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37. 물가의 공주님(1)
“저녁쯤에 도착한댔지 않았어? 더 빨리 온 것 같은데?”
버드나무가 보이자 백주연과 욱리의 되지도 않는 말다툼이 멈췄다. 박서원도 그제야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천장을 봐.”
백주하는 위를 가리켰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햇빛을 머금고 있던 수정이 별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지하국 내부에서도 시간이 동일하게 흐르는 게 아닌가 본데.”
“와, 뭐 이딴 곳이 다 있어?”
백주연의 말에 동의했다. 저쪽에서야 이곳이 드라마였으니 괴상한 설정이 있어도 정해영이 보는 드라마가 다 그렇지, 하고 넘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 쳐도 이 사람들에게 이곳은, 현실이다. 현실인데 이따위 설정이라니.
내가 괜히 미친 세상이라 욕하는 게 아니다.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니까.
“흩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는데.”
백주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잘못하면 여기서 혼자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겠는데.”
“그 전에 먹을 게 없어서 굶어 죽을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은데.”
“흠. 하루 만에?”
“하루 만에.”
신선놀음에 도낏자루가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속담이긴 했지만 여기 얽힌 이야기는 진짜다. 그러니까, 이곳에서는.
이야기 자체는 간단하다. 백발노인 둘이서 바둑을 두고 있길래, 그걸 구경하던 나무꾼이 한참 뒤에 집으로 돌아가자 이미 수십 년이나 지나 있었다는 내용이다.
딱히 교훈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야기지만 그게 실제로 가능한 이야기라면 말이 다르지.
작매가 길잡이, 길잡이 하던 게 어떤 의미였는지 이제야 절실하게 와닿았다.
“알겠냐? 길잡이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길잡이 귀한 줄 알면 잘 좀 챙기라고!”
작매가 작은 주먹으로 가슴을 콩콩 치며 말했다. 백주연은 뻘쭘한 얼굴로 가방 주머니를 뒤져 낱개 포장된 견과류를 작매에게 주었다.
“앗, 호두!”
잊지 않고 사촌 동생에게도 견과류를 물려 주던 작매는 슬쩍 눈치를 보며 물었다.
“고구마말랭이는 없어?”
“당연히 있지.”
백주연은 지퍼백에 담긴 고구마말랭이를 꺼내며 덧붙였다.
“아영 씨가 직접 만든 거라더라.”
“으, 그 여우가?”
“안 먹을 거야?”
작매는 눈을 데굴데굴 굴렀다. 얼굴에 갈등이 스쳤다. 그러나 음식 앞에선 장사 없었다.
“먹을 거야…….”
백주연의 어깨에 목말을 탄 채로 작매는 고구마말랭이를 꿀떡꿀떡 삼켰다. 백주연은 키득키득 웃다가 불개를 완전히 멈추었다. 썰매에서 내리자 푹신푹신한 잔디가 밟혔다. 아까부터 멀리서 보였던 푸른빛은 버드나무뿐만이 아니라 이 잔디 덕분이기도 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버드나무가 한들한들 흔들렸다. 지도에 그려진 건 버드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숲이었다. 엄밀히 따지면 숲이라고 불릴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지만, 커다란 버드나무 군락이 사락사락 흔들리는 건 꽤 멋진 풍경이었다.
“멋진데.”
다들 지금만큼은 순수하게 감탄하고 있지 않은가.
나무와 풀 때문인지 공기마저 청량하다. 백주연은 불개들을 쓰다듬어 주다가 말했다.
“여기까지 오긴 했는데, 이제 어떡해야 하지? 버드…….”
백주하가 팔꿈치로 백주연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백주연은 가까스로 백주하의 눈짓을 알아들었다. 해님과 달님 오누이가 분명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고 했었지.
“드으을님께 인사드려야 하나?”
사락사락.
버드나무 사이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다.
박서원이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능력을 쓰고 있진 않지만, 손가락이 정체불명의 존재의 위치를 빠르게 짚어 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계속 확인하며 쌍둥이가 슬금슬금 위치를 바꾸었다. 지하국에 내려오기 전, 상의한 대로다.
둘 중 어느 쪽이든 내 능력에 익숙해지도록 연습하긴 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까. 쌍둥이는 내 능력을 향해서 쓸모가 많은 능력이라 평했지만, 내가 보기엔 본인들의 능력이 더 쓸모가 많다. 이다혜처럼 몸을 움직여야 하는 능력은 쓰기 힘들지만 그 외의 능력은 쌍둥이 중 한 명의 접촉만으로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다. 그나마 있는 제한은 서로가 시야에 들어올 것.
“하아아지만, 버들님께 인사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이이이?”
백주연이 어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얼씨구, 아주 수상하다고 광고를 하지 그러냐.
쌍둥이의 능력이 능력이니만큼 어느 쪽이 무슨 능력을 사용하든 크게 상관없을 텐데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위치를 정했다.
박서원의 옆에는 백주하가, 내 옆에는 백주연이.
내 의견이 한 톨도 들어가지 않은 건 이제 그러려니 했지만, 의견을 주고받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 정하길래 궁금해서 이유를 물어봤었다.
‘그거야 백주연이 박서원 능력을 나보다 더 잘 써먹으니까.’
백주하는 뭘 당연한 걸 물어보냐는 얼굴로 답했었다.
사락사락.
아,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리가 들리는 게 싫다니까. 이 동네 인간…… 이 아닌 것들은 왜 이런 걸 좋아하는 건지.
다시 생각해 보니 저쪽에서도 인간이 아닌 것들은 소리만 내서 인간을 놀래 주기 좋아했던 것 같다.
“해님과 달님이 이곳으로 가 보랬잖아? 불개들이 쉴 곳도 필요한데.”
“아아아차차, 부, 불개들! 쉬, 쉬어야지, 그럼, 푹 쉬어야지.”
백주하는 자연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백주연 쪽은……. 눈 뜨고 못 봐 주겠군. 백주하는 자신의 형제가 부끄러운 듯 손으로 눈을 덮었다가 말했다.
“작매님, 사촌 동생님이 여기 와 봤다고 하지 않았어?”
“욱리야?”
“까악?”
욱리가 횃대에 앉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계속 달리느라 지쳤는지 바닥에 앉아 쉬던 불개 한 마리가 버드나무를 향해 짖었다.
“컹!”
쿵.
“아얏!”
“…….”
“…….”
분명 누가 넘어졌다. 그것도 꽤 크게 넘어졌다.
“히잉. 아파…….”
뒤이어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칭얼거리는 목소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박서원은 기운 빠진 얼굴로 손을 내렸다. 만에 하나를 위해 긴장을 늦추진 않으려고 했지만, 들리는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어눌한 탓에 살짝 힘이 풀린 건 어쩔 수 없었다.
“크흥.”
꽤 크게 넘어졌는지 아이인지 어른인지 알기 힘든 목소리는 꽤 오래 훌쩍였다. 목소리만 들으면 여자거나 어린아이 같았다.
훌쩍거리는 목소리를 배경으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길잡이인 까치 두 마리야 제외하고, 누군가는 나서야 했다. 해님과 달님의 경고가 있었으니 지하국의 밤을 밖에서 보내고 싶지도 않았고.
박서원과 쌍둥이가 무언의 눈빛으로 싸우더니 날 보았다.
왜?
“…….”
젠장.
나이와 학연과 다수결에서 진 나는 죽을상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백주연이 소리 없이 웃으며 내 팔을 잡았고 백주하가 얄밉게 손을 흔들었다.
“크흠.”
“히잉.”
“저기, 안녕하세요?”
“꺄악!”
길게 드리워진 버들잎에 가리어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서 들렸으니 바로 저 뒤쪽에 있는 건 분명한데.
“혹시 버들님이십니까?”
“…….”
“저희가 강을 건너야 하는데……. 저기 아래쪽에 사는 오누이가 이곳에 다리가 있다고 알려 주었거든요.”
“어, 으으…….”
버드나무 사이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해, 해님이랑, 달님이?”
“네. 그래서 버들님께 인사드리려고 하는데……. 버들님이십니까?”
“아니, 난 버들님, 아닌데.”
떨리던 목소리가 차츰 진정되었다. 어쩐지 어눌하게 들리는 발음은 여전했지만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를 들으니 어린아이라고 여기기에는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
“버들님을 만나러 왔다구?”
“강을 건너고 싶어서요. 그런데 오누이의 말로는 밤에는 되도록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불개도 달리느라 지쳤으니, 혹시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있는지도 버들님께 여쭙고 싶고요.”
백주연이 옆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렇게 해 줘도 전혀 기쁘지 않다. 그래, 이 멤버에서 예의 바르게 말할 수 있는 착실한 인간은 나밖에 없긴 하다. 이해해 줘야지.
세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박서원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백주하가 인상을 썼지만, 목소리가 다시 들려와서 둘 다 입을 다물었다.
“으응, 강아지…….”
목소리가 고민에 빠졌다.
“너희, 지상의 인간이야?”
“네. 찾는 것이 있어서 이곳까지 왔습니다.”
갑자기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찾는 거? 설마 날 찾아온 거야?!”
“네? 아뇨, 아닙니다.”
해님은 이곳에 공주님이 있다고 했다. 버들님이 아니라면 공주님이겠지. 아니면 어쩔 수 없지만.
“공주님을 찾으러 온 게 아닙니다.”
“그럼?! 지상인이 여기 왜 온 거야!”
공주가 맞긴 한가 보네.
“저희는 강철이를 찾으러 왔습니다.”
“……강철이?”
“네. 2년 전에 여길 지나간 까만 뱀이요.”
사납게 외치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겼다.
“……걜 왜 찾는 건데?”
뾰족하게 날이 서 있는 목소리다. 새까맣게 변한 강물을 떠올렸다. 강가의 버드나무와 초가집.
저 목소리의 주인도 그 뱀에게 무언가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 뱀이.”
천천히 대답하려는데,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
아니, 잠깐만. 지금? 이 순간에? 그동안 괜찮았으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갑자기 숨이 막혀서 그런 건 아니다. 아니, 그 탓도 있긴 하지만……. 분명히 하자. 이건 내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건진 알고 있다.
‘정해준’이 가족을 떠올릴 때마다 느끼는 감정. 영혼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 놈이 겨우 몸 하나 가지고 내 기분까지 움직이려 드는 꼴이 불쾌하다.
아직 제대로 구분할 수 없을 때는 그 기분에 휩쓸려 힘들어하기도 했었다. ‘이곳’의 ‘가족’을 생각하면 슬프다. 그야 그렇겠지. 난데없이 가족이 몰살당한 건데. 그건 이곳이 절대 ‘현실’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 생각은 아직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정해준’의 존재가 확실시되고, ‘정해준’이 느끼는 감정을 구분할 수 있게 된 지금, 이 기분은 부당하다.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 흔들리던 때도 아니고. 지금 내게는 벽이 있다. 이걸 ‘내’ 감정이라 착각해서 흔들리진 않는다.
“으응?”
“…….”
이 새끼는 이제 와서 왜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몸’을 쓰고 있는 건 ‘나’다. 가족을 잃은 슬픔은 나도 이해할 수 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거로 날 흔들려고 하면 안 되지!
설사 이게 ‘정해준’이 원했던 상황이 아니었더라도, 내가 억울함을 느끼는 것에 쓴소리하면 안 된다. 빌어먹을 ‘정해준’.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저기…….”
“그 뱀은.”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자 무슨 착각을 했는지 백주연이 입을 열었다.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겠는데 정정해 주는 건 기억상실이란 컨셉에 맞지 않았다. 별수 없이 그냥 입을 다물고 백주연의 말을 들었다.
“우리 가족을 그놈이 먹었거든요.”
버드나무 뒤에 숨어 있는 공주가 망설이는 기색이 여기까지 느껴졌다.
“으응. 그럼 버들 언니랑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게……. 응, 그래. 그게 나을 것 같다.”
마침내 버드나무 뒤에서 사람이 나왔다. 달님보다 조금 더 큰 아담한 체구의 여성이다. 혈색 좋은 붉은 뺨과 하얀 피부. 얼핏 보면 작은 체구 때문에 어린 소녀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분위기는 어른의 것에 가깝다.
옷은 낡았고, 헤진 곳을 덧대어 기우느라 낡은 치마에는 전혀 엉뚱한 색의 헝겊 조각이 꿰매져 있었다. 머리에 쓰고 있는 두건도 깨끗하지만 낡아 빠졌다.
그래도 그녀는 공주였다. 한눈에 알아봤다.
왜?
굽이치듯 쏟아지는 머리카락은 금을 녹인 색이었고,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은 새순처럼 선명한 초록색이다.
입고 있는 게 낡아 빠진 한복이면 어떤가.
“버들 언니는 저기, 우물가에 있어.”
생긴 게 그야말로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 그 자체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