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07화 (107/202)

# 107

31. 이국에서 온 신사(5)

모든 건 순식간에 일어났다. 허공을 가르고 말이 나타나고, 말 위에 탄 남자가 주위를 둘러보고 목표물을 정했다.

몸이 머리를 찾으러 올 거라 생각했지, 설마하니 스스로 새 머리를 찾았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말에 탄 남자는 손에 쥔 도끼를 휘둘렀다. 녹이 슨 도끼는 둔기에 가까웠다.

“…….”

이산래는 웃으며 그 도끼를 맞이했다.

* * *

시야가 뒤틀렸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알록달록한 색이 보였다. 치덕치덕 물감을 바른 종이를 반으로 접어 펼쳤을 때와 비슷한 색이 눈앞에 번졌다. 어디선가 들리는 아이들의 노랫소리에 시야가 더욱 엉망이 되었다.

“금환을 떼굴떼굴.”

툭.

뭔가 머리에 부딪혔다.

아프진 않았지만 그 충격 덕분에 몽롱한 정신을 붙잡을 수 있었다. 흔들리던 시야가 가라앉았다.

고개를 숙이자 발치에 주먹만 한 작은 금색 공이 굴러가고 있는 게 보였다.

아니…… 이걸 굴러간다고 말할 수 있나? 이게, 공이기는 한가?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공감각이 모조리 뒤섞인 괴괴망측한 풍경이었다.

내 머리를 치고 굴러가는 공도 그렇고, 하늘의 해와 달도, 눈에 보이는 사물 전부가 민화 속 그림처럼 생겼지만 삐뚤빼뚤했다. 마치 어린아이가 낙서한 것처럼. 색이 덜 칠해진 곳도 있었고 어떤 건 그리다 말기도 했다.

나는 발끝으로 살살 공을 차 보았다. 그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무게도 있고 부피도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나는 분명 공포 게임 최종 스테이지처럼 생긴 방에 서 있었다. 목포 외곽에 있는 지어진 지 오래되지 않은 특별수사과의 연구소 지하에.

이산래가 말하는 머리를 쥐고 서 있었고, 거대한 말을 탄 사내가 도끼를 휘둘렀다. 나는 보호막을 두르고 있었다. 내 옆에는 오늘이 있었고……. 잠깐, 보호막은?

“명월도 굴러가고 별들도 반짝반짝.”

보호막은커녕 주위에 오늘과 이산래도 보이지 않았다. 한껏 멍청해진 기분을 만끽하고 있는데 노랫소리와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발치에 굴러다니는 공과 마찬가지로 삐뚤빼뚤 그려진 탈을 쓴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을 추는 움직임도 진짜 사람처럼 매끄럽지 않고 인형극의 인형들처럼 동작이 툭툭 끊어졌다. 애초에 사람이라 하기에도…….

그래. 저건 종이인형이다.

“깔깔깔!”

“어흥!”

어린아이 모습을 한 종이인형들이 웃으며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종이인형들을 겁주려는 건지, 아니면 놀아 주는 건지 얼굴이 붉고 흰 털을 가진 사자가 울부짖었다. 사자인형은 가까이 있는 종이인형에게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들다가도 자기 꼬리를 쫓아 빙글빙글 돌았다.

“곱슬머리 감빛 얼굴 못 보던 사람들이.”

둥, 둥, 둥.

다른 한쪽에서는 북소리에 맞추어 파란색 가면을 쓴 종이인형들이 춤을 췄다. 그 주위를 황금색 가면을 쓴 종이인형들이 구슬 채찍을 휘두르며 빙글빙글 돌았다.

이산래는 그 가운데에 서 있었다.

“구슬 채찍 휘두르며 귀신을 쫓아낸다.”

황금색 가면의 종이인형들이 목청 높여 노래를 불렀다.

무지막지한 기세로 도끼를 휘두르던 사내의 몸이 지금은 동상처럼 굳어 있다. 사내의 몸에 붙어 있는 머리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달아나며 춤추다가 으쓱으쓱 늦은 걸음.”

황금색 가면의 종이인형들이 재주를 넘으며 노래를 불렀다. 이산래는 그 노래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썩 물렀거라!”

흡사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와 닮아 있었다.

그쪽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있던 사내는 어디론가 튕겨 나갔다. 콘코바르의 몸을 차지한 금발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는 버둥거리며 저항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말과 사내는 칼로 도려내진 것처럼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

똑 잘린 세계는 불길한 검은색이었다. 뭔가에 홀린 듯 그 자리를 바라보고 있자 종이인형들이 노래를 부르며 팽글팽글 돌았다.

종이인형들의 발길이 스칠 때마다 구멍이 메워졌다. 새싹이 돋은 땅은 종이인형들이 사뿐사뿐 밟아 다졌다.

“북소리 동당동당 바람 소리 살랑살랑.”

파란 가면을 쓴 종이인형과 황금색 가면을 쓴 종이인형들이 기세를 더욱 높이며 노래를 불렀다.

“너울너울 춤을 추는 봉황새와 같아라.”

“남북으로 뛰어다니며 끝없이도 춤을 추네.”

종이인형들이 춤을 추며 다가오자 이산래는 그들에게 아직 손에 쥐고 있는 콘코바르의 머리를 건네주었다. 콘코바르는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이 괴물들은 뭔가! 안 돼!”

본인도 괴물이면서 괴물 차별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이 종이인형은 괴물이라기보다는…….

“털이 모두 떨어지고 먼지까지 묻었구나.”

하얀 털을 가진 사자가 뒤뚱뒤뚱 이산래에게 다가왔다. 사자의 시중을 드는 것처럼 함께 걷던 어린아이 종이인형들이 까르르 웃으며 이산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흰 사자는 이산래의 몸을 휘감았다. 조잡한 애니메이션처럼 엉성하게 그려진 사자의 털이 휘날렸다.

“하하하!”

집채만 한 사자에게 반쯤 파묻힌 이산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산래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종이인형들의 노래를 따라 불렀다.

“머리를 흔들면서 꼬리마저 휘두르니.”

이산래의 노래에 사자가 기분 좋게 투레질을 했다.

“어흥!”

이산래는 사자를 꼭 한 번 껴안은 다음 등을 툭툭 치며 다른 곳으로 보냈다.

“온갖 짐승 어른 되는 네가 바로 사자런가.”

종이인형들이 노래를 이어 부르며 사자를 이끌었다.

사자와 아이들이 떠나고, 이산래는 두리번거리다가 작게 웃었다.

“오늘 씨, 그 아이들은 그 놀이밖에 모르니 무시해도 됩니다.”

종이인형들은 오늘의 주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금색 공을 주고받으며 놀고 있었다.

종이인형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오늘이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 이, 분들을, 어떻, 게…….”

“정말 괜찮다니까요.”

이산래는 오늘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

“쉬이, 저리 가서 노세요.”

이산래가 종이인형들을 토닥이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자 종이인형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을 가지고 놀던 종이인형들은 노래를 부르며 깔깔 웃다가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고요한 바다 물결엔 고래도 춤을 춘다.”

노랫소리가 멀어졌다.

다른 곳으로 우르르 달려간 종이인형들은 그곳에서 또 다른 종이인형 무리와 어울려 즐겁게 춤을 췄다. 종이인형들 사이에서 콘코바르의 비명 소리가 간간이 들리는 점을 빼면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산래는 연희를 즐기는 종이인형들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오늘이 비틀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가요?”

“네, 네?!”

오늘이 화들짝 놀라며 이산래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이산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리화의 영역과는 많이 다르죠?”

물감을 풀어놓은 것처럼 오색빛깔로 빛나는 하늘이 보였다. 이산래의 머리 위로 해와 달이 보였다.

생긴 건 좀 다르긴 해도, 다리화의 영역에서도 해와 달이 함께 떠 있었다.

“정식으로 소개하겠습니다. 이렇게 인사하는 게 도대체 몇 년 만인지 모르겠네요…….”

이산래는 싱긋 웃었다.

“저는 서해용왕 이목과 남해용왕 적안홍성제왕 오윤의 딸, 오경의 다섯째 아들 이산예라고 합니다.”

그러고 이산래는, 어쩐지 즐거운 기색으로 덧붙였다.

“아직 수련 중인 이무기랍니다.”

* * *

“이곳은 제 형제의 세계도 합쳐진 터라 좀 복잡합니다. 원래 이렇게 산만한 곳이 아닌데…….”

이산래는 무슨 덜 치운 방을 보여 주는 사람처럼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아직 제가 어려서 그런지 형들이 걱정을 많이 하더라고요.”

아직도 희미하게 노랫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풀밭에 앉은 이산래는 당당하게 말했다. 너무 당당한 나머지 내가 잘못 들은 건 줄 알았다.

“실례지만 연세가……?”

“아마 이 땅에 있는 이무기 중 가장 어릴 겁니다.”

나는 떨떠름하게 물었다.

“이무기가…… 또 있습니까?”

“몇 마리 안 남긴 했는데 있긴 하죠.”

“그럼 다리화에 대해 잘 알던 것도……?”

“같은 이무기니까 그렇죠. 아, 완전히 같은 건 아닙니다만.”

이산래는 계단에 구르러 가지 않겠냐고 말했을 때처럼 산뜻하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이산래의 입에서 나온 말과 말투를 쉽게 매치하지 못했다.

“다리화는 뱀이 오랜 시간을 수련한 것이고, 저는 용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다를 수밖에 없죠.”

이산래가 그걸 설명이랍시고 하는 말이 아니었으면 했다. 전혀 설명이 아니니까.

“…….”

묻고 싶은 게 많다. 너무 많아서 뭐부터 물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었다.

새끼고양이처럼 생긴 새끼 사자 몇 마리가 캉캉거리며 뛰어와 이산래의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다. 이산래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새끼 사자들을 쓰다듬었다.

나는 눈을 꾹꾹 눌렀다.

“어디서부터 물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오늘은 버둥거리는 새끼 사자들에게 신경을 빼앗기고 있었다. 솔직히 내 눈에는 정해영의 그림 실력처럼 거북이인지 사자인지 알아보기 힘들지만 두 사람에게는 아니었던 것 같다.

집에 가고 싶다.

옆에 앉아 있는 오늘을 보았다. 오늘은 이곳에 불려 왔을 때 어리둥절해하긴 했지만 이산래의 소개를 들었을 때 놀라진 않았다.

“오늘 씨는 알고 있었습니까?”

이산래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오늘 씨는 볼 수 있는 인간이니까요.”

“볼 수 있다는 건…….”

“인간마다 다르긴 한데, 오늘 씨는 꽤 잘 보니까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제 존재를 눈치채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저, 저도, 놀, 랐, 어요…….”

오늘은 입사했더니 상사가 인간이 아니라 기절할 뻔했다고 했다. 그래. 그건 그럴 만도 하지. 그 자리에서 사표를 던지고 오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그건…… 그렇다 칩시다. 그럼 왜 지금에서야 저한테 밝히는 겁니까?”

“원래 저도 저 일이 아니었다면 좀 더 시간을 들여서 말해 드리려 했습니다.”

이산래는 가면 쓴 종이인형들을 가리켰다. 신명 나게 춤을 추고 있는 종이인형들은 공 대신 콘코바르의 머리를 가지고 주고받으며 놀고 있었다.

콘코바르는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지만 종이인형들은 물론, 여기 앉아 있는 이무기 하나와 인간 두 명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지금은 저런 머리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산래는 시선을 돌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은 해준 씨가 궁금해하는 걸 알려 드릴 수가 없거든요.”

“……제가 뭘 궁금해할 줄 알고요?”

“그거야 우리 아버지한테 물으려던 거겠죠.”

사고가 잠깐 멈췄다. 너무 많은 정보가 몰려왔다.

“아버, 지요?”

“네, 잠실의 청룡님이요.”

다시 미간을 꾹 눌렀다.

“잠실 청룡님은 동해용왕님 아니셨습니까?”

“원래는 서해용왕입니다. 지금은 좀 사정이 있어서.”

“……그래요. 그렇다 칩시다.”

잠실 일조권을 두고 이산래가 청룡에게 왜 그렇게 당당히 따질 수 있었는지 비밀을 알게 되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 이거지.

“청룡님 아들이라고요…….”

입 안에 맴도는 질문이 너무 많았고, 그중에서 뭐부터 물어봐야 하고, 물어봐도 괜찮은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나는 이산래를 보았다.

평소처럼 흐트러짐이 없는 단정한 생김새다. 날카로운 눈매는 안경으로 가려져 있었고, 유난히 새까만 머리카락을 포함하더라도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다.

하긴 그동안 만났던 영물들도 생기기는 인간이었다. 호랑이나 곰, 까치나 청룡도. 심지어 신선비조차 얼굴이 좀 창백했을 뿐 잘도 등산객 흉내를 내지 않았던가.

“저, 해준 씨?”

청룡의 아들이라는 이산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나는 혹시나 싶어 물었다.

“저기, 팀장님.”

다리화처럼 두 번 불러야 되는 건 아니군.

“네?”

“혹시 그, 경북도지사 김개천 씨네 아버지가 구해 줬다는 청룡님 아들이 혹시…….”

“윽, 제가 그땐 좀 어렸거든요!”

이산래의 얼굴이 처음으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종이인형들이 부르는 노래는 『삼국사기』에 실려있는 최치원의 <향악잡영> 5수이며, 한글 풀이는 《조선연극사(김재철)》를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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