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36. 해와 달이 없는 세계(3)
여자아이는 잔뜩 신이 난 얼굴로 우리를 가리켰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여기 사람이 찾아온 게 얼마 만이죠? 너무 오랜만이에요!”
“그래, 그런데 얘네부터 진정시키자. 정신 사납잖아. 그리고 사람한테 손가락질하는 거 아니라고 했지.”
“아차, 너무 오랜만에 봐서…….”
여자아이는 찔끔한 표정으로 남자아이를 보았다. 남자아이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웃으며 휘파람으로 불개의 주의를 끌었다.
여자아이는 두 손을 모아 입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얘들아! 달님이 뜨는 시간이에요. 그럼 우린 뭘 해야 하죠?”
여자아이는 방긋방긋 웃으며 유치원 선생님처럼 불개들을 향해 말했다. 구름처럼 폭신폭신한 목소리다.
“코, 자야 해요. 그렇죠?”
여자아이의 말에 맞추어 남자아이가 휙, 하고 날카롭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렇게 흥분해서 날뛰던 불개들이 곧바로 조용해졌다. 불개들은 휘파람 소리에 맞추어 하품을 쩌억 하며 그 자리에 엎드려 곯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수십 마리나 되는 개들이 그대로 잠드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역시 인간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해도 괴물들이 득실거린다는 지하에 있는 애들이 평범할 리가 없다. 적대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해도 방심할 순 없지. 때론 존재만으로도 인간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 바퀴벌레처럼.
주먹을 쥐었다. 주머니에는 혹시나 해 챙겨 온 묵주가 있다. 김유신이 장난질을 쳤던 그 묵주다. 내 생각이 맞다면, 난 아직 ‘정해준’의 능력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다. 이 묵주는 최후의 수단이다.
“까아악.”
그러나 긴장이 무색하게도, 작매의 어깨 위에 있던 욱리가 날개를 움직여 남자아이 쪽으로 향했다. 남자아이는 환하게 웃었다.
“욱리잖아! 오랜만이구나. 그럼 이분들이 그때 말했던 그분들이니?”
“깍.”
“내려오는 데 다른 건 만나지 않았구? 닷발이가 새끼 데리고 이소 준비를 하길래 걱정했었는데.”
“까아악.”
“그래? 그럼 다행이다.”
한참 욱리와 이야기하던 남자아이는 여자아이가 팔을 잡아당기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손님이 계시잖아요.”
“아차, 그랬지, 참.”
남자아이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헛기침을 큼큼, 했다. 남자아이는 조금 전 까치와 신나게 떠든 걸 잊어 달라는 듯 허리를 곧게 펴고 의젓한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지상의 사람들. 저는 달님, 여기는 제 여동생 해님이라고 합니다.”
여자아이는 오라비를 따라서 수줍게 웃었다.
“지하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 *
“옛날에는 내려오는 길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옛날에는 여러 길잡이들이 지상 사람들을 데려오기도 했어요. 심성 고운 사람들은 진귀한 보물이나 능력, 가끔은 색시를 얻어 돌아가기도 했죠.”
오빠 쪽인 ‘달님’은 말했다. 짙은 남색 두루마기는 가까이서 보자 보석 가루를 뿌린 것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밤하늘의 별을 그대로 옮긴 듯한 옷이다. 이름인 달님을 떠올리면 그보다 잘 어울리는 옷이 또 없었다.
“그건 반대로 말하면 올라가는 길도 많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나쁜 마음을 먹은 괴물들이 지상으로 올라가서 사람을 잡아먹거나 납치해 오곤 했어요.”
얼레빗으로 불개의 털을 빗겨 주던 ‘해님’이 말을 받았다. 새파란 치마의 아랫단에는 새하얀 실로 구름 모양의 자수가 놓여 있었다. 이쪽도 이름을 떠올리면 우스울 정도로 직관적인 옷이다.
그 옷이 이름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고, 그 이름이 무엇인지 깨달았다면 웃음은 전혀 나오지 않았지만.
뻔하잖아. 해님과 달님이라니. 어미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피해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어떻게 지하에서 살아가게 되었는지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불개를 보면 이해가 갔다. 불개는 까막나라 임금님의 명령에 따라 해와 달을 물어오러 갔었지?
“이제 까막나라도 없고, 내려오는 길도 여러분들이 사용한 그거 하나밖에 없게 되면서 발길이 뚝 끊겼죠. 가끔 불개들이 나들이 갈 때 사용하기만 했는데 이렇게 손님이 오시다니.”
“욱리에게 올 거라는 말은 들었지만 닷발이가 새끼들 이소 준비를 하기에 아무래도 오기 힘들지 않을까 했거든요.”
그 닷발이는 박서원이 모조리 때려잡았다. 어미 한 놈을 놓치긴 했지만, 그것도 결국 박서원이 잡았지.
……그것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겠지.
“그으럼, 그…….”
백주연은 답지 않게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달님.”
호칭 때문에 고민했군. 마침 나도 고민하고 있던 부분이다.
“네.”
달님은 순한 얼굴로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지상의 인간이었다면 중학생 정도 되는 얼굴이다. 실제로는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쪽 세상의 역사로도 그렇게 골머리를 앓았는데 지하국의 역사까지 들어 가며 골치가 아프고 싶진 않았다. 지하국은 지하국대로 살라고 해. 내가 왜 거기에 신경을 써야 하지? 까막나라가 망했든 말든 무슨 상관이래.
“그럼 저희가 왜 여기에 왔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뭔가 찾고 있다는 말만 들었어요.”
생글생글 웃고 있는 얼굴을 보니 입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속 알맹이야 어쨌든 겉모습은 중학생이었고, 그런 얼굴을 향해 가족을 몰살한 뱀의 행방을 찾으러 왔다고 얘기할 만큼……
“저희는 강철이를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강철이가 여기서 자고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달님, 혹시 보신 적 있으신지?”
……이 멤버가 복수 때문에 모이게 된 사람들이란 걸 잊고 있었군. 백주연은 망설임 없이 물었다.
‘정해준’의 기억 때문에 한차례 걸러진 채 그 복수심을 받아들인 나와는 다르게 저 세 명은 애초에 그 하나를 보고 10년을 살아왔다. 셋 다 점잖은 척 굴고 있어도 어디 하나 나사가 빠져 있었다. 아니, 박서원은 딱히 점잔을 빼지도 않았지. 쌍둥이도 딱히 점잖은 적이 없긴 하지만.
“그 검은 강철이를 말하는 건가요?”
이게 드라마였으면 여기서 엔딩곡이 흘러나왔을 거다. 아니면 bgm이 뚝 끊겨서 고요해졌거나.
비록 TV 속 화면은 아니었지만 주위의 온도가 5도는 족히 내려갔다. 여름이 시작된 지상은 더웠지만 지하의 공기는 서늘했는데, 지금은 서늘하다 못해 추웠다. 박서원 때문이다.
계속 박서원 탓으로 돌려서 좀 미안하기는 하다. 표정이 굳은 건 쌍둥이도 마찬가지였으니까.
“봤습니까?”
박서원이 물었다.
“본 적이야 있지요. 저기, 저쪽으로 가면 그 강철이가 지나가느라 난 자국이 있어요.”
달님은 태연하게 말했다.
“크기가 엄청나게 커졌지만, 옛날에 까막나라 임금님을 삼켰던 뱀과 비슷하게 생겨서……. 불개들이 뛰쳐나가는 걸 막느라 고생했어요.”
강철이의 또 다른 과거가 나왔다. 놀랍지도 않다. 오히려 안 그랬다면 더 이상하지. 작매가 해 준 이야기만 봐도 한반도에 있는 영물이나 인간은 한 번씩 다 잡아먹었다.
“그게 언제였습니까?”
박서원이 만났다던 새끼 뱀은 2년 전에 보았다고 했다. 박서원은 자기가 죄 없는 놈은 죽이지 않는다고 했지만 만나는 영물마다 박서원의 업을 들먹인 걸 보면…… 지금 그 새끼 뱀이 살아 있을지 궁금하다.
박서원의 질문에 달님은 동생에게 물었다.
“해님아, 언제 봤는지 기억나니?”
“지상의 시간으로는 저도 잘 모르겠는데……. 으응, 이곳에서는 십이지가 두 번 정도 지났나?”
“지상과 이곳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서…… 여러분들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지하의 규칙은 지상과 완전히 다르게 돌아간다. 시간도 포함해서.
해님과 달님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가장 근본적인 사실을 물었다.
“그럼 그놈이 나가는 건 본 적이 있습니까?”
입구는 하나뿐이라고 했다.
언제 봤느냐도 중요한 단서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놈의 행적을 추적만 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그놈을 잡아 족치는 데에 있다. 그럼 결국 최종 행방이 중요한 거지.
내 말에 깨달음을 얻었는지 남은 세 명이 눈을 시퍼렇게 떴다.
“어…… 해님아, 없었지?”
“없었지요.”
오누이는 삽시간에 사나워진 공기에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 그렇지만 돌산은 깊이 들어가 본 적이 없어서, 그쪽에는 다른 입구가 있을 수도 있고……. 그, 저희 말을 맹신하는 건 안 좋아요.”
달님이 허둥거리며 수습하려고 했지만 이미 세 사람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백주하가 벌떡 일어났다.
“지나간 자국이 저쪽에 있다고요?”
해님이 빗질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시간이 지났긴 하지만 워낙 커서 그대로 남아 있어요.”
불개 사이에서 해님의 손길을 슬쩍슬쩍 받고 있던 까치 두 마리도 날아올랐다. 하나는 박서원의 어깨에 앉았고, 덩치가 좀 더 작은 하나는 낮게 날며 머리 위를 뱅글뱅글 돌았다.
“저희끼리 가도 되는데요.”
해님과 달님이 따라오자 백주연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달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손님만 보낼 순 없지요.”
감시하는 건 아니고?
이곳에 와서 너무 사람을 못 믿게 된 것 같다.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해님과 달님이 움직이자 불개들도 따라 움직였다. 한숨 푹 잤기 때문인지 아까처럼 흥분해서 날뛰지는 않았다. 약간 양 치는 목동이 된 기분이었다.
“왈!”
아마 똘이로 추정되는 불개 하나는 내 곁에 붙었다. 같은 털색의 삽사리가 이렇게 많은데 그 속에서 걔만 알아볼 재주는 없었다. 백성찬이라면 알아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백성찬처럼 그 녀석을 매일 본 것도 아니잖아.
“기해가 잘 따르네요.”
“……이 녀석 이름이 기해입니까?”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번호라고 해야 하나.”
달님은 불개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까막나라에서 키우던 불개는 모두 60마리거든요. 그 아이는 서른여섯 번째에요.”
“여기 있는 불개는 60마리까지는 안 되어 보이는데요.”
“그동안 많이 죽었으니까요. 지금은 여기 있는 아이들이 다예요.”
어쩐지 숙연해지는 말이다.
“이 녀석이 사라져서 많이 놀랐겠네요.”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지상으로 나들이 간 아이가 안 돌아와서! 호랑이가 물어간 줄 알았어요. 지상에는 아직 호랑이가 있다면서요?”
해님이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지상에 있는 호랑이를 떠올렸다. 동네 양아치처럼 보였던 호랑이 한 마리와, 강아지 내지는 고양이 새끼처럼 보였던 조그만 호랑이들.
불개를 물어 갈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긴 한데 불개에게 해코지하진 않을 겁니다.”
“……진짜요?”
“그럼요.”
“그럼 인간을 잡아먹나요?”
그건 더 안 먹을 것 같은데.
“아뇨. 인간도 안 먹어요.”
“그럼 뭘 먹나요?”
불안하게 떨리는 해님의 목소리를 들으니 입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호랑이가 뭘 먹지? 그거야 고기를 먹겠지. 강원도에서 지낼 때 한진열과도 함께 식사했었다. 좀 더 고기가 많긴 했지만, 한진열의 식단은 인간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해님의 정신건강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 몇백 년을 족히 살았을 어린아이를 위해서.
겉모습에 넘어가면 안 되는데.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인간은 시각적인 동물이다.
“채식합니다.”
“켁.”
“큭.”
앞서가던 쌍둥이에게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시했다.
“채, 식이요……?”
해님이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네. 얼마 전에 같이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풀만 먹더라고요.”
“지, 진짜요?”
“그렇다니까요. 잘 먹던데요.”
한훈열이 편식하지 말라고 고함치고 나서야 겨우 젓가락을 가져가긴 했지만 어쨌든 풀을 먹긴 먹었다.
“그렇, 구나……. 여기에 온 뒤로 지상에 간 적이 없으니 호랑이 식성이 바뀌었을 수도 있죠……. 저어기 명나라에는 풀만 먹는 곰이 있다고도 들었으니까…….”
“그건 팬더라고 해요.”
“팬더요…….”
“걔도 옛날에는 고기를 먹었다고는 하는데 이젠 풀만 먹는답니다.”
“와아…….”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해님을 보니 가슴이 뿌듯해졌다. 정해영한테 비행기 탈 때는 신발을 벗는 거라고 얘기해 줬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어차피 해님은 지상으로 올라갈 일은 없어 보이니 그보다도 훨씬 보람찬 일이다. 어린애가 덜덜 떠는 걸 보는 건 그 속에 있는 게 무엇이든 보기 좋은 건 아니었으니까. 달님도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고.
“저기, 저기에요!”
한껏 기분이 좋아진 달님은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달님이 손으로 가리키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오누이가 말한 대로 그건 멀리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거대했으니까.
“여기가…….”
“지하에는 비가 안 와서 거의 그대로 남아 있어요.”
달님의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뱀의 흔적에 다가갔다.
목적지를 미리 알고 있던 게 아니었다면 가뭄에 물이 모두 말라 바닥이 드러난 강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만큼 거대했다. 엄청나게 큰 고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묘하게 다르다. 이건 무언가가 기어간 흔적이니까.
지하철에서 보았던 동영상이 떠오른다. 도로를 꾸물꾸물 기어가던 현실감 없던 거대한 뱀. 타르처럼 찐득거리는 것들이 뚝뚝 떨어졌었지.
메마른 땅에는 꿀렁거리는 타르 따위는 없었지만 말라비틀어진 흔적은 있었다. 새까만 흙은 발밑에서 불길하게 바스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