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30. 종이로 만든 세상(2)
[그를 찾거든 내 이름을 크게 부르라.]
다리화는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
“…….”
잔뜩 긴장하고 있던 게 무색하다.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오늘이 먼저 정신을 차렸다.
“누, 누굴, 말하는, 걸, 까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오늘은 휴대폰을 꺼냈다. 할 말만 다 하는 게 아니라 행동도 함께한다. 다리화가 날 똑바로 보며 냄새가 나니 마니 그런 소릴 하는데 내게는 묻지 않는다. 그저 휴대폰을 들고 날 바라봤다. 마치 나보고 선택하라는 듯.
서방에서 온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 이 근처에서 느껴졌고 나도 알고 있을 거라고?
그럼 뻔하지.
서방, 즉 독일에서 온 난쟁이가 나와 함께 기차를 탔지 않던가. 이름도 어려운 룸펠슈틸츠킨. 본인은 쉽게 럼이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그렇게까지 친한 사이가 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다리화와 대화하는 데에는 이산래의 조언이 필요하다. 보고도 해야 하고. 오늘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오늘이 곧바로 통화버튼을 눌렀다.
기다리고 있던 건지 이산래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사람을 찾는 부탁이라고요?”
이산래는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근처에 있고……. 서방에서 온 존재라고요? 이상하네, 입국 신고 들어온 건 딱히 없는데……. 뭔가 짐작 가는 건 없습니까?”
숨겨 봤자 아무 소용없다. 여기서 나가는 게 우선이다. 나는 마른 입술을 축이다 입을 열었다.
“……제가,”
“다리화도 생각이 있으면 0에서 시작하라고 하진 않겠죠.”
“그…….”
“사람을 찾아 달라고 했으면 이름이라도 제대로 알려 줘야 할 거 아닙니까.”
이산래가 답답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해는 하는데 말 좀 하게 해 줘라, 좀.
“그러니까…….”
“다리화가 했던 말을 다시 말해 주세요. 서방에서 왔다고요?”
“그러니까, 그 이무기가 누굴 찾는지는 제가 압니다.”
이산래가 드디어 말을 멈췄다.
“해준 씨가 안다고요?”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난쟁이를 찾는 겁니다.”
기차에서 보았던 키가 큰 난쟁이를 떠올렸다. 키가 큰 난쟁이라니. 이렇게 모순적인 말이 있을까.
“난쟁이요? 어느 난쟁이요? 일곱 난쟁이? 아니면 북유럽의 욕심쟁이들? 다리화가 딱히 찾을 이유는 없는데. 또 누가 있었지?”
이 세상엔 너무 많은 난쟁이가 있다. 가끔 이렇게 치고 들어오는 거엔 영 적응을 못하겠다니까.
“거기 말고요, 독일 난쟁이요.”
“…….”
이산래가 말을 멈췄다. 불길한 징조다.
“……설마 소원 들어주고 다니는 악덕 상인이요?”
역시 유명하다니까.
“네.”
“하……. 그놈은 아니길 바랐는데.”
이산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이라기보다는 욕지거리를 참는 것에 가까웠다.
“그놈을 어떻게 찾아요.”
“저…….”
“아니지, 근처에 있다고 했죠? 이 미친놈이 언제 한국에 들어온 거지?! 신고도 안 하고!!”
화나는 부분이 거기인 건가. 이곳은 역시 잘 모르겠다…….
한참을 불법 체류자 불만을 늘어놓던 이산래는 오늘이 헛기침을 하다못해 짜증을 내고 나서야 멈췄다.
“큼, 좀 흥분했네요. 다들 법 잘 지킵시다. 알겠죠?”
“…….”
“어, 어쩔, 건지, 얘, 얘기나, 하, 세요.”
“저…….”
“큼, 큼.”
말 좀 하자, 이 사람아.
우릴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잘 알겠다. 그러나 굳이 먼 길을 돌아갈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내 휴대폰에는 그 난쟁이 연락처가 있다. 애초에 내가 이산래에게 전화를 하라고 한 것도 다리화와 이야기하는 데 주의할 점을 알기 위해서였지 난쟁이의 행방 때문은 아니다.
“최악의 부탁을 받는 건 피했으니까 그 점은 다행이라고 생각합시다.”
“팀장님이 예상한 최악은 뭐였습니까?”
“부정 타니까 얘기 안 할 겁니다.”
“아, 네…….”
이산래는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두 사람이 거기서 할 수 있는 건 없을 테니 체력 보존에 주력하세요. 룸펠슈틸츠킨 찾는 건 저희가 할게요.”
“아, 그거 말인데요.”
“최대한 빨리 찾도록 하겠습니다. 멋대로 소원 들어주겠답시고 영업하고 다녔나 모르겠네요. 그렇잖아도 겨울에 어느 멍청이들이 저주에 걸려 와서 조금 난감했었는데 이번에는 정식으로 항의할 수 있겠군요.”
“……?”
그 멍청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도대체 어디까지 뻗어가는 건지 모르겠다. 이 부분은 못 들은 척하자.
아니, 이게 아니지. 나는 이산래의 말을 끊을 타이밍을 쟀다. 제발 말 좀 하자.
“금도 많이 가지고 있을 테니 이 김에 벌금도 왕창 때리고…….”
여기도 금에 환장한 건 마찬가지군.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포기했다. 그냥 이산래의 말을 싹둑 자르고 말했다.
“저, 팀장님.”
“네?”
“찾으실 필요 없어요.”
“네?”
“그 난쟁이 부를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
이산래는 잠깐 숨을 고른 뒤 내게 물었다.
“명함, 받았습니까?”
“……네.”
“네, 증거 확보했고요. 두 분 나오는 게 먼저니 제 볼일은 그 뒤에 처리하도록 하죠.”
화난 공권력이란 무서운 법이다. 차가운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재차 말했다.
“부르기 전에 주의사항이 있나 싶어서 전화한 겁니다.”
“그래요……. 그건 잘하셨습니다. 역시 해준 씨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오늘 씨는 안 그런 척하면서 의외로 좀 막나가는 경향이 있거든요.”
“티, 팀장님!”
이산래는 오늘의 외침을 무시했다.
“그럼 난쟁이에게 연락은 바로 됩니까? 되겠죠, 영업 뛴다고 남의 나라에 불법 체류한 놈인데.”
어쩐지 오늘의 화법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알 것만 같았다. 몇 년 동안 이런 상사 아래에 있었다면 아니꼬워서라도 말투를 배울 것 같다.
“주의사항 물었죠?”
“네.”
난쟁이를 향해 분노를 불태우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두 사람 다 잘 들으세요. 난쟁이를 만나면 다리화가 난쟁이에게 소원, 혹은 도움을 요청할 겁니다. 그건 아무래도 좋지만 그 내용을 말하기 전에 거기서 나와야 합니다. 알겠습니까?”
“네, 네에…….”
오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이유가 궁금했다. 이렇게까지 말해 주는데 경고를 무시할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이쪽은 이무기, 혹은 뱀과 난쟁이에 관한 정보는 조금이라도 긁어모아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산래는 쉽게 대답해 주었다.
“다리화가 말할 내용이야 뻔한데 그건 그 난쟁이가 들어줄 수 없는 종류거든요.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전에 나와야 합니다. 소개만 시켜 주고 바로 나와요.”
“……만약 못 나오면요?”
“그럼 망하는 거죠.”
이산래는 진지한 목소리로 가볍게 말했다. 이게 목소리만 나와서 그렇지 얼굴이 보였다면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잠실 타워 아래에서 봤을 때만 해도 좀 더 냉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하긴, 일조권을 두고 청룡과 다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알았어야 했다. 백성찬도 겉보기에는 멀쩡했다. 이 세계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한 세계지 않은가. 다들 속 알맹이가 미쳐 돌아가는 거다.
어깨를 으쓱였다.
남 말 할 때도 아니다.
* * *
휴대폰을 꺼냈다.
곧 대한민국의 공권력에 달궈질 난쟁이는 자신의 운명을 모른 채 금방 전화를 받았다.
“흠. 무슨 일인가?”
“……그쪽에 볼일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
음, 아니다. 이산래는 이무기가 부른다는 말을 난쟁이에게 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나는 말을 바꿨다.
“그, 볼일이 있는데요.”
난쟁이는 반색했다.
“소원인가?”
본인 말대로라면 독점 시장이라는데, 왜 이렇게 소원에 목매는지 모르겠다. 불경기인가?
“비슷한 거죠…….”
여기서 나가는 걸 소원이라고 하면 소원이 있기는 하다. 물론 난쟁이에게 원하는 건 아니지만.
“흠흠. 소원을 이루고 싶은 불쌍한 영혼이 있다면 가 줘야지. 바쁘지만 그 정도 아량은 내게도 있다네.”
난쟁이는 어쩐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기분 나쁜데.
“좋네. 그럼…… 흠? 자네, 지금 어디에 있는 건가?”
“네?”
“특이한 곳에 있군? 어디 결계라도 들어갔나?”
“어…….”
“그래도 이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지. 소원을 이루고 싶은 이들에게는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법. 원하는 이가 있다면 나 또한 존재할 수 있지. 금방 가겠네.”
난쟁이는 즐겁게 말했다. 이산래의 말대로 찾는 이가 이무기라는 말은 난쟁이에게 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진 않았다. 그저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원래 한국말은 끝까지 잘 들어야 한다.
난쟁이가 어쨌든 우린 이무기 앞에 던져 주면 돌아갈 수 있다. 그럼 된 거다. 중요한 건 그거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냥 안개가 아니라 해무라서 그런지 피부에 쩍쩍 달라붙는 공기가 기분 나빴다.
난쟁이는 금방 나타났다.
눈 한번 깜빡할 사이에 난쟁이는 이 안개가 내려앉은 세상에 우뚝 서 있었다.
“흠.”
툭툭.
난쟁이는 지팡이로 종이로 된 풀이 난 바닥을 두드렸다. 난쟁이는 조금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안에 오래 있는 건 좋지 않아.”
오래 있을 생각이 없는 건 여기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날 부른 거면 꺼내 달라는 말인가? 나라면 몰라도 인간들이 여기서 나갈 수는 없겠지.”
난쟁이는 지팡이로 땅을 툭 두드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건 그렇죠.”
“그렇지? 좋네, 그럼 대가는…….”
난쟁이는 다소 조급하게 굴었다. 오래 있고 싶지 않다고 하는 걸 보면 이무기와 마주치는 일을 피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적어도 저 재수 없는 얼굴에 한 방 먹일 수 있겠군.
“다리화여, 다리화여!”
나는 난쟁이의 말을 무시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다리화가 나오면 바로 본론을 말하세요. 기억하세요. 바로 나와야 해요.’
이산래가 몇 번이고 당부했다. 여기서 다리화에 대해 아는 건 그 사람뿐이었으니 객기를 부리는 건 안 좋다.
일이 잘 풀려야 하는데.
……왜 이렇게 불안할까.
“자네?!”
난쟁이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당황하는 꼴을 보니 좀 기분이 좋아졌다. 좋아, 다 잘될 거다.
땅이 덜덜 흔들리기 시작했다. 종이로 만들어진 꽃과 풀이 마구 흔들렸다. 사락거리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바람이 불 리 없는 곳에서 바람이 불었다. 순간 해무가 밀려 공기가 맑아졌다. 한없이 펼쳐진 꽃과 풀이 보였다. 군데군데 있는 빈집들이 스산했다. 바람이 멈추자 다시 해무가 자리를 차지했다.
흰 비늘을 가진 뱀이 긴 몸으로 주위를 빙 휘감았다.
“당신이 찾는 이가 이 난쟁이가 맞습니까?”
다리화는 머리를 가까이 가져와 난쟁이를 보았다. 난쟁이는 지팡이를 꽉 잡으며 눈을 찌푸렸다.
[맞구나. 내가 찾는 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밖으로 내보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내가 그렇게 약속하였으니 그게 도리에 맞는 일이다. 걱정 말거라, 작은 인간아. 너희는 너희 세계에 돌아갈 테니.]
다리화가 움직였다. 뱀과 용 사이의 형태를 가진 이무기는 천천히 움직였다. 거대한 몸이지만 움직임은 물속에 있는 것처럼 부드럽고 무게감이 없었다. 나는 뒤늦게 다리화의 아래에 있는 종이꽃들이 짓눌리지 않고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걸 눈치챘다. 뱀에 좀 더 가까운 모습이라고는 해도 진짜 뱀은 아니니……. 이무기는 다 저런가.
“잠깐!”
난쟁이가 외쳤다.
“아직 용이 되지 못한 뱀이여!”
[무슨 일인가, 서방의 이여.]
“그대가 내게 무얼 요구할지는 이미 알고 있소.”
[그런가.]
“그대의 탐구는 오래되었지 않소? 나도 들어 알고 있소. 그리고 당연히 내게 답을 요구할 것이오.”
다리화의 시선이 우리를 떠난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좋지 못하다. 저 말이 나오기 전에 떠났어야 했는데.
“그대가 내게서 답을 듣기 위해서는 저 인간들이 필요하오.”
난쟁이와 눈이 마주쳤다. 젠장, 저 미친 난쟁이 새끼가…….
“다시 말하겠소. 그대가 용이 되는 법을 알기 위해선 저 인간들이 필요하오!”
역시 인간이 아닌 것들은 죄다 상종할 것이 못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