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13화 (113/202)

# 113

32. 복수에 눈이 먼(4)

박서원은 짜증 날 정도로 멀쩡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박서원!”

이다혜가 반색하며 외쳤다. 단언하는데 이다혜의 인생에서 박서원이 그렇게 반가웠던 적은 이번이 처음일 것이다.

박서원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손을 움직였다. 두 자루의 검이 빠르게 괴조를 향해 날아갔다.

챙!

검과 새의 부리가 부딪쳤을 때 났다고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이긴 것은 부리 쪽이다.

검이 반으로 부러졌다.

“칫!”

박서원은 혀를 차며 검의 방향을 바꿨다. 아직 온전한 검이 부리를 피해 날아가며 괴조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고, 부러진 검도 허공에 떠올라 빠르게 움직였다. 어차피 사람이 쥐는 것도 아니니 검이 부러진 건 큰 문제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야! 나 검 하나만!”

이다혜가 박서원을 향해 소리쳤다. 박서원은 눈을 찌푸리며 이다혜를 흘깃 봤다.

“몸만 왔어요?”

“저놈 날개 찢느라 날려 먹었다!”

박서원은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날개를 확인한 다음에야 말했다.

“나도 들고 있는 검은 저게 다인데.”

“뭐? 너 원래 검 졸라 바리바리 싸 들고 다녔잖아!”

“그거 다 깨 먹었거든요.”

이다혜와 대화하면서도 박서원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빠르게 날아다니는 검에 괴조가 신경질을 냈다.

나는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곤두세웠다. 검을 다 깨 먹었다고? 멀쩡하다 못해 건방지기까지 한 얼굴로 서 있지만 불과 이틀 전 새벽, 작매가 박서원이 죽는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던 걸 잊으면 안 된다. 도대체 저 새끼는 뭔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눈에 박힌 건 지금 못 빼고……. 일단 저기 멀쩡한 거 써요. 가다가 낚아채면 내 힘은 풀 테니까.”

이다혜가 멈칫했다.

“너…… 쥐 아니지?”

“뭐라는 거야.”

“아님 말고……. 이렇게 친절한 놈이 아닌데.”

“닥치고 저놈이나 잡을 생각이나 하세요, 이다혜 씨.”

이다혜는 입술을 쭉 내밀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하기 일렀다. 박서원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자신 없으면 뒤로 빠져서 구경이나 하고 있고요.”

“씨발, 박서원 맞네!”

이다혜는 앞으로 달려갔다. 눈으로 좇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다. 박서원은 이세빈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다혜에게 꽂히는 괴조의 부리를 검으로 튕겨 내며 말했다.

“꼭 한 소리 듣고 나서야 움직인다니까.”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린 모습이 재수 없었다.

박서원은 주춤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김재현과 허재환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재현아, 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네, 발판 만들게요.”

김재현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도서관 앞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어차피 아스팔트 아래에는 흙이 있으니 흙이 부족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시작점에는 꼭 흙이 있어야 하는지 김재현은 잔디가 심어진 화단으로 뛰어갔다. 곧 흙으로 만들어진 가시가 바닥을 잔뜩 헤집은 채 솟아올랐다. 가시 크기를 보아하니 봄에 박을 가를 때는 내숭 떨었던 게 틀림없다.

박서원은 바쁘게 손을 움직이며 말했다.

“손요운 씨는 저놈이 뜨지 못하도록 신경을, 아, 씨발, 검이 없으니까 영 힘드네…….”

손요운이 할 일을 말해 주려던 박서원은 욕설을 내뱉었다. 괴조가 다시 날아오르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서원은 말하다 말고 냅다 앞으로 뛰었다. 얼떨결에 손요운도 박서원의 뒤를 따라갔다.

“이다혜 씨, 등으로!”

“아, 너 또 그거 쓸 거지?! 나 그거 싫다니까!!”

“쟤 못 날게 해야 할 거 아냐!”

이다혜는 옆으로 지나가는 박서원의 검을 잡아챈 다음 김재현의 가시를 밟고 뛰어올랐다. 김재현은 헉, 하고 숨을 참으며 이다혜가 밟고 올라가기 쉽도록 가시의 크기를 조절했다.

이다혜는 놀라울 정도로 가벼운 몸으로 단숨에 올라갔다. 생각해 보니 놀라울 정도는 아니다. 박서원이 도와줬을 테니까.

물론 그 영향력 안에는 괴조도 들어가 있다. 다만 몇 차례 박서원과 일하느라 중력의 변화에 능숙하게 대처하는 이다혜와 달리 괴조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당황했다.

이다혜는 그 틈을 타서 높이 뛰었다. 박서원은 이다혜가 자세를 잡는 걸 보며 인정사정없이 중력을 증가시켰다.

겨우 비틀거리며 날아오르려던 괴조는 무거워진 중력에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때, 이다혜가 활짝 펼쳐진 날개 위로 나타났다. 이다혜가 꽉 쥐고 있는 검이 놈의 왼쪽 날개에 있는 상처를 다시 한번 찔렀다.

“키에에에엑!!”

박서원은 힘을 더 실었다. 이다혜에게 신체 강화 능력이 있으므로 가능한 일이다. 이다혜는 고함을 지르면서도 검을 놓지 않았다. 괴조의 몸이 마침내 쓰러졌다. 커다란 손이 위에서 짓누르는 형세였다.

“으아아아악!!!!”

“여기서 날개 끊어야 해요, 이다혜 씨!”

“알아, 닥쳐!!”

이다혜는 검에 지지해서 겨우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날개를 찌른 검을 움직여 날개를 잘라 버리려고 했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흐으윽.”

신체 강화 능력을 갖추지 못한 박서원은 저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김재현이 이다혜를 돕기 위해 가시를 몇 개 만들어 냈지만, 그것도 중력의 영향을 받는지 제대로 바닥에서 올라오기도 전에 무너졌다.

“이다혜 씨. 더 있다가는 다쳐요. 나와요.”

“……제가 하겠습니다.”

“손요운 씨?”

손요운은 걸음을 내디뎠다. 전직 소방관, 오로지 신체 강화에만 특화된 능력. 손요운은 저 거대한 괴조마저 짓누르는 중력 속에서 홀로 우뚝 섰다.

손요운은 이다혜를 대신해서 검을 잡았다. 한쪽 발로 날개를 꽉 밟은 채, 톱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쓰윽 날개를 자르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에엑!!!!”

괴조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질퍽질퍽한 피가 흘러내렸다.

“하!”

박서원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괴조가 거세게 버둥거렸다.

“큭!”

“악!”

날개 위에 있던 손요운이 비틀거렸다. 고통에 눈이 돌아간 괴조는 자신의 날개 위에 있는 두 인간을 공격하려고 했다. 박서원은 급하게 손을 움직였다. 반으로 부서졌던 검 하나를 괴조의 남은 눈에 박아 넣었다.

“끄에에에엑!!!!”

괴조가 손요운과 이다혜를 공격하는 걸 막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아직 잘라내지 못한 날개가 퍼덕거리는 걸 막지는 못했다.

“큭……!”

날개 위에 있던 손요운과 이다혜가 데굴데굴 구르며 떨어지는 모습에 중력이 원래대로 돌아온 걸 알 수 있었다. 박서원은 입가를 닦으며 뒤로 물러났다.

두 눈에 검이 박힌 괴조는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박서원이 있는 곳을 똑바로 노려 왔다. 눈을 공격받기 직전에 박서원이 있는 방향을 봐 둔 듯했다.

왼쪽 날개가 반쯤 잘리고, 두 눈이 보이지도 않을 텐데 새의 속도는 빨랐다. 몸집이라도 작으면 모를까 저 커다란 몸은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이다. 발에 걷어차이거나, 잘못해서 날개에 깔리기만 해도 부상 확정이다. 저 거리에서 박서원이 저 새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쟤 분명 아까 피 토한 거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저놈은 나도 좀 부담스러운데.

나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박서원의 위로 보호막을 쳤다.

“끄에엑!!!”

첫 번째 보호막은 당연히 깨졌다. 버틸 거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잠깐의 시간을 벌 수는 있었다.

곧바로 다시 보호막을 쳤다.

“끄에에에엑!!”

다시 보호막이 깨졌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지로 누른 채 계속해서 보호막을 만들었다. 새가 부딪칠 때마다 보호막은 깨져 나갔다.

깨지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럼 다시 만들면 된다.

“오래, 못, 버텨요……!”

괴조는 핏물을 뚝뚝 흘리며 부리로 보호막을 쪼았다. 겨우 한 평의 공간이다.

“끼에에엑.”

괴조는 방법을 바꿨다. 부리로 쪼던 걸 멈추고 쩍 벌렸다. 부리로 보호막을 꽉 깨물었다.

“아!”

한평원이 어쩔 줄 모르고 허둥거렸다. 나는 이를 악문 채 보호막을 두 겹씩 만들었지만 깨지는 속도가 빠르다. 아까부터 몇 번이나 보호막이 강제로 깨져서 보호막을 만드는 속도는 이미 늦어질 만큼 늦어져 있었다.

한평원이 비명을 질렀다.

“안 돼!”

“괜찮아.”

박서원은 금이 가기 시작한 보호막 안에서 손을 움직였다. 보호막이 깨지기 직전, 괴조의 부리가 무언가에 얻어맞고 날아갔다. 붉은색이 휘날리는 걸 겨우 보았다.

박서원의 머리가 흩날렸다. 그을음과 피 웅덩이 위에 선 박서원은 씩 웃으며 손을 움직였다. 붉은 술을 매단 검들이 그에 맞추어 사납게 춤을 췄다.

괴조의 몸 중 가장 연약한 부위라고 할 수 있는 눈에 박히는 검이 있다. 다리를 베는 검이 있다. 반쯤 끊어진 왼쪽 날개를 잘라 버리려는 검이 있다. 박제된 새처럼 만들려는 건지 오른쪽 날개를 찌르는 검이 있다.

꽁지깃을 잘라 버리고, 다리를 잘라 버리고, 날개를 잘라 버린다.

검이 움직일 때마다 피가 튀었다. 불과 한 시간 전만 해도 평화로웠던 공원 광장이 시뻘건 색으로 가득하다.

“정해준 씨.”

난자되어 이제 새라고 보기 힘들 정도의 모습이 된 괴조를 눈앞에 둔 채 박서원은 나를 불렀다.

“……네?”

“보호막 한 번 더 펼칠 수 있어요?”

나는 박서원이 가리키는 괴조를 보았다.

괴조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 질긴 생명력에 질려 버렸다. 부리가 부러지고 날개가 모두 떨어졌는데도 괴조는 괴성을 내질렀다. 죽어 가고 있는 목소리였지만 광기로 가득했다. 박서원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괴조의 날개와 몸에 박혀 있던 검 중 하나가 날아와 괴조의 목에 꽂혔다. 피가 박서원의 발에 묻었다.

“그, 네,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래요? 그럼 백성찬 씨.”

“어, 네, 네?!”

“이리 와 보세요.”

질려 버린 건 괴조의 생명력에만이 아니다. 그 질긴 생명력을 난도질한 박서원에게서는 인간 냄새가 나지 않았다. 백성찬을 지키는 것처럼 그 앞을 막아서고 있던 불개가 꼬리를 말고 백성찬의 무릎 뒤에 숨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백성찬은 한평원에게 불개를 맡기고 주춤거리며 박서원에게 다가갔다. 박서원은 나에게도 손짓했다.

박서원에게 걸어가는 걸음마다 괴조의 피가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이놈은 불에 태워야 해요.”

왜 백성찬과 나를 불렀는지 이해했다.

“지네잡이에 대해서는 들었어요. 그때와 똑같이 하면 돼요.”

백성찬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본 박서원은 지친 얼굴로 기침을 몇 번 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떠올랐다는 듯 아, 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평원아.”

한평원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어, 응?”

“혹시 모르니까 비 내릴 준비해. 정해준 씨 능력이 언제 깨질지 모르니까.”

“응…….”

한평원이 긴장했다. 평소라면 깨지지 않는다고 말했겠지만, 지금은 나도 장담하지 못했다. 사실 보호막을 제대로 펼칠 수 있을지도 확신이 들지 않았다.

“해준아, 시작할게.”

“네.”

그래도 정신을 집중하니 손이 빛나기는 했다. 평소보다 깜빡거리기는 했다. 수명이 다 된 전등처럼.

백성찬은 불을 만들었다. 괴조의 몸에 금방 불이 붙었다. 나는 보호막을 펼쳤다. 엄밀히 따지면 차단막이라 해야겠지만.

“키이이이…….”

차단막 안에서 괴조는 산 채로 불태워졌다.

차단막은 가끔 유리 조각처럼 작은 조각이 떨어져 불꽃이 새어 나오긴 했지만 한평원이 능력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한평원은 열기를 정화해 주었다. 피 웅덩이로 뒤덮인 공원 광장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맑은 공기가 흘렀다.

문득 하늘을 보았다.

불이 나고 비가 내리고, 그 난리가 있었음에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

그리고 그 하늘을 새 한 마리가 크게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아마도 까치겠지.

박서원을 흘깃 보았다. 얼굴이 창백했다.

그게 이틀 전 입은 부상 때문인지, 조금 전 능력을 과하게 쓴 탓인지 모르겠다.

“키이익…….”

마침내 괴조의 움직임이 멈췄다. 마지막까지 지긋지긋한 생명이다.

혹시 모르니까 다 태우자는 백성찬과 허재환의 주장이 힘을 입어 나는 보호막을 해제하지 않았다. 다들 캠프파이어하는 초등학생처럼 불타는 괴조를 지켜보았다.

한창 괴조를 태우는 와중에 초능력자들과 임상규를 비롯한 요괴대책팀 사람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공원의 참상에 혀를 내두르다가 박서원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점은 편했다.

도착한 초능력자 중에는 서다흰도 있었다. 서다흰은 광장에 페인트칠이라도 한 것처럼 가득한 괴조의 피를 보고는 곧바로 힘을 쓰기 시작했다.

충분히 태웠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보호막을 해제했다. 그에 맞추어 한평원이 비를 내렸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나는 태평하게 생각했다.

……도대체 작매는 저 몸으로 어떻게 박서원의 검들을 들고 온 거지?

“까아악.”

머리 위의 까치는 승리를 축하하는 것처럼 크게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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