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31. 이국에서 온 신사(6)
전혀 생각지도 못한 상황을 직면한 인간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아예 돌아 버리거나 돌아 버리다 못해 냉정해지거나.
몰랐는데 나는 후자였던 모양이다.
나는 차분히 얘기했다.
“왜 청룡님 아드님께서 인간들 틈에서 월급이나 받아 가며 일하는지도 모르겠고, 그걸 왜 지금 밝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하다 보니 기분이 나빠졌다. 후자인 줄 알았는데 전자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차이가 있나?
내 말에 이산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제가 특수과에서 일한 건 해준 씨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전 여기서 해준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산래는 당황하며 말을 이었다.
“아버지라면 몰라도 저는 해준 씨를 돕고 싶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여기에 두 사람을 부를 일도 없었겠지요.”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이산래를 보았다. 본인 입으로는 나이가 많지 않다고 했지만 그거야 인간이 아닌 자들의 기준일 거고.
여태 만나 온 것들을 보건대, 인간보다 나이가 많은 것들은 다들 머리 한구석이 돌아 있었다. 이산래도 그러지 않을 거란 보장은 없다.
“사실 여태 이런 일이 생기면 죽은 척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는데…….”
봐라. 기준이 다르다니까.
“이런 일이요?”
이산래는 콘코바르를 슬쩍 보았다.
“그, 서양 요괴와는 상성이 안 좋아서 말입니다…….”
“자, 잘, 모르, 시는…… 것, 뿐, 이, 잖아요…….”
지켜보던 오늘이 한마디 했다.
얼씨구.
“큼, 그, 그야 엄마한테, 아니, 어머니께 중국과 한국의 주술은 배웠지만 서양 쪽은 못 배웠는걸요.”
얼씨구…….
나는 기가 막힌 얼굴로 물었다.
“실례지만 나이가?”
생각보다 더 어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먹을 만큼은 먹었습니다.”
나는 전혀 믿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팀장님이 그렇다면 그렇다고 해 두죠.”
“…….”
이산래는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큼큼, 어쨌든 그래서 제가 예상한 것보다 일찍 정체를 밝히게 되었다고요.”
“시기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시기보다는…… 해준 씨가 답답하고 짜증 낼 것 같아서요.”
이산래는 무릎 위에 있는 새끼 사자의 배를 간질였다. 새끼 사자들은 낑낑거리며 이산래의 손바닥에 머리를 비벼 댔다.
“저도 다 알려 드리고 싶은데 지금은 부족하거든요.”
“……뭐가요?”
“이것저것요. 그래도 다리화의 여의주 덕분에 많이 채워졌긴 한데, 조금만 더 쌓읍시다.”
이산래는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덕이나 업이나 상관없습니다. 물론 덕을 쌓는 쪽이 더 좋긴 한데 그건 제 입장이고 해준 씨한테는 아무래도 좋을 겁니다.”
이산래는 잠깐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정 아니면 박서원 씨처럼 다 죽이고 다녀도 됩니다.”
“켕!”
느긋하게 뒹굴며 이산래의 손길을 즐기던 새끼 사자가 몸을 말고 깨갱거리더니 새빨간 피를 토했다.
“티, 팀장님!”
오늘이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산래는 소매로 입 주위를 닦으며 손을 내저었다. 하얀 셔츠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괜찮습니다.”
저 말을 오늘 몇 번이나 듣는지 모르겠다. 앞서 들었을 때는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겠지, 싶었는지 이번은 다르다. 느닷없이 피를 토했는데 괜찮다고? 개소리를 하는 건 용의 새끼도 똑같구나.
이산래는 피를 토한 탓인지 조금 창백해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직접적으로 말하는 건 역시 무리네요. 어쨌든 해준 씨, 힘들어도 조금만 더 쌓으세요.”
이산래는 이해 가지 않을 정도로 간절하게 말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만큼 절실한 얼굴이었다.
“제가 이해한 건지 모르겠다만……. 지금 팀장님은 제 상황을 알고 있는 겁니까?”
“해준 씨가 알고 있는 것보다 제가 더 많이 알고 있을걸요.”
이산래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낑낑거리던 새끼 사자를 달래는 손이 다정하다.
“해준 씨가 충분히 쌓으면 제가 아는 건 다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 전까지는 답답해도 참아 주셨으면 합니다.”
나는 가만히 이산래를 보다가 물었다.
“대가가 필요한 겁니까?”
“네?”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른다고 들었는데.”
“아…….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금 다릅니다. 제가 해준 씨를 도우려는 일은, 이미 일어난 일에 끼어드는 것에 더 가까워서……. 굳이 말하자면 통행료죠.”
점점 갈수록 일이 복잡해지는 것 같은데 그냥 내 기분 탓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집에 돌아가는 것뿐인데.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나?
“그럼 그…… 쌓는 건 뭘 어떻게 하면 됩니까.”
제대로 말해 주지 못하는 게 미안했는지 내 눈치를 보고 있던 이산래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런 이산래를 보고 있으니 다시 나이가 궁금해졌다. 현 경북도지사의 아버지가 그물에 걸린 청룡님 아들을 구해준 게 백 년도 안 된 일이긴 하다. 본인 입으로 어릴 때라고 했으니……. 사진이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서 나가면 찾아봐야지.
“지금 하는 대로 계속하면 됩니다. 흔들리지 말고요. 그것만 주의하세요.”
“…….”
“……솔직히 이해가 안 가시죠?”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네.”
“제가 더 말해 주고 싶어도 이게…… 좀 그렇거든요.”
“제, 제가, 물, 어, 도요……?”
가만히 듣고 있던 오늘이 끼어들었다. 이산래는 오늘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대답했다.
“오늘 씨까지 계산하면 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건 해준 씨가 온전히 쌓는 게 낫습니다. 그 이후의 일까지 고려하면요.”
이산래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기 싫어서 좀 더 뒤에 말하려고 한 건데. 저 서양 요괴 때문에 다 꼬여 버렸네요.”
“……도대체 왜 특별수사과에서 일하고 계신 겁니까? 서양 요괴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제가 용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해도 진정한 용이 되려면 수련을 하고 덕을 쌓아야 합니다.”
이산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엄마, 아니, 어머니는 어디 산에 들어가서 불경이라도 읽으라고 하셨는데, 저는…….”
눈이 반짝 빛났다.
“인간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 모습은 마치 어린아이가 내 꿈은 파일럿이라고 말하는 모양새를 닮아 있었다.
“그래서 10년 전부터 특별수사과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여기서라면 제가 배운 걸로 인간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물론 같은 존재로 오래 있는 건 좀 힘들어서 두 번 정도 죽음을 위장했던 적도 있지만요.”
“그거 사기 아닙니까?”
“인식을 흐려 놔서 완전히 다른 존재로 보니까 괜찮습니다. 아, 물론 특별수사과에는 감이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이상한 소문이 돌긴 했지만…….”
“……사, 사건이, 막, 혀… 이, 있으면, 나, 타, 나는, 해, 해결, 사, 유, 령, 이요……?”
“네, 그거요.”
이산래는 씩 웃었다.
시원스럽기까지 한 웃음이었지만 나는 따라 웃어 주지 못했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풀리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한숨만 쉬었다.
“저는 왜 도와주려고 하는 겁니까? 인간을 돕고 싶어서?”
“그것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고요.”
이산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빠랑 싸웠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해준 씨거든요. 아, 해준 씨 말고, 해준 씨요.”
* * *
콘코바르의 머리를 가지고 놀던 종이인형들이 춤을 멈추고 다가왔다. 이산래는 떨떠름한 얼굴로 콘코바르의 머리를 보았다.
“저 아이들은 셋째 형과 넷째 형의 종이인형이거든요? 귀신과 삿된 것을 쫓아내는 아이들인데…….”
오늘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기, 기분, 나, 빠요…….”
콘코바르의 얼굴은 궤짝 속에서 나왔을 때와는 달라져 있었다. 생김새보다는 인상이 바뀌었다. 너저분했던 회색 머리는 윤기가 돌고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시체처럼 창백했던 피부도 혈색이 돌았다.
“하하, 젊은이들이여, 이곳은 아주 멋진 세상이야!”
심지어 즐겁게 웃기까지 했다.
“힘을 줄이려고 했던 건데…… 왜 이렇게 됐지?”
이산래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기요, 콘코바르 씨.”
“내 평생 이렇게 개운했던 적이 없네!”
“……하랑 씨한테 물어보면 알려나.”
“인, 간성이…… 회, 회복된, 건, 아닐… 까요?”
“인간성이요?”
오늘이 더듬거리며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하, 하랑, 씨가, 금, 고아, 주문과…… 궤, 궤짝에, 있, 던, 시간… 때문에, 이, 인간, 성이, 생, 긴, 것, 같…… 댔, 으니까, 요…….”
“그런데 여기서 힘을 깎아내리고 주문을 강하게 해서 인간성이 더 회복되었다? 일리가 있어요.”
이산래는 고민하다가 손을 뻗어 콘코바르의 머리를 잡았다. 어쩐지 아까보다 더 손대기 싫어하는 모습이었다. 이해가 되긴 하는데…….
꼭 머리채를 잡아야 하는 걸까? 아니지, 거길 잡는 게 다른 부분과 닿지 않으니 훨씬 낫다.
“콘코바르 씨.”
“응? 무슨 일인가, 젊은이여!”
“아까 콘코바르 씨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이가 누군지 아십니까?”
“모르네!”
콘코바르는 경쾌하게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 몸을 잘 써 주면 좋겠군.”
“……콘코바르 씨의 몸이잖아요? 되찾을 생각은 없고요?”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서 살 수 있다면 몸 따위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되었네, 더 필요한 사람이 잘 써 주면 되는 거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지금 내 표정이 이상하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이산래와 오늘의 표정과 비슷할 테니까.
이산래는 무슨 더러운 쓰레기를 보는 눈으로 콘코바르를 보았다.
“일단…… 돌아갑시다. 하랑 씨에게 맡기면 뭐라도 알게 되겠죠.”
“업무 전가 아닙니까?”
“전 서양 요괴 전문이 아니라서…….”
“어머님께서 그쪽은 안 가르쳐 주셨습니까?”
“그, 가르쳐 주시려고 했는데.”
이산래는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어쨌든 돌아가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제가 콘코바르 씨의 몸을 쫓아냈다고 하시면 됩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말만 보면 분명 맞는 말인데 이상하게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드는 건 뭘까.
“이렇게까지 기운을 죽여 놨으니 아까 그 방법으로 찾아오는 건 무리일 겁니다. 아까는 몸이 머리에게 돌아가려는 항상성을 이용한 걸로 보이니까요. 몸이 다시 오기 전에는 이 머리를 어떻게 할지 결정이 나겠죠.”
이 세계에 들어온 것처럼 이산래의 세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종이인형들로 가득한 세상이 사라지고 특별수사과 연구소의 지하가 나타났다.
“아, 초능력자들은 괜히 불렀네요.”
이산래는 그런 태평한 소리를 하며 콘코바르의 머리를 손끝으로 잡은 채 방을 나섰다. 나는 그 뒤를 터벅터벅 따라가다가 물었다.
“그럼 그때 묵주에 대해 경고한 것도 절 알기 때문이었습니까?”
“묵주? 아, 장군님이요?”
“네.”
이산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쐐기로 바뀐 거라서 자주 사용했으면 안 좋았을 겁니다.”
“쐐기라고요.”
오늘이 고대인들의 기준은 돌아 있다고 했었는데 그 말이 진짜였다.
김유신은 그 묵주를 주며 능력을 쓰는 데 도움이 될 거라 했다. 김유신의 가호가 깃든 묵주를 쓰면 ‘혼’이 흔들렸으니 ‘정해준’과 동화되었다. 그 때문에 능력이 강해지는 거라면 그래, 능력을 쓰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지.
역시 미친 신라인들은 상종해서는 안 될 족속들이다. 하지만 김유신이 내게 그럴 이유가 있던가?
그날 일을 곱씹다 보니 좀 억울해졌다. 묵주도 묵주지만 그날 연구소에 갇혀있던 시간이.
“그 장군님 연배면 팀장님 아버지랑 아실 것 같은데. 그렇게 덜덜 떨고 있을 게 아니라 말 좀 해 보시지 그랬어요?”
“아니, 그야…….”
이산래는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해준 씨도 처음 뵙는 아버지 친구라면 어렵지 않겠습니까?”
“…….”
할 말이 없었다.
“……설마 아사달도?”
“전 인사만 잘하면 되죠.”
“팀장님, 나이가?”
이산래는 질문을 듣지 못한 것처럼 딴소리를 했다.
“용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고, 저도 아직 수련 중이라…….”
내가 미덥지 못한 눈길을 보내자 이산래는 황급히 덧붙였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일하는 중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힘을 쓰기로 해서요.”
“아, 네. 그러시군요.”
“진짜라고요…….”
이산래는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