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39. 쟁탈전(1)
보통은 새파란 하늘이 있어야 할 부근에 텁텁한 돌벽이 있었다. 고개를 뒤로 잔뜩 젖혀야 볼 수 있는 하늘이 아니다. 하늘 대신 높은 천장이 있는 곳. 땅 밑의 땅.
여긴 지하국이다.
두 번의 밤을 버드나무 속에서 보냈다. 달님이 걸어 다니는 시간 내내 괴물들의 비명을 들었던 탓인지 피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다들 아무 말 없이 썰매에 앉아 있었다. 욱리는 횃대에 앉아 불안한 눈으로 주위를 경계했다. 이렇게 깊은 곳까지는 저 어린 까치도 와 보지 못했다고 했다.
작매는 꼴에 자기가 나이가 더 많다고 그런 욱리를 제법 살뜰하게 보살폈다. 보통 백주연 졸라서 받아 낸 간식을 나눠 먹는 방식이었지만. 저 두 마리가 있으면 쇼 프로그램 출연도 꿈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백성찬의 추억앨범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어쨌든 우리는 착실하게 나아갔다. 오누이의 부탁도 있고, 신라 출신이라는 점에서 평가가 좀 까였지만 버들의 말도 있었다. 조금 돌아가긴 해도, 산함박의 흔적을 따라가지 않고 수수밭으로 향했다. 강 근처에서 잠깐 끊겼던 뱀의 흔적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버들이 꼬리를 뜯었다고 하더니 어쩐지 조금 홀쭉해 보이는 흔적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거대한 자국이다. 버들은 어떻게 저놈을 물어뜯은 거지? 역시 신라 출신이란…….
아니지. 잠실의 청룡과 비슷한 연배라고 했지 신라 출신이라고 한 건 아니지 않은가? 백제나 고구려 출신일 수도 있지. 혹시 아는가? 당나라 출신일지도 모른다.
그때 불개들의 고삐를 잡고 있던 백주하가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수수밭이다!”
그 말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멀리서 붉은 수수밭이 바다처럼 일렁였다.
* * *
“생각보다 잘 풀리고 있어.”
박서원이 뜬금없이 말했다. 수수밭으로 향하기 전 잠깐 썰매를 멈추고 쉬고 있을 때였다.
백주연은 불개들을 봐주다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나 이거 알아. 그런 말을 하면 이제 앞으로 모든 일이 다 꼬이는 거야.”
딱.
“아야야…….”
“원래는 회장님이 같이 오려고 했었거든요.”
박서원은 손을 내리고 날 흘깃 보며 설명했다.
“그런데 뭐, 자기가 빠질 수 없는 회의가 있다든가, 뭐라나.”
“이래서 사업가는 안 돼.”
“회장님이 살아서 사지 멀쩡하게 돌아오라고 했던 걸 보면 원래 지하국은 이렇게 평화로운 곳이 아니라는 말이거든요.”
“아니, 야. 회장님이 그런 얘길 했다고? 왜 우리한테 얘기 안 했어?!”
“지금 하잖아.”
박서원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게 강물이 오염된 탓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는 모르겠고.”
“그걸 지금 이야기하는 이유는요?”
“버들님이 수수밭을 강조한 이유가 분명 있을 테니까요.”
단순히 수수밭을 강조하기만 했을까. 수수밭에 있는 곡식들이 뱀 잡는 데에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했다. 박서원이 겁을 주는 것치고는 꽤 친절한 지하나라 아닌가.
물론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일도 있다.
도대체 왜 곡식들이 거기서 나오는 거란 말인가?
곡식은 농부들이 열심히 농사를 지어서 수확하는 걸 얘기하지 인간을 돕고 어쩌구 하는 용도가 아니다! 농부에 대한 배려심을 가지라고! 인간을 돕게 하지 말고!
…물론 이쪽 세계는 나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튀어나오는 단어들은 심장에 좋지 않았다.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최소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정신 바짝 차리고. 특히 백주연.”
“맨날 나만 구박하지, 너.”
“네가 타이밍을 못 잡으니까.”
훈련인지 그냥 놀림거리였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백주연은 무사히 내 능력에 적응했다.
광화문에서 불가사리를 가둬 둔 걸 생각하면 잘 쓴다고 생각했는데 박서원의 눈에는 수준 미달이었던 모양이다. 워낙 눈이 까다로운 분이시니.
“다들 머리가 달려 있으니 우리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봅시다.”
충분히 예쁘게 할 수 있을 말일 텐데 저렇게 말하는 것도 참 재주다. 여러 가지로 힘들었을 사정이 있으니 어느 정도 감안해 준다 해도, 쌍둥이의 증언을 들어 보면 그냥 태생이 저 모양인 것 같다.
“생각해 보라고. 오누이까지는 그렇다 치고. 만약 버들님이 우리에게 부탁할 게 없었다거나, 우리가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없었다면 어떻게 됐었을지.”
박서원은 예고 없이 소름 끼치는 말을 했다. 그런 거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아무래도 벌서는 중이었던 모양이고, 불살계까지 받았다 하니 우릴 죽이진 않았겠지만…….”
물론 박서원이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지는 안다. 우리에게 행운이 따랐다는 거겠지.
나는 박서원의 말을 받았다.
“다리를 건넌 이후는 책임지지 않았겠죠.”
“그런 겁니다. 인간이 아닌 것들의 친절은.”
박서원은 예의 재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겁니다. 야, 너희도 들어. 겉모습에 속지 말고, 항상 의심하라고.”
겉모습이라.
그런 말을 하면 ‘드라마’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무슨 사정으로, 어떤 원리로 이 세계와 정해영이 쳐 보던 드라마가 이어졌는진 모르겠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정해영의 ‘내 새끼’ 박서원은 최후의 서울 멸망까지는 도달한다. 16화에 죽든 말든 알 게 뭔가. 어쨌든 15화까지는 살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최소한 박서원은 산다.
“에이, 우리가 이런 일을 하루 이틀 하나.”
“경력도 짧은 게.”
“너 진짜 이상한 데서 지기 싫어한다? 너도 네 성격 이상한 거 알지?”
나머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나는 그 드라마 등장인물도 아닌데. 어차피 지금쯤 정해영이 봤던 그 드라마와 내용도 많이 달라졌겠지.
쌍둥이의 말에 박서원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살짝 어깨를 긴장하고 이어질 충격을 대비하고 있는 쌍둥이를 보았다. 저럴 거면서 왜 굳이 박서원을 긁는 건지. 취향은 존중해 줘야겠지.
그러나 박서원은 쌍둥이의 기대대로 돌멩이로 머리를 후려치진 않았다. 쌍둥이가 박서원의 눈치를 보았다. 나도 박서원을 보았다. 가만히 있을 박서원이 아닌데?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어허!”
“어허!”
“어허!”
수수밭이 있는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뜩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다.
창, 검, 방패, 활. 다양한 무기를 든 무리가 열을 맞추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갑옷을 입고 각반을 착용하고 있다. 조선 시대의 군인들이 쓰는 것과 비슷하게 생긴 전립의 꼭대기에는 붉은 털 장식이 흔들렸다.
“정체를!”
“밝혀라!”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거리가 되자 병사들은 멈추어서 무기를 겨누었다. 대장으로 보이는 이는 없었고 다들 한 마디씩 주거니 받거니 하며 고함쳤다.
“너희는!”
“누구냐!”
거리가 가까워지자 위화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멋스럽게 수염을 기르고 있는 것과 달리 하나같이 얼굴이 앳되었다. 아무리 잘 쳐줘도 달님과 비슷한 또래로 보인다.
물론 인간이 아닌 것들을 보이는 거로 나이를 추정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그러나…….
입고 있는 갑옷들이 하나같이 콩이나 팥 같은 곡식을 꿰어 만든 것이라면 말이 다르지.
버들은 수수밭의 곡식들이라는 말을 했다.
분명 이들을 말하는 거겠지.
일행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들에게서 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 * *
“지상에서 왔다고?”
가장 화려한 모자 장식을 한 아이가 뒤늦게 수수밭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이쪽도 어린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멋진 수염을 가지고 있다. 사극에서나 보았던 수염이다.
“네, 교위님!”
“네, 교위님!”
“네, 교위님!”
“그래, 가 봐.”
교위는 뒷짐을 진 채 이쪽으로 살랑살랑 걸어왔다. 교위의 갑옷은 붉은 팥을 꿰어 만들었다. 목에는 손가락 길이만 한 피리 여러 개를 줄에 달아 매달고 있었다.
“지상에서 왔다고?”
교위는 거드름을 피우며 물었다. 이곳 곡식들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는군.
“그렇습니다.”
눈치를 보다가 내가 나섰다. 이 인간들이 제대로 사람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이 생각, 예전에도 했던 것 같은데.
“지상, 지상이라……. 신기한 곳에서 왔구나!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교위가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모자 아래로 콩을 꿴 갓끈이 흔들렸다.
“어디로 내려온 거지? 아직 우리 장군님은 소식이 없으신데.”
교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지, 혹시 지상에서 우리 장군님 소식을 듣진 못했어?”
“잘 모르겠습니다만…….”
장군은 무슨 얼어 죽을. 박물관에서의 안 좋은 추억이 잠깐 떠올랐다.
“으응, 아직 자라지 않으셨을 수도 있지……. 그래서, 이곳에는 무슨 일이라고?”
“수수를 얻으러 왔습니다.”
“수수?”
교위는 어깨너머로 흔들거리는 붉은 수수를 보았다. 수확할 때가 다 되었다. 실제로 어린 병사들이 수수를 베고 있었다.
“지상 인간이 여기 수수를 가져가서 뭐에 쓰려고?”
“저희가 쓰는 게 아니라, 부탁을 받았습니다.”
“아, 알겠다.”
교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에 걸고 있는 피리 중 아랫부분에 빨간색으로 표시가 되어 있는 것을 불었다.
휘익, 하고 높은 피리 소리가 들리자 팥으로 만든 병사들이 다가왔다.
“아랫목의 오누이 이야기지? 서책에서 읽은 기억이 있어.”
병사들은 열을 맞추어 교위 앞에 섰다.
“옛날 기록인데 아직 오누이가 있나 보구나! 아니지, 낮과 밤이 오누이 덕분에 있는 거랬던가?”
교위는 혼자 중얼거리며 알아서 납득했다.
“이거 참, 기록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나도 힘들다니까.”
“저기.”
결국 못 참고 교위를 불렀다.
“수수를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아차, 그렇지, 그 얘기 하고 있었지. 그래, 이 녀석들이 도와줄 거야. 얼마나 필요한데? 저 썰매를 가득 채워 줘?”
“아뇨.”
그럼 우리가 탈 자리가 없어진다. 나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하나면 됩니다. 뿌리가 멀쩡하기만 하면 되거든요.”
“그래? 너희, 다시 가서 연습해.”
교위는 손을 휘휘 저었다.
병사들은 우렁차게 대답하더니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흩어졌다. 병사들은 수수밭 근처에서 손에 쥐고 있는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수수대나 짚을 엮어 만든 거대한 허수아비를 찌르는 이들도 있었다. 어린 외관과 어울려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렇지만 무기를 휘두르는 폼이 예사롭지 않다. 앳된 얼굴에 달린 수염만큼이나 괴이쩍은 움직임이다. 창끝에 귀기가 서려 있다거나, 검을 쥐고서 달음박질을 했을 뿐인데 저 멀리 가 있다.
밤이면 괴물들이 가득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이 허허벌판에 있는 병사들이다. 당연히 평범할 리가 없다.
“교위님?”
“응?”
황량한 지하국의 땅과 수수밭. 병사들. 어느 하나도 다른 것들과 어울리는 것이 없다. 보통 영문 모를 것들은 골치 아픈 일을 부르곤 했다. 버들이 의미심장하게 덧붙인 말이 자꾸 머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교위가 말한 장군도 마찬가지다. 장군이라……. 좋지 못한 추억이 있는 명칭이지만 세상에 장군이 꼭 그거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지하국에도 장군이 하나 있다고 들었다. 기와집에 사는 구두 장군.
하지만 이 교위가 말하는 장군이 그 장군 같지는 않고.
“여기서 뭘 하시고 계시는 겁니까?”
그래서 물었다. 한 번 사는 인생, 질러야지. 박서원이 여기까지 오면서 잘 풀렸다고 했으니까 이번에도 잘 풀렸으면 좋겠다.
교위는 수염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좋아, 여기까진 괜찮다.
“우리 장군님이 타실 말을 기르는 게 주요 임무고……. 장군님이 우릴 부르실 때를 대비해서 훈련 중인 건데.”
말끝이 흐려졌다.
이건 좋지 않은 징조다.
“웬 개떡 같은 뱀이 우리 귀염둥이 망아지의 발목을 물었지 뭐야!”
버들이 뭐랬더라? 뱀 잡는 거 도와준다고? 살짝 비웃으면서 얘기하길래 마음에 걸렸었는데.
교위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그래서 그놈 잡아서 술이나 담가 먹으려고 훈련 내용을 바꿨지.”
신라 출신이라 욕해서 죄송합니다, 버들님. 그래. 청룡과 비슷한 연배라고 해도 꼭 신라 출신이 아닐 수도 있지.
버들님이 고구려의 기상을 이어받았을 수도 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