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29. 해묵은 소원(2)
“…….”
툭. 툭툭.
난쟁이는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아무도 없는 기차 객실 칸은 기이함만 느껴졌다.
8년 전 ‘정해준’이 빈 소원을 묻는 것도 소원이라면 좀 더 구체적인 걸 묻는 게 낫지 않을까?
예를 들면 지난 10년 동안의 ‘정해준’의 기억을 되살리게 해달라는 종류의?
아니지, 대가도 대가지만 그건 미친 짓이다. 지금도 묵주를 벗으면 짧게 떠오르는 기억에 휘말려 정신을 차리기 힘들다. 여기서 10년 세월을 ‘내’가 떠올리는 건 무모하다.
그럼 기억이 아닌 10년간의 ‘행적’을 알려 달라고 하는 건?
“그건 대가가 좀 셀 텐데.”
난쟁이가 요구하는 대가가 어떤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머뭇거렸다.
그러자 난쟁이가 대뜸 말했다.
“한국 드라마에 자주 나오던 상황이던데.”
드라마라는 소리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개 같은 드라마.
“다들 기억상실증에 걸리더라고.”
“그건 좀 오래된 트렌드인데요.”
“내 나이가 나이다 보니 옛날 게 좋더라고.”
“…….”
그런 문제인가.
“자네도 그런 건가?”
“…….”
“흠.”
난쟁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궁금하지만 말하기 싫다면 괜찮네. 난 고객의 속사정은 어쨌든 좋네. 말 못 할 사정이 있는 고객이 한두 명인 것도 아니고.”
난쟁이는 혼자 말하고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너그러운 얼굴로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좀 기분 나쁜 얼굴이었다.
“행적뿐이라면 감정과 생각까지는 못 알려 주지. 그럼 대가는 좀 나아지지만……. 보자, 그래도 앞으로 10년간 다리를 못 쓰게 될 걸세.”
기각.
아무리 독점시장이래도 이정도면 행패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다가 처음에 했던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애초에 모든 걸 알 필요가 있나?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면. 돌아갈 방법이 있다면,
“그럼 뭐 좀 물어봐도 됩니까.”
얽힌 이야기 정도는 무시할 수 있다.
“소원인가?”
“네.”
집. 우리 집. 평안아파트. 내 가족들이 있는 곳.
“ ”
“……!”
난쟁이가 지팡이를 꽉 쥐며 몸을 빳빳하게 긴장시켰다.
쨍그랑!
동시에 세계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난쟁이가 만든 사람 하나 없는 기차 객실 칸이 부서졌다. 요란한 기차 소음이 다시 들렸다. 화장실에서 돌아오는 남자가 있었고, 꾸벅꾸벅 졸다 못해 완전히 곯아떨어진 여자가 있었다. 창밖의 풍경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쨍그랑! 쨍그랑! 쨍그랑!
그러나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난쟁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저 멀리 어딘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지만 그건 못 들어주겠군.”
쨍그랑, 쨍그랑…….
여전히 깨지는 소리가 낫다. 소리가 멀어지면서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아지긴 했지만……. 단순히 기차에 타고 있어 그 장소에서 멀어져서 그런 건지, 깨져가는 것이 점점 멀어지고 있어선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심상치 않은 소리였다. 무엇이 깨지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더 그렇다. 불길하게만 들렸다.
“너무…… 많은 업이 얽혀 있어. 소리조차 들리지 않아.”
한참 소리를 듣고 있던 난쟁이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나 하나로는 안 돼. 소원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깨져 나가다니…….”
난쟁이는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가 그 소원을 꼭 말해야겠다면 최소한 부담을 덜 것들이 필요하네.”
“부담을 덜…… 것이요?”
“그래. 나 정도 되는 힘을 가진 자나 어마어마한 힘이 집약된 물건 말이네.”
난쟁이의 말에 곰곰이 생각하다가 잠실에 상주 중인 청룡이 떠올랐다.
청룡도 내 부탁 하나를 들어준다고 했었다. 어떻게 된 건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쟁이는 지금 내 소원을 이뤄 주기 힘들다고 말했다. 청룡도 똑같이 말하면 어쩌지? 그때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은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봤어야 했는데.
일단 눈앞에 있는 건 청룡이 아니라 난쟁이다. 이번에는 생각나는 건 다 물어 두자.
“……청룡님은요?”
“흠?”
“청룡님이 계시면요?”
“서울에 있는 용왕 말인가?”
“네.”
“그 용왕님 정도면 괜찮겠군. 하지만 말하는 것만으로도 깨져 버리는 소원이 얼마나 큰 대가를 요구할지는 나도 모르네. 아마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게 필요할 거야.”
그 말 덕분에 이 드라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최초로 떠올렸던 방법까지 생각났다.
여의주. 원래는 여의주를 모아서 소원을 이루어 볼 생각이었다. 결국 이렇게 다시 돌아오는구나.
난쟁이에 청룡, 여의주까지.
한숨만 나왔다.
“……하나 더 물어보겠습니다.”
“소원인가?”
“대가를 들어보고요.”
나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물었다.
“8년 전 제가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알려면 어떤 대가가 필요합니까?”
난쟁이는 한결 편해진 얼굴을 하고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내가 아는 악마라면 대가를 강탈하고 억지로 소원을 이루어 주겠지만……. 나는 그 정도로 악독하진 않네.”
내 입장에서는 난쟁이나 악마나 별 차이가 없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그렇다 치자.
내가 어이없어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난쟁이는 싱긋 웃었다. 보고 있으니 기분이 나빠지는 표정이다.
“대가를 듣고 얼마든지 고민해 보게. 자네가 말한 소원은…….”
지팡이를 잡고 있던 손 하나가 내 손목을 가리켰다. 삐쩍 마른 주름진 손은 창백해서 얼핏 보면 뼈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난쟁이의 손가락은 내 왼쪽 손목으로 향했다.
“그 묵주.”
“……네?”
“그 묵주. 그게 대가네.”
* * *
목포역을 나오자 바다냄새가 훅 풍겼다.
“으, 고, 고생, 많으셨, 어요…….”
그 바다냄새에 휩싸인 채 오늘은 퀭한 얼굴로 나에게 인사했다.
“아뇨…….”
나는 떨떠름하게 인사했다. 못 본 사이에 오늘의 얼굴이 반쪽이 되었다. 그렇게 길게 못 본 건 아니었는데.
오늘은 피곤한 듯 눈을 꾹꾹 눌리다가 말했다.
“도, 도와…… 드린, 다고, 하…… 고선, 자, 자, 자꾸…… 일…… 이, 생, 겨서…… 죄, 송해요…….”
오늘은 말하면서 하품을 했다.
“죄, 죄송…… 해요……. 요, 이, 틀, 동안…… 여섯, 시간…… 잤어요…….”
“괜찮습니다…….”
오늘의 말을 듣자 다른 게 더 걱정되었다. 안전벨트를 매며 오늘에게 물었다.
“……운전 괜찮으세요?”
“네? 네에…….”
오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우, 운전…… 잘, 해요…….”
그런 문제가 아닌데.
어쨌든 오늘은 운전대를 잡았다. 출발하기 전에 주머니에서 레몬 맛 사탕을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엄청 신 모양인지 오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래도 눈이 한결 말똥말똥해진 걸 보면 안심이 되었다. 졸음운전은 위험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입니까?”
“아, 그…….”
오늘의 얼굴이 다시 죽어 갔다.
“그으…….”
고려인들은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일까. 불려 온 이상 원하든 원치 않든 알게 되겠지만 알고 싶지 않은 게 본심이었다.
“이, 이번, 에, 발견된…… 배가, 고, 고려 시대, 상선…… 이거든요…….”
그건 뉴스에서도 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700년 쯤 전에 중국에서 부산으로 가던 배라면서요?”
“네에…….”
오늘은 말을 하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 그런데, 그게…… 너무, 자, 잘…… 가라, 앉, 았어요…….”
오늘의 말은 즉 이랬다.
배가 가라앉았고, 그걸 건져 낸 것까진 좋았다. 문제는 가라앉은 배는 도자기를 잔뜩 실은 배였고, 대부분의 물건들이 파손된 부분도 없이 말끔하게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두 팔을 벌려 환영받은 일이었고, 오늘과 같은 특별수사과의 수사관들에게는 불행이었다. 예정된 야근 스케줄에 수사관들은 시작도 전부터 죽어갔다.
그래도 수사관들은 기록에도 남아 있는 상선이었기 때문에 곤란한 일은 없을 거라 예상했다. 양이 너무 많아 시간이 걸릴 뿐이다…… 라고,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배 가장 밑바닥에서 부적이 덮다시피 한 봉인된 상자를 발견하기 전까지.
“……엄청 불길하게 들리는데요.”
“주, 중국에서, 온, 거니까…… 그쪽, 기록도…… 보, 는, 중인데, 나, 나오는, 게, 없어서…….”
“언제 발견되었는데요?”
“어, 어제 새벽…… 에요…….”
배의 주인이 몰래 옮기던 물건이었는지 비밀의 방 같은 곳에 숨겨져 있었다는데.
이거 왠지…….
“……저주받은 물건을 실어서 배가 가라앉은 건 아니고요?”
어릴 때 TV에서 해주던 미스터리 프로그램에서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있었다. 오늘이 미친 고려인이라고 해서 같이 욕한 게 조금 미안했다. 중국에서 온 배니 미친 중국인이다. 그 시대면 원나라인가? 미친 원나라 인간…….
의심스러운 눈으로 오늘을 보자 오늘은 허리를 꼿꼿하게 편 채 전방만 주시했다.
“오늘 씨?”
“저, 저는, 모, 모, 모르는, 일, 이에요…….”
“그거 더 수상하게 들려요.”
“지, 진짜……. 그, 랬, 을, 수도…… 있, 다고…… 팀, 장님이, 이, 이야기, 하긴, 했, 지만…….”
더 의심스럽다. 그건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 아닌가? 심지어 나까지 불렀잖은가?
왼쪽 손목에서 흔들리는 묵주를 보았다. 그렇잖아도 생각할 게 많은데 도와주질 않는군.
작게 한숨을 내쉬자 오늘이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그래. 700년 전 사람이 비밀의 방을 만들어 저주받은 물건을 옮기긴 했지만 그게 오늘의 잘못은 아니다. 특별수사과의 잘못도 아니지.
그럼 누구의 잘못인가? 정해영? 아니면 8년 전에 난쟁이에게 소원을 빌었던 ‘정해준’?
시원하게 욕이라도 퍼붓게 대상이 명확했으면 좋겠다. 뭔, 점점 갈수록 영문을 모르겠다.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왜 이곳에서 저주받은 상자를 열러 가고 있는가?
살기 싫네, 정말…….
“…….”
오늘이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오늘 씨?”
창밖을 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나는 눈을 깜빡였다. 오늘은 눈을 찌푸리며 앞을 노려보았다.
“왜 그러세요?”
“…….”
오늘을 따라서 앞을 보았다.
“……특별수사과 목포 연구소가 혹시 다른 세계에 있다거나?”
“그, 그럴 리가요…….”
“그렇죠?”
갑작스럽게 멀쩡했던 목포 시내가 해무에 잠겨 희뿌옇게 변했다. 짙은 해무 때문에 바로 앞도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은 날씨였다.
“도대체…….”
심지어 문제는 그게 아니다. 갑작스럽게 낀 해무는 그렇다 쳐도, 하늘에 뜬 달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보통 이정도로 해무가 끼면 달은커녕 해도 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하늘에는 해와 달이 모두 떠있었다.
오늘은 조심스럽게 차를 세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이 사라졌다. 목포 시내를 달리던 차들과 거리의 사람들. 심지어 건물까지.
설마 난쟁이의 장난질에 휘말린 건가? 비록 독점시장의 폐해를 몸소 보여 주긴 했지만 이런 짓을 저지를 놈으로 생각되진 않았다.
“저거 다 한옥이에요?”
“그, 그런, 것, 같은데, 요…….”
사람들과 건물들이 사라진 자리를 꽃들과 빈 한옥들이 채웠다.
아스팔트 도로는 초록색이 싱그러운 풀밭으로, 인도를 장식하던 화단과 가로수는 알록달록한 꽃으로 변했다. 간판이 잔뜩 걸려 있던 건물들은 낡고, 당장이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 같은 빈 한옥으로 바뀌었다.
“…….”
도대체 어디에 온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