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99화 (99/202)

# 99

30. 종이로 만든 세상(1)

안개에 휩싸인 세계는 뿌옇기만 하다. 종이로 만든 풀도, 알록달록한 꽃도 그 안개 속에서는 아무 의미 없이 색을 잃었다.

더 이상 드라마고 등장인물이고 큰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문득 생각하곤 한다.

과연 그 빌어먹을 드라마에서는 누구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조명해 줬을까? 정해영이 보던 드라마가 케이블에서 방영되는 16부작짜리 한국 드라마라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주인공 측이 아닌 이야기도 해 줄 만큼 분량이 여유로울까?

……명심해야 할 건, 이곳은 드라마에 나오지 않은 사람들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 * *

오늘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 내 모습도 저렇게 보였을 거라 생각하니 별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늘이 날 보며 했을 생각도 비슷하겠지.

불안하게 뛰던 가슴이 진정되자 내가 너무 충동적으로 행동했다는 걸 자동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말간 눈으로 바라보는 오늘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어쩌면 오늘 씨도 전혀 다른 인생을 살고 있을지 몰라요.”

더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내 말에 오늘이 나를 보았다. 동그랗게 떠진 눈이 얼마나 놀랐는지 보였다. 움찔거리던 오늘이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어, 릴, 때부터…… 자, 잘, 보았어, 요. 뭐, 뭐든지요…….”

그렇게 시작된 오늘의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더듬거리면서도 오늘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이야기를 끝냈다.

10년 전에 누굴 잃었는지, 그 뒤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하루하루 살아가기만 했던 것을 누가 구해 주었는지. 그리고 왜 나에게 친절을 베풀었는지까지.

“…….”

오늘이 박서원의 부탁을 받아서 내 뒷조사를 했다는 건 좀 놀라지 않은 건 아니다. 생각해 보면 박서원 입장에서도 내가 그만큼 수상하다는 거겠지. 아니, 내가 아니어도 ‘정해준’은 이미 충분히 수상하다.

오히려 오늘이 조사했다면 다행이다. 난쟁이에게 소원을 빌지 않아도 ‘정해준’의 대략적인 행적을 파악하는 게 가능할 테니까.

“미, 미안, 해요…….”

그래도.

그래도…….

눈앞에 있는 오늘도 불안에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뭐라 하겠는가?

“나도 오늘 씨한테 이상한 소리 했잖아요. 서로 주고받았다고 하죠.”

오늘은 물기에 젖은 눈으로 눈을 깜빡였다. 그 눈을 보고 있으니 아차 했다.

“아니, 오늘 씨 이야기가 이상한 소리라는 건 아니고요…….”

10년 전 참사 때 오늘도 가족을 잃었다. 그런 사람 앞에서 할 말은 아니다.

오늘은 내게 내 세계에서는 자신의 부모님이 살아 있을지 물었다. 그동안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문제였다. 이곳에서는 죽은 가족들은 모두 저쪽에서는 멀쩡히 살아 있다. 산함박에게 죽었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까?

“그러니까, 그, 이상한 소리는 저만 했고요, 서로 숨겨 둔 이야기를 꺼낸 거니까…….”

“무, 무슨, 이야기인지, 아, 알겠, 어요…….”

어떻게 수습하려고 허둥거리며 이야기하자 오늘이 어깨를 들썩이기 시작했다. 오늘이 쿡쿡거리며 작게 웃고 있었다.

“……그냥 같다고 합시다. 어때요?”

도저히 수습이 안 되었다. 오늘의 웃음소리에 머리만 긁적이다가 툭 말했다. 오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래도, 미, 미안하니, 까, 요…….”

나는 내 손에 있는 묵주를 흔들었다. 오늘에게 받은 것만 세 개다. 묵주 둘, 부적 하나. 하나는 장군님 덕분에 못 쓰게 되었다 쳐도, 두 개다. 이미 오늘은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왜 그렇게 줬나 싶었는데 그녀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다. 사과도 받았는데 모른 척하는 건 좀 아니지.

“오늘 씨가 미안할 건 아니죠. 오늘 씨는 그냥 부탁받은 거잖아요?”

“그, 그래도요…….”

“그럼 박서원 씨한테 준 자료, 저한테도 줄 수 있어요?”

내심 흑심을 가지고 말한 건데 오늘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이쪽이 미안할 지경이다.

“어, 어차피, 해준, 씨, 잖아, 요?”

오늘은 당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제, 제가, 아는, 해, 해준 씨는…… 해, 준, 씨뿐이니까…….”

입을 우물거리며 말을 흐리던 오늘은 곧 활짝 웃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러, 니까…… 해준, 씨를, 도, 돕게, 해, 주세요.”

“……도와준다고요?”

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걸? 그래 봤자 오늘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다. 그런데 왜? 그쪽은 그쪽 세상일 뿐이니까.

“네, 대, 대신…….”

내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읽었는지 오늘이 조건을 덧붙였다.

“도, 돌아가게, 되, 면……. 제, 부, 부모, 님이랑…… 친, 구가…… 괘…… 괜찮, 은지, 확… 인, 해, 주세요…….”

웃고 있는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꽉 쥐고 있는 두 손이 보였다.

이곳이 완전히 별개의 세상이라면, 내가 돌아가도 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걸 확인해 봤자 이곳의 오늘의 인생은 그대로다. 저쪽에서 가족이 무사해도 그 소식을 이곳의 오늘에게 전해 주지도 못한다.

최악의 경우 가족마저 아닐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왜 오늘이 저런 말을 했는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래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선택지는 없다.

“……네. 꼭, 확인할게요.”

“네.”

오늘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눈 꼬리에 매달려 있는 눈물이 결국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생글생글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 나도 따라 웃어 버렸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 씨가 날 도와주려면 먼저 이곳부터 빠져나가야겠는데요.”

나는 아까 뛰어왔던 방향을 다시 보았다. 덜덜거리는 진동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이무기는 이 근처에 있다.

“이번에는 도망치지 말고 버텨 봅시다.”

* * *

오늘은 간이 주술이라며 내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썼다. 손바닥이 간질거렸다.

“믿, 음은…… 주, 중요한, 거니까요…….”

또박또박 정자로 쓰인 글자는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벽.

“벼, 벽이, 있, 는, 거, 예요…….”

“벽이요?”

“해준, 씨, 주, 주위에는… 단, 단한, 벽, 이, 있어서…… 아, 아무도, 들어, 가, 지, 못하는, 거예요.”

오늘은 손가락을 떼고 내 손가락을 움직여 말아 쥐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들어 손바닥에 있는 걸 삼키는 시늉을 했다.

“흐, 흔들리더라도, 치, 침범, 하지, 모, 못, 하, 게…….”

“이건 어디 주술입니까?”

“효과! 가, 있, 으면, 부, 부두, 주술이라도, 써먹, 어, 야죠!”

“그건 그렇지만……. 정말 효과가 있긴 합니까?”

"미, 믿음은, 중요, 하다니, 까요…….”

오늘의 눈치를 보며 손바닥에 써진 글자를 삼키는 시늉을 했다. 오늘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해영의 ‘내 새끼’는 저쪽에선 원래 배우였다. 손요운이나 한평원, 한평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오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오늘은? 역시 오늘도 등장인물일까? 저쪽 세계에선 배우인?

“오늘 씨는 무슨 글자 쓰려고요?”

“어? 어, 저, 저는…….”

오늘은 눈을 한 바퀴 굴렸다. 정작 자기 건 생각을 안 했구만.

나는 아까와는 반대로 오늘의 손을 붙잡고 손가락을 세워 글자를 썼다.

승.

“다 이겨먹어야죠.”

눈을 동그랗게 뜬 오늘은 곧 작게 웃으며 손바닥에 써진 글자를 삼켰다.

……만약 오늘이 등장인물이 아니라면, 저쪽 세계의 오늘은 무얼 하고 있을까. 어떤 사람일까. 그 사람도 오늘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작게 웃는 사람일까.

여기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럼 진짜 갈까요.”

“네, 네!”

의미 모를 행동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마음가짐의 문제였는지 떨리는 게 덜했다. 아까보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이무기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지금이라면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저쪽 방향인 것 같네요.”

“네, 바, 발밑, 조, 조심하, 세요.”

“오늘 씨도요.”

천천히, 진동이 들려오는 곳으로 걸어갔다.

“…….”

확실히 거리 감각이 이상하다. 나는 걸어온 방향을 흘깃 돌아보았다. 그다지 걷지도 않았는데 이무기의 그림자가 보였다. 이무기의 세계란 다 이런 건가.

침을 꿀꺽 삼켰다. 오늘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서렸다.

그렇지만 막연하게 다 잘 될 거라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무것도 잘될 것 같지 않은데.

……아무렴 어떤가. 풀 죽어 있는 것보단 훨씬 낫지.

“이제, 보, 보일, 거, 예요.”

오늘이 속삭였다.

오늘의 말대로 이무기의 그림자가 점점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그림자는 조금씩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었고 곧 느리게 기어가는 뱀이 되었다.

짙은 해무 속에서 이무기의 새하얀 비늘이 빛도 없이 반짝였다. 입술을 악물었다.

기억해라.

나에게는 벽이 있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견고한 벽이다.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도 나를 흔들진 못한다.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손바닥을 말아 쥐었다. 아까 오늘이 글자를 써 준 손바닥이다.

눈을 부릅뜨고 이무기를 보았다.

“…….”

검은빛을 살짝 머금은 하얀 비늘은 은은하게 빛났다. 다시 보아도 용보다는 뱀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아직 용은 아니니 당연한 말이다.

이산래는 이무기, 다리화에게 인사하는 방법도 알려 주었다.

‘이름을 부를 때는 항상 두 번 말하세요. 인사를 하고 절을 두 번 하면 됩니다.’

도대체 무슨 책을 보고 공부했는지 궁금하다. 여기서 나가면 꼭 물어봐야지.

오늘과 눈이 마주쳤다.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을 때는 아니지. 나는 숨을 들이켠 후 크게 외쳤다.

“다리화여, 다리화여!”

이무기의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나는 이어 말했다.

“여기, 작은 인간이 인사드립니다!”

땅을 울리던 진동이 멎었다. 천천히 기어가던 하얀 뱀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저만치 가 있던 상체가 움직였다. 이무기의 새까만 눈이 해무를 뚫고 아래로 내려왔다. 꿰뚫을 것처럼 차갑고 날카로운 눈이다.

[누가 나를 불렀느냐.]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렸다. 아사달이나 김유신 때와 비슷하다. 시린 목소리에 몸을 흠칫 떨었다가 정신을 차렸다. 절을 두 번 해야 한다.

식은땀이 가득한 손을 말아 쥐고 무릎을 굽혔다. 한 번, 두 번. 절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작은 인간이 둘이구나.]

“저희는 길을 가다 우연찮게 이곳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곳의 주인은 다리화여, 다리화여, 당신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내가 주인이니라]

여기가 중요하다. 다리화의 기분이 좋다면 사족을 붙이지 않을 테지만 이산래는 그 가능성은 낮다고 했다.

다리화는 몸을 움직였다. 좀 더 우리 쪽으로 머리를 숙였다. 잠실 타워의 청룡을 보았을 때처럼 기이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곳은 내가 도망치지 못하는 곳이니 견뎌야 한다.

벽. 기억해라. 나에게는 벽이 있다.

“우리를 내보내 주실 수 있습니까?”

쿠구구구…….

다리화의 크기를 생각하면 거의 코앞이라고 할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다리화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는 신기한 냄새를 가지고 있구나.]

바로 나가긴 글렀군.

[내가 찾는 이의 냄새도 나는구나.]

다리화는 내게서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거대한 뱀의 머리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를 찾아 준다면 너흴 보내주마.]

오늘과 눈이 마주쳤다. 누굴 찾는지 어떻게 알고?

“다리화여, 다리화여!”

급하게 이무기를 불렀다.

“누굴 찾는지 좀 더 말씀해 주십시오!”

이무기가 머리를 옆으로 기울였다.

[너는 알지 않느냐.]

“네?”

[이 근처에서 느껴져서 급히 왔는데 보이지 않아 찾는 중이었다. 하지만 네게서 냄새가 나니 너는 그를 찾을 수 있겠지.]

다리화는 영문 모를 소리만 늘어놓았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안개 낀 세상 속에서 도대체 누굴 찾아내라는 소린가? 이곳에 우리 말고도 누가 있다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찾는 일은 요원하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 수준이 아니다. 그냥 불가능한 일이다.

작은 인간의 필사적인 외침이 불쌍했는지 다리화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방에서 온 거대한 힘을 가진 존재 말이다. 너는 알고 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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