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21화 (121/202)

# 121

35. 광화문 파수꾼(2)

불가사리가 나타나면, 처음에는 기껏해야 손바닥만 한 크기다. 경복궁과 창덕궁에 있는 불가사리 조각이 그 정도 크기이기 때문이다.

조각이 있으니 실물이 나온다니. 이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는가. 더군다나 경복궁과 창덕궁이면 궁궐이지 않은가? 당시에는 요괴와 영물의 침입을 막는 주술이 도성 곳곳에 있었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해도……. 역시 이 땅에 있는 인간 중에 제정신 박힌 사람은 없다. 물론 나는 빼고.

쿵.

육중한 소리와 함께 나타난 불가사리는 코끼리를 닮은 동물이었다. 거대한 몸집에 긴 코. 그러나 동시에 곰처럼 생기기도 했고, 얼핏 보면 멧돼지를 닮기도 했었다.

불가사리는 쿵쿵 걸으며 자동차에 달라붙었다. 커다랗게 입을 벌리고 자동차를 베어 문다. 불가사리는 날카로운 이빨에 그대로 찢겨 나간 자동차를 꿀꺽 삼켰다.

쇳덩이를 삼킬 때마다 불가사리의 몸집이 조금씩 커졌다. 지금은 꽤 크기가 커져서 잘 티가 나지 않았지만, 자동차 한 대를 순식간에 해치우고 나자 커진 것이 눈에 보였다.

“크르륵…….”

오후의 햇살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던 해태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먹이를 찾고 있던 불가사리가 움찔거렸다. 자기 발만 한 해태가 무서운가? 덩칫값 못 하긴.

광화문 광장에는 불가사리 미끼용의 자동차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파수꾼이 지키고 있는 동상보다는 아무런 방해 없는 자동차 쪽이 탐이 날 것이다. 불가사리는 코끼리보다는 조금 짧은 코를 휘적거리다가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자동차 주위에는 바짝 마른 짚이 카펫처럼 푹신하게 깔려 있었다.

백주하와 눈이 마주쳤다.

임상규가 신호를 보냈다. 불 능력자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광장 중앙에 깔린 짚에 손을 가져가는 불 능력자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곳은 분명 2019년 대한민국일 텐데, 이런 짚은 또 어디서 구해 오는 것일까. 못 구할 건 없지만 불이 잘 붙는 게 필요하다고 그게 꼭 짚일 이유는 없지 않은가. 먹이로 내놓은 건 또 자동차면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건물과 자동차들.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동안 인간들의 삶을 위협한 요괴들을 처리하는 방법은 원시적이다. 옛 방법에서 바뀌지 않는다. 이미 검증된 방법이 있으니 새로운 걸 시도해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에서는 무엇보다 확실한 것이 좋으니까.

화르륵.

불이 붙었다.

백성찬을 비롯한 바람 능력자들이 불이 빠르게 번지도록 바람을 일으켰다. 모두 불가사리잡이에 동원된 건 처음이라고 했는데 헤매는 이는 없었다. 임상규가 영상을 보여 주며 세뇌하다시피 주지했던 탓일 수도 있다.

“크응?”

자동차에 머리를 박고 식사를 하고 있던 불가사리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이때가 우리가 나설 때다.

나 혼자는 절대 만들 수 없는 거대한 차단막이 광화문 광장에 나타났다. 해태는 불가사리를 경계하다가 차단막이 생기는 걸 보자 하품을 쩍 하고 엎드렸다.

“쿠와아앙!!”

차단막 안에서 불가사리가 내지르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쾅, 쾅, 차단막에 충격이 전해졌지만, 타격이 올 정도는 아니다. 혼자 능력을 쓰고 있는 게 아니어서 그럴지도 모르고.

왜 임상규가 쌍둥이가 저주에 걸린 동안 그렇게 아쉬워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성아영이 감을 찾아 주겠다며 굴릴 때도 이 능력은 좀 사기 아닌가 싶었는데 실전에 나오니…….

그렇게 생각하니 박서원이 쌍둥이에게 괜히 욕했던 게 아니다. 다행히 월식 전에 저주가 풀려서 다행이지. 단청 연구원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다음 식까지 반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별로 긴장감이 없는데요?”

최나라는 슬그머니 다가와서 말했다. 딱 봐도 이쪽이 세종대왕상과 가까워서 온 거다.

“불가사리는 대비가 잘 되어 있으니까…….”

백성찬도 은근슬쩍 다가왔다. 월식이 코앞으로 다가와서 불개와 헤어지는 날까지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자 백성찬은 어딜 가든 불개를 데리고 다녔다. 다만 이번에는 불을 쓰는 일이라 그런지 불개가 없었다. 불에 그 녀석이 다칠 일이야 없겠지만 사람들이 놀랄 수 있다고 임상규가 금지했다. 그 때문인지 오늘 백성찬의 텐션은 조금 낮았다.

“엄청 어릴 때 불가사리가 나와서 뉴스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이제 내가 이걸 잡고 있네.”

백성찬은 추억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최나라가 으, 하며 핀잔을 주었다.

“완전 아저씨 같은 말…….”

“너도 이 나이 되어 봐.”

“형, 그거 진짜 아저씨 같거든요.”

“나랑 별 차이도 없으면서 네가 그런 말 하면 안 되지.”

“같은 취급 하지 말아 주실래요?”

백주하가 기분 나쁜 얼굴을 했다.

“형은 앞자리가 3, 저는 아직 2.”

“내년이면 너도 3이잖아.”

“아직 2.”

“와.”

백성찬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흘렸다.

“요즘 같은 시대에 나이 30가지고 뭘 그러냐.”

“제 마음은 언제나 열여덟이라서.”

백주연에 비해서 조금 나을 뿐이지 역시 백주하도 미친놈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 가장 열여덟에 가까운, 열아홉 살 최나라는 어른들의 유치한 다툼에 한심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최나라는 현명하게 두 사람을 무시하고 해태에게 다시 관심을 던졌다.

평범한 개는 아니더라도 생긴 건 평범한 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불개와 다르게 해태는 딱 봐도 평범하지가 않다. 저 해태는 어느 순간 광화문 광장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는데, 예로부터 길조로 여겨졌던 만큼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무얼 먹고 사는지도 모르고, 나이를 얼마나 먹었는지도 모른다. 늘 광화문 광장에 있지만, 생김새가 좀 더 귀여울 뿐, 청룡과 동급으로 미스테리한 존재였다.

나로서는 도저히 가까이 다가가고 싶진 않지만, 인기가 많은 걸 보면 내가 특이한 반응일 것이다.

“크으응…….”

어쨌든 지금은 일하는 중이니까. 저기에 집중해야지.

“충격이 줄어든 걸 보니까 슬슬 다 된 것 같은데요.”

“그래?”

백주하가 차단막을 보았다. 내 능력을 그대로 쓰고 있는 백주연과는 다르게 지금 백주하는 어디까지나 중계역을 하고 있을 뿐이다. 신기한 능력이란 말이지.

“만약 보호 능력자가 없었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임상규가 불 능력자들에게 보여 줬던 영상은 나도 보았다. 쌍둥이 같은 능력자는 없었으나 영상 속의 보호 능력자는 오로지 혼자서 거대한 돔을 만들어 불가사리를 가두었다.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남자가 아마 한평화와 한평원의 아버지였을 것이다.

내 말에 백주하는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글쎄……. 불붙은 불가사리는 펄쩍펄쩍 날뛴다고 했으니 광화문이 불바다가 됐겠지?”

그러고는 쿡쿡 웃기 시작했다.

역시 끼리끼리 논다더니, 박서원의 친구라는 놈도 제정신일 리가 없지. 백주연보다는 생각을 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그냥 단순히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땅에 사는 인간 중 제정신인 놈은 없다니까……. 나는 빼고.

“해준 씨가 겨울에 각성해서 정말 다행입니다.”

백주연 쪽에 있다가 이쪽으로 다가온 임상규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보호 능력자 없이 불가사리가 나타났다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일어났겠죠.”

이게 정상적인 사람의 반응이지.

나는 백주하를 흘깃 보았다. 백주하는 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단막 안에서 넘실거리는 불꽃을 보고 있었다.

“이제 슬슬 풀어도 될 것 같군요. 잠깐만요, 물 뿌리겠습니다.”

“네.”

이번엔 소방관들과 물 능력자들이 나설 차례다. 지시에 맞추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능력자들을 보았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능력자들이 내리는 물만 보아도 시원해졌다.

무전으로 차단막 반대편에 있는 백주연과 신호를 주고받았다. 성아영의 지도하에 쌍둥이와 능력 합을 맞춰 보면서 제법 재밌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을 해 볼 수 있었다.

“시작한다?”

백주연이 건너편에서 쾌활하게 말했다. 나는 차분히 대답했다.

“네.”

광화문 광장 중앙의 거대한 차단막의 윗부분이 사라졌다. 천장이 뚫렸다.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고 새빨간 불길이 치솟았지만 퍼붓는 물줄기에 금세 기세가 줄어들었다.

“……쓸모가 많은 능력이란 말이지.”

백주하가 작게 중얼거렸다.

집중적으로 물이 쏟아졌던 탓인지 차단막 안의 불은 금방 꺼졌다. 관광버스만 했던 불가사리의 모습도 사라졌다. 쇠를 닥치는 대로 먹어치워 고려 말, 백성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괴물도 수백 년의 시간 동안 만들어진 대처법 앞에서는 허무하게 스러졌다.

쏟아지는 물까지 멈추고, 조심스럽게 차단막을 풀자 새까만 잿물이 광장 바닥을 적셨다. 물을 그만큼 쏟아부었는데도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다.

소방관들이 엉망이 된 현장을 파헤쳤다.

“찾았습니다!”

새까맣게 탄 못생긴 도자기 같은 게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불에 탄 불가사리다.

“크응.”

세종대왕님 무릎에서 게으르게 늘어져 있던 해태가 폴짝 뛰어내렸다. 최나라가 입을 틀어막고 휴대폰을 들었다. 이번엔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이다.

불가사리를 잡는 데 광화문 광장을 사용하는 마지막 이유가 저기 있다.

불가사리의 출몰 지역인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가깝다는 이유도 있었고, 미끼인 자동차를 놓고 불을 지를 만큼 크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기실 지금 보이는 가장 마지막 이유가 아무래도 제일 컸다.

해태는 무게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 모습으로 사뿐사뿐 걸었다. 뭉글뭉글한 털은 햇빛이 비칠 때마다 반짝여서 비늘에 가까운 모습이었고, 천천히 흔들리는 꼬리는 털이 복슬복슬하여 두툼한 사자 꼬리 같은 모습이었다. 이산래의 세계 안에서 보았던 사자와 닮은 형상이었다.

새까만 바닥을 밟지만, 해태의 발은 더러워지지 않았다. 쇠를 먹어서 몸집이 커졌던 불가사리처럼 해태도 발을 내디딜 때마다 조금씩 커졌다.

대형견만 하던 크기가 소방관들이 찾았던 불가사리 앞에 섰을 때는 집채만 하게 커졌다. 이 세계는 없지만 내 세계는 자리 잡고 있었던 광화문 옆의 해태상만 한 크기였다.

“킁.”

모두 숨을 죽이고 해태를 바라보았다.

해태는 불가사리의 냄새를 킁킁 맡더니 입을 쩍 벌려 그대로 삼켜 버렸다. 저게 불가사리를 광화문 광장 앞에서 퇴치하는 세 번째 이유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였다.

광화문 앞의 해태는 화마를 막는 존재이기도 했다던가.

불가사리를 삼킨 해태는 입맛을 쩍쩍 다시며 걸어온 길을 다시 돌아갔다. 크기는 다시 줄어들어 세종대왕상 발치에 왔을 때는 평소처럼 대형견 크기가 되었다.

해태는 폴짝 뛰어올라 세종대왕상의 방석 위에 엎드려 몸을 말았다.

“크으응…….”

아무렇지 않게 하품을 쩍 하는 모습이 평범하기만 했다. 그래 봤자 조금 전의 모습을 본 이상 일광욕을 즐기는 강아지라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느긋한 얼굴로 엎드린 해태는 자신을 경이로운 얼굴로 바라보는 인간들을 훑었다. 사악과 귀신을 쫓는다는 노란 눈이 심드렁하게 나를 스쳤다.

나를 지나친 눈이 백주하를 향했다.

“…….”

노란 눈이 가늘게 떠지며 이가 살짝 드러났다. 백주하는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해태가 백주하에게 시선을 준 건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의미심장한 시간이기도 했다.

박서원에게 그토록 많은 업이 쌓여 있다면 그놈과 함께 다녔을 쌍둥이에게는 아무 업이 없을까?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괜한 것도 아니고.

“왜?”

백주하는 내 시선에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뇨, 해태가 선배 보길래 죄지었나 싶어서요.”

“지었으면 어쩌려고?”

백주하의 말에 할 말이 없어진 건 이쪽이다.

……그렇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긴 하네.

나는 반쯤 진심을 담아서 대꾸했다.

“저한테 도움만 되면 상관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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