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05화 (105/202)

# 105

31. 이국에서 온 신사(3)

“앞으로 해준 씨는 그 두 개만 잘 들고 있으면 다른 부적은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이산래는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태 친절하게만 느꼈던 미소였는데 장소가 장소라서 그런지 조금 소름이 끼쳤다. 그냥 해 주는 소리겠지? 배경이 이 모양이라 괜히 신경 쓰이는 거겠지?

이산래의 말은 오늘에게도 들렸을 게 분명했다. 바로 옆에 붙어 있었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복도 끝에 시선을 던질 뿐 이산래를 돌아보지 않았다. 분명 여의주는 보고할 때 뺐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이산래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역시 볼 수 있기 때문에?

“아, 여의주의 소유에 대해서 걱정하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그건 오늘 씨와 해준 씨 겁니다. 저도 어디 가서 얘기할 생각 없습니다.”

과연 이산래를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 걸까?

의심스러운 눈으로 이산래를 봤지만 이산래는 여상히 웃었다. 과연 이산래가 볼 수 있는 건 어디까지일까?

그래. 생각해 보니 김유신이 만졌던 묵주를 쓰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한 건 이산래였다. 그럼 최소한 오늘만큼은 볼 수 있다는 건가?

하지만 오늘은 이산래가 한 말을 듣고 나서야 그럴 수도 있어요, 하고 설명하지 않았던가. 머리가 복잡해진다.

결과적으로 그 묵주를 쓰지 않는 게 맞긴 했었다. 이산래는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건가? 최소한 이산래가 ‘나’를 어디까지 보았는지 알고 싶었다.

“팀…….”

내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말소리가 들렸다. 열렸던 입이 다물렸다.

“…….”

세 명 다 봉인해제실로 가던 발을 멈췄다. 기분 탓인가? 기분 탓이었으면 좋겠는데.

발이 멈추자 말소리가 좀 더 선명해졌다. 기분 탓이 아니군. 낮은 목소리가 혼자서 떠들고 있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요.”

이산래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은 얼굴로 복도 끝을 보았다.

“해준 씨, 궤짝이 말을 걸어도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살짝 인지부조화가 오는 말이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궤짝과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리고 제가 신호를 주면 저와 궤짝을 감싸도록 보호막을 치세요. 그건 차단막이라고 하던가요?”

“팀장님은 어쩌시려고요?”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차단막은 말 그대로 차단막이다. 내용물은 바깥과 분리된다. 안에 있는 것은 바깥과 단절된다.

지금 이산래는 스스로 정체불명의 궤짝과 갇히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아, 두 겹 다 치세요.”

“아니, 그럼 진짜 어쩌시려고요?”

이산래는 똑같은 말을 한 번 더 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

영 못 미더웠지만 수사관들이 이산래를 향해 보이던 믿음을 떠올렸다. 오늘도 가만히 있고 뭔가 방법이 있으니 저런 말을 하겠지.

나는 어쩔 수 없이 떨떠름한 얼굴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진짜 괜찮은 거겠지?

봉인해제실로 이어지는 복도 정 중앙에는 새빨간 색으로 한자로 보이는 글자가 연이어 적혀 있었다. 적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유난히 새것처럼 보였다. 아까 수사관들이 작업했다던 게 분명했다.

“……는가?”

말소리가 좀 더 선명해졌다. 웅웅 울리던 목소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되었다.

“거기 누구 없는가?”

낮은 남성 목소리였다. 성악가처럼 웅장한 목소리였다.

“오, 드디어!”

목소리는 우리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과장된 음색으로 외쳤다.

“누구인지 모를 방문자들이여, 나를 여기서 꺼내 주지 않겠나?”

덜컹거리는 소리가 목소리를 뒤따랐다. 자물쇠가 잘그락거렸다.

“…….”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빌어먹을 ‘정해준’은 왜 이딴 능력을 얻어서 이 고생을 하게 만드는 거지?

“두려워하지 말게, 젊은이여! 아니, 젊은이인가? 뭐 어떤가!”

목소리는 쾌활하게 말했다.

“젊은이들이여, 들어오도록 하게나. 나를 도와준다면 내 가장 진귀한 것을 주도록 하지.”

이산래는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말했다.

“오늘 씨는 늘 하던 대로 해 주세요. 보다가 빠져나오는 게 있으면…….”

“네…….”

이산래가 제일 앞에, 그다음은 오늘. 내가 마지막에 섰다. 이산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이었지만 망설임 없이 문을 열었다.

서울에서 봤던 연구소 지하와 별반 다를 게 없는 풍경이 펼쳐졌다. 사방에 써진 글자와 부적들이 좀 더 새것 티가 나긴 했지만 사실 이즈음 되면 그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방 가운데에 놓은 낡은 궤짝이 흔들렸다.

“오호, 여럿이서 찾아왔군. 세 명? 네 명인가? 그래도 괜찮네.”

궤짝은 중후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이산래는 그걸 무시하고 상자 앞에 섰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부적이 덕지덕지 붙은 낡아빠진 궤짝이 크게 움직였다. 바닷속에 오래 있어서 그런지 비린내가 났다.

“사례는 충분히 할 테니 나를 도와주지 않겠는가?”

이산래가 자리를 잡았다. 차단막은 이산래와 궤짝을 감싸도록, 두 겹.

능력을 쓰기 전 이 능력을 계속 써도 괜찮은지 잠깐 고민이 들었다. 이제 와서 이런 고민을 하기에는 많이 늦었지만.

‘정해준’은 정말 무슨 생각으로 이 능력을 얻은 것일까. 10년 동안 나와 비슷하게 살았겠거니 했는데 생각해 보면 그럴 리가 없는 게 당연했다.

그 녀석은 10년 동안 혼자였다. 혼자서 살아남았다.

그 녀석과 나는 별개다. 이름이 같고, 생일이 같고, 가족마저 같지만 그 녀석의 인생과 ‘나’는 다르다. 전혀 다르다. 같은 사람일 수가 없다. 전혀 다른 인물.

‘정해준’의 인생이 아무리 안타까워도 나는 그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중심을 잡고 있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벽을 떠올리자.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굳건한 벽.

“나는 진솔한 자이니 거짓으로 자네들을 현혹하지 않아.”

이산래가 나에게 눈짓했다.

그래, 고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흔들리지만 않으면 되는 일이다. 섞이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리자.

손이 하얗게 빛났다. 그 빛에 맞추어 은은하게 빛나는 하얀 막이 붉은 글자로 가득한 방 안에서 생겨났다. 이산래가 지시한 대로 두 겹이었다.

“부귀영화를 약속할 순 없지만 그래도 충분한 대가를 치를 것이네. 그대, 젊은 영혼들에게 영광을!”

이산래는 보호막을 확인하자 품속에서 염주를 꺼내 손에 둘렀다. 옅은 붉은 빛을 띠고 있는 수정으로 만들어진 염주였다.

“응? 그러니 이 상자를 열지 않겠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까진 알 수 없는지 상자는 요란하게 떠들어 댔다. 이산래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더니 염주를 두른 손을 뻗었다.

“그래, 좀 애매하지만, 젊은이여!”

손끝이 궤짝과 닿자 작게 불꽃이 일었다. 이산래는 불꽃을 무시했다. 불똥이 휘날리며 상자에 붙어 있는 부적을 태웠다.

“얼른 나를 자유롭게 해 주게나.”

정말 저 궤짝을 열어도 되는 걸까? 불안한 눈으로 이산래를 봤지만 이산래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았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표정이었다. 이산래의 손이 부적으로 돌돌 말린 자물쇠를 잡았다.

화르륵.

불꽃이 일어나 자물쇠를 태웠다. 당연히 자물쇠를 잡고 있던 이산래의 손도 불에 삼켜졌지만 이산래는 아무렇지 않게 손에 힘을 주었다. 깜짝 놀란 건 나뿐이었다. 심지어 오늘마저도 놀라지 않고 눈을 굴리며 방 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특별수사과는 다 이런가? 부디 이게 특별수사과 특유의 안전 불감증이 아니길 빌었다.

덜컹.

자물쇠가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흥분해서 떠들던 궤짝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이산래는 천천히 궤짝을 열었다. 심상찮은 말을 지껄이던 것 치고 궤짝은 맥없이 열렸다.

끼이익…….

녹이 슬다 못해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궤짝이 완전히 열렸다. 뚜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궤짝이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말라며 신신당부하던 이산래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이산래는 인상을 쓰며 궤짝 안쪽을 살폈다. 궤짝이, 아니, 안에 든 것이 기분 좋게 소리쳤다.

“하! 그래, 자네군. 이름이 어떻게 되지? 아냐, 자네의 이름은 아무래도 괜찮아. 자, 젊은이여! 어서 이 저주스러운 서클릿을 벗기게나!”

“오늘 씨.”

이산래는 허리를 굽혀 궤짝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하랑 씨 불러요.”

“네, 네?”

“이건 아시아 쪽이 아니네요. 전문가 뒀다 뭐 합니까? 모르는 건 물어보려고 스카우트했는데.”

이산래는 궤짝 안에 든 물건을 꺼냈다.

……그걸 물건이라 칭할 수 있다면 말이다.

수정염주가 흔들렸다.

이산래는 궤짝 안에서 회색 피부의 머리를 꺼내 들었다. 그래. 머리였다. 시체처럼 핏기 하나 없는 남자는 흰자위가 거의 없는 새까만 눈동자로 유쾌하게 웃었다.

“으하하하!”

영화 소품처럼 생겼다. 그러나 이건 영화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다. 비이성적인 풍경이다. 그러니 목만 있는 남자가 저렇게 웃을 수도 있겠지.

“나를 그렇게 바라만 보지 말고, 이 서클릿 좀 벗겨 주지 않겠나?”

물에 젖은 것처럼 축 늘어진 회색 머리카락 사이로 누런색으로 번쩍거리는 서클릿이 있었다. 워낙 충격적인 모습이라 남자가 그런 장신구를 하고 있는 것도 뒤늦게 보였다.

“이 서클릿을 얼른 내 머리에서 치워 주게나.”

이산래는 머리만 남아서 떠드는 남자가 신기하지도 않은지 궤짝 안쪽을 더 살폈다. 궤짝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걸 확인한 다음에야 허리를 폈다.

그사이에 머리만 있는 남자의 목소리는 점점 애원조가 되었다.

“이 서클릿은 무려 금으로 만들어졌네! 내가 저 상자 안에 갇힌 지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보게, 젊은이. 아직 인간들 사이에선 금의 가치가 뛰어나지?”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시대와 나라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금은 많은 이들이 꿈꾸는 것 중 하나지요.”

마침내 이산래가 머리의 말에 대답했다.

“그럼 됐네!”

머리는 반색하며 외쳤다.

“이 서클릿을 벗겨서 가져가게나! 날 자유롭게 해 준 보답일세!”

이산래는 머리를 든 채 싱긋 웃었다. 절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늘 씨, 하랑 씨한테…….”

“네, 네?!”

“머리가 잘렸고 금을 무서워하는 서양 괴물이 뭐가 있는지 물어보세요.”

오늘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아, 그리고.”

이산래는 뒤늦게 생각났는지 덧붙였다.

“난쟁이에게 받은 금 아직 안 옮겼죠? 확인 작업 끝난 것들만…… 아니지, 그냥 다 가져오라고 하세요. 나 참, 아무리 돌고 돈다지만 그게 이렇게 도움 될 줄 몰랐는데.”

이산래가 혀를 차며 말하자 머리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미 창백한데 어떻게 더 창백해질 수 있는지 신기했다.

“어어어, 아니, 그럼 안 되지! 어허, 젊은이, 우리 대화로 해결하세나!”

이산래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중국에 있는 괴물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잡스러운 게 오다니.”

“어허, 어허! 지금 날 보고 잡스럽다고 하는 건가?”

“귀찮게 됐네요.”

이산래는 혀를 찼다.

분명 괴상하다 못해 광기에 젖어 있기까지 한 풍경이었지만 그런 이산래의 반응 때문인지 나도 차분해졌다. 옆에서 오늘이 태연하게 휴대폰을 들고 문자를 치고 있기 때문인지도…….

잠깐, 이거 나도 특별수사과의 안전 불감증 분위기가 옮은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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