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38. 물속의 뱀 꼬리(4)
아침.
혹은 떠오르는 태양에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권은 많다. 그런 거창한 단어가 아니더라도 하루의 시작은 아침이다. 시작하기 좋은 시간이다. 등교하거나, 출근하거나.
혹은 길을 나서거나.
괴물들이 울부짖는 밤이 끝나고, 해님이 집 밖으로 나올 시간이 되자 우린 뭉그적거리지 않고 바로 출발 준비를 했다.
공주는 아쉬운 얼굴로 불개들에게 하나하나 작별인사를 했다.
“날 데려왔던 아이는 흙으로 돌아갔지만 너흰 언제나 날 좋아해 주는구나.”
우수에 찬 얼굴이 제법 공주처럼 보인다. 공주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공주라는 느낌은 없었잖아. 이제 와서 공주처럼 말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 저쪽도 보기보다 나이가 많을 테니 노인공경이라 생각하자. 옛 추억에 잠겨 있는 어르신을 기다리는 것쯤은 장유유서에 입각하여 충분히 할 수 있다.
“돌아올 때도 꼭 얼굴 보여 줘? 기다리고 있을게.”
불개를 끌어안고 온갖 신파를 찍던 공주는 코를 훌쩍이며 몸을 일으켰다.
“너희들은…….”
공주는 입을 꾹 다물고 품에서 낡은 주머니를 꺼내 썰매에 묶었다. 여전히 우수에 차 있는 얼굴이다.
“그건 뭔가요, 공주님?”
강물에 들락거리다가 공주와 제법 친해진 백주연이 물었다.
“이거?”
공주는 주머니를 살짝 열어서 안에 든 걸 보여 주었다. 낡은 금화가 네 개 들어 있었다. 금화에는 처음 보는 문양이 있었다.
“너희 노잣돈이야.”
“……네?”
“재밌는 걸 보여 줘서 고마워. 실컷 웃었어. 모처럼 인간을 봐서 좋기도 했구…….”
공주는 다시 주머니를 꽉 묶었다.
“여기서는 죽은 뒤에 7일마다 기도를 해 주면 좋은 곳으로 간다며? 그런 거 해 본 적 없지만, 열심히 해 줄게.”
공주는 눈물을 글썽이며 얘기했다. 49재 이야기인가? 그럼 노잣돈에서 느껴지는 오싹함도 착각이 아니군.
버들은 작게 웃었다.
“콩이야, 여기는 차사들이 오지 못해서 이곳에서 죽은 인간들은 구천을 떠돌게 된단다.”
한술 더 뜬다.
“그러니 노잣돈을 주는 건 돈 낭비하는 거란다.”
“큼, 크흠.”
백주연이 입을 여는 순간에 백주하가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 찔렀다. 백주연이 급하게 헛기침을 하는 동안 공주는 해맑게 얘기했다.
“아이, 그래도 어떻게 빈손으로 보내.”
그런 배려는 필요 없다.
아니, 애초에 배려도 아니지. 죽지도 않은 인간을 죽은 사람 취급하는데 어떻게 배려가 될 수 있는가. 다른 사람이 그랬더라면 온갖 욕설이 튀어나갔을 것이다.
공주는 눈물이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보았다.
“버들님.”
노잣돈이고 뭐고 박서원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버들을 불렀다.
“약속하신 걸 주시지 않겠습니까.”
버들은 싱긋 웃었다.
“물론이지요. 그래도 약속을 어기진 않아요. 지금도 열심히 지키고 있는데.”
버들은 집 앞에 있는 장승을 잠깐 보았다.
“콩이야, 어제 내가 만들어 준 건?”
“여기 있어!”
눈물이 그렁그렁하던 공주는 금방 슬픔을 잊고 활짝 웃었다.
공주는 발치에 내려놨던 보자기를 들어 펼쳤다. 버들잎을 꾹꾹 뭉쳐 색실로 묶어 만든 공 몇 개가 그 속에 있었다. 공 하나하나 크기가 제각각이었지만 제일 작은 것도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였다.
버들은 그중에서 제일 작은 것을 하나 꺼냈다.
“인간들은 이상하게 눈으로 보는 것만 믿더라고요. 그러니 직접 보여 주는 수밖에 없지요.”
목소리는 다정하지만 두 눈은 여전히 서늘하다. 누군가를 비웃고 있는 것도 같았다. 버들은 눈을 한 번 깜빡이는 거로 표정을 지운 다음 잡은 공을 바닥에 묻었다. 묻은 자리가 흠뻑 젖도록 물을 부었다.
“버드나무라고 해서 다 같은 버드나무가 아닌데. 멍청하고 귀여운 인간들.”
젖은 자리에서 새싹 하나가 삐죽 튀어나왔다.
새싹은 쑥쑥 자랐고 금방 작은 나무가 되었다. 성장은 멈추지 않았고, 작은 나무는 점점 커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가지를 길게 드리운 커다란 버드나무가 되었다. 기이할 정도로 줄기가 굵은 나무였다. 어찌나 굵은지, 문이 달려 있었다.
“인간 남자 넷이니 조금 좁을 수도 있겠지만 이게 한계이니 그 점은 알아서 해요.”
버들은 불친절한 부동산 업자처럼 말했다.
이래서 간이 집이었군. 나무 속에서 보내는 하룻밤이라. 괴물이 득실득실한 지하국이 아니었다면 꽤 운치가 있었을 것이다.
버드나무는 바깥보다 안이 더 넓거나 하는 재주는 없었기 때문에 내부의 넓이에 맞추어 줄기가 정직하게 굵었다. 아무리 봐도 국내산 버드나무는 아닌 것 같지만 신경 쓰지 말자.
부동산 업자의 뒤를 이어, 깐깐한 세입자에 빙의한 백주연은 꼼꼼하게 확인했다.
“불개들은 어떻게 합니까?”
“나무 아래라면 보호를 받으니 괜찮아요. 불개들은 영리하니 벗어나지 않을 테고. 하지만 인간들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밤이 오면 나무 속에 있으세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썰매를 점검했다. 까치가 앉을 횃대도 보강했다. 문이 달린 버드나무 아래에서 그러고 있으니 한국 드라마보다는 서양 영화에서 나올 법한 장면을 보고 있는 거 같았다. 하긴, 금발의 공주님이 지하국에 있는 마당에 국적을 따져서 뭐 하나. 그러려니 해야지.
보드라운 보자기에 감싼 버드나무 공을 잘 챙겨 두고, 이젠 정말로 출발할 때다.
“공주님.”
박서원이 공주를 부르지 않았다면.
“응?”
“하나 여쭤봐도 될까요?”
그러나 박서원의 눈은 버들을 향해 있었다. 실질적으로 버들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다. 공주에게 물어도 되는지. 버들은 잠깐 박서원을 물끄러미 보더니 곧 못 본 척했다.
공주는 머리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눈치채지 못한 채 되물었다.
“뭐가 궁금해?”
“그 검은 뱀이 이곳을 지나간 뒤로 소식을 들은 적이 있습니까?”
“흐응……. 딱히 모르겠는데.”
공주는 고개를 좌우로 까딱까딱 움직였다.
“만약 걔가 언니를 피해서 강 하류를 건너서 돌아갔다면 난 모르지. 그치만 아랫목에서 소리가 들리진 않았으니까 아직 위에 있지 않을까? 아니면 장군님이 뭔가 손을 썼을까?”
“그 뱀은.”
가만히 있던 버들이 입을 열었다.
“먹은 걸 제대로 소화하지 못할 만큼 비대해져 있었어요. 그저 잡아먹기만 해서, 톡 찌르면 펑 하고 터졌을 텐데…….”
과거형이다. 보통 이러면 뒤에 이어지는 말은 달갑지 않은 편이다.
“그런 놈을 내가 찢어서 구멍을 내줬으니, 잘 풀렸다면 다시 홀쭉해졌을 거고.”
“……안 풀렸다면요?”
“소화하기 딱 알맞게 되었겠지요.”
박서원이 예전에 비슷한 소리를 했던 것 같다.
‘소화가 다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버들은 저 멀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지하국의 저편을 보았다.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있는 걸까.
“해님과 달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면 수수밭으로 갈 거지요? 그리로 가세요.”
버들은 손을 뻗었다. 불개 머리에 앉아 있던 욱리가 퍼드득 날아서 버들의 손에 앉았다.
“길은 이 아이에게 말했으니 따라가세요. 수수밭에는 곡식들이 있는데, 뱀이 돌산으로 들어갔다면 그들이 봤을 거예요.”
버들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혹시 알아요? 뱀 잡는 데에 그들이 도와줄지.”
* * *
불개가 달릴 때마다 썰매에 매달린 낡은 금화 주머니가 짤랑거렸다.
노잣돈 소리는 나만 신경 썼는지 쌍둥이나 박서원은 짜증 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히려 횃대에 앉아 있던 작매가 안절부절못하더니 인간으로 둔갑해서 백주연의 어깨에 올라탔다.
“저거, 그대로 둬도 돼?”
“응? 어떤 거?”
“저거!”
작매는 야무지게 백주연의 머리를 잡으며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그 서양 공주는 무슨 정신머리야?! 산 자에게 노잣돈을 주다니! 이래서 서쪽에서 온 이들은 안 돼! 버릇이 없어!”
백주연은 손을 뻗어 작매의 머리를 도닥였다.
“아깐 가만히 있더니 왜 이제 그래?”
“그거야 그분이 시퍼렇게 눈 뜨고 있는데 어떻게 말해!”
“내가 대머리가 되면 그건 반은 박서원 탓이고 반은 작매님 탓이야.”
“무슨 소리야?”
작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나 배웠거든! 대머리 인간은 유전이랬어! 조상 중에 대머리가 있으면 후손도 대머리가 된다고.”
마침내 까치가 유전학에 대해 배우는 날이 도래했다. 백주연은 인상을 팍 썼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일단 우리 집안에 대머리는 없었거든? 그러니까 내가 대머리가 된다면 다 이렇게 내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작매님 탓이지.”
“음…… 만약 정말 대머리가 된다면 딱히 해 줄 건 없구나.”
“아니, 이럴 땐 끝내주는 성능의 발모제가 있다고 할 타이밍이지. 영물들한테는 그런 거 없어?”
작매가 키들키들 웃었다.
“그런 게 있었다면 여우가 인간들에게 팔았겠지.”
전자기기 파는 회사가 갑작스레 발모제를 팔아도 이상하지 않나. 물론 작매는 그런 인간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버들과 있는 동안은 이상하게 긴장하고 있던 작매는 이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얼굴이었다. 거기서는 인간으로 둔갑하지도 않고 있어서 가까이 가지도 못했다.
짤랑짤랑.
“어쨌든! 그 여자는 정신이 나갔어!”
금화 주머니가 흔들리는 소리에 작매가 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가방을 뒤지고 있던 백주연은 작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보지 못하고 물었다.
“누구, 버들님?”
“무, 무, 무슨 큰일 날 소리!”
작매가 화들짝 놀랐다. 하마터면 백주연의 어깨에서 굴러떨어질 뻔해서 잠깐 썰매가 비틀거렸다.
백주연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작매님, 날개를 가지고 있는 건 알겠는데 달리는 썰매에서는 뛰어내리지 말자, 우리. 알았지?”
“네놈이 큰일 날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작매는 되레 화를 냈다.
이쯤 되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버들님이 어떤 분이시길래 그래요?”
“그!”
작매는 입을 뻐끔거렸다.
“그, 그으…….”
“왜요?”
구석에서 눈을 감고 있던 박서원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닌 척하더니 다 듣고 있었군.
“말 못 해. 내가 멋대로 얘기하면 경을 칠 거야. 버들님은 다 들으실 테니까.”
작매는 단호하게 말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는 것이 생각났다. 지하국은 낮이지만 딱히 새는 없어 보이고……. 도대체 누구길래 그래?
“그렇게 대단한 분이야?”
“벌을 받는 중이라곤 들었는데 여기서 마주칠지는 몰랐지……. 이름도 다른 걸 쓰시잖아. 인간을 썩 좋아하시는 분이 아닌데 옆에 있는 그 공주 때문에 많이 유해지신 걸 거야.”
작매는 입을 벌려 백주연이 건네는 고구마말랭이를 받아먹었다.
“그 완두콩 공주님? 뭐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나? 잠자리에 예민한 거 말고는 잘 모르겠던데.”
백주하가 작매의 고구마말랭이를 뺏어 먹으며 물었다. 작매는 백주하의 손등을 찰싹 쳤다.
“능력이라기보다는……. 그분은 공주님에 좀 약하거든. 할아버지 말로는 옛날부터 그랬어.”
“뭐야. 좀 변태 같은데.”
“큰일 날 소리 하지 말라니까!”
작매는 고구마말랭이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그냥 귀한 걸 좋아하시는 분이라서 그래. 보통 공주란 건 인간 세상에서 가장 귀한 사람 중 하나니까. 머리카락도 금처럼 반짝반짝하잖아.”
“요즘 같은 시대에도 신분이 중요한 거야?”
“이곳에 오래 계셨으니 지상이 얼마나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시겠지.”
나이 먹고 사고방식을 바꾸기는 힘든 일이지. 이해한다. 다만 작매가 이런 말을 할 정도이니 버들의 나이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 물음에 작매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했다.
“응? 버들님 연세요? 저도 잘 모르지만, 지상의 청룡님과 비슷한 연배일걸요?”
……이 미친 신라인!
그동안 만난 신라인 중에서는 그래도 행동거지가 가장 신사적이었지만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오늘도 그랬다. 신라인들은 상종하는 게 아니라고.
미친 신라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