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12화 (112/202)

# 112

32. 복수에 눈이 먼(3)

날갯짓을 할 때마다 거센 바람이 불었다. 날개를 활짝 편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컸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독수리를 닮았다. 부리가 무척 길다는 점을 빼면.

“키이이이익!!!!!!!”

괴조(怪鳥)는 낮게 날며 공원을 빙글빙글 돌았다. 울음소리가 마치 비명 소리와도 같았다.

새의 얼굴은 붉고 깃털은 검은색이 짙게 섞인 붉은빛이다. 날개 끝에는 독버섯처럼 노란 반점이 톡톡 찍혀 있었고, 꽁지깃으로 갈수록 반점이 커졌다. 거의 노란색으로 보이는 꼬리는 꿩처럼 길다.

저걸 어떻게 하라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잠실 타워에서 청룡을 봤을 때도, 목포에서 다리화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감상이었다.

저건 인간이 어찌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키이이이이!!”

괴조는 머리를 쭉 내밀며 두리번거렸다. 가로등에 내려앉았지만 작은 건물만 한 몸집에 비해 가로등은 너무나 작은 횃대였다. 가로등은 순식간에 찌그러졌고, 괴조는 짜증을 내며 바닥에 내려섰다.

“도망치세요!”

그나마 빠르게 정신을 차린 백성찬이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그 앞을 불개가 용맹하게 지키고 있었다. 불개는 괴조를 향해 컹컹 짖었다.

“네, 네!”

“다들 뛰어!!”

촬영 스탭들과 이름도 모르는 연예인들,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허둥거리며 반대쪽으로 뛰었다. 현실감각이 사라지는 기분이다. 그동안 수없이 비상근무를 나가고, 심지어 목도 없는 말 귀신을 상대한 적도 있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처음 이 능력을 각성했던 날이 떠올랐다.

죽는다.

그 생각을 처음 했던 날.

“키이이익!”

“형!!”

괴조가 날개를 활짝 폈다. 검붉은 깃털이 공원 한쪽을 완전히 가렸다. 부리를 앞으로 쭉 내민 게 금방이라도 누구 한 명을 물어 삼킬 것 같았다.

한평원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백성찬은 뛰쳐나가려는 불개를 붙잡으며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아, 몰라, 비상상황이야, 비상상황!”

“질러요!!!!”

얼굴이 화끈거렸다. 화끈거리다 못해 뜨거웠다. 하지만 동시에 청량한 바람이 불었다.

눈앞에 새빨간 불꽃이 펼쳐진 다음에야 왜 백성찬과 한평원이 파트너로 함께 움직였는지 깨달았다. 백성찬이 불을 지르고, 바람으로 번지게 한다. 이쪽을 덮치는 열기와 연기는 한평원이 능력으로 정화시킨다.

아무런 제한 없이 능력을 펼칠 수 있다면 합이 좋다. 심지어 일이 끝나면 진화도 가능하니까.

초능력으로 생긴 불은 태울 것 없이도 빠르게 번졌다.

“캬아아아!!!!!”

괴조는 불길을 보며 괴성을 질렀다.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던 발이 주춤했다.

괴조는 날개를 퍼덕여 바람으로 다가오는 불꽃을 날려 버렸지만 날아가진 않았다. 그것이 이상해서 유심히 바라보자 왼쪽 날개의 깃털이 마구잡이로 헤집어져 있었다. 깃털 색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지만 부상을 입은 게 확실하다. 아까 재난문자에서 초능력자들이 전투 중이라고 했었지. 누군가의 혼신의 작품인 모양이다.

나는 망설이다가 손을 움직였다. 불길과 저 괴물로부터 몸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보호막을 펼친 건 다른 쪽이다.

“빨리 가세요.”

도망가는 사람들의 꼬리에 붙었던 불길이 보호막에 막혀 방향을 바꾸었다.

“불 지를 거면 앞쪽으로만 보내요!”

“이게 내 맘대로 됐으면 벌써 11등급 됐겠지!”

내 말에 백성찬은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백성찬의 손을 떠난 불은 자유롭게 움직였다. 바람으로 제어하고 있다고는 해도 완벽하진 않다.

촬영 스탭들과 느긋하게 구경하던 사람들로 가득하던 공원 광장은 금방 불지옥으로 변했다.

“미쳤어, 불! 불!!”

그리고 불꽃 저 너머에서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재현아! 준비해!”

“네, 누나!”

“누구야! 불 지른 놈!”

“난데!”

백성찬이 대답했다.

“백성찬 이 미친 새끼! 평원아, 너 있지? 불 좀 꺼!”

“그래도 돼요?”

“그래야 우리가 움직일 거 아냐!”

흔들리는 불꽃 사이로 흙으로 만들어진 기둥이 솟아올랐다. 가시가 꽃처럼 피어났다. 저런 능력을 가진 초능력자를 알고 있다. 가끔 메시지를 주고받긴 했지만 얼굴을 본 건 처음 만났을 때뿐이다. 그땐 저것보다는 귀여운 크기였다.

흙으로 만들어진 가시는 하나같이 크기가 컸다. 대신 속도는 도서관 앞에서 박을 갈랐을 때보다 느리다. 공격용은 아니다. 가장 앞쪽, 제일 크기가 큰 가시 위에는 어쩐지 너덜너덜해 보이는 손요운과 이다혜가 있었으니까. 저게 저런 용도로도 가능했었군.

백성찬이 마구잡이로 뿜어내던 불이 멈췄다. 한평원은 그 불을 끌 물을 불러냈다. 물방울이 콧잔등 위로 툭툭 떨어졌다.

“왼쪽이요!”

그래. 이다혜가 있으면 이세빈도 있어야지.

손요운은 이세빈의 말을 듣자마자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어지간한 사람보다도 더 길고 커다란 부리가 두 사람을 후려치려다가 손요운에게 막혔다. 부리가 긴 만큼 가늘었다. 손요운은 온몸을 던져 부리에 매달렸다. 키가 큰 전직 소방관이 부리 중간에 뛰어서 매달리자 괴조의 머리도 그쪽으로 쏠렸다. 그 틈을 타서 이다혜가 이를 악물고 뛰었다. 이다혜는 원래 검을 썼을 텐데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맨 손이었다.

이다혜는 부리에 매달린 손요운을 떨쳐내기 위해 퍼덕거리는 괴조의 왼쪽 날개 끝을 잡았다. 이다혜의 무게 때문에 날개가 아래로 축 쳐지면서 상한 깃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난 신체 강화 능력도 없다고!”

그리고 불길이 조금씩 가라앉으면서 손요운과 이다혜가 있었던 기둥 옆으로, 좀 더 작은 기둥에 매달려 있는 허재환이 보였다. 허재환은 울상을 지으며 외쳤다.

날카로운 바람이 괴조의 날개를 헤집었다.

저 상처가 저렇게 생긴 거였군.

“캬아아아악!!!!”

괴조가 고통에 몸부림쳤다. 손요운과 이다혜가 견디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꽤 높은 높이에서 떨어졌지만 두 사람은 훌륭한 낙법을 선보이며 벌떡 일어났다.

왜 두 사람이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달려들었는지 알겠다. 저 멤버 중에서 신체 강화 능력이 있는 건 저렇게 두 사람뿐이었다.

“캬아아아!!”

“피해요!!!”

이세빈이 급하게 외쳤다. 허재환을 향한 소리였다. 허재환도 알아들었다.

“여기서 어디로?!”

괴조의 머리를 향해 날카로운 바람을 몇 차례 더 날렸지만 부리를 스쳤을 뿐 맞추지 못했다.

기둥에 매달려 있던 허재환은 괴조의 머리가 자신을 향하는 걸 보고 눈을 꾹 감았다. 뒤쪽에서 흙으로 만들어진 가시가 솟아났지만 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 같았다.

……뻔한 타이밍이다. 나는 거리를 가늠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다리화의 세계에서 기억을 조금 더 떠올린 이후로 능력이 조금 더 강해졌다.

능력을 쓸 때마다 내가 이 몸에 동화되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이 능력이 ‘정해준’의 소원이었다는 걸 안 이후로는 생각을 바꿨다. 전후 과정이 바뀌었다. 최초는 나를 이곳에 고정시킨 복숭아 때문이겠지만 그 이후는 아니다. 내가 ‘정해준’의 기억을 떠올려 ‘혼’이 흔들렸기에 이 능력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때마다 내가 쓸 수 있는 능력이 더 강해졌다. ‘혼’과 ‘백’이 합쳐졌기 때문에.

왜냐하면 이 능력은 ‘백’의 것이니까.

어차피 내가 이 ‘몸’을 쓰고 있는 건 사실이다. 여태까지는 제대로 규칙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무리였지만 지금은 조금 감을 잡았다. ‘내’가 흔들리지 않으면 ‘몸’의 능력 정도는 충분히 끌어다 쓸 수 있다.

콰앙!

“크윽……!”

허재환을 덮치던 부리가 보호막에 막혔다. 딱 봐도 평범한 새는 아니었던 만큼 보호막에 가해지는 충격도 컸다. 보호막은 그 한 번의 충격으로 깨졌다.

허재환이 다시 괴조의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었지만 김재현이 만들어 낸 가시가 괴조의 품을 파고들어 턱을 쳤다. 그 틈을 타서 허재환은 반쯤 떨어지다시피 하며 기둥에서 내려와 허둥지둥 달렸다.

쏴아아…….

불이 완전히 꺼지자 한평원은 비를 멈췄다. 바람에 베인 괴조의 날개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져 발에 고인 물웅덩이에 섞였다. 점성이 높은, 유난히 새빨간 색의 피였다.

백성찬은 홀딱 젖은 몰골의 초능력자를 보며 물었다.

“그쪽이 다야?”

이세빈이 있는 곳까지 달아난 허재환이 대답했다.

“몇 명 더 있었는데 날개 찌른다고 다쳐서 낙오됐고, 발 느린 몇 명은 뒤에 따라오고 있을 겁니다.”

“이거 게임도 안 되는 거 알지……?”

백성찬의 능력은 말 그대로 화력은 좋지만 사용하면 다른 이들이 움직일 수가 없다. 한평원의 능력은 저 새를 잡는 데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나마 공격이라고 할 만한 걸 할 수 있는 건 급히 달려온 손요운이나 이다혜, 허재환, 김재현이다. 일반적인 요괴라면 충분할 전력이지만 집채만 한 새를 상대로는 부족하다.

“키이이이익!!!”

괴조는 긴 부리를 딱딱 부딪치며 인간들을 노려보았다.

“왼, 오, 위! 위요!”

“아, 씨발, 진짜, 개, 같, 네!”

이세빈이 열심히 뒤에서 공격 방향을 알려 주었지만 가속 능력을 가진 이다혜만 가까스로 피했다. 손요운을 덮칠 것 같은 공격에는 내 보호막이 힘을 냈다. 속이 진탕 뒤틀렸다.

“이거 이대로 안 될 것 같은데요.”

한평원이 불길하게 중얼거렸다.

“형, 임 팀장님 전화 받아요?”

“아니, 아예 연결이 안 돼.”

“재난문자로 장소는 특정됐죠?”

“어, 여기로 모일 거야. 빨리 와야 하는데…….”

미꾸라지처럼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가는 이다혜와, 보호막 때문에 잡아먹지 못하는 손요운에게 짜증 났는지 괴조가 눈을 부릅떴다.

“키이이익!!!!”

고막을 자극하는 높은 괴성과 함께 괴조가 날개를 움직였다. 이다혜가 기겁했다.

“아직도 날아? 안 돼! 쟤 날면 망해!!”

“이런……!”

손요운마저 거칠게 인상을 찌푸렸고 김재현이 급하게 공격을 했지만 그게 다였다.

괴조가 본격적으로 날개를 퍼덕거리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이다혜가 돌풍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졌다. 급하게 이다혜 위에도 보호막을 쳤다. 괴조의 날카로운 발톱이 이다혜를 덮쳤다가 보호막에 박혔다.

“힉!”

이다혜가 깜짝 놀라며 뒤로 더듬거리며 물러났다. 나는 급하게 물었다.

“저놈 공격할 방법 있어요?!”

손요운이 대답했다.

“아뇨, 없어요.”

“야, 요운아!”

“무기도 없잖아요! 언니, 일단 뒤로 빠져요!!”

이세빈이 잠깐 숨을 고르며 외쳤다. 이다혜는 이를 으득으득 갈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씨발…….”

괴조는 보호막을 놓고 날개를 퍼덕여 날아올랐다.

“캬아아아!!!”

그래도 그 전에 날개를 공격했던 게 유효했는지 괴조는 난다기보다는 펄쩍 뛰는 모양새가 되었다.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 틈을 노려 김재현과 허재환이 몇 번 더 공격을 성공시켰다.

그렇지만 그렇게 늦춘 건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캬아아아아악!!”

괴조는 하늘을 날아오르며 괴성을 내질렀다. 커다란 날개가 펄럭일 때마다 해를 가렸다. 덕분에 해를 등지고 있어 그림자가 진 괴조의 몸은 새까맣게만 보였다. 다만 바닥에는 날개에서 떨어진 피가 시뻘겋게 고여 있을 뿐이다.

긴 부리를 쩍 벌린 괴조는 내지르는 괴성을 듣지 않아도 잔뜩 화가 나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하늘에서 저 괴조가 공격하기 시작하면 몸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그대로 도망간다면? 그럼 더 문제지. 여긴 천만 명의 인간이 살고 있는 도시니까.

더군다나 새가 높이 날아오르면 공격할 방법이 없다. 저 사람들이 어떻게 날개에 부상을 입혔는지도 신기할 판인데.

“큭, 젠장!”

손요운마저 결국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괴조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땅에 서 있는 인간들을 내려다보았다. 이 게임의 승자는 자신이라고 선언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

이세빈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세빈의 능력은 찰나의 미래를 보는 것. 무엇을 봤기에?

의문은 금방 풀렸다.

“키이이이이이!!!!!!”

괴조가 여태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기겁한 이다혜가 능력까지 써 가며 몸을 피했고, 손요운은 아슬아슬하게 범위를 벗어났다.

괴조는 바닥에 엎어져 마구 몸부림쳤다. 긴 부리가 마구 흔들렸고, 퍼덕거리는 날개까지 합쳐져 괴조는 무너진 건물 잔해 같은 모습이 되었다. 시각적인 충격이 굉장했다.

“뭐, 뭐야?”

백성찬이 당황한 채 중얼거렸다. 난데없는 괴물의 발작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보았던 이세빈이 외쳤다.

“눈! 눈이요!”

눈?

거대한 날개가 푸드덕거렸다. 제대로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가까스로 괴조의 눈에 무언가 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새빨간 피가 철철 흘러넘쳤다.

“저거…….”

“검이잖아?”

괴조의 왼쪽 눈에 검이 박혀 있었다. 완전히 박히지 않고 반 정도 박혀 있던 터라 검은 괴조가 몸부림칠 때마다 흔들려서 더욱 고통을 주었다.

“키이이이이!!!!”

괴조의 날개와 눈에서 나온 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자신이 버르적댈수록 아프기만 하다는 걸 알았는지 괴조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괴조의 발이 피 웅덩이를 밟고 일어났다. 깃털에 있는 노란 반점 위로 새빨간 핏자국이 번졌다.

마침내 괴조의 눈에 박힌 검이 제대로 보였다.

검에 매달린 붉은 술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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