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36. 해와 달이 없는 세계(4)
이 세계에는 인간이 볼 수 없는 것들이 공식적으로 존재한다. 일반적으로 영물이라 불리는 것은 인간을 먹지 않는 영적인 존재들이다. 그러한 영물들은 태생적으로 그것들을 볼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나이나 배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는 모양이지만, 어쨌든 ‘볼 수 있다.’
반면 인간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들만 그것들을 볼 수 있다. 특별수사과의 최소 조건이 바로 그거다. 물론 꼭 볼 수 있다고 다 특별수사과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도 공무원인 만큼 여러 자격이…… 이건 상관없는 얘기고.
어쨌든 특별수사과 사람들만큼 보진 못하더라도 일반인 중에서도 볼 수 있는 사람은 충분히 많다. 하지만 여기 있는 ‘인간’ 중에는 없다. 목표물인 산함박이 볼 수 없는 것에 속하는 게 아니라 그렇다 치지만, 팀으로 생각하면 밸런스가 좀 안 맞지 않나? 잡는 게 요괴라고만 생각하면 상관없을 성싶다가도, 요괴 중에 볼 수 없는 것들을 저주로 사용하는 놈들이 없지 않다는 점을 떠올리면 좀 걱정스럽기도 하다.
박서원이 집에 덕지덕지 처발라 놨다는 주술을 고려하면 그놈 집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다 떨어질 것 같지만……. 그곳에서 까딱 잘못했으면 박서원에게 살해당할 뻔했다는 걸 알고 난 뒤로는 원래도 갈 생각 없었지만 더욱 갈 생각이 없어졌다. 난 어차피 오늘이 준 묵주나 다리화의 여의주도 있으니 괜찮겠고. 쟤들도 자기 일이니 어련히 알아서 대처하고 있겠지.
“으…….”
작매는 코를 막은 채 뒤로 물러났다. 내 코에는 특별히 냄새가 맡아지지 않는데 영물에게는 다른가 보다. 볼 수 없는 걸 보고, 맡지 못하는 걸 맡고.
“역시 냄새나요? 불개들도 이 근처에는 잘 안 오려고 하더라고요.”
인간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물도 아닌 것 같은 달님은 깨갱거리는 불개를 달랬다.
“그놈 맞네.”
박서원은 도랑 아래로 폴짝 뛰었다. 바스라지고 흙과 섞였지만 안쪽 대부분은 새까맣기만 했다. 박서원은 발끝으로 검은 흙을 문질렀다.
“이놈이 지나간 게 십이지 두 번이라고 했죠?”
“네? 네…….”
“새끼 뱀이 2년 전이라고 했으니 동물 하나에 한 달이겠고……. 이래서 뱀 새끼들은 안 된다니까. 꼭 하나씩 빼먹는 게 있어. 어디가 기준인지 얘길 안 했잖아.”
박서원은 짜증을 냈다.
나는 끙끙거리며 내 다리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는 똘이, 기해를 쓰다듬었다. 이 녀석도 휴먼 테라피가 필요한 모양이지만 나도 애니멀 테라피가 필요하다. 곧 이어질 말이 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작매 씨.”
“으응?”
“시간의 흐름이 지상과 같지 않다는 건 이곳의 시간이 지상보다 더 빠를 수도 있고, 더 느릴 수도 있다는 말이죠?”
“그, 그렇지.”
“십이지 두 번에, 나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박서원이 씩 웃는 모습에 백주하가 말을 이었다. 아주 마음이 척척 통하는구만. 쓸데없게.
“아직 여기 있을 수도 있겠네.”
* * *
산함박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왜? 라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그냥 그게 최종보스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다소 낙관적인 생각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미리 계획을 세워 봤자 다 쓸모없을 거라는 느낌도 있었다. 어떤 식으로 흘러가게 될지도 모르고,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복수극이랍시고 이들에게 가담하고 있지만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생각하면 이건 ‘내’ 복수도 아니다.
만약 ‘정해준’이라면 복수에 가담할까? 하지만 백주하의 말에 따르면 ‘정해준’은 복수를 포기했다고 했다. 그러나 ‘정해준’이 또 난쟁이나, 확실하진 않지만 악마를 찾아다녔던 걸 보면 목적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럼 도대체 ‘정해준’은 무엇을 노렸던 것일까?
‘나’는 무엇을 노려야 하는 것일까?
용이 되지 못한, 타락한 이무기인 산함박에게도 여의주가 있긴 할 것이다. 잡아먹은 것들이 것들이니만큼 업이 치덕치덕 붙은 어마어마한 여의주가 있겠지. 여의주를 모아야 한다는 생각은 있지만…….
심각한 얼굴로 산함박이 지나간 흔적을 보는 세 사람을 보았다. 박서원, 백주하, 백주연.
저놈들 틈에서 산함박의 여의주를 가져올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산함박을 죽일 수 있기는 할까?
박서원과 쌍둥이는 손에 넣은 여의주가 있다고 했었지. 다리화가 특수한 경우라는 건 그쪽에는 문외한인 나도 안다. 저 셋이 시도할 법한 방법은 하나뿐이다.
……잡은 거겠지? 이무기를?
“저기, 여러분.”
해님은 치맛자락을 매만지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뱀을 찾아가려는 거 맞으시죠?”
“네, 뭐…….”
“찾으러 가는 거 도와드릴 테니까 저희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지 않겠어요?”
“이 아이들을 데려가면 빠르게 이동하실 수 있을 거예요.”
달님이 불개들을 가리켰다.
달님의 말에 일행들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산함박의 흔적은 계속 이어져 있지만 새끼 뱀의 증언을 잊으면 안 된다. 그 증언에 따르면 우리는 지하국을 거의 종단해야 한다.
백주하는 잠깐 망설이다가 물었다.
“도움을 주신다면 감사하지만 저 불개들이 어떻게 이동을 도와준다는……”
“저쪽에 가면 우리 집이 있는데, 예전에 만들어 놓은 썰매가 있어요.”
“저와 동생은 여기서 벗어날 일이 없으니까 있어도 쓸 일은 없지만…….”
“용맹한 아이들이니까 혹시 괴물을 만나더라도 도움이 될 거예요.”
이상할 정도로 필사적인 모습이다. 그 모습에 백주하가 머뭇거렸다. 최나라한테 약할 때부터 알아봤지. 누군들 안 그러겠느냐마는 나이 차 많이 있는 여동생이 있다 보니 애들한테 약해 보였다. 속이야 몇백 살인지 알 수 없겠다만 인간은 시각적인 정보에 약한 동물이라니까.
박서원은 잠깐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 부탁이라는 게 뭡니까?”
인간이 아닌 놈들은 죽이겠다고 하는 미친놈도 일단 오누이의 모습이 인간이다 보니 깍듯하게 대하고 있긴 했다.
“강을 건너서 북서쪽으로 쭉 올라가다 보면, 수수밭이 하나 있어요.”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수수밭이요?”
“네. 거기서 많이도 말고, 수수 한 포기만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옮겨 심을 거니까 뿌리가 안 상하게요.”
“…….”
이쪽 세상에도 해님과 달님 전래동화가 있다. 이걸 전래동화라고 해야 할지 역사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있긴 있다.
어미를 잡아먹고 오누이마저 잡아먹으려던 호랑이는 마지막에 수수밭으로 떨어지고 만다. 수수에 찔려 죽은 호랑이를 내려다보며 오누이는 나란히 해와 달이 된다. 지하국에는 호랑이가 없는 것 같지만 또 모르지. 마음의 안정이 필요할지도.
내가 아는 이야기를 박서원과 쌍둥이가 모를 리 없다. 박서원은 작매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으, 냄새나서 가기 싫은데.”
작매는 거부했다.
“예민한 척 굴기는.”
박서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거기서 들어요. 작매 씨, 사촌 동생에게 그 수수밭이 어디 있는지 좀 물어봐요. 우리가 가려는 길목에 있는지, 아니면 많이 떨어져 있는지.”
작매가 지도를 꺼내자 욱리가 까악까악 울기 시작했다.
“조금 옆으로 새긴 하는데, 가는 길목이래.”
“그래요? 그럼 잠깐 들리는 거로 하죠. 어차피 돌아가려면 여기로 다시 와야 하니까.”
박서원은 쌍둥이와 나를 보며 말했다.
“불만 있는 사람은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고 지금 말해요.”
어차피 이 팀의 리더 비스름한 건 박서원 아니던가. 쌍둥이는 별 불만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권력과 다수결 둘 다 밀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해님과 달님 오누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럼 우리 집에 가시지요! 썰매도 가져가시고 겸사겸사 잠깐 쉬었다 가세요. 이제 밤이 오니까 움직이기도 힘드실 거예요.”
달님이 말했다. 그 말에 궁금해졌다.
“이곳에도 밤이 옵니까?”
하늘도 없고, 천장에는 별처럼 반짝이는 수정만 있었다.
달님은 당연하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와 달이 있는데 낮과 밤이 있는 것도 당연하잖아요?”
역시 이 세계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사실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만으로도 버거운데 이제 지하의 규칙도 신경 써야 하나? 아니다……. 그냥 그러려니 넘기고 여기서 나가는 순간 다 잊어버리자. 그래. 그러자.
“지금은 저녁이니까 저와 오라버니가 같이 있는 거고요.”
“우린 새벽이나 저녁에만 같이 밖에 있을 수 있어요.”
진짜 미친 세상 아닌가?
“밤 동안 동생은 집에 있어야 하고요.”
“그럼 낮에는…….”
“제가 집에 있어야 하지요.”
“…….”
그래. 지하국에서 나가면 깡그리 잊자.
오누이의 안내에 따라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금방 도착했다.
산함박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구석진 곳에 낡은 초가집 하나가 있었다. 혹시 지도에 있던 그 초가집이 아닌가 싶었지만, 근처에 강도 없고, 아예 다른 곳이었다.
달님은 집 안으로 들어가는 해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새벽에 보자.”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오라버니.”
해님은 방긋방긋 웃으며 오빠를 배웅했다.
미친 세상…….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
슬쩍 박서원과 쌍둥이를 보았다. 현재로서는 집에 돌아갈 만한 가능성이 있는 방법은 여의주를 잔뜩 챙겨 들고 청룡이나 난쟁이에게 가는 건데……. 저 새끼들에게서 여의주를 어떻게 빼앗, 아니, 훔쳐…… 큼. 양도받지?
“되게 불손한 눈빛인데요, 정해준 씨.”
“그렇게 의심하면서 살면 인생 피곤하지 않으세요, 박서원 씨?”
“더 고달파질 인생도 없어서 괜찮은데요.”
씨발, 사람 할 말 없게…….
“그럼 좀 더 편하게 살려고 노력 좀 해 보세요.”
“그 부분은 꽤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보는데요.”
사람 속 긁어 놓는 거로?
지고 싶지 않아서 뭐라 더 말하려다가 백주연이 눈짓해서 삼켰다. 박서원을 괜히 자극하는 건 안 좋긴 했다. 인간이면 안 죽인댔지만, 저 새끼 성격에는 죽여 놓고, ‘아, 인간이었어요? 실수했네.’ 할 것 같기도 하고. 저 새끼와 편먹은 여우가 대한민국 기득권층이니 사람 하나 실종상태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았다.
내가 입을 다물자 박서원은 피식 웃었다. 그 재수 없는 몰골을 보고 있자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렸다. 저 새끼 머리를 후려치고 능력을 사용하면 괜찮지 않을까? 능력 훈련할 때를 생각하면 충분히 막을 만한데. 반대로 차단막으로 가둬 놔도 괜찮을…….
* * *
지하국에 밤이 찾아왔다. 초가집의 마루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짙은 남색 두루마기가 펄럭거리고, 달님의 걸음걸음마다 어둠이 나무처럼 피어났다. 불개 몇 마리가 달님의 뒤를 따랐고, 몇 마리는 마당에 자리를 잡고 하품을 했다.
나무처럼 자라난 밤은 곧 달님의 걸음을 앞질렀다. 눈에 닿는 부분이 모두 밤이 되었고, 천장도 물감을 떨어뜨린 물처럼 밤으로 덮였다. 별처럼 반짝이던 수정은 정말로 별이 되었다.
이 장면이 정해영이 처 보던 드라마에 나왔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나왔다면 CG값만 엄청나게 깨졌지 않았을까.
한순간에 밤이 된 지하국을 보고 있으니 정말 시간 흐름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시계가 가지 않는다고 해도 대충 느낌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아무리 오래 지났어도 지상에서는 이제 출근 시간일 것이다. 그런데도 여긴 밤이란 말이지.
“손님들은 저쪽 방에서 있으시면 돼요. 혹시 시장하시지는 않으신가요? 아아, 어쩌지. 지상 사람들이 먹을 만한 음식은 없는데.”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먹을 음식은 우리가 챙겨 왔으니까요.”
해님은 손뼉을 쳤다.
“다행이에요. 그럼 내일 새벽에 오라버니가 돌아오면 출발하면 되겠어요. 밤 중에는 안 좋은 것들이 많이 돌아다니니까 되도록 실내에서 지내도록 하세요.”
해님은 금 같은 조언을 해 주었다. 하지만 실내라고는 해도…….
작매에게서 지도를 받은 쌍둥이는 바닥에 지도를 폈다. 아직도 그저 검은 동그라미로만 보이는 불개가 그려진 곳이 우리가 있는 곳이라면…….
“걸어서 가면 오래 걸리지만, 불개가 끌어 주는 썰매를 타면 여기까지는 금방 도착할 거예요.”
해님은 지도를 보며 설명했다. 해님의 작은 손가락이 강 건너편의 초가집을 가리켰다.
“저 아이들은 엄청나게 빨리 달리거든요! 혼자 달리면 축지법 같은 것도 쓴다니까요?”
“그거 대단하네요.”
“그렇죠? 새벽에 출발하면, 해가 지기 전에는 여기에 도착할 수 있어요. 저와 오라버니 이름을 말하면, 버릇없게 행동하지만 않으면 하룻밤은 재워 줄 거예요.”
해님은 발랄하게 말했지만 지하국이 처음인 인간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면 된다는 겁니까?”
“초가집으로 보이는데……. 누가 살고 있습니까?”
“강원도의 그 할아버지 같은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아, 그건 싫은데. 그 할아버지한테는 얻어맞은 기억밖에 없어.”
백주연이 투덜거렸다.
“할아버지라서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얌전히 얻어맞을 수밖에 없다고.”
“네 뇌세포는 박서원이 8할을 죽였고 그 할아버지가 1할을 죽였을 거야.”
“지금 내 뇌세포가 1할밖에 안 남았다고 욕하는 거냐, 백주하?”
“어쩐 일로 잘 알아듣냐?”
해님은 쌍둥이들이 다투는 게 재밌는지 까르르 웃었다.
“아뇨, 두 분이 말씀하시는 분이 어떤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가 계시는 건 아니에요.”
해님은 두 손을 모으고 조금 몽롱한 눈빛으로 말했다.
“아주아주 어여쁜 공주님이 살고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