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
34. 드라마의 단골 소재(3)
“……폭력 반대.”
확실히 친구는 맞는지 쌍둥이는 얼마 전 병실에서 박서원이 중얼거리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
머리를 매만지며 구시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다가 잠깐 이야기가 멈춘 틈에 슬쩍 물었다. 한창 지하국 얘기하던 중이었지만, 작매의 사촌 동생의 증언에만 의지하고 있는 이상 지도 분석 이상의 이야기는 못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이라도 궁금증을 해결하는 편이 생산적이지 않겠는가. 분명 한 소리 또 들을 것 같지만 어쩌겠나. 나도 급하다.
“아까 하던 얘기 말인데요.”
“어?”
“기억이 안 났다는 거 무슨 말인가요?”
백주하의 시선이 얼굴에 꽂혔다.
“너 진짜…….”
기가 막히다는 표정이다.
“그게 컨셉이라면 인정해 준다. 드라마 좋아하냐?”
나는 정색하고 대답했다.
“절대 안 보는데요.”
“그래……. 좋아한다고 했으면 네 나이를 좀 의심했을 거야.”
“여기서 제가 제일 어린데요?”
“그건…….”
백주하는 입을 뻐끔거리다 닫았다. 백주연이 낄낄거렸다.
나는 짧게 덧붙였다.
“기억이 좀 안 날 뿐이지 정해준은 맞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이쪽 세계의 ‘정해준’이 아닐 뿐이다.
“그 기억이 안 난다는 게 엄청 수상하다니까.”
물론 나 같아도 고등학교 후배가 몇 년 만에 나타나서 우리가 같은 고등학교 나왔어요? 소리를 하고 있으면 의심스러워할 것이다. 차라리 친한 척 다가오면 사이비나 다단계라고 의심할 텐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것 같다. ‘정해준’이 이따위로 막장 인생을 살고 있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알았더라면 그날 회사에서 박서원과 마주치는 걸 어떻게든 피했을 것이다. 적어도 음료수 사 준다는 말에 1층에 내려가지는 않았겠지.
아니지, 그럼 드라마 스토리에 끼어들지 못할 테니 결국 어떻게든 안면은 텄으려나. 그럼 처음부터 기억상실이라고 우기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이미 몇 번이고 얼굴을 본 상태에서 기억상실이라니. 그렇지만 ‘정해준’이 박서원과 아는 사이인 걸 알게 된 건 신선비를 잡을 때였고……. 젠장, 뭐가 다 이 모양이야.
내가 생각해도 내가 수상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설정이 최선이다. 나도 ‘정해준’과 내 행적을 앞뒤가 맞게 설명할 자신이 없는데.
“두 사람도 날 기억 못 했다면서요? 그걸로 퉁치죠.”
“그게 그거랑 같냐?”
“다를 게 뭐가 있어요.”
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생각외로 재밌는데, 이거.
대신 백주하는 골치가 아픈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얼굴이 조금 불쌍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다. 독일에서 ‘정해준’을 아는 악마를 만난 건 쌍둥이였다. 나는 그 이야기가 필요했다.
“악마? 악마랑 만났다고 했죠? 걔가 저에 대해서 말한 겁니까?”
“뭐…….”
백주하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쟁이에게 빌었던 두 개의 소원에 악마라. 이제 악마도 찾아 나서야 하는 팔자가 되었다.
“개인적인 이유로 조작질 같은 건 내키지 않는데 어쩔 수 없었다나 뭐라나.”
“인간들이 영악해져서 귀찮은 일만 시킨다고도 했었지.”
백주연이 끼어들었다. 어느 쪽이든 수상한 발언이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우리도 모르지. 사실 그 당시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고.”
“나중에 네 기억이 돌아오고 나서야 이걸 말했던가, 싶었다고.”
백주연과 백주하가 나란히 말했다. 두 사람은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을 쓰고 싶은 건 내 쪽이다.
“그럼 악마가 일부러 그런 말을 흘린 겁니까?”
“그런 또 아닌 것 같던데.”
“우리가 들을 줄 몰랐던 얼굴이었지.”
조금 전에는 나한테 잔뜩 짜증 낸 주제에 물으니까 의외로 술술 말해 준다. 그 모습이 조금 웃겼지만 고아원에서 ‘정해준’을 데려갈 거라 말했던 건 쌍둥이였다. 가족을 잃은 이들끼리 모여 있었으니 서로서로 챙겨 줬던 게 습관처럼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뭐…….
박서원을 슬쩍 보았다. 인간이 아니었으면 죽였을 거라 말하는 놈도 있지만.
그걸 본인 앞에서 말하는 건 인성이 조금 의심이 되지만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고. 이곳은 하도 기상천외한 일이 많은 곳이니 잘 찾아보면 정말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인간 흉내를 내는 놈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손톱 먹고 사람으로 둔갑하는 쥐도 있는데.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정해준’이나 ‘나’나 여러모로 수상하긴 했다.
하. 이렇게 다른 사람을 최대한 이해해 주려고 노력하는 내 모습에 눈물이 난다. 이렇게까지 넓은 마음으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이유가 있나 싶은데.
“어쨌든 그게 네 얘기라고 의심한 건 널 만나고 난 뒤부터였거든. 그전까지는 안 그래도 미친 박서원이 더 미친 줄 알고 걱정했었다고.”
“그럴 시간이 스스로에 대해 걱정부터 하시지?”
박서원이 비웃었다.
“카드도 하연이가 다 들고 갔다며?”
“……우리가 준 거야.”
“그럼 빌려준 돈이나 내놔.”
“진짜 이러기야?”
백주하는 박서원에게 툴툴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널 다시 만나니까 기억이 돌아오는데 그동안 잊은 줄도 모르고 있었다고.”
백주연이 말을 받았다.
“분명 이건 악마가 한 말과 관련이 있다 싶었는데 몸이 그런 꼴이다 보니까 말도 못 하고 얼마나 답답했는지 알아?”
“그건 너희 멍청이들의 자업자득이고.”
“어허, 까치님.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악! 그 더러운 손으로 내 머리 만지지 마! 곶감 먹고 손 안 씻었지! 찐득찐득하다고!”
쌍둥이의 말대로라면 백하연도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일까. 뒤늦게 도서관에서 만났을 때 옛날이야기를 꺼낸 걸 보면 가능성이 있는 소리다.
난쟁이에게 빈 소원은 두 개. 무엇을 대가로 바쳤는지는 모른다. 거기다 악마와도 거래를 했다면…….
지난겨울까지 이곳에 있었을 ‘정해준’은 과연 온전한 상태였을까.
“어쨌든 이제 사람으로 돌아왔으니까 거기에 관해서 이야기 좀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네가 그런 컨셉을 잡을 줄 몰랐지.”
나는 당당히 말했다.
“컨셉이 아니라니까요.”
사람 억울하게 왜 말을 안 믿지.
하늘 아래 한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한 내 얼굴을 본 백주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나 말고 제정신인 놈이 없냐.”
백주하는 한탄했다. 백조였을 때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이쪽이 제일 제정신이 아닐 텐데. 뻔뻔하기는.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제정신은 하나도 없구만.”
작매가 잔인한 사실을 알려 왔다. 혀를 쯧쯧 차던 작매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아이고, 물론 우리 해준 씨는 아니죠.”
“아이고, 까치가 인간 차별하네.”
백주연이 작매를 놀리듯 말했다. 작매는 코웃음을 쳤다.
“난 멍청이들만 차별하는 거야.”
분명 사람이 됐는데도 작매와 으르렁거리는 쌍둥이를 보면 사람이 된 것 같지가 않다. 뭐가 문제려나.
아니, 뭣보다 다 큰 어른 둘이서 어린애를 데리고 그러고 있는 걸 보면 좀…… 한쪽의 인성에 대해서 의문이 든단 말이지.
“어쨌든.”
소파에 앉아서 휴대폰을 만지고 있던 박서원이 무심하게 말했다.
“지하국에 내려가는 건 위험하니까 타이밍 정도는 체크 해야 해.”
백주연이 가만히 박서원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또 쥐라고 하면 죽여 버린다.”
“……네.”
백주연은 입을 다물었다.
“저주고 기억상실이고 컨셉이고 간에.”
박서원은 쌍둥이에게 말했다.
“적어도 정해준 씨는 그동안 계속 능력을 써 왔는데…….”
쌍둥이들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너희 반년 동안 안 썼지?”
“뭐…… 백조였으니까…….”
“그동안 먹고 싸고 즐거웠지?”
“그, 말 못 하는 짐승에게는 그만의 고충이 있습니다, 박서원 님.”
“무슨 고충? 비상금 털린 거?”
“……그거 알려 준 거 너였냐?”
“10년 전이랑 숨기는 장소가 안 바뀌었던데.”
“야, 너 진짜,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박서원은 듣는 시늉도 안 했다.
“난 너네 등급이 등급 세 개는 떨어졌을 거로 생각하거든.”
“에이, 그건 심했다.”
“너무 적게 불렀나?”
“아니라니까.”
“그래?”
박서원은 손을 뻗어 백주연의 머리채를 잡았다. 짧은 머리를 잘도 잡은 박서원은 아까 맹활약을 펼친 리모컨을 주워 백주하에게 던졌다.
퍽.
“…….”
“…….”
리모컨은 백주하의 머리를 맞고 바닥을 굴렀다. 박서원은 살벌하게 웃었다.
“이래도?”
“아니, 그…….”
“한 번만! 한 번만 더 해 보자!”
백주하의 뒤에 있던 작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게 보였다.
박서원은 여전히 두 백조, 아니 두 사람의 말을 무시한 채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됐고, 다시 감 잡을 때까지 훈련해. 도와줄 사람도 불렀으니까.”
박서원은 백주연의 머리를 놓고 무슨 더러운 쓰레기를 만진 것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털었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손을 씻으러 갔다.
오늘이 하도 심각한 얼굴로 말해서 좀 더 큰 반향이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부드럽게 넘어가는데. 그만큼 이 세 사람이 ‘정해준’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어찌 되었든 ‘내’가 인간이기 때문일까.
“드라마 아니라니까요.”
“어? 하하하.”
슬금슬금 내 뒤통수를 치려고 손을 올리던 백주연이 어색하게 웃었다.
“머리를 치면 기억을 돌아온다니…… 드라마 그만 보세요.”
“야. 그걸 니가 말하면 안 되지.”
“못 말할 게 뭐가 있어요?”
“그런 점은 옛날이랑 똑같네.”
백주연은 작매가 무릎에 올려놓은 접시 위에서 곶감 하나를 빼먹으며 말했다.
“진짜 악마와 거래한 거야?”
“제가 기억상실이라 그만.”
“어디까지 기억하는데?”
나도 모르겠다.
“글쎄요.”
“능력은 언제부터 쓸 수 있게 된 거고?”
“겨울부터요. 이건 들었지 않아요?”
“듣긴 들었는데……. 초능력자로 사는 건 별로 추천할 만한 일은 아니잖아? 우리같이 가족 없는 애들은 더 그렇고.”
초능력자의 혜택은 가족들에게도 돌아간다. 직업의 제한이 없는 가족들이 오히려 더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판국이다. 반대로 말하면 가족이 없는 이들은 괜찮은 후원사를 잡지 못하면 한순간에 삶이 퍽퍽해질 수도 있다.
백주연은 쓰게 웃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거라면 차라리 이쪽이랑 연관되지 말고 그냥 살지.”
“그러게요. 그게 더 좋았을 텐데.”
그건 ‘정해준’에게 물어봐야 하는 일이다. 악덕 난쟁이에게 소원까지 빌어 가며 능력을 얻은 건 그놈이니까.
내 말에 백주연은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너 10년 전은 기억해?”
나는 잠깐 백주연을 가만히 보다가 대답했다.
“대충요.”
“……그래? 네가 정말 악마와 거래해서 기억이고 간에 다 지운 거라면, 난 네가 왜 그랬는지 좀 이해할 것 같거든.”
걱정이 가득 담긴 백주연의 얼굴을 보자 백주연이 ‘정해준’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긴 하군.
‘정해준’이 너무 힘들어해서 스스로의 선택으로 자신의 기억과, 다른 사람의 기억을 지운 후 조용히 살기를 바랐다 따위의. 혹은 너무 힘들어서 꼭꼭 숨어 버리고 모든 걸 외면했다거나.
“그러니까 내 말은, 만약에, 너무 힘들어서 그랬다면…… 굳이 우리한테 끌려다닐 필요는 없다고.”
그렇지만 이것도 말이 안 되지.
정말 모든 걸 다 지워 버리고 혼자 틀어박힐 생각이었다면 새날에 입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소한 내가 ‘정해준’이었다면 그랬다. 다른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것처럼 ‘정해준’ 또한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난쟁이에게 초능력을 소원으로 빈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렇다면 ‘정해준’의 기억은 온전했을 거로 생각하는 게 맞다.
“……해준아?”
악마와 거래를 했든지 안 했든지, 다른 이들의 기억에서 자신을 지운 ‘정해준’이 다른 데도 아닌 ‘새날’에 입사했다. 쓰고 싶지 않은 돈이라고는 해도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굳이 박서원이 소속된 센터를 찾아가서 입사한다고? 나야 내가 합격했던 ‘새날’은 평범한 무역회사였으니까 그렇다 치지만 ‘정해준’의 행적은 영 설명이 안 된다. 더군다나 능력까지 얻었지 않은가.
난쟁이와 악마. 소원과 거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초능력.
그 생각은 잠깐 멈추고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정해준’을 바라보는 ‘고등학교 선배’에게 웃어 주었다.
“괜찮아요, 선배.”
어렴풋하게 ‘정해준’이 어떻게 대답했을지 떠올랐다. 벽이 견고하다 한들 스며드는 모든 걸 막을 순 없을 테지. 다 막진 못하더라도 그건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백하연과 종이접기 놀이를 함께해 준 ‘정해준’처럼.
“저도 아무 생각 없이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건 아니거든요.”
주인공 패거리를 잡지 못하면 최소한 악당이라도 붙잡고 있어야지.
덕이나 업이나 어떤 것이든 좋으니 쌓기만 해 달라는 이산래의 말이 떠올랐다. 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둘 중 뭐라도 쌓이긴 하겠지.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든 최종적으로 내가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아무래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