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
37. 물가의 공주님(3)
평범한 이는 아닐 것으로 생각했지만 이건 너무 규격 외지 않은가. 머리가 아파진다.
정작 그 말을 한 당사자는 태연하게 공주의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다. 얄밉게까지 느껴지는 행동이다.
“언제 봐도 너무 예쁜 색이야.”
“흐으응, 난 언니 색도 너무 좋아. 예뻐.”
“고마워라.”
사이 좋은 자매처럼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건 아무래도 좋은데……. 할 말이 없어서 차만 계속 들이켰다.
“정말, 이렇게 예쁜 아이를 시험하다니. 지상 인간들은 너무 못됐다니까.”
지상 인간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맞아! 언니한테 누명도 씌우고! 정말 못됐어! 못돼먹은 인간들!”
공주의 말에 버들은 눈을 사르르 접으며 웃었다.
“누명은 아니었지만……. 응, 그래도 인간들이 너무한 건 맞지?”
듣는 인간들은 서러워서 살겠나.
백주연이 빈 찻잔을 채웠다. 쪼르륵. 네 명이 동시에 차를 마셨다. 입에 자꾸 버들잎이 들어와서 벌컥벌컥 마실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을 때는 뭐, 서두르지 말고…… 세심한 배려 어쩌고저쩌고 대충 교훈적인 이야기라고 떠들어 댔던 것 같은데 실제로 겪어 보니 교훈은 개뿔. 그냥 화병 나기 딱 좋다. 물은 시원하게 들이켜야지. 뭘 찔끔찔끔 마시고 있냐.
인간들이 뻘쭘한 얼굴로 눈치를 보며 차를 마시고 있는 동안 까치들은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새끼고양이들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맘 편해 보여서 좋겠다. 우리에게는 냉랭한 눈빛을 하는 버들도 까치들에게는 다정했으니까.
공주의 머리카락을 다 정리해 주었는지 까치들에게도 손길을 내어 주던 버들은 드디어 우리를 다시 떠올렸다.
“쉴 곳을 내주지요.”
충격적인 발언을 했던 것 치고는 다소 심드렁한 반응이다. 그동안 나이 먹은 영물들을 보아 왔던 경험에 따르면 저건 그냥 우리에게 큰 기대를 걸지 않고 있는 거다. 그럴 거면 굳이 부탁은 왜?
……성공하든 실패하든 크게 상관없다는 얘기겠지. 오염된 물을 마신 지하국의 괴물들이 난폭해지든 말든 그저 귀찮은 일일 뿐, 곤란한 일은 아니라는 거다. 해님과 달님을 걱정하고 있기야 하지만.
“아까도 말했지만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도 하룻밤은 재워 줄 테니 푹 쉬고 가세요.”
버들은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울타리 너머로 나가지만 않으면 마당까지는 나와도 된답니다. 대신 우리 콩이가 잠귀가 밝으니 조용히 다니고요.”
버들은 은근하게 웃었다. 금발의 공주님 쪽은 좀 더 알기 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주님다운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음흉한 미소를 지은 공주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버들 언니가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다고 생각하지? 분명 내일이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쓰레기를 꺼내겠다고 할걸!”
선언에 가까운 말이었다. 공주가 너무 호언장담했기 때문에 접대용 미소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깍깍깍.”
심지어 새끼 까치마저 비웃고 있었으니까.
쟨 여기 와서 파닥거리고 시끄럽게 우는 것 말고 더 한 게 있나?
“까악?”
내 의심스러운 시선을 눈치챘는지 욱리는 바닥을 종종거리며 걷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모르는 척 눈을 돌렸다.
“당신들은 여기, 작은 방을 쓰면 돼요.”
“이제 어두워졌으니까 밖에 나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버들과 공주는 즐거운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유독 마루가 좁긴 했다. 아마 이 방은 거실 비슷한 곳이겠지. 넓은 마루를 반으로 갈라 벽을 세운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하국의 괴물들이 밤에 나온다고 하니 그것 때문에 일부러 세운 가벽 같았다. 이러면 넓은 마루를 밤에도 방처럼 사용할 수 있으니까.
“저 방에서는 자기 힘들 테니 까치들은 우리와 같이 자자.”
공주가 방싯 웃으며 말하자 욱리는 냉큼 공주의 어깨에 올라탔다. 작매는 어쩐지 버들의 눈치를 보며 공주의 치맛자락을 꾹 잡았다.
우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안내받은 방으로 들어갔다. 버들의 부탁에 대해서도 의논을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저렇게 겁을 주는 지하국의 밤이 궁금했다.
* * *
“무슨 민속촌에 놀러 온 기분이야.”
백주연은 태평하게 말했다.
“어제…… 어제라고 해야 하나? 어제도 그렇고. 한옥 게스트하우스 같은 거도 아니고 이런 완벽한 초가집에서 잘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박서원의 원래 계획에 따르면 본래는 꼬리가 여럿 달린 부회장과 함께 오려고 했었다. 그런데 도저히 부회장이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일이 생겼다나 뭐라나. 불안한 국제 정세가 도움이 됐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길잡이 두 마리에 인간 네 명.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혹시나 해 침낭과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챙겨 왔었다. 그래도 최대한 이곳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자고 했었다.
“편하게 잘 수 있는 건 좋지.”
“그건 그런데……. 솔직히 체감상으로는 몇 시간 안 지났잖아? 밤이라는 기분이 영 안 드는데.”
“그렇긴 하지만…….”
“도대체 여기 시간은 어떻게 흐르는 거야?”
백주연은 휴대폰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폰 시계는 여전히 엉망이었다.
“돌아가면 막…… 시간이 엄청나게 흘러 있거나 하는 거 아냐?”
“그거 막으려고 길잡이가 있는 거라잖아.”
“해님과 달님네 집에서 여기까지 오는 게 체감상 서너 시간 정도 아니었어? 너무 종잡을 수가 없어서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겠어. 시간이 그렇게 흐르는 게 가능한 거야?”
혼란스러운 얼굴이다. 그에 반해 백주하는 현명하게 대답했다.
“그런 거 머리로 생각하면 지는 거야. 마음으로 느껴.”
현명한 건가? 백주연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내가 저런 놈을 뒷바라지해서 대학에 보냈다니.”
회한에 가득 찬 발언이었다.
지하국의 시간에 대해 잠깐 이야기했다가 주제는 버들의 부탁으로 옮겨 갔다. 박서원은 태연하게 말했다.
“본인도 아니고 떨어진 꼬리에는 관심이 없어.”
너무 태연해서 이쪽도 차분해졌다.
“그렇지.”
“그 물을 마시고 지하 괴물들이 난폭해졌다잖아. 굳이 모험할 필요는 없어.”
박서원은 딱 잘라 말했다.
백주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걸리는 부분은 있다. 나는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근데 그 공주님 되게 확신에 차 있었잖아요. 우리가 어떻게든 그, 쓰레기를 꺼내게 될 거라고.”
“뱀 잡으러 여기까지 온 인간들이니까 그놈과 관련된 거라면 눈 돌아가서 꺼낼 거로 생각한 거 아닐까?”
백주연이 제법 타당한 의견을 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왜 밤을 들먹였겠어요? 분명 뭔가 있으니까 그랬겠죠.”
“하지만 굳이 우리가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없잖아요? 아까 거기에 들어가고 싶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박서원이 툭 내뱉었다.
“…….”
모두 조용해졌다.
백주연은 잠깐 생각하더니 물었다.
“그런데 그거, 우리가 치울 수 있긴 해?”
“쉬운데. 정해준 씨가 보호막을 쳐서 물 아래로 들어간 다음 위치 확인하고, 내 능력으로 끌어 올리면 돼.”
“산소는?”
백주연이 모처럼 생각을 했는지 현실적인 부분을 지적했다. 박서원은 나를 흘깃 보며 말했다. 눈이 슬쩍 접히는 걸 보니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다. 뭐지?
“노력으로 대충 걸러 내면 돼.”
왜 잘 나가다가 또 헛소리하는 거지.
나는 굳이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아닌 척해 봤자 오늘이 인증한 뛰어난 직감은 자기 욕하는 것만큼은 기가 막히게 감지했다.
박서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 능력은 생각의 영향을 많이 받는 거니까요. 무엇을 위험하다고 여기는지에 따라 거를 수 있는 것들이 많아져요.”
박서원이 한훈열의 아래에서 훈련했다는 점을 기억해 냈다.
박서원은 한훈열에게서 능력 제어에 대해 배웠을 테지만, 그건 박서원이 당시 대한민국에서 유일하던 보호 능력자 아래에 있었다는 말이다. 박서원이라면 해외에 보호 능력자가 있으니 돌아다니다가 그중 몇 명은 만나 봤겠지. 내 능력을 훈련시키던 걸 보면 보호 능력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다.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그러니까 충분하죠. 왜요, 들어가게요?”
“아뇨, 그건 아닌데 역시 공주님의 말이 걸려서…….”
똑똑.
때마침 누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렸다. 보통 이럴 때는 인간이 아닌 것이 문 앞에 서 있기 마련이다.
“있지.”
저 공주가 인간인지 인간이 아닌 것인지는 모른다. 둘 중 하나겠지. 지하에 있고, 여러모로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버들과 함께 있는 걸 보면 마찬가지로 인간이 아닐 가능성이 크고.
“저기, 방은 괜찮아?”
“네?”
“잘 때는 불편하면 안 돼.”
공주는 다부진 얼굴로 말했다. 공주의 뒤로 희미하게 웃고 있는 버들이 있었다. 뭔가 유치원생과 보호자 같은 비주얼이네.
“잠은 편하게!”
“그렇다고 하네요.”
버들이 웃었다. 공주에게 허튼짓하면 가만 안 두겠다는 거로 읽히는 건 그저 착각일까?
공주는 손수 이부자리를 꺼냈다. 밤이 찾아온다고는 해도 체감상으로는 별로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이불을 펴 줘 봤자 바로 잘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심각하게 이불을 들여다보는 공주를 향해 뭐라 말하기도 그랬다. 어차피 어두워지면 집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누워 봐!”
공주는 당당하게 명령했다.
“네?”
“누워서 뭐가 결리는 게 없는지 확인하라구.”
공주는 이불을 팡팡 두드렸다.
“사람은 잠을 잘 자야 해. 사람뿐만이 아니라 동물도 잘 자야 하고. 잠을 자야 키가 큰다고.”
이제 키가 클 나이는 아니지만……. 아니지, 아직 크려나.
공주의 말을 듣자 쌍둥이가 박서원을 보며 히죽히죽 웃었다. 공주와 버들이 없었다면 키가 작다고 한바탕 놀렸을 얼굴이다. 박서원은 그런 쌍둥이의 불손한 눈빛을 눈치채고 눈썹을 치켜떴다.
“옛날에 어느 미친놈이 나 자는 곳에 완두콩 하나를 숨겨 놨지 뭐야?”
완두콩? 그거 어디서 들어 본 적 있는 이야기인데.
“내가 불편해서 잠을 제대로 못 잤는데 하는 말이, 뭐? 진짜 공주라면 완두콩이 불편해서 잠을 못 잤을 거라고?”
공주는 구시렁거리며 이부자리를 팡팡 쳤다. 작은 손길이 어찌나 매섭던지 다들 공주의 말에 따라 이불에 한 번씩 누웠다.
“딴 건 몰라도 먹을 거랑 잠자리로 장난치면 안 돼.”
하도 진지한 얼굴로 말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버들이 공주를 콩이라고 부르는지 알게 되었다. 단순하게 완두콩에서 따왔군.
“안 불편해?”
“편합니다.”
쌍둥이가 잽싸게 대답했다.
“공주님, 그럼 어쩌다가 이곳에 오게 된 겁니까?”
“으응?”
공주는 순진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정해영을 오랫동안 보아 왔기 때문에 그런 표정에 속지 않을 정도로 익숙했다.
“아니, 그으…….”
공주라면서 정해영보다는 숙련도가 낮았다. 공주는 금방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안 그래도 잠자리가 불편해서 제대로 못 잤는데, 다음 날 그놈이 일부러 불편한 곳을 내주었다면서…….”
“네.”
“그걸 눈치챈 내가 진정한 공주니 뭐니 하면서 자기와 결혼하자길래…….”
“하자길래?”
“짜증 나서 찌르고 도망쳤어.”
“…….”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그래서 돌아다니다가 강아지를 만났는데, 걔 따라다니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불개는 옛날에도 심심하면 한 번씩 길을 잃나 보다.
“그래서 함부로 사람을 시험하면 안 돼. 알겠어? 다 대가를 받는다니까.”
실제로 대가를 집행한 사람 입에서 저런 말을 하니 안 들을 수가 없었다. 찝찝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기서 버들 언니를 만난 거야.”
“마침 나도 죄를 지어서 그 벌로 버드나무를 가꾸고 있었거든요. 혼자서 외로웠는데 콩이가 와서 살았지 뭐예요?”
버드나무를 가꾸는 게 벌이었다고?
이거 뭐 버드나무니 뭐니 하면서 황량한 대지에 오아시스 같은 푸른 빛을 띠고 있지만, 사실 유배지인 거였냐?
어쩐지 작매가 버들을 무서워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떤 범죄를 저질렀는진 말하지 않았지만 불살계가 세워진 집에 사는 사람이 저지른 짓은 뻔하지 않겠는가.
이거 괴물 피하려다가 더한 괴물 입속으로 기어들어 온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