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29. 해묵은 소원(3)
조금 전만 해도 활기차던 도시는 온데간데없다.
짙은 해무 때문에 앞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겨우 보이는 풀밭과 색색의 꽃들만 여기가 이질적인 공간임을 강조하고 있었다.
“……일단.”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말했다.
멈춘 차 안에서 덜덜 떨고 있어 봤자 이 상황을 타개할 계책은 떠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오늘을 보았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가 아니란 점은 은근히 안심이 되었다.
“일단 내려서 살펴볼까요.”
오늘은 어깨를 움찔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으, 함, 부로, 움…… 직이는, 건, 안, 좋아요…….”
“어떻게 된 건지는 봐야죠.”
차에서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그러다가 박물관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전화는 안 터져도 와이파이는 터졌었지. 여긴 와이파이는 없을 것 같지만 확인은 해 보자.
“오늘 씨, 전화는 돼요?”
그 말에 오늘이 화들짝 놀라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돼, 돼요!”
사실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의외의 말이 나왔다.
“된다고요?”
“네, 네! 시, 신호는, 잡, 혀요.”
“그래요? 그럼 다른 사람한테 연락해 봐요. 지금 목포에 다른 수사관들 많죠?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저 앞까지만 갔다 올게요.”
오늘은 휴대폰을 꼭 쥔 채 날 붙잡았다.
“고, 공포, 영화 보면……. 일행이, 찌, 찢어지면, 다, 죽, 어요…….”
말이 좀 느려서 그렇지 은근히 할 말은 다 한다니까.
어쩔 수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럴 때 할 말은 하나뿐이지.
“같이 갈까요?”
오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둘이 같이 차에서 내렸다. 아스팔트가 깔려 있던 도로가 푸른 평원이 되었다. 걸을 때마다 사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주위를 돌아본다고 해도 해무가 짙어서 보이는 게 없었다. 근처에 바다는 없으니 그냥 안개인가도 싶었는데 묘하게 진득거리는 공기가 거슬렸다. 여기가 어딘진 잘 모르겠지만 바다 근처인가?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며 날 따라오던 오늘이 갑자기 발을 멈췄다.
“오늘 씨?”
“이, 이거……. 지, 진짜가, 아, 니에요…….”
오늘은 발밑을 가리켰다. 알록달록한 꽃들과 풀이 있었다.
“진짜가 아니라고요?”
오늘은 대답을 하지 않고 허리를 숙여 꽃과 풀을 확인했다. 나도 오늘을 따라서 발밑의 꽃과 풀을 자세히 보았다.
오늘이 무슨 말을 하는 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종이네요.”
잘 만들었지만 전부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다. 도대체 여긴 어디지?
그나마 이쪽 방면으로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오늘과 함께 있어서 다행인 건가.
“가지꽃…… 박꽃…… 이, 이건, 고동화, 인가?”
오늘은 꽃들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나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다.
“오늘 씨는 꽃 이름을 잘 아네요.”
“구, 굿당, 장식에…… 사, 사, 사용되는, 지화에요…….”
내 눈에는 다 비슷비슷하게 보이지만 전문가의 눈에는 다른가 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피어 있는 다른 종이꽃을 보았다. 새하얀 꽃. 다른 건 몰라도 이 꽃만큼은 나도 잘 아는 꽃이다.
“이건 저도 알아요. 국화.”
“더, 덤불국화…… 라고, 해요…….”
종이로 만든 새하얀 국화는 해무 속에서도 하얗게 빛났다. 언젠가 보았던 국화와 닮아 있어서 잠깐 시선을 빼앗겼다가 고개를 돌렸다. 내 기억이 아닌 것에 그리 절절맬 필요는 없다.
신경을 돌리기 위해 옆에 있는 다른 꽃을 가리켰다. 흰색이 섞여 있는 탐스러운 붉은색 꽃이었다.
“이건 뭐라고 합니까?”
“아, 그, 그건…. 산, 함박이요…….”
“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왔다. 오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산함박…… 이요…….”
“이 꽃 이름이요?”
“네에…….”
“…….”
“해준, 씨?”
그냥 꽃 이름일 뿐이다. 꽃 이름. 젠장.
신경을 돌리려다가 더 거슬리는 이름을 만나 버렸다. 어느 쪽이 이름을 따온 건지 알 수 없지만 앞으로 절대 저 꽃을 좋아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굿당 장식으로 쓰이는 꽃이라면 잘 보지도 않는 거다.
젠장, 왜 이름이 하필 그래서는.
내 기억이 아니라고 생각하려고 해도 이렇게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내가 이곳의 ‘정해준’과 나를 구분할 수 없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게 난쟁이에게 묵주를 건네지 않은 이유였다. 무서웠으니까.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목표 대신 박서원과 함께 산함박을 잡겠다고 난리 칠까 봐.
“해, 해준, 씨?”
오늘이 눈치를 살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라 잠깐 놀랐네요.”
“아…….”
“저쪽에 있는 한옥에 한번 가 보고 다시 돌아오죠. 전화가 된다면 이 팀장님께 전화해 보세요. 뭔가 더 알고 계실지 몰라요. 이 분야 전문가시잖아요.”
“네에…….”
오늘이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만졌다. 워낙에 조용해서인지 오늘의 휴대폰에서 전화신호음이 가는 게 들렸다
전화가 연결되길 기다리며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짙은 해무 때문에 뭐가 튀어나올지 예상할 수가 없었다.
“…….”
“…….”
가장 가까운 한옥까지 걸어갔다. 마당이 있는 작은 기와집이다. 내부는 비어 있었다. 하긴 뭐가 나오면 그게 더 문제다.
“전화는요?”
“안, 받아요…….”
“계속 걸어 봐요.”
오늘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이곳이 어딘지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고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긴 우리만 있는 건가?
쿠르르르.
그때,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는 오늘을 붙잡았지만 결국 나란히 넘어지고 말았다. 진동이 멈출 때까지 몸을 낮추고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오늘을 감싸며 가만히 있었다.
“……오늘 씨.”
나는 조용히 오늘을 불렀다.
“저거…… 보이죠?”
“……네, 네.”
꼴깍. 오늘이 침을 삼켰다. 내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쿠르르…….
“여보세요? 오늘 씨? 지금 어디세요?! 오늘 씨!”
오늘이 귓가에 댄 휴대폰에서 이산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대답해 줄 정신은 없었다.
희뿌연 해무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마치 뱀같이 보이는, 커다란 그림자다.
* * *
“…….”
가만히 숨을 죽이고 그림자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휴대폰에서 이산래의 목소리가 애타게 오늘을 불렀지만 대답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오늘은 덜덜 떨다가 전화를 끊었다. 기이한 정적 속에서, 거대한 뱀 형상의 그림자가 기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종이로 만든 풀이 바스락거리며 울어 댔다.
천천히 기어가던 그림자가 사라진 후에도 한참동안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건 뭐였지? 뱀?
‘으아아악!!’
귓가에 윙윙거리며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나 오늘의 목소리는 아니다. 나 말고 다른 이가 기억하고 있는 목소리다. 주택단지 사이를 기어가는 까맣고 거대한 뱀…….
주먹을 꽉 쥐었다. 정신 차리자. 해무가 껴서 그림자만 보였을 뿐 모습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놈이 아닐 수 있다.
……만약 그놈이라면? 아니, 진정하자. 내 가족은 모두 멀쩡히 살아 있다. 내 가족은.
“해, 해준, 씨?”
“……아. 죄송해요. 괜찮아요?”
“네, 네…….”
오늘이 일어나는 걸 도와줬다. 오늘은 비틀거리며 일어나서는 그림자가 사라진 방향을 보았다.
“……뭐였을까요?”
“…….”
“오늘 씨?”
“……배, 뱀이나, 이무기, 아, 아닐까요.”
“저게 우릴 이곳에 가둔 걸까요?”
“…….”
오늘은 무어라 입을 열려다가 다물었다. 대신 손에 꼭 쥐고 있던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랫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아까 급하게 전화를 끊었던 이산래의 이름이 액정 위에 떠 있었다.
오늘은 아직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오늘 씨!”
오늘이 뭐라고 답하기 전에 이산래가 커다랗게 외쳤다.
“어딥니까?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자, 잠깐만요, 티, 팀장님…….”
“전화는 왜 끊겼던 거예요?! 어디 다친 곳은 없고요? 그렇지, 해준 씨는? 해준 씨와는 만났어요?!”
이쪽을 바라보는 오늘의 눈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잔뜩 쏟아지는 이산래의 목소리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오늘의 손에서 휴대폰을 넘겨받아 대신 말했다.
“팀장님, 정해준입니다.”
“해준 씨! 다행입니다. 같이 있었군요.”
“오늘 씨와 만나서 이동하는 중에 이상한 곳으로 오게 되었거든요……. 아, 스피커로 돌릴게요. 너무 큰 소리만 내지 말아 주세요. 여기 좀, 그게…….”
휴대폰을 든 채 빈 기와집의 담벼락 아래에 오늘과 나란히 주저앉았다. 아까 그 그림자를 보고 너무 긴장해서인지 벌써부터 지쳤다.
이산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 있었습니까?”
“그…… 실제로 본 건 아니고, 안개 속에서 엄청 큰 그림자를 봤습니다.”
“그림자요?”
“네, 뱀처럼 생긴 그림자요.”
“…….”
이산래는 잠시 말이 없었다.
“팀장님?”
“……주위에 보이는 걸 다 설명해 봐요.”
침착한 목소리지만 묘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보통 일이 아니란 건 잘 알겠다. 모를 수가 없다. 종이로 만들어진 꽃과 풀, 빈집이 가득한 곳이 눈앞에 있는데.
오늘과 내가 더듬거리며 설명했다. 눈에 보이는 건 그것뿐이라서 별로 설명할 건 없었다.
“종이로 만들어진 꽃과 풀이라고요.”
이산래는 말이 없었다. 결국 침묵을 참지 못 한 오늘이 말했다.
“티, 팀장님, 어떻…… 게, 해, 야, 하나요……?”
“안 좋은 소식과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뭐부터 들을래요?”
“어느 쪽을 선택하든 안 좋은 소식과 더 안 좋은 소식은 아니고요?”
“역시 해준 씨는 감이 좋네요.”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다. 이 상황에서 저런 말이 나올 타이밍인가? 역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다 어딘가 하나씩 돈 게 틀림없다. 여태 만났던 사람들은 전부 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보았다는 그 뱀은 이무기입니다. 인간을 잡아먹는 사악한 종류는 아니니 당장 죽진 않을 겁니다.”
이산래는 덤덤하게 말했지만 단어 선택은 영 아니었다.
“당장이요?”
“인간을 죽이진 않는데 거기 주위를 보십시오. 인간이 살 수 있을 거라 봅니까?”
종이로 만들어진 풀. 마찬가지로 종이로 만들어진 알록달록한 꽃. 아무것도 없는 낡은 기와집들.
답은 간단했다.
“……못 살죠.”
“그렇죠? 그러니까 두 분이 거기서 나올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왠지 듣기가 싫어졌다.
“그 세계는 이무기가 만든 겁니다. 일종의…… 집이라고 할 수 있죠. 이동식 집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달팽이 집 같은 거요.”
그걸 여기에 비유할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아까 좋은 소식이라고 했잖습니까.”
“도대체 어디가요?”
“거기 있는 이무기가 말이 통한다는 점이요.”
……역시 미친 건 신라인이나 원나라 인간뿐이 아니었다. 현대 한국인도 당당하게 미쳐 있다. 오늘이 불안한 눈으로 이산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휴대폰을 보았다.
“……나, 나쁜, 소, 식은, 요?”
“나쁜 소식은…….”
나쁜 소식이 아직 나온 게 아니었구나.
“모든 대화는 얼굴을 마주해야만 일어난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