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23화 (123/202)

# 123

36. 해와 달이 없는 세계(1)

“지하국에서 돌아오면 부회장님도 귀국하셨을 거예요.”

성아영은 하품을 크게 하며 말했다. 눈 밑이 거뭇하다. 새벽 3시가 넘어가는 시간은 여우에게도 활동시간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전에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백주연은 성아영이 챙겨 놓은 가방을 등에 메며 말했다. 성아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여러분에게 달렸죠.”

너무 당연한 말이다.

“가방 안에 연고랑 꽃 말린 거 넣어 놨어요. 누구 씨가 열심히 쓴 탓에 생각보다 꽃이 많진 않아요. 아껴 써요.”

성아영의 눈이 박서원에게서, 박서원의 어깨로 옮겨졌다. 박서원의 어깨에 앉아 있는 까치는 성아영의 눈빛에 날개를 퍼덕거렸다. 날개가 박서원의 얼굴을 후려쳤다.

“풉.”

백주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박서원의 응징은 곧바로 이루어졌다. 뭘 맞았는진 모르겠지만 백주연이 뒤통수를 붙잡고 끙끙거렸다.

“흐응.”

반면 성아영은 박서원이 아니라 까치를 똑바로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쩐지 허기진 얼굴이다. 여우가…… 새를 잡아먹던가?

“길잡이가 있으니 다른 건 많이 안 챙겼어요. 먹을 건 좀 넣어 놨는데……. 그런데 까치님,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나 섭섭한데?”

“끄아아악.”

까치는 심통 난 목소리로 울었다. 꼬리 세 개 달린 여우는 키득거리며 웃다가 마저 설명했다.

“비상근무나 그런 건 우리 쪽에서 다 처리했어요. 그러니 맘 편히 갔다 오세요.”

왜 지하로 내려가는지를 떠올리면 그런 말이 안 나올 텐데. 지금도 떨려 죽겠구만.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헛웃음을 쳤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성아영은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럼 좋은 소식 기대할게요.”

* * *

항간에서 얘기하는 안전한 산행을 위한 주의사항에는 등산 초보의 야간등산을 추천하지 않았다. 꼭 야간이 아니더라도 난 원래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상하게 여기 와서 산 탈 일이 늘었긴 한데.

새벽 4시에 가까운 시간이라 산속은 어둡다. 여름이라 해가 일찍 뜬다고 해도 5시 정도의 이야기지. 새까맣다 못해 시꺼먼 산속을 보고 있으니 한숨이 나왔다.

다들 비슷하게 생각하는지 앞서가던 쌍둥이가 투덜거렸다. 백주연이 가장 어이없어하는 부분은 분명했다.

입구의 위치.

“지하국으로 내려가는 입구가 서울에 있다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인왕산이다.

“입구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아. 시기가 중요한 거지.”

인간으로 둔갑한 작매는 쉽게 등산로를 올랐다. 손전등으로 길을 비춰도 쩔쩔매고 있는 인간과는 다르다. 역시 어린아이 모습이라도 영물은 영물이라는 건가.

작매는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며 설명했다.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나는 날, 길이 열리는 거다. 시기가 가까우면 억지로 문을 열 수 있기야 하지. 그렇지만 식이 아닐 때 지하나라에 도달하는 건 길잡이가 없으면 무리야.”

“그리고 그 길잡이가 까치고?”

“다른 이들도 있지만……. 다들 까막나라 임금님이 죽은 이후로는 발길을 끊었어. 너무 위험해서. 우리도 잘 가는 건 아닌데, 욱리 말로는 입구 근처까지는 괜찮다고 했거든…….”

작매는 잠깐 발을 멈췄다. 고개를 젖혀 하늘을 보았다. 덩달아 쌍둥이도 하늘을 봤지만 역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기껏해야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만 밤하늘과 겨우 구분이 됐다.

“까아아악.”

그러나 소리는 들렸다. 작매 덕분에 귀에 익은 까치 울음소리다.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던 까치는 천천히 등산로 근처의 돌 위에 앉았다. 백주하가 손전등을 비추자 까치는 신경질적으로 울었다. 작매보다 몸집이 작고, 목 주위에 흰 털이 보송보송 난 까치다.

……이산래도 그렇지만 이 동네 영물들은 왜 이렇게 어린애들이 많은 것 같지? 작매도 까치일 때는 다 큰 모습이지만 둔갑한 모습은 어린애고. 저 까치는 까치 모습부터 솜털이 있다.

작매는 덜 자란 까치를 팔 위에 올리며 반갑게 말했다.

“얘는 내 사촌 동생, 욱리다. 지하국을 안내해 줄 거야.”

“까아악.”

까치는 입을 쩍 벌리며 우렁차게 울었다. 백주하는 인상을 썼다.

“우릴 싫어하는 것 같은데?”

“역시 한번 새대가리가 되더니 잘 알아듣는구나.”

작매는 전혀 대견하지 않은 말을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깍, 까악.”

까치가 울자 작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그러더니 우릴 보며 말을 전했다.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데.”

까치는 도도하게 고개를 홱 돌렸다.

“…….”

대충 어떤 애인지 알겠다.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던 욱리는 까치인 채로 길을 안내했다. 욱리가 울 때마다 작매는 인간의 말로 통역해 주었다.

“이쪽으로.”

“여기로.”

“계속 가면 된대.”

드디어 까치의 안내가 등산로를 벗어났다. 이럴 줄 알았어. 국토 대부분이 산인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겠지만, 이럴 거면 인간적으로 등산은 시키지 말자. 이런 밤중이라면 더욱.

손전등 네 개가 앞을 비춰도 발밑이 어둡다. 한숨이 나왔다.

“저기, 작매님.”

“까치인 두 분은 몰라도 우리 인간은 밤눈이 어두워서 이런 길을 가는 건 많이 힘들거든.”

마침내 백주하의 입에서도 힘들다는 소리가 나왔다.

“얼마나 더 가야 해?”

“까악.”

“거의 다 왔대.”

그렇다고는 해도 말이지…….

거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산속도 힘들었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도 있었다.

지하국으로 내려가겠다는 일행은 인간 네 명과 까치 두 마리. 선두에 까치 두 마리가 있고, 그 뒤를 쌍둥이, 나, 박서원 순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뒤에는 박서원이 있었다.

뒤에 따라오는 사람이 갑자기 휙 하고 사라지는 공포영화 같은 일은 없었다. 환한 손전등 빛은 여전했다.

“…….”

하지만 역시 등 뒤에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따라오는 박서원은 무섭다. 출발할 때부터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딱히 입을 열 기분은 아니겠지만 이쯤 되면 뒤에 따라오는 게 인간인지도 헷갈릴 지경이다. 능력이라도 쓰고 있는 건지 인기척이 없다.

가만, 진짜 능력 쓰고 있는 거 아냐? 검 위에 용케도 서서 균형을 잡고 움직이는 걸 보면 가능할 것 같은데.

물론 돌아서서 확인할 용기는 없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는 세계 최강의 초능력자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진 않았다.

“저 돌을 치워야 한다는데.”

그러나 까치는 아무렇지 않게 박서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작매가 가리키는 곳에는 돌이 있었다. 산에 가면 자주 보이는 커다란 돌이다. 반쯤 바닥에 박혀 있고, 그 주위에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그런 거.

“……이거요?”

오늘 처음으로 박서원이 입을 열었다.

박서원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검을 타고 있진 않네.

“비켜 봐요.”

입을 연 의미가 있나?

어쨌든 다들 얌전히 비켜섰다. 쌍둥이가 한 마디 던질 법도 한데 그 두 사람도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애초에 이 모임이 가족을 잃고 복수를 꿈꾸는 이들만 모인 것이니까……. 2년 전이라고는 해도 드디어 원수의 목격담이 갱신된 거다.

장례식장에서 이들이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수다를 떨 만한 기분은 아니긴 하지.

드드드드…….

박서원은 돌을 노려봤다. 땅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백주하와 백주연이 손전등으로 바위를 비춰 주었다. 다른 곳이 무너지지 않게 신중히 처리하는 박서원에게서 잠깐 시선을 돌린 나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 시간에 도대체 누구야?

물론 연락 올 사람은 별로 없고, 몇 안 되는 연락처 중에서 이 시간에 연락할 사람도 뻔하다.

[백성찬 : 우리 똘이 마지막 모습ㅜㅜㅠㅜㅜㅠㅜㅜㅜㅠ]

역시나.

백성찬의 메시지 아래로 사진 수십 장과 동영상이 있었다. 무슨 연속 촬영이라도 했나? 내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는 사진들만 있었다.

불개와는 크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래도 반강제로 이별 선물이라며 백성찬이 나에게서 뜯어 간 간식을 먹고 있는 불개 사진을 보니 조금 아쉬워졌다. 백성찬의 주접이 귀찮아서 그렇지 불개 자체는 나름대로 귀여운 맛이 있었다.

[백성찬 : 이번에는 길 안 잃고 잘 가야 하는데ㅜㅠㅠㅠ]

그래도 같이 있던 시간이 있으니 불개가 돌아가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백성찬의 반응을 보니 불개는 냉큼 떠난 모양이다. 생긴 건 개고, 이름에도 개가 있어도 습성까지 완전히 개를 닮은 건 아니었다.

삽사리를 닮은 정감 가는 생김새지만 나라면 서식지도 밝혀지지 않은 정체불명의 개를 그리 아끼지는 못했을 것 같다.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그 부분은 확실히 해야지.

불개에게 종종 간식을 줬던 것도 아는 사람의 애완동물이어서 가능했던 거고. 산불 현장에서 불개가 백성찬에게 반해서 다행이다.

“오…….”

“여기로 들어가야 하는 거야?”

“까악. 까아악.”

바위가 들리는 것과 함께 나는 휴대폰 전원을 껐다. 바위가 치워진 곳에는 굴이 있었다. 새까매서 끝이 전혀 보이지 않는 구멍이다. 작매는 욱리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설명했다.

“원래는 줄을 만들어 내려가야 하는데, 우린 저놈 능력이 있잖아?”

이래저래 박서원의 능력은 쓸모가 많다. ‘보호’ 능력도 쓰임이 많지만, 박서원의 능력에 비해서는 한정적이다.

“저번에 내려갔던 입구는 동굴이더니.”

“지하국 입구는 많아. 열려 있느냐가 문제니까. 하지만 도착하는 곳은 다 똑같지. 지하는 그런 곳이니까.”

작매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입구는 완전히 열렸어. 어쩔 거냐?”

박서원은 구멍을 내려다보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야죠.”

* * *

“약간, 그 느낌이야.”

얼마나 내려왔는지 모르겠다.

“그, 왜, 여자애가 책 읽다가 토끼를 쫓아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요?”

“그래, 그거.”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멍을 오로지 박서원 능력에만 의존해서 떨어졌다. 혹시나 범위를 벗어날 경우를 대비해서 박서원의 검을 세 명이 꽉 잡고 있느라 손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물론 까치 두 마리는 여유롭게 날개를 파닥거렸다.

바닥이 보이자 작매는 다시 인간으로 둔갑했다. 욱리는 여전히 까치 모습으로 작매의 어깨에 앉았다.

구멍의 끝에 있는 곳은 동굴이었다. 서울 지하에 이런 게 있다고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동굴. 가끔 뉴스에 나오던 싱크홀은 여기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다.

여기가 서울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게 아니었으면 한다. 상식적으로 이런 거대한 동굴이 아래에 있는 서울에선 살고 싶지 않지 않은가.

“아까는 어둡더니 여긴 또 밝다?”

“까악.”

“빛나는 걸 따라 걸어야 한 대.”

“아니, 또 걸어?”

빛을 내는 물건은 없는데 동굴 벽은 혼자서 반짝반짝 빛이 나고 있었다. 수정을 박아 놓은 것처럼 동굴 안은 은은한 빛으로 가득 했다. 손전등이 더 필요 없을 것 같아서 가방에 넣었다. 두 손은 자유로운 편이 좋다.

“까아아악.”

“입구가 열리지 않은 날에 오면 미로만 있어서 길을 헤매게 된다네. 벽이 빛나는 건, 식이 일어난 시간만……. 그래서 저번에 저놈과 같이 왔을 때 어두웠던 거구나.”

“깍? 까아아악!!!”

“응, 금방 나갔어. 걱정 안 해도 돼.”

작매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날개를 마구 흔드는 사촌 동생이 귀여운지 내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동굴은 아주 미세하게 경사가 있었다. 우린 아래로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너 몇 마리 죽였댔지?”

조용히 걷던 백주하가 대뜸 박서원에게 물었다.

“뭘?”

“얼마 전에 올라왔다던 그 새.”

“다섯 마리.”

“이런 동굴에서 싸웠냐?”

“좀 어둡긴 했는데 그럴걸.”

백주하는 손가락을 들어 빛이 없는 통로 하나를 가리켰다.

“저거 아냐?”

먼지처럼 굴러다니는 깃털이 보였다. 새의 깃털. 난데없이 서울 한복판에 나타난 괴조와 같은 무늬였다. 독버섯처럼 반점이 콕콕 찍혀 있는 깃털이다.

아직 손전등을 손에 쥐고 있던 백주연이 스위치를 켠 다음 통로 안쪽을 비추었다. 자세히 보고 싶지 않았다. 손전등의 불빛에 검붉은 바닥이 보였을 때는 더욱 그랬다.

“그땐 바닷가 근처에서 들어갔는데 진짜 다 연결되나 보네.”

박서원은 태연하게 감탄했다. 목이 잘리고, 날개가 잘리고, 뼈만 남은 새의 몸에 몇 번이고 본 붉은 술이 달린 검이 잔뜩 꽂혀 있는 건 아무래도 좋은 눈치였다. 자기가 했다, 이거지.

여기서 새 가족을 잡았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군. 그날 공원에서 잡았던 괴조보다 덩치는 작지만, 마을버스만 한 새의 사체를 보자 혀만 내둘렀다. 동굴이라 날지 못해서 잡을 만했던 건가? 그래도 다섯 마리, 어미까지 합치면 여섯 마리를 상대한 거잖아? 어떻게 한 거야?

역시 제정신이 아닌 놈이다.

“까악.”

“저런 더러운 건 보기 싫으니까 빨리 가자는데. 나도 동감이고.”

작매가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하자 백주연이 손전등을 껐다. 손전등이 꺼지기 직전,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마트 전단지를 보았다. 정말 이곳이었구나.

이번에는 잡담도 완전히 끊긴 채 조용히 걸었다.

“흐응, 그래, 그렇구나. 할아버지는 잘 계시고? 조만간 한번 뵈러 가야지, 나도.”

작매와 까치가 이야기하는 소리만 두런두런 울려 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