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20화 (120/202)

# 120

35. 광화문 파수꾼(1)

“안녕하세요, 두 분 다 오랜만이네요.”

성아영은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채 인사했다. 이온 음료 광고에 나올 법한 모습이다.

그 인사가 향하는 곳에는 쌍둥이가 있다. 백주연은 툴툴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뭐가 오랜만입니까? 동영상 찍은 거 아영 씨잖아요. 온갖 곳에 다 뿌렸더만.”

“그만큼 두 분이 인기 있다는 증거죠.”

성아영은 매혹적이게 웃었다.

“부회장님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하시더라고요. 두 분 덕분에 오랜만에 용돈도 받았어요.”

“그래요…….”

백주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아영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두 분 상황에 대해서는 서원 씨에게 들었어요. 아주 심각하다던데요?”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주 못 써먹을 수준이라던데?”

“그 정도는 아니라니까요.”

“아주 쓰레기라던데?”

“점점 말이 심해지는데요?!”

“아니라는 소리는 안 하네요.”

성아영은 입을 가리며 즐겁게 웃었다.

“지하국 입구가 열리기까지 얼마 안 남았죠? 반년 동안 열심히 놀았으니까 이제 일할 차례죠. 아시죠? 우리 부회장님은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아요.”

쌍둥이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

“서원 씨는 내일부터 러시아에 잠깐 갔다 와야 하거든요. 지하국에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그 전에 바싹 일을 해야죠. 서원 씨가 갔다 오는 동안 두 분은 다시 감을 잡을 수 있게 훈련하고……. 해준 씨와도 합을 맞춰 봐야지요?”

내 이름이 나와서 잠깐 움찔했다. 나는 성아영이 말할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세 개의 꼬리를 보았다.

거기까지 말한 성아영은 잠깐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아, 그런데 우리 귀여운 까치님은 안 왔어요?”

“까치님은 아영 씨 만나러 간다니까 꽁지 빠져라 날아가던데.”

“아쉬워라. 오랜만에 잔뜩 귀여워해 줄 생각이었는데.”

성아영은 전혀 아쉽지 않은 얼굴로 말하며 쭈욱 기지개를 켰다. 성아영이 나를 보았다.

“까치님한테 우리가 여우라는 소리는 들었다고 했는데. 알고 계시죠?”

“네, 뭐.”

구민석이 여우라는 말만 들었지만 그게 그거지.

성아영의 뒤로 흔들리는 붉은색 여우 꼬리가 탐스럽다. 왜 옛날 사람들이 여우 꼬리로 목도리를 만들었는지 알 것 같은……. 이게 아니지.

“성아영 씨는 그렇다 치고, 부회장님은 어떻게…….”

그렇다 칠 만한 일은 아니지만, 사람이 백조도 되는 마당에 여우가 대기업 부회장일 수도 있고, 비서일 수도 있지.

“어떻게 인간 회사의 후계자가 되었냐고요?”

성아영은 내 궁금증을 간단하게 정리했다.

“……네.”

“엄청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으니까 나중에 삼촌 오시면 물어봐요. 물어보면 좋아라 이야기할걸요?”

성아영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자, 그럼 우리 시작해 볼까요?”

* * *

“요즘 자주 보네요.”

“어째 지겹다는 말처럼 들린다?”

“왜 그렇게 사람 말을 꼬아서 들어요.”

백성찬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표정도 띠꺼운데.”

“오랜만에 봐서 좋다는 뜻인데요.”

“아까는 자주 본다며?”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조금 떨어진 곳에는 한평원이 이세빈과 인사하고 있다.

“오늘은 너만 왔어?”

“오늘은 다혜 언니와 상성이 안 좋으니까……. 사실 나까지 필요한가 싶긴 한데, 혹시 모른다고 불려 왔어.”

“하긴, 오늘은 불 써야 하니까 어쩔 수 없겠네.”

반대쪽에는 임상규가 백주하, 백주연을 붙들고 밝은 얼굴로 떠들고 있었다.

“드디어 저주를 풀었군요! 축하드립니다.”

“아, 네.”

“그동안 두 분이 없어서 너무 아쉬웠다니까요. 두 분 능력이면 좀 더 쉽게 끝날 수 있는 일이 많았는데.”

“저희가 없어도 잘 해결했던 것 같은데요?”

“지름길이 있으면 지름길로 가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세 사람한테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최나라가 휴대폰을 들고 세종대왕상을 찰칵찰칵 찍고 있었다. 정확히는 세종대왕상 무릎 위에 있는 사자와 개를 섞어 놓은 듯한, 몽글몽글 구름을 닮은 동물을 찍고 있었다.

“으아아, 완전 귀엽다!”

해태는 심드렁한 얼굴로 발라당 누웠다. 전설 속의 동물이자, 이 세계에서는 서울의 랜드마크 중 하나인 영물은 영락없이 낮잠 자는 강아지처럼 굴었다. 혀를 할짝대며 앞발로 세수를 하는 모습을 보면 고양이 같기도 했고.

나는 최나라에게서 시선을 떼며 광장을 둘러보았다. 점심시간을 막 지난, 평일 오후. 평소라면 사람들과 차들로 빡빡했을 광화문이었지만 오늘은 다르다. 창덕궁부터 광화문 광장까지 이어지는 길이 모두 통제되어 있다.

임상규는 쌍둥이와의 대화를 잠깐 멈추고 다가온 경찰의 말을 들었다.

“종로 경찰서를 지나고 있다고요?”

“네, 크기는 1톤 트럭 정도 된답니다.”

“다른 길로 새진 않고요? 잘 따라서 온답니까?”

“가로등을 먹어 치우느라 멈추기는 하는데, 아직은 잘 따라오고 있습니다.”

“다른 자동차 안 먹게 조심해 주시고요.”

임상규는 광화문 광장에 모여 있는 초능력자들을 불러모았다.

모인 초능력자 중 나와 쌍둥이, 이세빈과 한평원을 비롯한 물 능력자 서너 명을 제외하면 모두 불 능력자. 도시 한가운데에서 불 능력자를 부르는 일은 크게 많지 않지만, 오늘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불가사리가 종로 경찰서를 지나고 있답니다! 다들 자기가 할 일은 기억하고 계시죠?”

이미 몇 차례나 이야기했지만, 임상규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다시 한번 주의사항을 말했다.

“특히 불 팀! 화력 조절 잘하셔야 합니다! 불이 다른 데로 튀어서도 안 되고요!”

“다들 불 지르는 게 한두 번도 아닌데 걱정하지 마시죠, 팀장님.”

“도시 한복판이잖습니까. 잘못되면 욕먹는 거로 안 끝나요. 여러분, 광화문 근처에 있는 회사가 몇 갠지 아십니까? 평일이라서 다들 여러분 지켜보고 있어요.”

임상규는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물 팀은 소방차도 있으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평소처럼 해 주세요.”

“네.”

“그리고 해준 씨와 주하 씨, 주연 씨는…….”

지네잡이 이후로 임상규는 나를 써먹는 방법을 깨달은 것 같았다. 부려 먹히는 입장에서는 썩 달가운 소리는 아니었지만 다른 초능력자들의 위험이 줄어든다면 감수할 정도는 된다. 내가 괴물 앞에 나서는 것도 아니니까.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불가사리가 완전히 힘을 잃을 때까지는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차단막을 푸시면 안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불가사리가 막 나타났을 때 관람객이 신고해 줘서 살았습니다. 먹기 시작하고 나서 몸집이 커진 채로 발견됐으면 골치 아팠을 텐데.”

불가사리는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서울 중심부에 나타나는 요괴였다. 액과 화재를 막아 주는 존재로 오래전부터 부엌이나 불을 쓰는 곳에 그려 넣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쇠붙이들을 닥치는 대로 삼켜서 퇴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자주 나타나는 종류는 아니지만,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작달막한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다.

옛날이면 모를까, 현대 사회에서는 불가사리가 삼킬 쇳덩이들이 길거리에 굴러다닌다. 가로등부터 자동차까지. 순수한 철로 이루어진 것뿐만 아니라 철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으면 먹이가 되니 상당히 식성 좋은 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다행이라 할 수 있는 점은, 잊지 않고 종종 나타나는 놈이다 보니 대응법이 확실하게 있다는 것이다.

“아이고, 아까워라.”

백주연은 경찰들이 천천히 운전해서 옮기고 있는 자동차를 보며 아쉬워했다.

“박서원은 운도 좋다니까. 한국에 있었으면 분명 동원됐을 텐데.”

“걔 능력은 이번 일엔 별로 도움 안 되잖아?”

“쓸모없다니까, 진짜.”

세계 최강의 초능력자라고 해도 고등학교 동창에게 무시당하는 건 이쪽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두 사람은 자신들이 반년 동안 백조로 있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백성찬이 기가 막힌 얼굴을 했다.

“어이, 백조들. 너희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과거는 모두 잊자고요.”

“내로남불도 그 정도면 범죄야.”

어디서 구해 왔을지도 모를 낡은 자동차들은 헨젤과 그레텔이 숲길에 떨어뜨린 빵조각처럼 도로 위에 하나씩 놓였다. 불가사리를 유인할 먹이다. 다른 곳으로 새지 않도록 지근거리로 주차된 낡은 자동차들은 장관이었다.

불가사리는 철을 먹고 몸집을 키운다. 퇴치할 유일한 방법은 불에 태우는 것.

하지만 이 복잡한 현대 도시, 서울에서 불가사리를 태울 만한 공간은 많지 않다. 출몰 지역이 경복궁과 창덕궁이기 때문에 불가사리를 끌고 오는 장소는 늘 광화문 광장이 되었다.

해태는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지루한 듯 하품을 했다. 깔고 앉은 방석은 파란 바탕에 하얀 구름무늬였다.

“크기는 어떻습니까?”

마지막으로 먼지를 뒤집어쓴 검은색 자동차가 광화문 광장 중앙에 놓였다. 위치를 체크하던 임상규는 경찰에게 물었다.

“관광버스 정도로 커졌답니다.”

“좋아요, 예상했던 대로군요. 수고하셨습니다.”

경찰들은 초능력자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안전선 밖으로 물러났다. 백성찬은 경찰들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퇴근하고 싶어 하는 눈이다. 불을 놓아야 하는 일인 만큼 집에 두고 온 불개가 그리운 모양이지.

광화문 광장까지 불가사리를 유인하는 것이 불가사리 퇴치의 가장 큰 난관이라 불리는 만큼, 여기까지만 오면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임상규는 불 능력자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다들 불조심하세요!”

“불 지르는 사람들한테 그런 말 해 봤자…….”

불 능력자 중 하나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세종대왕님한테까지 불길이 번지면 해태가 화낼 수도 있어요.”

“아, 그건 곤란하죠…….”

“해준 씨와 쌍둥이가 막아 줄 테지만, 조심하라고 말하는 겁니다. 여기가 도시 한복판이라는 거 잊으면 절대 안 됩니다!”

불 능력자들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네!”

임상규는 불 능력자들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나와 쌍둥이 쪽으로 다가왔다.

“보통은 경험자가 있어서 이끌어 주는데, 이번에는 다들 처음 하는 사람들뿐이라 걱정이네요.”

“그래서 일부러 등급 높은 사람들만 데리고 온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백주하는 못마땅한 눈으로 말했다.

“나라는 굳이 안 데려와도 되는 거 아닙니까, 팀장님.”

“저도 고3은 어지간하면 안 부릅니다. 근데 이번에는 나라 양이 해 보고 싶다고 나와서요.”

“아니, 쟤는 무슨 정신머리랍니까? 아무리 그래도 미성년자인데 임 팀장님이…….”

임상규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자습하기 싫다더라고요.”

……고3의 탈주였군.

임상규의 말에 백주하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바로 그때였다.

쿵.

커다란 발소리가 울렸다.

쿵.

쿵.

와그작.

발소리가 잠깐 멈추고, 돌을 씹는 듯한 소리가 도로를 가득 채웠다.

“이제 오는군요. 세 분, 잘 부탁드립니다.”

임상규는 마지막까지 신신당부했다. 안전선 밖으로 나가는 임상규를 보며 백주연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그래도 에이스 아니었어? 왜 이렇게 다들 걱정하지?”

“반년 동안 쉬셨잖아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백주연. 입을 열수록 우리만 구차해지니까 닥쳐.”

“에이씨…….”

백주연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럼 내가 저쪽으로 갈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너나 잘하세요, 백주하 씨.”

백주연은 추리닝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터덜터덜 걸어갔다. 털레털레 걸어가던 백주연은 바닥에 표시된 자리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나는 백주하를 보았다.

“어디 잡을까요?”

“내가 잡는다는 선택지는 없냐?”

“박서원 씨처럼 머리 잡아도 돼요?”

“너 못 본 사이에 성격이 좀 이상해진 것 같다.”

“착각이겠죠.”

“기억이 없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어.”

백주하는 팔을 내밀었다.

“잡아. 오기 전에 확인해 보자.”

“네.”

백주하의 팔을 잡자 멀리서 백주연이 손을 흔들었다.

쌍둥이의 능력은 무어라 정의 내리기가 힘들다. 쌍둥이만 있으면 별 볼 일 없는 능력이다. 일반인과 다름없다. 그러나 일정 수준 이상의 능력자가 있다면…….

정신을 집중하여 내 주위로 보호막을 펼쳤다. 컨디션은 유례없이 좋다. 반대편에 있는 백주연의 손이 하얗게 빛나는 것이 보였다. 백주연을 중심으로 보호막이 생기기 시작했다.

두 개의 보호막은 같은 파장을 지니고 있다. 똑같은 보호막이다. 내가 만들었기 때문에 알 수 있다.

똑같은 파장을 지닌 보호막은 덜덜 떨리더니 겹친 영역이 공기 방울처럼 합쳐지기 시작했다. 내 능력만으로는 절대 만들 수 없는 크기의 보호막이 만들어졌다.

백주연이 머리 위로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쌍둥이의 능력은 전달, 공명, 증폭. 쌍둥이 중 한 명과 접촉하고 있으면 다른 한쪽이 접촉된 초능력자의 능력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의 보호 능력자는 세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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