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101화 (101/202)

# 101

30. 종이로 만든 세상(3)

‘……혹시나 싶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산래는 안 그렇게 생겨서 말이 많았다.

‘보통 부정 타니 입에 잘 담지는 않습니다만, 지금은 비상사태니까요.’

그리고 그 말만큼이나 걱정이 많았다.

그게 나쁜 건 아니었다. 이형상수색팀장인 이산래는 이쪽 분야의 전문가였다. 오늘도 이산래보고 대단한 사람이라 치켜세웠지 않은가. 아사달 때도 그렇고, 다리화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이산래의 이야기는 주의 깊게 들을 가치가 있다.

‘만약에, 진짜 만약에 말입니다. 일이 어떻게 꼬여서 바로 못 나오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렇게 되면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겠죠?’

‘그렇겠죠.’

‘그럼 저한테 전화하기도 힘들 거라 생각되어서 미리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역시 말이 많다. 오늘의 상사답게 여태까지는 말을 직설적으로 하더니 이번에는 이상하게 빙빙 꼬았다.

‘일어난 일에는 제가 관여할 수 없지만 아직 일어나기 전의 일이니까요. 그러니까 괜찮을 겁니다. 아마도요.’

빙글빙글 돌긴 했지만 그래도 이산래는 결론을 말하긴 했다.

‘잘 들으세요, 해준 씨, 오늘 씨. 바로 못 나오게 될 경우 룸펠슈틸츠킨는 두 분을 붙잡고 늘어질 겁니다.’

이산래가 걱정하던 일이 결국 일어났다.

* * *

[작은 인간들이 필요하다고?]

“그렇소, 아직 용이 되지 못한 뱀이여.”

[어째서? 그대는 인과의 방향을 바꾸는 존재지 않나. 대가는 내가 지불해야 할 텐데. 왜 작은 인간들이 필요하지?]

이산래는 대처도 말해 줬다.

‘두 분도 룸펠슈틸츠킨을 물고 늘어지세요. 지면 안 됩니다.’

이산래는 거듭 말했다.

‘룸펠슈틸츠킨이 무능하다고 매도하세요. 적어도 그 공간에서는 사실이니까 룸펠슈틸츠킨도 별말 못 할 겁니다.’

꽤 기꺼운 방법이었다.

말꼬리를 잡기 위해 난쟁이와 이무기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힘들지만 말꼬리를 잡기에는 충분했다.

“그 방법에 몇 가지 문제가 있소.”

난쟁이의 말에 다리화는 영 이해가 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문제가 있는가?]

“그건…….”

난쟁이는 버릇처럼 지팡이로 바닥을 치지도 못한 채 미간을 좁혔다.

“이걸 말하는 것조차 불가하오.”

[알려 줄 수 없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대도 모르는 것인가?]

“용이 되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것이 소원이라면 나는 알려 줄 수 있소! 하지만 알려 줄 수 없소. 당신에게는 이 소원이 성립되지 않소. 나는 그런 소원을 들어줄 순 없소.”

난쟁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오늘도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곳에 혼자 내팽개쳐지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그대의 말은 이해하기 어렵군.]

바뀐 점이 없어 보이는 이무기도 사실 우리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난쟁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게 우리가 인간이어서가 아니군.

“그런 고로 여기 인간들이 필요하오.”

논리가 점프한다.

여기까지 와서야 내 논리력을 시험당할 줄이야. 목포역에서 내렸을 때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긴, 이런 이무기가 우릴 잡아 삼킬 줄은 어떻게 알았겠는가. 옆에 있는 오늘을 흘깃 보았다. 오늘도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나는 당신의 말을 들어주되, 들어줄 수 없기 때문이오.”

난쟁이를 무능하다고 매도하는 것 자체는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리화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는 모양이었으니까. 그렇게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 말하고 다니더니……. 용이 될 이무기라는 존재는 난쟁이에게도 버거운 것인가?

[서방에서 온 이여,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가 힘들군.]

다리화는 솔직하게 말했다.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다. 뱀 얼굴을 보고 알아차리는 건 불가능하지만 목소리로는 가능하지. 다리화는 확실히 당황하고 있었다.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알려 주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인가?]

“이 인간들이 필요하다는 것이오.”

[왜 작은 인간들이 필요한가?]

“내가 그대의 바람을 온전히 이루어 줄 수 없기 때문이오.”

도대체 이게 무슨 억지냐고.

그때,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던 오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뭔가 알아차렸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오늘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고민하더니 휴대폰을 들었다. 타닥타닥 문자를 치더니 고개를 들어 날 보았다.

지이잉.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오늘 : 저 미친 할배가 왜 우릴 붙잡았는지 대충 알겠어요.]

욕이라곤 하나도 못 할 것 같은 얼굴로 난쟁이보고 미친놈이라 평하는 걸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맞는 말이지. 오히려 얌전한 표현이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어 웃음을 참으며 오늘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은 다시 문자를 쳤다.

[오늘 : 저 룸펠츄킨어쩌구는 우리를 징검다리로 쓰려는 거예요.]

[오늘 :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리화의 소원을 직접 이뤄 줄 수 없나 봐요.]

[오늘 : 그래서 우리를 거쳐 가려는 거죠.]

나는 하늘을 한 번 보고 땅을 한 번 보았다. 해무 때문에 뿌연 하늘과 사락거리는 종이로 된 풀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을 내쉬는 걸 표현하는 말 중에 땅이 꺼지도록, 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도 사실일까? 한숨을 내쉴 때마다 지면이 낮아질까?

다 부질없는 고민이다…….

[정해준 : 팀장님이 말한 거 기억하죠?]

[오늘 : 매도하는 거요?]

나는 오늘을 보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 저 잘할 자신 있어요!]

그럴 것 같았다.

[오늘 : 팀장님 흉내를 좀 내면 될 것 같아요.]

[정해준 : 거기 팀 혹시 사이가 나쁩니까?]

[오늘 : 팀장님이 청룡님 대하듯 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 사람은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정해준 : 다리화한테는 불쌍하고 무해한 작은 인간이라는 어필을 해야 하니까.]

[정해준 : 적당히 힘내요.]

[정해준 : 알았죠?]

오늘은 네, 라고 대답하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OK 표지판을 든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냈다. 귀가 쫑긋거리는 토끼가 묘하게 오늘을 닮았다. 저 토끼도 오늘처럼 안 그런 척 막말을 할까.

“저, 저기…….”

오늘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손을 슬쩍 들었다.

소원을 들어 줄 수 있네 없네 배배 꼬인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던 난쟁이와 다리화가 말을 멈추었다.

오늘은 목포역에서 나와 만나기 전부터 이미 피곤에 찌들어 있었다. 이틀 동안 여섯 시간 잤다고 했던가? 레몬 사탕을 먹고 잠을 깼지.

나와 만난 다음은? 해무에 휩싸인 세계에서 걸어 다니고, 뛰어다녔다. 그리고 지금은 여름이다. 이무기의 세상에 갇혔다고 해서 계절이 바뀌지 않는다. 즉, 여기도 더웠고 한참을 뛰어다니느라 땀에 절어 있었다.

“저, 저희, 집에, 보, 보내, 주, 면, 안… 될, 까요……?”

그러니까, 지금 나와 오늘은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꽤 불쌍한 몰골이다. 특히 이틀 동안 여섯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는 오늘은 더욱.

“이, 대화, 에선…… 저, 저흰, 필, 요, 없는, 것, 같은데…….”

피곤에 찌들고 땀에 찌든 무해한 인간이 더듬거리며 말하는데 도대체 어느 놈이 무시할 수 있을까.

오늘은 다리화를 보았다. 다리화의 크기가 크기인지라 목이 뒤로 젖혀졌다.

“다, 리화여, 다리화, 여……. 우린, 다, 당신의, 부탁, 은, 들어, 줬, 어요…….”

[그렇지, 작은 인간이여.]

다리화는 부드럽게 말했다. 적어도 다리화는 이 작은 인간들에게 적의를 품고 있지 않았다.

“그, 다음은…… 난쟁, 이와, 이야기, 하, 면, 되지, 않을까, 요……?”

“흠.”

난쟁이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늘의 눈이 난쟁이를 향했다. 난쟁이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왜…… 본, 인이…… 느, 능력이, 없, 는데…… 우릴, 끌, 어, 들이, 시는지……?”

“흠흠.”

나도 사심을 담아 한마디 얹었다.

“오늘 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본인이 못 하면 못 하는 거지, 왜 애꿎은 우릴 걸고넘어지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요.”

“그, 그쵸…….”

툭툭툭.

난쟁이가 못마땅한 듯 이마를 찌푸렸다. 틀린 말도 아니잖아?

원래 맞는 말을 듣는 게 더 아픈 법이지.

“허, 나를 꾀어낸 건 두 사람이지 않나?”

나는 펄쩍 뛰었다.

“꾀어내다니요? 볼일이 있다고 했죠. 누가 소원을 빈다고 했습니까? 멋대로 소원이라고 착각해서 온 건 그쪽 아닙니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죠.”

조금 공격적이었나? 나는 슬쩍 오늘을 보았다. 순식간에 역할이 정해졌다.

“저, 저희는, 집…… 집에, 가, 고, 싶을, 뿐, 인, 데…….”

다리화가 이 상황이 불편한지 몸을 뒤틀었다.

‘다리화는 살생을 하지 않는 이무기입니다. 먹는 것도 풀만 먹어요. 그런 부분에서는 까다로운 성격이거든요. 인간과 살가운 사이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귀여워하기는 합니다.’

이산래의 속성 다리화 강의를 떠올렸다. 마지막에 좀 이상한 말이 섞여 있어서 되물었었다.

‘귀여워한다고요?’

‘코끼리도 인간을 귀여워한다지 않습니까. 그런 거죠.’

인간이 아닌 것들의 기준이란…….

‘그러니까 난쟁이의 무능함을 공격하면서 다리화에게 필사적으로 불쌍하게 보이도록 합시다.’

이산래는 옳았다.

그렇게까지 말해 준 걸 보면 분명 다리화가 난쟁이에게 뭘 원할지도 알았던 것 같은데 왜 말을 못 한 거지.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결국은 우리에게…….”

“집, 에, 가고, 싶, 은데…….”

“독점 시장이라서 질도 떨어진 겁니까?”

“다리, 화여, 다리화여, 야, 약속을…….”

내가 필사적으로 난쟁이의 무능력함에 대해 어필하고 오늘이 최대한 무해한 얼굴로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이산래가 짜 준 필승전략이다.

[으음.]

과연, 다리화는 난쟁이와는 달리 아직 양심이 있어 우리가 말할 때마다 이리저리 몸을 뒤틀었다. 애초에 다리화는 원래 우리를 보내 주려고 했다. 붙잡고 늘어진 건 난쟁이였지.

[서방에서 온 이여.]

다리화는 난쟁이를 굽어보며 입을 열었다.

[이 작은 인간들의 말이 옳다. 이들은 이미 나의 부탁을 충분히 들어주었고, 나는 내 일에 작은 인간들이 끼게끔 둘 생각이 없도다. 이들은 충분히 나를 도왔으니.]

“흠.”

툭툭툭.

지팡이 두드리는 소리가 초조하게 들렸다.

“흠흠.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이여.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나 또한 존중할 것이네. 그렇지만 여기 이들이 없다면 그대가 알고 싶은 건 알려 줄 수 없네.”

“느, 능력, 부, 족…….”

오늘이 작게 속삭였다. 난쟁이가 못마땅한 얼굴로 지팡이로 땅을 두드렸다.

[그건 그대와 내가 차분한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이건 그렇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만.”

[우리에겐 많은 시간이 있네. 대화를 하다 보면 분명 합의점을 찾을 수 있겠지.]

“허,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 흠, 아니지, 그래, 이 일은 안 되겠군. 미안하네, 이건 없던 일로 하지.”

초조하게 바닥을 두드리던 지팡이가 멈췄다. 난쟁이는 다리화에게 우아하게 인사했다.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이여, 그대가 용이 되어 날아오를 날을 기대하지.”

덜컹.

“흠?”

덜컹. 덜컹. 덜컹.

허공에서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묵직한 것들끼리 부딪치는 소리다. 마치 빗장이 걸리는 것처럼 들렸다.

“흐으음?”

난쟁이는 당황한 채로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다리화는 다시 몸을 움직여 난쟁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은 나의 집. 나의 세계. 내 허락이 없다면 그대 또한 나갈 수 없을 것이네.]

“허!”

난쟁이는 기가 막힌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

“다리화여, 다리화여. 저희는 그럼 어떻게 합니까?”

[걱정 말거라, 작은 인간들이여. 너희는 돌려보내 주마.]

“아니, 이러는 법이……!”

난쟁이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싱긋 웃었다.

콰직.

난쟁이는 지팡이를 꽉 쥔 채 종이로 만들어진 풀을 짓눌렀다.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풀을 짓밟던 난쟁이는 짜증이 가득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네, 좋아. 그래, 내가 졌네!”

난쟁이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항복 선언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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