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33. 왕자의 귀환(2)
“더워!”
낮은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어야 하는 목소리지만 들어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정해준’의 기억 속에 있었던 목소리다. 기억 속의 목소리는 좀 더 앳된 티가 남아 있었지만.
단상 위에는 겨울 외투를 입고 있는 남자 두 명이 있었다. 키가 크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얼굴. 얼핏 보면 조금 사나운 느낌이지만 동글동글한 눈매가 확실히 백하연과 닮아 있었다. 누가 봐도 같은 핏줄이었다.
단청에서 준비한 곳이니만큼 냉방은 추울 정도로 잘 되고 있었지만, 계절감에 엇나간 옷차림의 두 남자에게는 소용없었다. 곧바로 외투를 벗어 버리고 두툼한 카디건도 벗었지만, 여전히 더워 보이는 옷차림이었다. 두 남자가 옷깃을 쭉 늘리며 손부채질을 하는 동안 백하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연아!”
“우리 동생!”
“고생 많았지?”
“고생 많았어!”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쌍둥이는 그저 신나서 팔을 활짝 펼친 채 백하연을 불렀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만큼 다정한 목소리였다.
백하연은 당장 오빠들의 품으로 달려가지 않았다. 먼저 테이블 위에 있는 물을 마셨다. 큼큼, 헛기침해서 목소리를 확인했다. 아아, 하고 소리도 내보았다. 일견 차분해 보이는 반응이었지만 어쩐지 심상치 않았다.
목소리가 제대로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한 백하연은 고개를 번쩍 들어서 오빠들을 보았다.
“이 개씨발 미친 새끼들이!!!!”
험악한 고함과 함께 백하연은 날았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고, 진짜 날았다. 오랜만에 목소리를 내는 것일 텐데도 저주의 하나였는지 백하연의 목소리는 낭랑했다.
“으악!”
“악!”
백하연은 교과서에 나와도 될 법한 멋진 자세로…… 날아 차기를 성공시켰다. 쌍둥이 하나를 걷어차고, 그 반동으로 옆에 있는 남은 하나마저 걷어찼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 눈이 백하연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백하연의 응징에 잠깐 조용해졌던 회장은 쓰러진 이들이 쌍둥이라는 사실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던 일을 마저 했다. 샴페인을 터뜨리는 연구팀들이 보였다.
“미친 개새끼들! 도움이 하나도 안 돼! 나가 죽어! 죽어!! 죽어!!!”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박서원은 자지러지게 웃고 있었다. 최나라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옳지, 잘한다, 백하연!”
주하랑과 잠깐 눈이 마주쳤다. 둘 다 어리둥절하던 건 잠깐이었다. 한창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싶은 나이인 19살, 철없는 두 오빠 때문에 반년 동안 백조 두 마리를 길러야 했던 백하연의 심정을 생각하자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주하랑은 평화로운 얼굴로 음료수를 마시며 여동생의 응징 시간을 관전했다. 나도 마음 편하게 구경했다.
“악, 하연아, 자, 잠깐만!”
“자, 잠깐, 지, 지금 건 제대로 들어갔어. 하연아!!”
최나라는 그 모습을 촬영하고 있는 단청 직원에게 다가가서 슬쩍 물었다.
“언니, 그거 찍은 거 혹시 받을 수 있을까요?”
성아영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평소 보던 정장 차림이 아니라서 알아보는 게 늦었다.
“그럼요. 편집하면 보내 줄게요.”
“감사합니다!”
눈이 마주치자 성아영이 내게도 인사했다. 얼떨결에 마주 인사하면서 성아영을 흘깃 보았다. 구민석이 여우라면 저 여자도 여우일까. 느낌이 싸한 걸 보면 인간은 아닌 것 같은데.
머리 아픈 일이 너무 많다. 생각하기가 싫어서 그냥 다시 앞으로 보았다. 백하연은 야무지게 두 오빠의 등짝을 때리고 있었다. 어찌나 찰지게 패는지 배우고 싶을 정도였다.
“악! 하연아, 오빠 진짜 아파.”
“하연아! 하연아!!”
쌍둥이의 키가 워낙 큰 탓에 귀여운 여동생의 주먹을 그냥 맞아 주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저건 진짜였다. 쌍둥이는 파닥거리며 백하연의 손을 피하려고 시도하고 있었지만 백하연은 그 모든 시도를 뭉개 버리고 두 오빠를 노렸다. 오히려 오빠가 맞아 죽을까 봐 적당히 사정을 봐주고 있는 느낌이었다.
“요즘 세상은 위험하다고 이것저것 배우게 했거든요.”
박서원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그게 자기들한테 돌아올 줄은 저 멍청이들도 몰랐겠죠. 다 자업자득이죠.”
얼마 전 작매에게도 같은 소리를 들었던 박서원이 말하니 좀 우스웠다. 역시 끼리끼리 논다는 옛사람들의 말은 통계학적으로도 근거가 있는 말이다.
“아영 씨, 그 동영상 나도 좀 보내 줘요.”
“얼마든지요.”
박서원의 요청에 성아영은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성아영은 내게도 물었다.
“해준 씨도 보내 드릴까요?”
“전 괜찮아요.”
그동안 백하연은 마무리를 했다.
“휴!”
개운한 얼굴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그동안 쌓인 게 참 많았구나, 싶었다. 백하연은 단상에서 폴짝 뛰어내리며 오빠들에게 말했다.
“나 오늘 나라 집에서 자고 올 거야! 알아서 잘 살아!”
“하연아!!”
두 쌍둥이 오빠는 처절하게 동생을 불렀지만, 여동생은 오빠의 목소리에 분노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부르르 떨었다. 쌍둥이가 움찔 떨었다. 백하연은 고개를 홱 돌려 최나라를 보았다.
백하연은 오빠에게 보여 주지 않은 밝고 따스한 얼굴로 최나라에게 말했다.
“나라야, 노래방 가자!”
“좋아!”
아, 그래서 탬버린…….
두 여고생은 바람같이 사라졌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정정한다. 박서원에게는 인사했다.
“오빠, 그럼 다음에 봐!”
“그래, 재밌게 놀다 와.”
박서원은 백하연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박서원에게도 여동생이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면 백하연이 애틋할 만도 했다.
여동생의 폭격이 폭풍처럼 몰아쳤다가, 끝나고. 남은 건 샴페인을 뒤집어쓴 채 술잔을 높이 드는 단청의 연구원들과 어기적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쌍둥이다.
박서원은 낄낄거리며 웃으며 말했다.
“야. 여긴 정해준 씨. 알지?”
“알지……. 근데 옷 좀 주면 안 되냐? 솔직히 이거 진짜 덥거든?”
“누가 저주에 걸리래?”
“어쩔 수 없었다니까…….”
그때 주하랑이 끼어들었다.
“안녕하세요, 백주하 씨, 백주연 씨! 저는 특별수사과의 주하랑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두 분이 백조가 되어 있어서 독일과 이야기가 진행이 안 되고 있었거든요. 두 분이 어떻게 저주를 받게 되었는지 말해 주실 수 있을까요? 오늘은 푹 쉬시고, 다음 주 중으로 여기로 연락 주시면 됩니다.”
고생이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수사과에는 휴일이 없는 것 같다. 인원도 적어 보이는데 근무 환경이 최악이다. 대한민국의 잘못일까, 아니면 팀장이 인간이 아니라서 일어나는 참상일까.
“네, 빨리 연락드리겠습니다.”
“왜 네가 대답해?”
“멍청이들은 닥쳐.”
박서원은 한껏 경멸 어린 표정으로 대꾸했다.
쌍둥이는 머리를 긁적였다.
“뭐, 상관없는 이야기긴 한데…….”
“근데, 수사관님.”
“네?”
“시간이 너무 지나서 별로 소용은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
“저희가 저주에 걸린 건 좀 억울하거든요.”
“물론 저희가 잘한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알아주셔야 하는 게 있거든요.”
“이미 반년이나 지나서 지금은 없겠지만요.”
“왜, 그, 있잖아요. 이름 긴 놈.”
“무식한 거 자랑하냐? 이름이 긴 게 뭐냐. 그 정도는 외워.”
“백조로 오래 있다 보니 그렇다, 왜.”
“원래 멍청한 거겠지.”
“너랑 나랑 DNA 똑같거든?”
“쌍둥이라도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거든? 너 수능등급 몇이냐?”
“와, 씨발. 지금 나 수능 안 쳤다고 무시하냐?”
“난 네 머리를 무시하는 거야.”
“이 새끼가?”
“뭐, 이 새끼가.”
박서원은 한숨을 내쉬며 손을 움직였다. 테이블 위에 있는 티스푼이 움직여 두 쌍둥이의 머리를 한 대씩 후려갈겼다.
“수사관님이 기다리시잖아.”
쌍둥이는 헛기침하며 점잔 뺐다. 이건 인간이 되어도…… 인간으로 돌아와도 똑같군.
“큼, 그러니까 그놈이 있었거든요.”
“네, 누굴 말씀하시는 건가요?”
극한직업이다, 진짜. 주하랑은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되물었다.
“그…….”
“악마요.”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주하랑의 웃는 얼굴에도 결국 금이 갔다.
“메피스토펠레스, 그 악마가 있었어요.”
* * *
‘뭔가 이야기 좀 하려고 하면 자꾸 중단되네요.’
그대로 주하랑에게 끌려간 쌍둥이를 보며 박서원은 못마땅한 얼굴로 중얼거리다가 내게 말했다.
‘정해준 씨한테는 잘됐네요.’
‘네?’
‘그동안 변명거리는 잘 생각해 놔요.’
‘……네?’
‘이제 저 녀석들도 돌아와서 이야기할 수 있잖아요?’
박서원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툭 내뱉었다.
‘그동안 뭐 하고 지냈는지, 기억을 못 하는 건지 못 하는 척하는 건지. 그럴싸한 이야기를 만들어 놓으라고요.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
소름이 돋았다.
“음…….”
내 이야기를 들은 오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서, 저한, 테……?”
“다양한 의견을 들어 보고 싶어서요.”
다양한 의견이래도 나와 오늘, 끝이다.
“으, 으음…….”
“오늘 씨는 저보다 박서원 씨를 오래 봤잖아요? 어느 수준이면 박서원 씨가 넘어가 줄까요?”
오늘은 눈을 깜빡였다.
“무, 무리, 아닐… 까요?”
그 정도구나.
오늘은 음료수를 꿀꺽 마시며 말했다.
“그러, 니까…… 소, 손요운, 씨가… 주인, 공, 이고……. 서, 서원, 오빠는, 악, 당……?”
“그렇지 않을까 짐작만 하고 있어요. 솔직히 제 동생이 봤던 그게 이쪽 이야기가 맞는지 여기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잖아요?”
나는 턱을 긁적였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1화인지도 모르고. 정말 드라마가 되었다면 각색이 됐을 수도 있잖아요.”
……이곳이 또 다른 현실이라면 애초에 완벽한 악당 역할이란 있을 수 없다. 누군가에는 둘도 없는 천사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악마가 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내 말에 오늘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도, 업이, 많, 이…… 쌓였기는, 하, 할, 거니까, 그, 그런, 의미라면…… 악, 당, 일지도…….”
“박서원 씨요?”
“저, 저랑…… 얼굴을, 잘, 안, 보려고, 하, 하거든요.”
“……오늘 씨가 볼까 봐요?”
오늘은 대답하는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저, 저는……. 오빠, 가, 왜, 그러는, 지, 이, 이해할, 수, 있어요……. 그, 그렇, 지만, 해준, 씨, 여동생이, 봐, 봤다는, 드, 라마… 에서, 서, 서원, 오빠가…… 악당이어도, 이, 이해, 해요.”
나는 가만히 오늘의 말을 들었다. 오늘이 하는 말을 나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그래도…… 그, 방법, 은…… 자, 잘못, 됐어요…….”
업이 쌓인다는 것은 단순히 생명을 죽이는 것만으로는 쌓이지 않는다. 그보다 좀 더 복잡하게 돌아가는 굴레가 있다.
물론 손쉬운 지름길도 있다.
업을 쌓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는 죄 없는 이를 죽이는 것이다.
박서원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산함박을 죽이기만 하면 상관없다는 건가? 여의주로 빌 소원이 딱히 없다고 말했었는데 사실 따로 생각해 둔 소원이 있다면? 나를 의심하고 있었으니 일부러 없는 척하고 말해 줬을 가능성도 있다.
“그, 그러니까아…….”
오늘은 울적한 얼굴로 빨대를 휘저었다.
“마, 만약…… 오빠가, 도, 돌이킬, 수, 없…… 는, 일을, 저, 저지른다면…… 해준, 씨, 가…… 딱, 하, 한, 번만, 막아, 주세요…….”
“…….”
오늘은 그거면 족하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멈출지 말지는 내 몫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자신을 도와준 친구의 오빠를 완전히 저버릴 수도 없다고.
그러니까 딱 한 번이다.
나는 지금 하는 대답이 훗날 내 발목을 잡게 될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은 동물이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 씨.”
오늘은 웃었다.
“그, 그래도, 집…… 으로, 도, 돌아갈, 방, 법이, 보, 보이면, 바로, 가요……. 아, 알았, 죠?”
“……네.”
봐라. 결국…… 잡혔지 않은가.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시 고민해 볼까요. 박서원 씨가 넘어가 줄 만한 변명. 뭐가 있을까요?”
“으음……. 지, 지금, 상황, 을, 알…… 리기, 싫, 은, 거죠……?”
“네. 나도 아는 게 없는데 알려 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요.”
오늘은 미간을 좁히며 고민했다.
“드라, 마, 다, 단골, 소재이기는, 한데, 요…….”
“네?”
“저, 주…… 에, 거, 걸렸다고, 해, 보는, 건, 어…… 떤, 가요?”
저쪽 세계의 백혈병 같은 건가. 그래……. 저주. 그럴 수 있지. 그런 게 막장 드라마 단골 소재일 수도 있지.
“저, 주요.”
“아주…… 거, 거짓, 말도, 아니니까…… 요?”
오늘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조금 뼈아픈 말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