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17화 (117/202)

# 117

34. 드라마의 단골 소재(1)

“그, 그래도, 보, 복숭아, 건은…… 크, 크게, 걱정, 안, 해도, 되, 된다고, 했, 어요…….”

오늘은 다정하게 말했다. 위로 차 말하는 것 같았지만 크게 위로는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말간 눈에 대고 쓴소리를 할 수는 없어서 나는 뚱하게 되물었다. 어쨌든 오늘은 날 걱정해서 하는 소리였고, 도움이 되지 않은 적도 없다.

“……이 팀장님이 그래요?”

“네, 네.”

오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 피, 자, 잔향이, 남, 은, 거라…… 주술, 자, 자체는, 이미, 사, 사라졌, 을, 거라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박물관에서 들었던 말과는 미묘하게 다른 것 같은데. 그땐 인간 흉내 내고 있어서 두루뭉술하게 말했나?

아니지, 다른 게 문제일 수도 있다. 이산래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해도 백 살이 넘진 않을 것이다. 반면 그 가짜 복숭아를 만든 미친 원숭이는 못해도 천 살은 먹었지 않았을까. 이산래가 주술에 대해 생각보다 자세히 알지 못할 가능성도 생각해 보자. 백 살과 천 살이라니. 이제 걸음마를 시작하는 애와 달리기 선수라고 해도 될 정도다.

이래서 천 살 넘게 살면 안 된다! 죄다 노망들어서 미쳐 돌아가지!

“그 호랑이가 말한 건 좀 더 의미심장했었는데. 진짜 괜찮은 겁니까?”

그 호랑이도 이제 한 백 살쯤 됐던가.

“네에, 팀, 장님, 말씀으로는, 음……. 그, 가, 강원도, 호, 랑이는…… 인간, 들, 사이에서, 자, 자라서, 주술, 쪽은…… 문, 외한, 이래요…….”

이쪽은 용의 아들내미보다 못한 상황이었군.

“그래요……. 그렇다고 합시다.”

주술에 문외한인 건 나도 마찬가지니 할 말은 없다. 그렇지만 단순히 복숭아 하나 잘못 먹었다고 이곳에 붙들리게 된 것도 우습지 않은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그쪽이 더 믿음이 간다. 무슨 빌어먹을 원숭이 새끼가 돈 벌려고 지랄한 탓에 이렇게 되었다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복숭아는 고정시키는 역할이라고 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따로 있을 것이다. 애초에 여기에 오고, 복숭아를 먹기까지는 시간 차이가 있었다.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요?”

“음…….”

이제 하다못해 이딴 궁리나 하는 인생에 울적해졌다.

내 기분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어쩐지 즐거운 표정이 되었다. 하긴, 나도 내 일이 아니면 즐거워하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냈을 것이다.

그래. 한 명이라도 즐거우면 됐지, 뭐.

“이, 이런, 건, 어떨… 까요?”

* * *

“으헤헤헤헤헤!!”

비슷한 광경을 옛날에도 본 적이 있다.

작매는 짧은 팔다리를 마구 휘적거리며 웃었다. 들고 있는 태블릿 PC에는 백하연에게 얻어맞는 쌍둥이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두 쌍둥이는 기분 나쁘다는 얼굴로 턱을 괸 채 작매를 보았다.

“거기 까치님. 그만 좀 웃으시죠?”

“푸하하하핳!!!!!”

“저기요. 그러다 숨넘어가시겠어요.”

“으헤헤헤헹!!!!”

작매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박서원이 드물게 작매 편을 들어줬다.

“웃고 싶을 때 웃어야지, 왜 말려?”

“와, 진짜……. 우리 사이가 이 정도야?”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별로일 거야.”

지난 반년 동안 백조였던 쌍둥이에게는 처음부터 지는 싸움이었다. 둘 다 입을 꾹 다물었다.

“힉, 히익, 푸헤헤…….”

나는 작매에게 물을 건네줬다. 작매는 물을 꼴깍꼴깍 마신 다음에야 웃음을 멈췄다. 여전히 실실 웃고 있기는 하지만, 저 정도면 멈춘 거지.

박서원의 주도하에 이 악당 같은 모임은 다시 구민석의 집에 모였다. 두 마리 백조가 인간이 되었다는 점을 빼면 구성원은 같다.

쌍둥이는 거실에 있는 커다란 TV를 켰다. 뉴스 채널에서는 마침 해외의 무슨 행사에 참석했다는 구민석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글로벌한 여우다.

“자, 우리 재수 없는 후원자님도 참석하셨으니 이야기해 볼까.”

“시끄러우니까 소리 낮춰.”

구민석의 목소리가 음소거 됐다.

“좋아, 그럼 드디어 이야기해 볼까요.”

박서원의 말에 쌍둥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전부터 진짜 말하고 싶었는데.”

“그 되지도 않은 존댓말 집어치워라.”

“엄청 소름 끼치거든…….”

박서원은 무시했다.

“작매 씨, 이번에는 제발 날아가지 맙시다. 알겠죠?”

“네…….”

태블릿 PC를 만지작거리던 작매는 어깨를 움츠리며 얌전히 대답했다.

“그럼 뭐부터 이야기할까요? 이야기하고 싶어서 못 견디겠는 사람?”

“…….”

“…….”

다들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맘껏 수다를 떨 정도로 살가운 모임인가?

……살가운 모임이겠구나. 여기에 ‘정해준’이 앉아 있었다면 좀 더 그럴싸했을지도.

작매가 눈을 깜빡이며 거실 테이블 위에 있는 간식거리에 손을 뻗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의 집답게 이 계절에 보기 힘든 곶감이 접시에 예쁘게 담겨 있었다. 작매는 곶감을 베어 물었다.

“있잖아.”

쌍둥이 중 하나가 손을 들었다.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꼭 닮은 일란성 쌍둥이지만 나란히 보니 조금 다른 구석이 있는 것도 같았다. 물론 따로 한 명씩 보면 구분하지 못할 거다.

그래도 옷 입는 스타일은 확연히 다르다. 한쪽은 집에서 굴러다니는 티셔츠 아무거나 하나 주워 입은 몰골이지만 한쪽은 반팔 셔츠와 검은색 면바지 차림이다. 하지만 그럼 뭐 하나. 애초에 누가 누군지를 모르는데.

“나 말해도 돼?”

박서원은 쌍둥이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왜, 백주연.”

좋아. 티셔츠가 백주연이다.

“해준이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백주연의 눈이 나를 향했다. 인간으로 돌아왔어도 눈빛은 그대로다. 백조였을 때도 그랬지. 경박스러운 목소리와 행동거지에도 불구하고 눈빛만큼은 덤덤했다.

“너 독일에 간 적 있지?”

반사적으로 박서원을 흘깃 보았다. 오늘한테 나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던 박서원은 ‘정해준’의 행적에 대해 알고 있다. ‘정해준’이 독일에 간 것도 당연히 안다.

그러나 박서원의 얼굴에도 순간적으로 놀람이 스쳤다. 아주 짧은 틈이었지만 충분했다. 그걸로 알았다. 박서원은 쌍둥이에게 ‘정해준’에 대해 조사한 것을 말한 적이 없다.

“그게 왜요?”

“아니, 거기서 널 안다고 한 애를 만났거든?”

백주연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근데 걔가 인간이 아니라서 물어본 거야. 너 혹시 사기당한 건 아니지?”

여기서 어떻게 해야 정보를 더 끌어낼 수 있을까. 박서원도 쌍둥이에게서 이 얘기는 듣지 못했는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딱히.”

백주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인간인데도 왜 자꾸 백조가 겹쳐 보이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백조일 때는 입만 안 열면 우아해 보이기라도 했다.

……지금도 입 다물면 괜찮은가?

사실 다른 것보다 첫인상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 백하연에게 얻어맞는 것이었다. ‘정해준’ 기억 속에 있는 건 쳐주면 안 되지. 그건 내가 본 첫인상이 아니니까.

열 살 어린 여동생에게 후드려 맞는 모습을 봤더니 ‘정해준’이 보았던 쌍둥이의 모습과 매치가 안 된다. 기억 속에서 봤던 쌍둥이는 그래도 좀 어른스러웠는데.

“진짜 아냐?”

백주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꽥……. 아냐, 이건 환청이다. 쟨 백조가 아니다.

“꽥.”

백주연은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아, 그것 좀 꺼!”

작매는 실실 웃으며 태블릿 PC를 껴안고 고개를 저었다. 단상에 올라온 백조가 옷을 입고 있었다. 곧 인간으로 돌아온 쌍둥이에게 백하연이 날아왔다.

“푸하하하하!!!!”

작매가 뒤집어졌다.

백주연은 작매에게서 태블릿 PC를 뺏으려고 손을 뻗다가 포기했다. 입술을 쭉 내밀고 투덜거리던 백주연은 다시 날 봤다.

“근데 왜 그놈이 아는 척했지?”

“야, 백주연, 나와 봐.”

백주연에 비해서 단정한 차림인 백주하가 백주연을 밀치며 말했다. 이제 보니 쌍둥이라고 해도 조금 차이가 있긴 했다. 백주하의 왼쪽 볼에 점이 있었다. 어쩐지 식장에서 비슷한 겨울 차림을 하고 있던 쌍둥이를 박서원이 금방 구분했다 했지.

“그렇게 물어서 어느 세월에 물어?”

백주하는 신경질을 냈다.

“정해준. 네가 연락을 끊고 잠수 탄 건 이해해. 거기에 대해서 뭐라고 할 생각은 없어.”

‘정해준’의 행적에 대해서 나온다. 이건 오늘이 준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다. 오늘이 알아낸 건 단순한 행방이었으니까. 10년 봄까지 고아원에 있고, 10년 가을에 수능을 쳤고, 11년에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그 사이에 ‘정해준’과 쌍둥이, 박서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박서원도 강원도에 가 있고, 우리는 우리대로 정신이 없어서 너 많이 못 살폈거든. 그때 하연이 돌봐 준 건 지금 인사할게. 덕분에 하연이가 많이 밝아졌었어. 고마워.”

말하는 내용과 다르게 백주하의 목소리는 딱딱했다. 백주연이 백주하의 눈치를 살필 정도였다. 박서원은 오히려 흥미진진한 얼굴로 백주하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올지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너희 집 있던 자리에 세워진 그 오피스텔에 들어간다고 했을 때 말리긴 했지만, 이해는 해서 그냥 놔뒀어. 그 뒤로 연락 다 끊었던 것도, 솔직히 이 새끼 뭐 하나 했지만 다들 힘드니까 이해했다고. 어쨌든 어디 있는지는 아니까 잘 살아 있으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고. 알겠냐? 넌 그때 우리가 복수하겠다는데 안 끼겠다고 했으니까, 다 이해했다고!”

씨발, 박서원 이 새끼가.

저 새끼는 처음 날 만났던 순간부터 지금까지 날 떠보기만 했다. ‘정해준’이 복수에 끼지 않겠다고 했다고? 위험 등급 요괴를 잡는다는 팀을 설명하면서 박서원이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지 생각하면 속이 뒤틀렸다.

……인제 보니 신선비를 잡을 때 저 새끼가 했던 소리도 다 떠보는 소리였다. 언제까지 모른 척해 줘야 하냐고? 저 새끼는 이미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씨발, 심지어 바로 얼마 전에 병실에서 했던 소리도 전부 내 속내를 떠보는 거였잖아.

박서원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물어야겠다.”

백주하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쩐지 억울해하는 얼굴이다.

지가 뭔데? 억울한 건 바로 난데!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나도 알고 싶다.

“악마랑 계약한 거 맞아?”

백주하는 훅 치고 들어왔다.

“도대체 무슨 계약을 해서 우리가 그동안 널 잊고 있었어?”

“…….”

“박서원이 너 봤다고 떠들 때도 우린 너 기억 못 했어. 네 얼굴 보니까 그제야 기억나더라.”

“…….”

“그동안 무슨 짓하고 다녔냐? 너, 우리 기억하고 있긴 해?”

자, ‘정해준’에 대한 새로운 단서가 나왔다. ‘정해준’은 대학생 때 거의 분기마다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장 많이 방문한 곳은 독일. 쌍둥이가 주하랑에게 말했던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있다는 곳이다.

‘정해준’은 난쟁이로도 부족했던 걸까? 그래서 백주하의 말대로 악마와도 계약했던 걸까? 보통 악마가 요구하는 대가는 영혼. 그렇다면 ‘정해준’의 ‘혼’은 악마가 가져간 걸까? 내가 비어 있는 ‘몸’에 들어온 것도 ‘정해준’이 안배한 것일까?

그리고 쌍둥이와 박서원이 ‘정해준’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건 대가였을까, 소원이었을까?

“대가로 기억이라도 바쳤냐?”

“…….”

“야, 입 뚫려 있으면 말해 보라고.”

백주하는 날카롭게 말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과 짰던 계획이 조금 틀어졌지만 괜찮다. 설정이 살짝 바뀐 것뿐이니까. 애초에 막무가내로 우기기로 했던 계획이기도 했었고.

“그게요.”

모든 걸 부정하는 건 의심만 산다. 부정할 수도 없는 증거가 있잖은가.

“기억…… 을 바쳤는지 안 바쳤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기억이 제대로 안 나는 건 맞긴 해요.”

“……뭐?”

“다 없는 건 아니고, 좀 섞여 있어요.”

나는 내 머리를 톡톡 쳤다.

“특별수사과 팀장님이랑 같이 일한 적이 몇 번 있어서, 물어봤는데 저주나…… 그런 쪽이라고 하더라고요.”

쌍둥이와, 시종일관 실실거리고 있던 박서원의 표정이 이상하게 바뀌었다.

“악마에게 대가를 바쳤다면 저주와 비슷한 말이긴 하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충 그런 상황이라서 나한테 물어봤자 몰라요.”

원래 기억상실은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소재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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