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37. 물가의 공주님(2)
새하얀 얼굴, 구불거리는 금색 머리카락, 초록색 눈.
동화 속 삽화가 그대로 튀어나온 모습이야 아무래도 좋다. 공주님? 뭐,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세상에 공주님이 어디 한두 명인가. 한 줄로 세우면 지구 한 바퀴는 돌 거다.
그런데 그런 공주가 왜 여기 있는 건데? 국가가 맞지 않잖아. 얼굴만 보면 어디 유럽의 오래된 성에서 무도회라도 열어야 할 것 같다. 그나마 여기가 아시아라서 최후의 양심이랍시고 드레스 대신 낡아 빠진 한복을 입고 있나 본데.
“으응.”
공주의 초록색 눈이 불개들을 향했다.
말이 어눌하게 들렸던 것도 외국인이라선가? 여기에 그런 차이도 있었어? 난쟁이나 목만 남은 서양 괴물은 한국말을 잘만 하더니. 정말 새삼스럽게다.
“강아지들 데려갈 거면 그 썰매는 여기에 놔두고 가.”
공주는 입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버들 언니한테 허락받으면 그때 가져가구.”
욱리는 이곳에 버들님이 있다고 했다. 버드나무가 이렇게 자라 있는 걸 보면 여기가 버들님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름부터가 버들이지 않은가.
버들님은 버들님이고, 해님과 달님 오누이가 얘기한 공주님은 저 여자를 말하는 게 분명하다. 새끼 까치가 모르는 걸 보면 이 공주님은 그동안 꼭꼭 숨어 있었거나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봐도 아시아에서 태어났을 것 같진 않았다.
아니지, 이것도 편견인가? 부모가 자라난 고향을 떠나 동북아시아의 지하에 자리를 잡았을 수도 있지.
……개뿔이.
어쨌든 저 공주님과 버들님은 아는 사이이고, 버들님한테 가자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다. 지하국에는 괴물이 많다길래 준비를 많이 하고 내려왔는데 의외로 별일이 없다. 여기까지는 금방 오기도 했고.
“여기루.”
공주는 익숙하게 버드나무 사이를 헤치고 나갔다.
풍성한 금발이 버드나무 사이에서 흔들리는 모습이 이질적이다. 잠실의 청룡 같은 그런 이질감이 아니라, 한국 드라마에 푸른 눈의 외국인이 찜질방에서 라면과 식혜를 먹고 있는 걸 볼 때의 그런 기분이 느껴졌다.
공주의 목적지까지는 금방이었다. 버드나무 사이로 작은 우물이 하나 보였다. 돌로 만들고, 기와를 얹은 지붕까지 있는 그럴싸한 모습이다. 여자는 우물가에 앉아 있었다.
“언니!”
“어머나.”
소쿠리에 담긴 버드나무 잎을 다듬고 있는 여자가 공주를 반겼다. 여자는 아담한 체구의 공주와는 반대로 키가 크고 늘씬한 미인이었다. 서늘해 보이는 인상과는 달리 공주를 향해 웃는 눈동자는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콩이 왔니?”
뭐라고?
“아유, 머리가 엉망이네. 이따 집에 가서 빗겨 줄까?”
“응!”
금발의 공주는 헤실헤실 웃으며 여자의 주위를 돌았다. 보이지 않는 꼬리가 붕붕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어머, 불개들도 왔네. 아랫목의 오누이는 어쩌구 여기 왔니?”
“언니, 언니. 있지, 저기 저 사람들이 그 커다란 뱀을 잡으러 왔대!”
“그걸? 그건 인간이 잡을 수 있을 만한 놈이…….”
그 말에 공주에게서 떨어지지 않던 여자의 눈이 우리를 향했다. 앞에 서 있던 나와, 쌍둥이, 박서원을 차례로 훑었다.
“흐으응. 이거, 의외로…….”
여자는 싱긋 웃었다. 공주를 볼 때와는 달리 처음 인상대로 서늘한 눈빛이다.
“나는 강을 관리하는 이. 지금은 버들이라고 불리고 있으니 그렇게 부르면 됩니다, 인간들이여.”
물론 까치에게도 인사했다. 역시 공주에게처럼 다정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다. 인간차별인가? 어차피 이쪽도 인간이 아닌 걸 차별하고 있으니 모르는 척하자.
“욱리도 오랜만이구나. 옆에는 전에 말한 사촌 누나니?”
“으, 아, 자, 작매라고 합니다!”
작매는 허둥거리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버들은 그런 작매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다가 다시 우리에게 말했다.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휙휙 바뀌었다. 최소한 저 여자는 지상에서 온 인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불개를 데리고 있는 걸 보면 아랫목 오누이도 당신들을 돕기로 한 것 같구…….”
여자는 바닥에 있는 소쿠리를 챙겨 들었다. 버들잎이 가득 담겨 있다. 제주도에서 영혼 없는 얼굴로 살살이꽃을 다듬던 장규혁이 떠오르는 손길이었다.
버들은 버드나무 사이로 지하국의 천장을 보았다.
“이제 밤이니 집에 가서 마저 얘기할까요? 콩이야, 저기 소쿠리 하나 들고 오렴.”
“응.”
공주는 큼지막한 소쿠리 하나를 들고 버들의 뒤를 따랐다. 버들잎이 가득 차 있는 소쿠리라 무게가 무겁진 않겠지만 자기 상체만 한 소쿠리를 들고 가는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공주님?”
백주하가 손을 내밀었다.
“제가 들어 드릴…….”
“어허!”
버들이 뒤를 돌아보며 큰 소리를 내었다.
“함부로 손대는 게 아닙니다, 인간.”
“아, 네…….”
백주하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거두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공주는 씩씩하게 소쿠리를 껴안은 채 걸었다.
우물가를 벗어나 물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아까 보았던 강이 떠올라 인상을 찌푸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곁에 새까만 강이 흐르고 있다고 하면…… 그건 그것대로 나름의 운치가 있으려나. 기괴한 종류의 운치.
“콩이야, 아래로 다 쏟아붓자. 어떻게 하는진 알지?”
“응!”
그러나 눈앞에 있는 강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기괴한 모습이었다.
작은 돌다리가 있는 것까진 좋았다. 누가 만들었는진 몰라도 어설프게 생긴 돌다리는 잘못하면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생겼지만 또 어떻게 보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견고하게 보이기도 했다. 버드나무가 있는 쪽이 폭이 가장 좁고, 반대편으로 갈수록 점점 넓어졌다. 표면이 둥그스름한 게 다리로서의 편의는 불합격에 가까웠다. 경사가 심하진 않지만 술 마시고 걷다가 강물에 빠지기 좋게 생겼다.
“읏차…….”
버들에게 콩이라고 불리는 공주는 그 다리의 가장자리에 위태롭게 섰다. 반짝이는 머리카락이 사르르 흘러내렸다. 공주는 그대로 소쿠리를 뒤집어 강물에 버들잎을 탈탈 털어 넣었다.
그래, 강물. 새까만 강물.
다리를 기준으로 아래는 아까 봤던 것과 같이 시커먼 물이 콸콸 흐르고 있었고, 위쪽으로는 보기만 해도 청량감이 느껴지는 푸른 물이 가득했다.
버들 또한 들고 온 소쿠리를 뒤집어서 강물에 버들잎을 잔뜩 부었다. 빈 소쿠리를 옆에 놔둔 공주는 버들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강물을 들여다보았다.
“저기, 언니. 역시 이걸로는 무리지 않을까?”
“음……. 역시 콩이 눈에도 그렇게 보이지?”
“슬슬 인정해야 할 것 같아.”
“아유, 그렇지만 나는 들어가서 꺼낼 수가 없는데.”
버들은 팔짱을 끼다가 한쪽 손으로 볼을 감싼 채 심각한 얼굴로 강물을 보았다.
“아니지, 그래. 난 안 되어도…….”
“응?”
버들은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홱 들어서 우리를 보았다. 경험상 인간이 아닌 존재가 저렇게 쳐다볼 때 절대 좋은 일이 생기진 않았다.
“저기, 인간들.”
불안해.
엄청 불안하다.
“길잡이가 있다고는 해도 요 거지 같은 지하에 덥석 내려온 걸 보면 분명 지상에서는 제법 이름을 날리는 인간일 텐데.”
자연스럽게 박서원을 제외한 세 명의 시선이 박서원을 향했다. 박서원이 자신을 보지 못한 건 여기에 거울이 없어서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
왜 다들 인간한테 부탁하지 못해서 난리야.
“불개도 있으니, 오늘 밤은 재워 주도록 하지요. 하지만 강 건너로는 이처럼 지붕 있는 곳이 없답니다.”
버들은 강가의 버드나무처럼 웃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뿌리 자체는 흔들리지 않는다. 강을 건너는 인간을 굽어볼 만큼 커다란 나무 같은.
그런 눈이었다.
“내 부탁을 들어주면, 밤이 되면 몸을 쉴 수 있도록, 이지가 없는 이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부적을 주지요.”
박서원은 머리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물었다.
“강제입니까?”
“그런 몰상식한 성격은 아니랍니다. 능력이 부족하다면 어쩔 수 없죠.”
“……어떤 일인지 들어 보고 결정해도 됩니까?”
“그러든지요. 그런데…….”
버들은 꼬리를 흔들고 있는 불개들을 보더니 물었다.
“지하에서 밤을 보내 봤나요?”
“오누이가 쉬고 가라고 해 주어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아하…….”
버들은 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풋.”
옆에 있는 공주는 좀 더 솔직하게 반응했다. 손바닥으로 입을 막아 웃음을 참은 공주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능력이 안 되어도, 어떻게든 해내는 게 좋을 텐데.”
“콩이야.”
“여기 밤은 정말 시끄럽거든. 나도 처음 왔을 때는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니까?”
“콩이야?”
“으응, 그치만, 언니……. 알았어, 알았다구!”
공주의 말은 불길함만 가증시켰다. 그래서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저희가 어떤 일을 해 주었으면 하십니까?”
“음, 조금 어려울 수도 있는데.”
버들은 버드나무 가지처럼 우아하게 손을 내밀었다. 새하얀 손가락이 강물을 가리켰다. 물론 시꺼먼 쪽이다.
“요기 아래에 들어가서 강물을 오염시키는 쓰레기 좀 꺼내 주지 않겠어요?”
* * *
달님이 집에서 나왔는지 멀리서부터 밤이 보이기 시작했다. 버들은 집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며 다리를 건넜다.
다리 근처에는 마당이 있는 작고 아담한 초가집이 있었다. 목가적인 풍경이다. 울타리에는 문은 없었지만 입구에는 장승이 하나 서 있었다. 다만 새겨진 글씨는 자주 보는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이 아니라 다른 게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不殺戒.
불살계라.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문구 아닌가.
공주는 냉큼 신을 벗어 던지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불개들은 느긋하게 마당에 자리를 잡았다. 괴물이 나온다는데 불개들을 밖에 두는 건 좀 불안했지만 오누이들도 불개들은 풀어서 키웠다. 용맹하다니까 알아서 잘 있겠지.
“들어오세요.”
버들은 공주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살갑게 우리를 맞이하던 오누이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라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말투 자체는 친절하지만 왜, 눈이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아주 열렬히 말하고 있는데, 인간인 이상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실례하겠습니다.”
얌전히 인사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오누이가 살던 곳도 초가집이지만 이쪽이 훨씬 크다.
우리가 머뭇거리며 자리에 앉자, 버들은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지성이 없는 이들이 오염된 강물을 마시고 흉포해지고 있어서 정말 난감하거든요.”
버들은 버들잎을 띄운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우리 앞에도 버들잎을 하나 띄운 찻잔이 놓여 있다. 뭐지? 체하지 말라고?
“아직 저를 무서워할 만큼의 본능은 있어서 다리를 건너진 않지만……. 그것도 얼마 남지 않았죠. 그런데 저는 불살계를 받은 몸이라 살생을 하지 못하거든요.”
울타리 옆에 있는 장승에 불살계가 적혀 있었지. 이 여자의 정체는 뭘까.
“저와 콩이는 괜찮지만, 그놈들이 넘어가면 해님이와 달님이는 위험할 테니까요……. 그 아이들 덕분에 지하에도 낮이 오고, 밤에도 빛이 생겼는데. 다시 깜깜해지면 지상도 난리가 날 거예요. 지하는 지금도 좁으니까.”
가만히 듣고 있으니 조곤조곤한 말투에 가려져 있었지만 숫제 협박이나 다름없다. 박서원의 몸이 삐딱해지기 시작했다. 박서원이 머리가 홱 돌아서 정체도 모르는 존재에게 검을 휘두르지 않을 거란 믿음 정도는 있지만, 괜히 한마디 해서 심기를 거스르는 것도 반갑지는 않다. 백주하와 눈짓을 주고받다가 내가 먼저 나섰다.
“바닥에 있는 게 뭐길래 지하의 괴물들을 흉포하게 만든다는 겁니까? 알고 계시면 버들님께서 꺼내실 수 없습니까?”
버들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어찌나 지독한지 나도 맨몸으로 들어가면 위험해서……. 그렇다고 콩이를 시킬 수 없잖아요?”
차를 홀짝이던 공주가 버들의 말에 헤헤 웃었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이름이……. 됐다. 그게 중요하지는 않지.
“아, 그 아래에 있는데 당신들과 아주 연이 없지는 않은데.”
그때 버들은 의외의 말을 했다.
“당신들이 쫓고 있다는 그 뱀. 그 뱀의 꼬리가 강물 바닥에 있거든요.”
“……네?”
어찌나 놀랐는지 백주연의 목소리가 어긋났다.
“몇 년 전에 그 고얀 놈이 강물을 더럽히길래 꼬리를 찢어발겼답니다. 그게 강으로 떨어질 줄 알았으면 좀 참는 건데.”
버들은 새침한 얼굴로 찻잔을 들어 입술을 가져다 댔다. 따뜻한 차를 한 모금 꼴깍 마시는 일련의 행동은 자연스러웠고, 그래서 더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었다.
누가 뭘 찢어발겼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