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38. 물속의 뱀 꼬리(3)
“하, 됐다, 됐어.”
백주연은 세상에 배신당한 얼굴을 했다. 인생 헛살았다며 중얼거리는 꼴이 가당찮다.
보고 있으면 질리지 않긴 했다. 친하게 지내고 싶진 않지만 한 발자국 멀리서 구경하기에는 알맞다.
말은 그렇게 해도 백주연의 손은 박서원을 따라 움직였다. 따라 움직인다고 해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유심히 봐야지 미세한 차이를 알 정도다.
“어, 걸린다.”
“여기서부터 크게.”
강바닥에서 나뭇가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물 위에서는 알 일이 없다. 다만 백주연은 가볍게 눈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훨씬 큰데.”
“여기로 오면서 그놈이 기어간 자국을 봤잖아. 생각보다…… 많이 찢어 놓으신 모양이지만.”
그 말에 버들에게 향하려는 눈을 겨우 돌렸다. 저 여자는 괴물이다. 인간처럼 보이지만 차가운 눈만큼은 숨길 수 없지.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다.
어차피, 뭐. 시선을 돌릴 만한 적당한 구경거리도 있고.
백주연은 박서원을 보며 물었다.
“들 수 있겠어?”
“난 오른쪽. 넌 왼쪽. 잡아서 들어.”
“백련화 때처럼?”
박서원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살짝 들어 볼까.”
백주연이 씩 웃었다. 강물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박서원은 버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다리 위에서 옹기종기 모여서 강물을 바라보는 인간들과는 다르게 버들은 버드나무 아래서 팔자 좋게 공주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버들님.”
버들은 웃는 얼굴로 박서원을 보았다.
“꺼낸 건 어디에 두면 됩니까?”
“여기, 저 버드나무 아래에 두면 되는데……. 다리에 닿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박서원과 백주연이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버들은 손가락을 입에 붙였다가 뗐다.
“힘든가요?”
“무게가 꽤 나가서 움직이는 데 제한이 좀 있습니다. 최대한 노력하겠지만 그게 다리 바로 아래에 있어서 확답은 못 드립니다.”
“흐음, 그럼, 뭐.”
버들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바람이라고는 한 점도 불지 않는데.
“빠지지 않게 조심하고.”
“네?”
쿠르릉…….
천둥소리가 들렸다. 다만 그 소리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아니, 땅도 아니다. 올라선 다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겨우 중심을 잡았다. 다리 가장자리에 서 있던 백주연이 앞으로 기우는 걸 박서원이 겨우 뒷덜미를 잡아챘다.
돌다리 가운데가 위로 불쑥 솟았다가 꺼졌다. 억지로 서 있는 것보단 차라리 몸을 낮추고 있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돌다리가 다시 꿈틀거리자 버티지 않고 바로 몸을 낮추었다. 박서원과 백주하도 그대로 무릎을 굽혔다. 박서원에게 뒷덜미를 잡혔던 백주연은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었다. 박서원이 옷을 잡아당겼고 백주연은 엉덩방아를 찧었다.
“으악!”
“둔하기는.”
“잡아당긴 게 누군데!”
다리는 말 그대로 꿈틀거렸다. 위로 솟았다가, 아래로 꺼졌다가. 익숙해지고 나자 놀이기구를 타는 기분이었는데, 마찬가지로 익숙해지고 나자 다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약간……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것 같은데.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강을 따라 옆으로 조금씩 이동하는 게 다를 뿐.
지렁이도 가끔 옆으로 움직이고 싶을 때가 있겠지.
쿠르르르…….
다리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방금 누가 무례한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으응? 언니, 저 인간들 위험해 보이는데?!”
“……물에 빠지면 나도 곤란하겠지. 귀찮구나, 인간은.”
다리가 움직이는 게 얌전해졌다.
움직임이 부드러워지자 위에 버티고 있는 건 쉬워졌다. 다리는 조금씩 더 위로 움직였다. 덕분에 다리에 가려져 있던 오염 경계가 제대로 보이게 되었다. 경계면을 보았다.
물 아래서 무언가가 녹고 있었다.
녹고 있다는 말이 정확한지도 모르겠다. 새까만 물이 넘실거리고, 그 아래에 몽글몽글 덩이 진 것들이 물 아래로 굴러다니는 것은 보였다. 그러나 볼 수 있는 것은 그뿐이다.
새까만 강물은 그 이상으로 속을 보여 주지 않았다. 좀 더 위쪽의 강물은 물고기 하나 살지 않을 것 같은, 바닥이 비쳐 보이는 맑은 물인데.
본래 저 새까만 물도 이렇게 맑았을 걸 생각하면 기분이 오싹해졌다.
다리가 멈췄다.
“이 정도면 됐지요?”
“네.”
박서원과 백주연이 다시 자리를 잡았다.
“……보이지 않아도 움직일 수 있는 거예요?”
나뭇가지를 강바닥 아래로 보내 목표의 위치를 확인하고, 크기마저 짐작한다. 다른 능력자들도 할 수 있는 일일까? 정작 박서원을 제외하고는 염력을 쓰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능력 자체는 그리 드문 능력은 아닌데.
“얘가 괜히 11등급이겠어?”
백주하가 박서원의 팔을 흔들었다. 박서원은 인상을 찌푸렸다. 박서원은 손가락을 움직이며 말했다.
“아직 11등급은 아냐.”
“근사치지, 근사치. 눈에 보이지 않아도 거기에 있다는 걸 알면 들 수 있어. 약간, 뭐라고 해야 하지? 보이지 않는 손 같은 거야. 손으로 물건을 잡을 때, 그 물건이 꼭 보여야 하는 건 아니잖아?”
박서원이 수 개씩이나 되는 검들을 마구잡이로 움직였던 걸 생각했다. 그냥 넘어가긴 아쉽지.
“손이 무척 많나 봐요, 박서원 씨.”
“기억상실 설정은 넘어가 주고 있으니 사람 두고 이상한 소리는 하지 맙시다, 정해준 씨.”
“손이 많은데 그 손이 손가락 말고 집게발을 달고 있는 거야.”
백주연이 키득거리며 설명했다.
“많이 들 수는 있는데, 대신 너무 무거운 물건은 못 들어. 적재하중이 있어.”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좀 더 많이 들 수 있긴 한데, 보통은 검이나 리모컨 정도만 들면 되니까.”
“주로 리모컨을 많이 들긴 하지.”
“말이 많아, 백주연.”
“얘네도 같이 떠들었거든?”
백주연은 입을 쭉 내밀고 투덜거렸지만 할 일을 안 하진 않았다. 새까만 강물이 거세게 출렁거렸다.
“정해준 씨도 나와 얘네 능력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세요. 급할 때 계산이 잘못되면 위험하거든요.”
“그거 경험담입니까?”
“당연하죠.”
박서원은 다시 강물에 집중했다. 백주연은 인상을 쓰며 외쳤다.
“무거워!”
“응, 무거울 거야.”
어느새 다리 위로 올라온 공주가 말을 받았다. 손에는 지난밤처럼 버들잎이 가득 담긴 커다란 소쿠리가 있었다.
공주는 버들잎을 한 움큼씩 꺼내서 강물 위에 뿌렸다.
버들잎은 둥실둥실 물 위를 떠다녔다.
백주연은 낚시하는 것처럼 팔을 거칠게 움직였다.
“좋아, 올라온다!”
모습보다는 냄새로 먼저 알아차렸다. 지독한 냄새가 났다. 쓰레기장과 하수구에서 나는 냄새를 합쳐 지독함만 배로 늘린 것 같았다. 까치들과 불개들이 왜 아래쪽에서 강 근처에 다가가지 않으려고 했는지 알았다. 이런 냄새가 계속 난 것이었다면 아주 괴로웠을 것이다.
“……저게 꼬리라고? 부패한 건가?”
그건 꼬리라기보다는 덩어리에 가까웠다.
“아뇨, 그것보단.”
반은 아직 물에 잠겨 있고, 반은 수면 위로 올라왔다. 막 물 밖으로 건져진 덩어리는 새까만 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냥 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진득진득하다. 저 덩어리와 떨어지기 싫다는 듯, 아니면 놓칠 수 없다는 듯이.
“녹은 것, 같은…….”
손이다.
손을 뻗어 그것을 붙잡고 있다. 어린아이의 손, 어른의 손, 혹은 동물의 발. 날개도 언뜻 보였다.
“콩이야.”
버들이 공주를 불렀다.
“읏차.”
공주는 소쿠리의 버들잎을 모두 쏟아부었다.
버들잎들은 천천히 물살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직 새까만 강물에 닿은 버들잎들은 그대로 새까맣게 물들던 이전과는 달리 푸른빛을 간직하고 있었다. 주위의 강물이 오히려 버들잎에 먹히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빠졌던 까만 물이 조금씩 맑아지고 있었다. 그에 덩어리를 붙잡던 손들도 약해지기 시작했다.
“콩이야, 더 가져가서 부으렴.”
“응!”
공주는 바지런히 움직여 버들잎을 강물에 부었다. 박서원과 백주연이 덩어리를 옮기느라 물살이 반쯤 막혔던 탓인지 버들잎은 떠내려가지 못하고 바로 아래에 고여 있었다. 멀리서 보면 물이 아니라 버들잎이 흐르는 강 같을 지경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강 위의 버들잎이 많을수록 박서원과 백주연이 그 덩어리를 옮기는 것이 쉬워진다는 점이다.
“가벼워지고 있어.”
백주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백주하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되물었다.
“가벼워진다고?”
“저 버들잎이 닿을 때마다 가벼워져.”
크기도 점점 줄고 있었다. 뱀이 허물을 벗는 것처럼 검은 것이 벗겨지고 있었다. 보통 허물을 벗으면 더 커지거나 할 텐데, 저 덩어리는 크기가 작아졌다.
공주가 네 번째 소쿠리를 쏟아부을 때쯤, 덩어리는 뭍에 닿았다. 버들이 말한 장소였다.
“수고했어요, 인간들.”
버들은 천천히 그 덩어리에 다가갔다. 버들이 지나갈 때마다 근처의 버드나무가 움찔거리고 땅이 꿈틀거렸다. 버드나무 뿌리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아유, 더러워라.”
버들은 옷소매로 코와 입을 막으며 말했다.
“날 잡아먹으려고 간을 보기에 괘씸해서 혼쭐을 내준 건데. 이렇게 더러운 놈인 줄 알았더라면 쫓아내기만 했을 거야. 괜히 입맛만 버렸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린다.
“덕분에 지은 죄도 없는데 업만 쌓였잖아.”
고운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버들이 한마디씩 할 때마다 버들의 머리카락에서 버들잎이 한 장씩 떨어졌다.
“어찌나 잡아먹었는지 그렇게 정화를 했는데도 원혼이 줄어들지가 않네. 흥, 그러니까 날 한 입이라도 먹으려고 주둥이를 내밀었던 거겠지.”
버들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머리를 휘휘 저었다. 그를 따라서 버드나무 뿌리가 무서운 기세로 뻗어 나와 덩어리를 감쌌다.
공주가 타박타박 뛰어서 버들의 옆에 섰다. 버들은 공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었다.
“옳지, 콩이도 고생했어.”
“이제 강물이 다시 맑아지는 거야?”
“원인을 꺼냈으니 이젠 버들잎을 띄우는 대로 맑아질 거야. 아유, 다시 생각해도 짜증 나네! 이 지긋지긋한 곳을 벗어날 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하필! 그때! 나타나서는!”
버들은 험악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서늘하지만 단아한 인상이었던 미인의 얼굴에 귀기가 서렸다.
“언니, 언니.”
콩이는 난감하게 웃으며 버들을 불렀다. 뭐가 그리 억울한지 발을 동동 굴리던 버들은 겨우 진정했다. 버들이 발로 땅을 걷어찰 때마다 버드나무 뿌리는 으득거리며 덩어리를 죄었다.
“흥.”
버들은 콧방귀를 뀌며 손을 탁탁 털었다.
“자, 인간들. 내 부탁을 들어줬으니 이제 답례를 할 차례군요.”
“그런데, 언니.”
“응?”
“이제 밤이 올 것 같은데.”
“음…….”
버들은 아직 다리 위에 나란히 서 있는 우리를 바라보았다.
“금방 끝낼 수 있는 걸 느긋하게 한 건 인간들이지만…… 그 정도로 매정하진 않으니까요.”
서늘한 얼굴은 말과 다르게 느껴졌지만 힘없는 인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박서원만 목을 떳떳하게 치켜세웠다.
버들과 공주는 강에 버들잎 소쿠리를 몇 번 더 쏟아부은 뒤에야 움직였다. 불개들은 밤 동안 괴물들을 향해 용맹하게 짖은 사냥개라고는 생각도 되지 않을 만큼 순한 얼굴로 우리를 따라왔다.
한결 맑아진 강물이 우리 뒤로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