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36. 해와 달이 없는 세계(2)
핏자국과 마트 전단지를 지나 한참을 걸었다.
“이거 지하국이나 그 뱀 새끼가 말해 준 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걷다가 죽을 것 같은데.”
백주하가 백기를 들었다.
“동감이요.”
“인간들은 너무 나약하다니까.”
“까악. 깍. 까아아악.”
“욱리야, 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아, 우린 날개가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백주연은 조용히 눈을 빛냈다. 눈이 박서원을 향했다.
“그거 하자.”
“…….”
박서원은 팔짱을 꼈다.
“어때?”
“저 아래서 어떤 일이 있을지 모르니 힘은 아끼고 싶은데.”
백주연은 백조 시절처럼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며 입을 열었다. 파닥거리는 손가락은 박서원이 가방 대신 메고 있는 검을 가리켰다.
“너 그거 드는 데 은근슬쩍 능력 쓰고 있는 거 다 알거든?”
“…….”
“이대로 걷는 것도 문제 아니냐고.”
“평소 운동이라도 좀 하지 그랬냐?”
“숨만 잘 쉬면 되는 거지. 아, 어쨌든 너 하기 싫으면 팔만 내밀어!”
박서원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반면 백주연은 신이 났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다리 아프단 말이야. 판자가 있으면 더 좋긴 한데 없어도 대충 되긴 하잖아.”
“작매 씨, 아래까지 많이 남았어요?”
“욱리야?”
“까아악.”
“거의 다 왔다는데?”
“그럼 기각.”
“아, 왜!”
백주연은 심통 난 얼굴로 외쳤다.
“박서원 특급, 일명 날으는 양탄……!”
바닥에 굴러다니던 돌멩이 하나가 백주연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닥치고 운동하세요, 백주연 씨.”
“아씨……. 툭하면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건 진짜 안 좋은 버릇이다, 너.”
“툭하면 개소리하는 버릇을 고칠 때가 됐지 않으셨나, 백주연.”
“아우, 씨.”
백주연은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이며 머리를 매만졌다.
“내 뇌세포 책임져라.”
“원래 멍청한 걸 어떻게 책임져.”
백주연이 박서원을 이길 날은 요원해 보였다.
“그런데 지하국 도착해서도 이러면 진짜 좀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은데.”
백주하가 형제의 지원사격에 나섰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건 피해야 하잖아. 서울보다는 작다고 해도 쉽게 걸어 다닐 크기도 아닌 것 같고.”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계속 능력을 쓰기 싫은 거라면 자전거라도 챙겨 오는 게 나았을 것 같은데. 진짜 다 걸어서 갈 거야?”
백주하의 말을 가만히 듣던 박서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려가서 상황 보고.”
“아니, 그럴 거면 난 왜 때린 건데?”
“너무 멍청해서.”
박서원이 너무 당당하게 대답하는 바람에 백주연은 할 말을 잃었다.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는 백주연의 얼굴을 한 번 비웃어 준 박서원은 말을 이었다.
“원래는 회장님이 같이 내려…….”
탁.
“…….”
모두 발을 멈췄다. 모퉁이 너머에서 소리가 들렸다.
작매는 단숨에 새로 변해 날아올라서 사촌 동생과 함께 우리 뒤로 빠졌다. 백주하는 박서원의 곁에, 백주연은 내 곁에 섰다. 언제든 보호막을 칠 수 있도록 정신을 집중했다.
몸집이 가벼운 뭔가가 걸어오는 소리다. 왠지 모르겠지만 익숙하게 들렸다.
타다닥.
“왈!”
“…….”
긴장이 무색하게 개소리가 들렸다. 개 짖는 소리. 이곳에서 들을 리 없는…… 소리.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지?”
백주연이 긴가민가해서 물었다. 대답을 해 주기도 전에 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왈왈!”
아주 선명한 개소리다.
“까악? 까아아악?”
“까아악?”
“까아아아악!”
“그, 까치님. 한 명은 인간으로 변해서 말하자. 정신 사납거든?”
백주연이 인상을 쓰며 말하자 작매가 바로 인간으로 둔갑했다.
“여기는 영역이 아닌데 왜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욱리야, 저게 뭔데? 개? 개인 건 맞아?”
개 짖는 소리와 타닥타닥 걷는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다른 이가 함께 있는 건 아닌 것 같았고, 개 한 마리가 걸으면 딱 저런 소리가 났을 정도로 가볍고 경쾌한 발소리였다.
“왈왈!”
그 개는 그렇게 열렬히 짖으며 나타났다. 윤기가 흐르는 새까만 털, 살랑살랑 흔들리는 꼬리. 털이 덥수룩한 삽사리. 아니, 삽사리를 닮은 개.
어쩐지 익숙하게 생긴 모습이다.
“왈!”
개는 모퉁이에서 불쑥 나타나서 혀를 쭉 내밀고 헥헥 거렸다. 천천히 흔들리는 꼬리가 보였다.
빨간 목줄은 없지만…… 진짜?
나는 혹시나 해서, 떠오르는 이름을 입에 담았다.
“똘이야?”
“왈왈!”
개의 꼬리가 모터라도 단 것처럼 맹렬하게 흔들렸다.
* * *
“불개가…… 으응? 지도에 그려 놨다고?”
사촌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던 작매는 당황해하며 품속에서 지도를 꺼냈다. 지난번 우리에게 보내 주었던 그 지도였다.
“까아악.”
까치는 작매의 어깨에서 바닥으로 내려와 지도 위를 걸었다. 발끝이 지도 오른쪽 하단 구석에 있는 검은 동그라미를 가리켰다.
작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까치를 보았다.
“이게 왜? 입구라며?”
“까아아아악!!”
욱리는 강하게 날갯짓했다. 원래 조류는 짜증 낼 일 있으면 날개를 퍼덕이던가? 그런 습성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그건 그거고, 시끄러운 건 시끄러운 거다.
속은 진짜 새대가리도 아니면서 왜 새 모습을 한 놈들은 인간이고 영물이고 간에 진짜 새처럼 구는 건지 모르겠다. 백번 양보해서 영물들은 인간보다는 새에 더 가깝다고 해 줘도.
사촌 동생의 강한 항의에 작매는 당황해하며 지도를 보았다.
“불개 서식지를 표시해 놓은 거라고?”
……그게?
“여기 눈도 그려 놨고, 귀도 그려 놨다고?”
작매는 눈이 빠져라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검은 동그라미……. 저게 개 얼굴이라고 치면 귀가 있을 법한 장소에 뭔가 삐죽 튀어나와 있긴 한데 그냥 그리다가 삐져나온 줄 알았지.
……저게 진짜 귀라고?
눈은 또 어딨는데? 까만 동그라미에 까만색으로 눈을 찍어 놓으면 그게 보이는 줄 알아? 역시 영물이고 뭐고 간에 부질없다.
“까아아아!!!”
“그, 그래, 워낙 급하게 보다 보니…… 지금 다시 보니 불개 맞네, 불개.”
작매가 허둥거리며 달래는 것까지 정말 부질없었다. 삶은 종족을 구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흘러간다.
“얘 이름이 똘이라고?”
쌍둥이는 불개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뭔가 좀 더 그럴싸한 이름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냥 똘이라고 하더라고요.”
“생긴 건 그냥 개인데?”
“걔 성찬 형이 만드는 불을 좋아라 씹어 먹는 애예요.”
“뭐…… 불개니까.”
백성찬과 있으면서 사람에게 귀염받는 게 익숙해졌는지 불개는 쌍둥이의 손길에도 얌전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까치님, 그럼 여긴 불개밖에 없습니까?”
작매 곁에서 지도를 함께 들여다보고 있던 박서원이 욱리에게 물었다. 그러나 욱리는 처음 이미지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고개를 홱 돌려 버리는 사촌 동생을 난감한 얼굴로 보던 작매는 박서원의 눈길을 받고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사이 나쁜 동생 두 마리에게 낀 누나 같은 모습이다. 역시 삶은 공평하다니까.
“욱리야, 여기가 불개의 영역이라고?”
“까아악.”
욱리는 작매의 어깨에 오르며 간드러지게 울었다. 까치도 저런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러나 그 울음소리를 들은 작매의 얼굴은 이상하게 변했다.
“불개의 영역이 아니라고?”
“까악.”
“그럼 누구 영역인 건데? 정말 가도 괜찮은 거야?”
“깍.”
“으응? 그러니까 불개가 사는 건 맞는데, 걔넬 돌보는 이들이 있다고? 까막나라 유민들?”
“까아악.”
“아니, 걔네 다 죽은 건 알지. 혹시나 해서……. 그럼 누구?”
“까아악.”
“가 보면 안다고? 위험하진 않고?”
욱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작매는 영 시원찮은 얼굴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길잡이가 길잡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조금 의문이 들었지만 귀하신 까치님에게 무슨 말을 할까.
잠깐의 휴식을 끝으로 일어났다. 일행에 불개 한 마리가 추가되었다.
* * *
비슷한 풍경만 보며 걷고 있으니 시간을 알기 어려웠다.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는 여기에 내려온 순간부터 멈췄고, 혹시나 확인해 본 휴대폰도 마찬가지였다. 시계만 멈췄다.
작매에게 물어보니 작매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런 얘기 몰라요? 신선 세계에 간 인간이 바둑 한판을 두고 돌아왔더니 노인이 되었다 하는 그거.”
왜 그런 이야기를 꺼냈는지는 뻔했다.
“그래서 길잡이가 필요한 거죠. 단순히 길을 찾는 의미가 아녀요. 까막나라가 망한 이후로 지하국 시간이 제대로 흘러가지 않아서 거기에 휩쓸리지 않도록…….”
말하는 도중에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동굴이 끝났다. 반짝이는 벽이 맨 벽이 되어 가고 있을 때부터 느꼈다.
“왈!”
“어, 똘이야!”
불개가 크게 짖으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출구에서 불개는 멈춰서 우릴 보았다. 얼른 오라는 듯, 꼬리가 기분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미지에 가려 있는 불개의 서식지가 이렇게 밝혀질 줄 알았더라면 백성찬이라도 데려올 것을.
동굴을 걸어오며 작매는 지하국 이야기를 해 주었다. 까막나라가 멸망하고, 지하국은 까막나라가 있던 만큼의 공간이 사라졌다. 그 뒤로도 조금씩 줄어들어서 지금은 그 시절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이 되었다고 한다. 지하의 괴물들을 관리하던 까막나라 사람들도 더는 없으므로 지하국은 괴물들의 세상이 되었다. 지상에 나타나는 요괴들이 있는 것도 다 그 때문이랬다. 까막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지상으로 튀어 나가는 요괴는 보기 힘든 일이었다고.
“와…….”
걸어오면서 작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막연히 황폐한 공간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지하지 않은가? 해와 달도 없는 공간인데,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둡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이건…….”
“멋진데.”
그러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지하의 공간.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공동에 가까운 곳이다. 넓기만 하면 뭐 하나. 우리가 나온 곳은 거대한 벽에 조그맣게 뚫린 동굴이었고, 바닥도 풀 따위 보이지 않는 흙바닥이었다.
그러나 지하국은 밝았다. 해와 달은 없었지만, 천장은 동굴 벽처럼 반짝이는 수정으로 뒤덮여 있었다. 천장의 수정은 별처럼 빛났다. 빼곡한 수정은 은하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지하세계에 별빛을 뿌리고 있었다.
“왈왈!”
그 박서원마저 풍경에 넋을 놓고 있었다.
모래 먼지가 이는 흙바닥이지만 저 멀리 푸른 빛이 언뜻 보였다. 욱리가 그린 지도에 강과 버드나무가 있는 걸 생각하면 생명이 없는 곳은 아니다.
“왈!”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길 잃은 불개에게는 반년만의 귀환이다. 신이 날 만하지.
마지막으로 불개의 모습을 눈에 담기 위해 고개를 들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백성찬이 아끼고 아꼈던 불개는 내 곁에 있었다.
“어?”
“왈!!”
그러나 내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국의 별하늘에 시선을 뺏겼던 일행이 그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불개의 서식지라고 했다. 그렇다면 다른 불개가 있어도 이상하진 않다.
새까만 털 뭉치가 모랫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아니, 한눈에 봐도 수십 마리나 되는 불개 무리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
“네?”
백주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기에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사람이요?”
백주하가 가리키는 방향을 자세히 보았다. 거리가 있는 터라 보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불개의 까만 털과는 다른 게 한참 뒤에서 꼼지락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뭐야? 여기 사람도 살아?”
“까아악.”
“불개를 돌보고 있는 이들이라는데…….”
“위험한 놈이야? 작매님, 저놈들 우리에게 적대적이야?”
“어, 그렇지는…….”
불개 몇 마리가 바로 근처까지 다가왔다. 사람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개라고는 해도 불개는 사냥개다. 잔뜩 긴장했는데 불개는 폴짝폴짝 뛰며 불개, 똘이에게 반가움을 표시했다.
“컹!”
정신이 없다. 사방에서 개들이 왈왈 짖어 댔다. 하나둘씩 가까워진 불개들은 잔뜩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그 와중에 멀리서 다가오는 이를 계속 주시하고 있던 백주하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들인데?”
“뭐?”
“적어도 생긴 건 애들이라고.”
정말이었다.
낡지만 잘 정돈된 한복을 입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밤하늘처럼 짙은 남색 한복을 걸친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와 그보다 좀 더 어려 보이는 가을 하늘처럼 새파란 치마를 두르고 있는 여자아이.
둘이서 손을 꼭 잡은 채 부지런히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