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27화 (127/202)

# 127

36. 해와 달이 없는 세계(5)

달님은 별빛과 함께 돌아왔다.

시적인 표현이군. 감수성이 풍부한 인간이 된 것 같은 착각도 들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사실에 근거한 말이었다.

“안녕히 주무셨나요?”

방 한쪽에 다닥다닥 붙어 자긴 했지만 그래도 잠은 잔 거다. 새벽 내내 걸었던 게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해님은 방에서 나오는 우릴 보며 방긋 웃으며 마루에서 내려섰다. 발이 바닥을 딛고 서자 어둠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달님이 불개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어서 오세요, 오라버니.”

“잘 잤니?”

밤을 몰고 다니느라 내내 걸어 다녔을 텐데도 달님은 우릴 배웅해야 한다며 부산스럽게 굴었다. 쌍둥이가 그런 달님을 도와 헛간에서 낡은 썰매를 꺼냈다. 썰매보다는 지붕 없는 마차처럼 보이기도 했다. 해님이 불개를 불러 그중 몇 마리에게 안장을 채웠다.

“강물에 들어가지 마세요.”

달님은 졸음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보면 들어가고 싶게 생기진 않았을 거예요.”

달님은 하품을 쩍 했다.

“버드나무가 있는 곳까지는요. 어차피 강을 건너려면 거기에 가셔야 하는데. 다리가 그쪽에 있거든요……. 해님아, 공주님 이야기해 드렸니?”

“네, 오라버니.”

“공주님은 예의 없는 걸 안 좋아하시니까…… 아, 요즘은 좀 유해지셨어요.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죠…….”

말이 점점 느려진다 싶더니 달님은 끝에 가서는 거의 졸면서 말했다. 해님은 그런 오빠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어쨌든 저걸 타고 가시면 돼요! 수수를 꼭 부탁드릴게요! 하나면 돼요!”

“네, 알겠습니다.”

쌍둥이는 수수고 뭐고 더 이상 걷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높이 산 것 같았다. 해님이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만들어 썰매에 묶은 횃대 위에 앉은 욱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울었다.

“나 이런 거 한번 몰아 보고 싶었어.”

백주연이 고삐를 잡았다.

“운전면허 있어요?”

“너 컨셉 진짜 이상하게 잡은 것 같다…….”

나는 꿋꿋하게 말했다.

“어디서 백조가 모는 마차를 타는 여신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 선배는 잘 몰 수 있을 것 같다고요.”

백주연은 내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백주하에게 말했다.

“야, 백주하.”

“왜.”

“그동안 추억보정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뭐가?”

“쟤 옛날에도 약간 이상한 소리 지껄였지 않냐?”

“……애가 좀 다른 차원에 살던 것 같긴 했었지.”

한마디 보태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처럼 현실적인 애가 또 어디 있다고요. 사람 기억 못 한다고 매도하지 맙시다.”

“…….”

“아, 저건 완전 정해준 같았어.”

“정해준이거든요.”

어쨌든 달님은 졸고 있고, 해님은 방긋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천장을 보았다. 별빛을 머금고 있던 천장은 이제 햇빛을 머금고 하얗게 반짝였다.

이게 새벽이란 말이지.

지하에서 맞이하는 새벽이라. 센티해지기 좋은 시간 아닌가.

* * *

불개는 잘 달렸다. 진짜 잘 달렸다.

탑승감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걷지 않고, 힘도 쓰지 않은 채로 빠르게 갈 수 있다는 점이 어디인가. 거기다가 색다른 경험이기도 하고.

찰칵.

백주연이 달리는 불개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었다. 백주하가 그런 형제를 흘깃 보다가 말했다.

“그거 멍청하게 누구 보여 주고 그러지 마라.”

“아, 당연하지.”

“하긴 어차피 보여 줄 사람도 없겠지만.”

“친구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친구 없는 건 인정하나 보네?”

“여기 있는 애들 다 거기서 거기거든.”

반박하고 싶었지만, 이곳 ‘정해준’의 빈약한 연락처를 생각하면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내가 여기 와서 반년 동안 채워 넣은 연락처가 더 많을 정도였으니.

저쪽에 있을 내 친구들을 떠올랐다. 그 웬수 같은 새끼들이 그리워질 날이 올 줄 알았을까. 2년 동안 반강제로 과대 노릇을 하면서 채워졌던 수백 개의 연락처가 한순간에 쓸모없게 될 줄은 몰랐다. 돌아가 봤자 휴대폰 용량이나 차지하겠지만.

‘정해준’도 나와 같은 대학에 다녔던데, 도대체 대학 다니면서 뭘 했는지 모르겠다. 학점은 또 그럭저럭 잘 받았던데. 그냥 아르바이트만 한 건가.

“하연이가 너희보고 괜히 햇빛 좀 보고 살라고 그러는 게 아니라니까.”

“아씨, 박서원, 너도 똑같잖아.”

“무슨 소리야?”

박서원은 질색하며 말했다. 진심으로 싫어하는 기색이었다.

“난 일하느라 바쁜 거고 너넨 먹고 싸느라 바빴잖아.”

“와, 누가 보면 우린 일 안 하는 줄 알겠다.”

입이 비뚤어져도 말은 바로 하라고 했다. 그건 반년 동안 백조로 살았던 인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말이다.

“맞잖아요? 최소 반년은 놀았잖아요.”

겸사겸사 개인적인 호기심도 좀 풀고.

“근데, 선배.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백조로 있는 동안 화장실 문제는 어떻게 했어요?”

“야, 너 저번에 옷도 묻더니 이상한 것만 묻는다?”

백주연이 어이없는 얼굴로 말했다. 나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제가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성격이 더 이상해진 것 같은데.”

“기억상실이라고 지껄이는 놈이 그럼 제정신이겠냐.”

백주하가 콧방귀를 꼈다.

썰매에 탄 인간들이 뭐라고 떠들던 불개는 쉬지 않고 달렸다. 산함박의 흔적은 비스듬하게 이어졌다.

한참 달리던 중 백주연은 고삐를 당겨 불개들의 속도를 늦추었다. 썰매 한구석에서 몸을 말고 꾸벅꾸벅 졸고 있던 박서원이 눈을 떴다.

“왜?”

“아니, 물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강이 있댔잖아. 그 소리겠지.”

“야, 자지 말고 일어나 봐.”

백주연은 다리로 박서원을 툭툭 건드렸다. 박서원은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왜.”

“너 저게 강으로 보여?”

“물이 흐르니까 강은 강이겠지.”

“좀 보고 말하라니까?”

“뭐가 흐르든 강이라고 했으니 강이겠지.”

백주하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백주연. 네가 말 같지도 않은 소릴 내뱉어도 입으로 하는 소리라 말이라고 들어주는 것처럼.”

“말 다 했냐, 백주하?”

쌍둥이가 다시 투덕거리기 시작했다. 질리지도 않나.

두 사람을 한심스럽게 보다가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속도는 느려졌어도 불개가 계속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저 멀리 보이는 강은 점점 다가왔다.

물이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강은 강이었다.

그 물이 시꺼멓다는 점에서는 강이라 부르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지하국에도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진득진득한 타르처럼 보이는 강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들어가면 곧바로 죽을 것처럼 생겼다.

“그놈이 강을 건넜나 보네.”

백주연은 불개들이 강과 나란히 달리게 했다. 새하얗게 반짝이는 수정 아래서도 강물은 빛 하나 없이 저들끼리 뭉쳐 둔하게 흘렀다.

“아니, 이쪽 시간으로 2년 전이라며? 그때 강을 건넌 게 아직도 이 모양이야?”

횃대에 앉아 자고 있던 두 까치가 깨어나 불만스럽게 울었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자고 재촉하는 목소리였다. 말라비틀어진 흙에서도 냄새를 맡고 괴로워했으니 시커먼 물에서는 얼마나 냄새가 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강을 내다보던 백주하가 백주연에게 말했다.

“더 떨어져서 달려. 불개들도 힘들어 보이니까.”

“오케이.”

달님의 충고는 쓸모없었다. 아무리 강을 건너야 한다지만 저런 곳을 누가 들어가겠다고 생각하겠는가.

“저기에 누가 들어가겠어.”

같은 생각을 했는지 백주하가 중얼거렸다.

“버드나무가 있는 곳에 다리가 있다고 했지?”

“그냥 능력으로 띄워서 가도 되지 않아? 굳이 다리를 건너야 해?”

“밤에 괴물이 나온다잖아. 괜히 거기서 하룻밤 자라고 했겠어? 지하국의 요괴는 어느 정도 수준인지 모르니까 피할 수 있다면 피하는 게 좋지.”

여의도 공원을 피로 물들였던 괴조를 떠올렸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보호막을 일회용으로 만들었던 놈이다.

“그 새 같은 게 잔뜩 있다면 힘들어요.”

“정해준 씨 말이 맞아.”

어쩐 일인지 박서원이 내 말에 동의해 줬다.

“내가 그 새 가족을 상대했던 것도 협소한 동굴이라서 가능했던 거지, 이런 곳이라면 무리야.”

백주연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긴, 뭐가 나올지는 모르니까.”

강에서 떨어지자 불개들의 발걸음도 가벼워졌다.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그런데 공주님이라. 이런 곳에 공주님? 까치님, 혹시 짐작 가는 건 없어?”

백주연은 횃대의 까치에게 물었다.

“까악.”

몸집이 큰 까치가 작은 까치를 향해 울었다.

“까아아악.”

몸집이 작은 쪽이 답했다.

“까아악.”

“깍. 까악.”

“…….”

박서원은 울기 시작하는 까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다시 썰매 구석에 몸을 말았다. 백주연이 개탄스러운 얼굴로 까치에게 말했다.

“아니, 둘이서 울기만 하면 어떡해? 적어도 한 명은 둔갑하라고!”

“까아아아악!!!”

욱리가 길게 울었다. 작매는 살짝 날아올라 백주연의 등에 매달렸다. 성인 남성 넷이 앉아있는 썰매에는 자리가 없긴 했다.

“욱리는 오누이가 있는 곳에서 멀리 벗어난 적이 없대! 버드나무 있는 곳까지는 가 봤는데 버들님만 보고 돌아와서 공주님은 모르겠다는데?”

“버들님?”

“그 버들님이 공주님은 아니고?”

작매는 반쯤 백주연에게 업힌 채로 대답했다.

“버들님은 버드나무지 공주님은 아니래.”

더 난해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어디냐. 그리스에는 나무요정이 있다잖아. 그런 건가?”

“까아아악!”

“버들님은 그런 도깨비 같은 게 아니라는데?”

“아니, 도깨비라는 소리가 아니라…….”

백주연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버드나무라며?”

작매는 백주연의 등에 매달린 채로 이마를 좁혔다.

“까악! 깍!”

“버드나무와 공주님은 다른 사람이라는 말이지?”

“까악!”

“버드나무가 그러니까 도대체 뭔데? 신목 같은 거야?”

“까아아아악!!!!”

백주연이 한마디 할 때마다 욱리가 날카롭게 고함을 내질렀다. 작매가 중간에 끼어서 말을 전달해 주느라 바빴다. 새끼 까치가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한다는 건 알겠는데 그냥 그럴 거면 인간으로 둔갑해 줬으면 좋겠다. 정신 사납다. 아침에 가끔 마주쳤던 까치가 저렇게 시끄럽게 우는 새라는 걸 처음 알았다.

“끄으응…….”

그 증거로 한 사람과 한 마리 사이에 끼인 다른 한 마리가 괴로워하고 있지 않은가.

구석에 박혀 있던 박서원은 슬쩍 눈을 떠서 그 처참한 광경을 보더니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11등급을 코앞에 둔 초능력자는 준비성도 좋았다. 괜히 10등급 초능력자가 아닌 모양이다.

귀마개도 이어폰도 없는 나는 지하국 풍경이나 보았다. 배가 달리는 속도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다. 그러나 보이는 건 똑같았다. 작은 돌멩이가 굴러다니는 흙바닥과, 멀리서 느리게 흘러가는 검은 강. 파란 하늘은 없고 수정이 박힌 천장만 있다.

삭막한 모습이긴 했지만 일견 평화로워 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조용한데 밤에는 어떤 괴물이 나올까요.”

“박서원이 잡은 그 괴물 새 정도는 나오나 보지.”

백주하는 심드렁한 낯빛으로 말했다.

“걱정 안 돼요?”

“원래 누구나 비장의 수단 한 두 개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잖아.”

난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그렇죠.”

나도 나름대로 비장의 수단을 챙겨 왔다. 묵주.

“박서원이 옆에 있으면 죽일 자신이 있고, 네가 옆에 있으면 죽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럼 됐지.”

“선배, 의외로 인생 한 번만 사는 타입이네요?”

“초능력자로 살다 보면 그렇게 돼. 넌 반년밖에 안 돼서 모르나 본데.”

백주하는 나를 흘깃 보았다.

“아, 넌 없었을 때구나.”

백주하의 입가에 씩 웃음이 걸렸다. 재수 없는 미소. 삶에 미련이라고는 하나도 가지지 않은 얼굴이다.

“내가 마지막 학기만 남겨 두고 각성했거든. 졸업 학점 4.3 이상 유지하려고 그 개고생을 했는데 그거 다 날렸어. 그때 깨달았지. 인생계획 같은 건 다 쓸모없다고.”

“……등록금 돌려받았어요?”

“이 새끼, 또 이상한 소리 하네. 장학금으로 다녀서 못 돌려받았다. 됐냐?”

백주하는 싱겁게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막살다 보니까 의외로 괜찮은 해결책이 나오더라고. 다시 생각해 보면 차라리 그때 각성해서 잘됐어. 오히려 좀 더 일찍 각성하지 못한 게 아쉬워. 그랬으면…….”

“아!”

백주연과 우리 사이에서 고통받고 있던 작매가 탄성을 내질렀다. 작매는 백주연의 어깨에 올라탔다. 자그마한 손이 앞을 가리켰다.

“둘 다 정신 사나우니까 입 좀 다물어! 저기 가 보면 알게 되겠지!”

“까아악!”

작매의 손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흙먼지가 가득한 곳에 푸른빛이 흔들렸다.

버드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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