내려온다!”

“네!”

쿵.

땅이 울렸다.

“지금은 밤도 아닌데 괴물이 나옵니까?!”

“꽝철이 놈의 허물에 영향을 받은 놈이니까! 그걸 먹은 놈들은 다 미쳐 버린다고!”

수수밭에 피해를 미치지 않게 하려는지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달려갔다. 썰매 근처에서 쉬고 있던 불개들은 목줄을 풀기 위해 낑낑거리며 난리가 났다.

“저 개들도 풀어 줘!”

교위가 외쳤다.

“사냥개를 썰매개로 쓰다니, 재주가 좋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왠지 우리가 욕먹는 기분이다. 우린 빌려준다길래 받은 잘못밖에 없는데.

그래도 백성찬의 곁에서 지내던 불개 똘이, 기해가 지상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떠올렸다.

비록 백성찬은 울부짖었지만, 그 불개는 용맹하게 거대 지네를 물어뜯었다. 사냥개는 사냥을 할 때 쓰는 개다.

불과 얼음으로도 해할 수 없는 개는 무엇을 사냥할까?

“컹! 컹컹!”

불개들은 크게 짖으며 병사들과 함께 달려갔다.

멀뚱히 그 모습을 보다가 박서원이 튀어나가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박서원은 능력으로 검을 공중에 띄웠다.

“으, 씨발!”

백주연은 허둥거리며 가방을 뒤졌다.

“미리 꺼내 놓지 그랬냐!”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냐고!!”

백주하는 형제를 그대로 지나쳤다.

“빨리 와!”

지상처럼 건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돌산에서 무엇이 내려오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모래바람이 크게 일어났다. 이곳에 있는 것들은 죄다 크기가 미쳐 날뛴다. 집채만 한 멧돼지 한 마리가 성난 얼굴로 이곳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삑!

병사들의 뒤편에 선 교위가 날카롭게 피리를 불었다.

곡식으로 만든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들은 창과 방패를 들었다. 불개들이 그런 병사들을 지나쳐 달렸다.

불개들이 먼저 멧돼지와 부딪쳤다. 강물처럼 털빛이 새까만 멧돼지는 콧김을 훅훅 불며 귀찮은 불개들을 짓밟으려고 했지만 불개들이 더 빨랐다. 몇 마리는 다리를 물고 늘어졌고, 몇 마리는 어떻게 했는진 몰라도 단숨에 등으로 뛰어올랐다.

“꿰에에에엑!”

멧돼지가 방향을 잃고 달리던 기세가 줄어들었다.

삐익!

교위는 틈을 놓치지 않고 피리를 불었다.

병사들이 창을 던졌다.

거리가 제법 멀었음에도 창은 힘차게 날아갔다.

“꽤액!”

저게 바로 돼지 멱 따는 소리란 거다.

삑!

“다음!”

휘익.

이번에는 활을 들었다. 시위를 당긴 병사들은 교위의 신호에 맞추어 활을 쏘았다. 창도 그렇지만 빗나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멧돼지의 몸에 매달린 불개들을 피해 멧돼지만 골라 맞추었다.

“꽤애애액!”

순식간에 창과 활이 박힌 멧돼지가 발광했다. 매달린 불개들이 버티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잽싸게 몸을 돌려 무사히 착지했다. 보고도 믿지 못할 광경이다. 백성찬은 저런 불개를 애완견 다루듯 한 거야?

박서원은 급하게 달려온 것 치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뒤이어 무슨 꾸러미를 가지고 온 백주연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알 만했다.

“이거 끼어들 틈도 없겠는데.”

초능력자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인간인데 인간이 아닌 것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이들은 훈련받은 병사들이다. 생긴 건 아직 어린애들이지만.

아니, 잠깐.

“저 병사들 자랐지 않아요?”

“응? 어, 그러게.”

백주연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달님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던 병사들이 자랐다. 이제는 고등학생 정도로 되어 보인다.

“다음!”

지시를 하고 있는 교위도 마찬가지다. 어린 티가 남아 있던 목소리가 조금 굵어졌다.

바닥에 떨어지는 멧돼지의 피가 점점 늘어난다. 검은색이 가까운 붉은색이 흙바닥을 적셨다. 이대로라면 순조롭게 잡을 수 있을 터였다.

딸랑.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땡중이다!”

교위가 허둥거리며 외쳤다.

멧돼지는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게 하면서 잘 처리하고 있던 것에 반해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는 반응이 늦었다.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면서도 하늘을 활로 겨누었다. 그 끝에 석장을 쥐고 있는 늙은 중이 나타났다. 장삼을 입고 불경을 읊고 있는 모습만큼은 익히 본 적이 있는 스님의 얼굴이다. 비록 날개가 달려 있고, 두 눈에는 귀기가 서려 있지만. 이건 내가 아는 스님의 모습이 아니지. 약간 만화 같은 데서 자주 나오는 설정 아닌가. 타락한 종교인이나, 신실한 종교인을 흉내 내는 괴물 같은 것.

“허어, 가련한 이들이구나.”

날개 달린 중은 석장을 휘둘렀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걸 느꼈다. 백주연이 나를 붙잡았다.

내가 만든 보호막과 백주하가 만든 보호막이 동시에 펼쳐졌다. 합쳐진 보호막은 내가 평소에 만들던 것보다 훨씬 크기가 컸다. 멀리 떨어져 있는 불개들은 무리지만 근처에 있는 병사들은 충분히 감쌀 수 있는 크기다.

보호막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부딪쳤다. 혼자 만든 게 아니라서 그런지 큰 충격은 없었다.

내가 보호막을 푸는 것과 동시에 백주연이 내게서 손을 뗐다. 이번엔 백주하가 박서원을 붙잡았다. 백주연이 손을 움직였다.

박서원의 붉은 술이 달린 검들이 날아가고, 그 사이로 하얀 술이 달린 단검들이 날아갔다.

합쳐서 총 열 자루의 검이 허공을 수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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