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
34. 드라마의 단골 소재(2)
“응?”
태블릿 PC에 코를 박고 실실 웃던 작매가 조용해진 주위에 의아함을 느꼈는지 반짝 고개를 들었다. 입이 근질근질한지 코를 씰룩이는 게 보였지만 세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조용한 분위기 속에 ‘하연아! 하연아아!!!’ 하며 작매가 들고 있는 태블릿 PC 속에서 쌍둥이가 처량하게 울고 있었다.
“뭐라고?”
막 나가는 인생은 의외로 재밌다. 천천히 일그러지는 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거에 재미 들리면 안 될 것 같은데.
박서원은 기가 차서 웃었다.
“장난쳐?”
나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진짜인데요.”
오늘은 박서원을 속이겠다는 생각은 버리라고 조언했다. 20년 가까이 박서원을 보아 온 오늘이 그렇게 말했다. 어렸을 적부터 영감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주제에 오로지 직감만으로 집에 있던 잡귀의 존재를 알아차렸다고. 그거 하나만큼은 신기에 가까운 재주였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그 재주도 많이 흐려졌겠지만, 지난 10년 동안 온갖 요괴들을 상대해 온 박서원이라면 인간의 거짓말쯤은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처음부터 완벽하게 속이기보다는 구멍이 숭숭 난 이야기를 유지해 보자고 제안했다.
말이 제안이지 간단하게 말하면 그냥 우기자는 거다. 좀 더 속된 말로 표현하면 배 째라는 거고. 직감이고 나발이고,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도 박서원이나 쌍둥이에게 사람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재주가 없는 이상 어떻게 손쓸 수 없는 방법이다.
오늘은 논리적인 결론이라고 항변했지만, 솔직히 그냥 막 던진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야, 정해준. 기껏 하는 말이 기억상실이야?”
백주하가 기가 막힌 얼굴로 말했다.
“이제 그거 드라마에서도 낡아 빠졌다고 안 써.”
백주연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건 드라마고요. 원래 현실은 픽션을 능가하는 법이라죠.”
나는 더욱 뻔뻔하게 나갔다. 아주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당당했다.
내가 이 세계에 오게 된 거나, 남게 된 거나, 따지면 나에게는 저주 같은 일이다. ‘정해준’이 여기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는 나도 모르고. 기억이 없다는 말도 진짜다.
“좋아요, 정해준 씨.”
어이없어 코웃음을 치던 것도 잠시, 박서원은 시커멓게 웃었다.
“진짠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다고 칩시다.”
“야, 박서원.”
“네가 왜 얌전히 넘어가냐?”
쌍둥이들의 항의했다. 박서원은 쌍둥이들의 말을 무시하는 거로 두 사람을 조용히 시켰다.
“사실 쥐 때문에 새날에서 정해준 씨를 봤을 때는 나도 기억을 제대로 못 했거든요.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서서히 돌아오더라고요?”
박서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생각했죠. 정체를 알아내야겠다고. 아무리 봐도 정해준 껍데기를 뒤집어쓴 무언가인 것 같아서…….”
껍데기. ‘정해준’의 ‘몸’에 들어온 걸 그렇게 표현한다면 틀린 말도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봤다. 진짜 감이 좋잖아? 오늘이 괜히 그런 말을 한 게 아니었군.
다만 이어지는 말은 살벌했다.
“확인해 보고 죽이려고 했거든요.”
그렇게 웃는 얼굴로 할 소린 아니었다. 박서원은 느긋하게 말했다.
“우리 집에는 그런 쪽으로 주술이 많이 걸려 있어서.”
“그게 집이야?”
백주연이 못 참고 딴죽을 걸었다.
“그건 그냥 창고…… 악!”
그러나 리모컨에 머리를 맞고 입을 다물었다.
“여우가 직접 작업했으니까 수준이 상당하단 말이죠……. 작매 씨도 거긴 못 들어가거든요. 순수한 인간만 출입할 수 있어서.”
“그래서 우리도 그동안 못 갔지.”
“어차피 가자 해도 안 갔어. 물밖에 없잖아.”
백주연의 머리를 때렸던 리모컨이 한 번 더 활약했다. 백주하와 백주연은 머리를 문질렀다.
“그래서 데리고 간 건데, 잘 들어오더라고요. 최소한 인간이기는 한 것 같아서 정해준 씨를 안 죽였어요.”
인간이니까.
박서원은 그렇게 말했다.
“정해준 씨가 본인 말대로 기억이 온전치 못하든.”
“…….”
“속에 들어 있는 게 다른 놈이든.”
박서원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지금은 정해준 씨 능력이 필요하니까 놔둘게요.”
병실에서 결과가 좋으니 괜찮지 않냐며 웃던 박서원을 떠올렸다. 박서원에게 과정이란 어쨌든 좋은 것이었다. 이루어야 하는 목표는 분명했으니까.
박서원 주위만 온도가 내려간 느낌이었다. 역시 정해영의 취향은 모르겠다. 걔 눈은 발가락 사이에 달렸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놈을 좋다고 했겠지.
박서원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차피 난 인간이 아닌 것들만 죽이니까, 계속 인간으로 남아 있어요. 그럼 무슨 짓을 했든 간에 최소한 죽이지는 않아요.”
대신 인생을 피곤하게 만들어 주겠지. 신선비 때 반쯤 협박하던 말이 생각났다. 직접적인 죽음이냐, 사회적인 죽음이냐 선택하라는 말로 들렸다.
박서원의 눈치를 살짝 살피던 백주연은 나에게 슬쩍 다가오며 말했다.
“해준아, 쟤가 저런 미친놈 같은 소릴 해도 진짜 미친 거 맞으니까 당황하진 마.”
“……네?”
“원래 정상인인 척하는 미친놈이 제일 위험한데 쟤는 대놓고 미쳐 있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전혀 안 괜찮은 것 같은데요.”
“잘 생각해 봐 봐. 그 미친놈이랑 우리가 같은 팀이잖아? 그러니까 괜찮다고 생각해야…… 악!”
결국, 리모컨을 맞고서야 백주연은 입을 다물었다.
* * *
백주하는 ‘정해준’에 대해 더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박서원이 무시하자 포기했다. 쌍둥이가 보았다는 악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백주하와 백주연을 보았다. 나를 반쯤 무시하고 있는 백주하와는 달리 백주연은 흘깃거리며 바라보고 있다. 생각해 보면 도서관에서 굳이 다가와서 알은척을 했던 것도 백주연이었다.
“해준아, 나는 너 믿어.”
백주연은 무언가 다짐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한껏 진지한 얼굴이었지만 틀림없다. 개소리가 나올 거다.
“네가 기억상실이라면 머리에 충격을 받으면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멍청한 소리였군.
“내가 드라마 좀 그만 보라고 했지.”
“아, 백조로 있을 때는 할 일이 없잖아. 너도 같이 봐 놓고 왜 그래?”
백주연이 투덜거렸다.
“가만히 놔두는 것보단 머리라도 쳐 보는 노력을 해 보는 게…….”
“그건 나중에 해.”
박서원이 백주연의 말을 가로막았다. 하지 말라는 소리는 아닌 점이 더 얄밉다.
나는 박서원을 보았다. 산함박을 죽일 수만 있다면 내 정체는 아무래도 좋다는 건가? 어쨌든 ‘정해준’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일말의 자비를 베풀어 주는 건가?
왜 이런 놈이랑 알게 돼서는. 다 ‘정해준’의 부덕함 때문이다.
……‘정해준’이 정말 악마와 거래를 했고, 그 거래나 과정으로든 이 세 사람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정해준’에게는 이 세 사람을 벗어나서 움직여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걸까.
“이제 지하국으로 가는 입구가 열리니까.”
“아, 그거.”
백주연이 아는 척하면서 박서원을 향해 비웃음을 날렸다.
“또 지 고집대로 멋대로 굴다가 된통 혼났다며? 그러게 성질 좀 죽이라니까.”
“평화가 주는 꽃만 믿지 말고.”
백주하도 한마디 보탰다. 박서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작매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작매는 드디어 쌍둥이가 얻어맞는 동영상을 멈춘 채 입을 열었다.
“내려가는 건 7월 17일 새벽 4시. 월식이 시작되고 나서.”
“비상근무는 회장님이 빼 줄 거야.”
“아, 권력의 달콤함이란.”
백주연은 과장되게 말하며 TV 속의 구민석을 향해 경례했다.
“올라오는 건…….”
작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최고는 월식이 끝나기 전에 올라오는 거고.”
“언제 끝나는데?”
“진시(辰時). 너희에게 익숙한 단위로는 오전 9시경.”
“4시에 내려가서 9시까지 올라와야 한다고?”
백주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지하국이 그만큼 작아?”
“넓지.”
“다섯 시간 안에 다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넓어?”
“앞뒤가 안 맞는 말이라는 건 둘째 멍청이, 너도 알지? 넓어, 넓다! 서울만큼은 아니어도 한양보다는 훨씬 크지!”
작매는 무릎을 탁, 쳤다.
“그래도 이번에는 내 사촌 동생도 같이 데려갈 거다! 원래 걔만 보내려고 했는데 혼자 가기 싫다고 떼를 써서…….”
작매의 작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월식이 끝나도 문이 바로 닫히진 않아. 박서원 저놈이 억지로 비집고 기어들어 갔던 것처럼 식 전후로 문이 조금 열려 있단 말이지. 그러니 거기서 엉덩이 비비고 오래 앉아 있지만 않으면 나오는 건 문제 없어.”
작매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래 봤자 목소리는 어린아이지만 어깨를 쭉 펴고 말하는 모습에서는 기세가 흘러넘쳤다.
작매는 품속에서 꼬깃꼬깃 접은 종이를 꺼냈다. 테이블 위에 있는 간식 접시를 치우고 종이를 펼치자 옛날 지도가 나타났다. 원형에 가까운 지형이다. 북에서 남으로 강 하나가 흐르고 있었다.
“사촌 동생이 그려 준 지하국 지도야.”
지도를 유심히 보았다. 현대 방식으로 그려진 지도가 아니라서 한눈에 들어오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알아볼 수는 있었다.
강을 기준으로 동쪽에는 버드나무와 우물이, 그 건너편에는 초가집이 있다. 가장 위쪽에는 으리으리해 보이는 기와집이 우뚝 서 있고, 가장 아래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까만 동그라미가 있다.
작매는 그 까만 동그라미를 가리켰다.
“이쪽이 입구.”
그리고 강 건너 기와집 근처의 산을 가리키며 말했다.
“새끼 뱀이 그놈을 봤다는 위치는 대충 이쪽.”
“……그놈이 아직 여기 있을까?”
“그건 몰라. 하지만 확인은 해야지.”
박서원이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백주하는 작매에게 물었다.
“작매 님이 슬쩍 갔다가 그놈이 있는지만 확인해 보는 건?”
“어허, 지하국이 얼마나 위험한데! 어떻게 이 연약한 까치를 그런 험한 곳에 내보내려고 하는지……. 이래서 백조는 안 돼.”
“이제 백조 아니라고.”
“훠어이, 멍청이는 저리 가라.”
작매는 히죽 웃으며 쌍둥이를 놀렸다. 맺힌 게 많아 보이는 얼굴이라 그냥 모른 척했다.
지도만 빤히 바라보던 박서원이 툭 물었다.
“작매 씨, 지하국에 있는 위험요소는?”
“그 커다란 새…… 는 네놈이 죽였고, 구두 장군이나 금돼지, 지네, 도적 떼…… 마주치지 않으면 안전할 거고, 마주치면 위험하지.”
작매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를 덧붙였다.
“최대한 피해 가려고 하겠지만 세상살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거야 당연한 거고요.”
박서원은 지도에 박았던 시선을 들었다.
“꽃은 있는 대로 다 챙기고.”
반쯤 죽었다 살아난 인간이 하는 말이니 신뢰가 갔다.
“능력을…… 한 번쯤 합을 맞춰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백주하와 백주연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야, 백주하. 지금 박서원이 뭐랬냐?”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백주연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박서원에게 물었다.
“너 혹시 쥐냐?”
“…….”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를 한댔지! 쟤가 기억상실이라는 개헛소리를 그냥 넘어간 것부터가 말도 안 됐다고!”
“어쩌지. 주민 센터 가서 고양이로 확인해 달라고 할까?”
“작매 님, 저거 확인할 방법 없어?”
“…….”
“차라리 회장님한테 전화하는 게 빠를 것 같은데.”
“아니지, 그냥 쟤 창고로 데려가면 안 돼? 순수한 인간만 들어갈 수 있다며?”
“…….”
작매는 슬금슬금 엉덩이걸음으로 뒤로 물러났다.
“우리가 아는 박서원이면 저런 소릴 지껄이지 않을 텐데. 백조로 있는 동안 천지가 바뀌었나?”
나는 바닥에 떨어진 리모컨을 들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리모컨이 혼자서 들썩 움직였다.
“…….”
“…….”
백주하와 백주연이 말을 멈췄다.
박서원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화사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