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29. 해묵은 소원(1)
날씨가 더워지면서, 그렇잖아도 진작 슈트를 벗어던진 초능력자들의 옷차림이 더욱 가벼워지고 있었다.
“언니, 왼쪽!”
“하앗!”
느루의 이세빈과 이다혜가 합을 맞추는 소리를 들으며 느긋하게 햇살을 즐겼다. 그러면서 슬쩍 임상규를 보았다.
이거 굳이 내가 필요한 일인가…….
나와 눈이 마주친 임상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웃어 봤자 요즘엔 웃는 얼굴에도 침 뱉는 세상이다. 기분이 묘하게 찝찝한데.
“…….”
진짜 내가 필요한 일인가?
이세빈과 이다혜는 합이 좋아 저 둘이 같이 나오는 날이면 다른 초능력자들은 노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까지 포함해서.
위험하다 싶으면 막아 주긴 하지만……. 별로 위험해 보이진 않는데? 이다혜는 이세빈의 고함 소리에 맞춰서 잘 피하고 잘 공격했다. 그렇다고 잡아야 하는 놈이 주위에 피해를 입히는 놈도 아니고.
“…….”
이거 본격적으로 노예로 찍힌 건가.
임상규가 다시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웃지 마, 이 아저씨야. 돌아가면 노래부터 다 삭제할 거야. 다시는 듣지 않을 테다. 씨발, 정해영이 그런 아저씨 노래 듣지 말라고 했을 때 듣지 말걸.
“…….”
비록 할 일은 없어도 눈을 뗄 수는 없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야 하니까.
내가 필요한 일이든 아니든 애초에 그러라고 불려 온 거긴 했다.
“끝!”
물론 예상했던 것처럼 내가 나서는 일 없이 깔끔하게 끝나 버렸지만.
이다혜는 거대한 두꺼비 위에서 내려왔다.
“이 신발 새 신발인데!”
“액땜했네요.”
“지금 말이라고 해요?!”
이다혜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임상규를 돌아봤지만 임상규는 할 일 하기 바빴다. 부하 직원들을 시켜 사진과 동영상을 찍고……. 불쌍한 공무원들.
어쨌든 일은 끝났다. 휴대폰을 보았다. 아까 전화가 온 걸 무시하고 있어서다.
[김석준]
오랜만에 보는 이름…… 은 아니고. 등급 갱신 때문에 연락이 왔었구나.
무슨 일이지? 설마 또 등급 갱신하라는 이야기는 아닐 테고.
임상규에게 대충 인사를 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를 잡았다. 김석준에게 전화를 하자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김석준이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는 대뜸 물었다.
“너 특수과랑 친해?”
그걸 친하다고 해야 하나? 모르는 사이가 아니긴 하지.
“얼굴은 아는데.”
“지원 요청이 왔어. 이번에 고려 시대 상선이 발견됐다는 건 너도 알지?”
휴대폰을 들지 않은 손으로 미간 사이를 꾹꾹 눌렀다. 어제 오늘에게서 온 답장이 생각났다.
[오늘 : 살려 주ㅅㅔ요]
한참 답이 없다가 온다는 메시지가 구조 요청이었다. 조금 기다리니 메시지가 갱신되었다.
[오늘 : 미친 고려인들]
신라에 이어서 고려인들도 미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간이었다. 이 세계에 정상적인 고대인은 존재하는 걸까?
[오늘 : 배가 가라앉았으면… 건져놓지……]
[오늘 : 너무 바빠서 헛소리 했어요ㅠㅠ 죄송해요]
그렇듯 늘 바쁜 특별수사과다.
나에게 지원 요청을 했다는 말에 박물관에서의 안 좋은 추억을 떠올렸다.
[오늘 : 다음 주에 서울 올라가니까 그때 뵈어요]
라는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오늘은 다시 사라졌다.
분명 그랬단 말이지…….
“그렇게 됐으니까 기차 타고 빨리 내려가. 영수증 끊어 오면 경비 처리해 줄게.”
이런 부분까지는 사비가 들지 않아서 다행인가.
“아, 수사관 연락처 줄 테니까 그쪽으로 연락해 놔.”
“그래.”
전화를 끊자 김석준이 보낸 메시지 알림이 반짝거렸다. 연락처라…….
[오늘]
“…….”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운전석을 보며 말했다.
“아저씨, 죄송한데 서울역으로 가 주세요.”
* * *
돈이 가득한 통장이 있다는 건 어딜 급하게 갈 때 귀찮게 짐을 챙기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네, 네. 알겠어요. 지금 기차에 탔으니까…… 내릴 때 연락드리겠습니다.”
내려서 다시 이동해야 하니 오늘이 마중 나오기로 했다. 숙소나 그런 것도 저쪽에서 다 준비한다고 하고. 필요한 건 역 주위에서 대충 사서 가면 되겠지. 괜히 집에 들른다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 이쪽이 편하다. 오늘을 만나면 이것저것 물어볼 것도 있고.
손목에 있는 묵주에게 잠깐 시선을 던졌다가 말았다. 누가 보면 독실한 신자인 줄 알겠군.
낮이라서 그런지 기차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천천히 움직이는 창밖을 보다가 문득 생각나서 휴대폰을 다시 꺼냈다.
연락을 기다리는 곳은 한 군데 더 있다.
내 빈약한 전화번호부 사이에 튀는 이름이 하나 있다.
[난쟁이]
이름은 길어서 적지 않았다. 어차피 내가 아는 난쟁이는 한 명뿐이다.
분명 조만간 연락을 주겠다더니 아직도 소식이 없다. 언제까지 기약도 없이 기다릴 수도 없고, 생각난 김에 내가 먼저 연락해 보자.
난쟁이에게 전화를 걸며 객실 칸을 나왔다.
달칵.
내 긴장과는 달리 난쟁이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
“슬슬 연락을 할까 하고 있었긴 하네만, 이렇게 먼저 전화를 한 걸 보면…….”
수화기 너머로 흠, 하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원을 빌 준비가 되었는가?”
그건 옛날 옛적부터 되어 있었다.
* * *
난쟁이는 알았다고만 하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어이없는 눈으로 시꺼먼 액정을 내려 봤다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했다.
난쟁이 룸펠슈틸츠킨. 이름도 어려운 난쟁이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원을 들어주는 난쟁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부르는 명칭이 더 다양했다. 그러나 어느 소녀의 소원을 들어주다가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 내기로 인해 밝혀진 이름이 유명세를 탔다. 덕분에 난쟁이의 본명, 룸펠슈틸츠킨은 역사서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이름이 되었다.
지금은 전혀 난쟁이 같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새까만 양복을 입은 메마른 노인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난쟁이 모습도 보긴 했지만 키 큰 노인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왜냐, 객실 통로 끝에 서서 날 보고 있었으니까.
“흠.”
여기 달리는 기차 아냐? 알았다는 게 이런 의미였어? 아니, 그보다 내가 기다릴 필요 없이 그냥 전화했으면 됐던 거였어?!
“사람이 너무 많군.”
난쟁이는 혀를 찼다.
“흠흠.”
툭툭.
난쟁이는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난쟁이는 그제서야 흡족하게 웃었다.
“이제 좀 조용하군.”
난쟁이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릴 때마다 주위에 있는 것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날이 밝아 가로등이 하나둘씩 불이 꺼지던 것처럼.
덜컹거리는 기차 소음이 제일 먼저 사라졌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일어나던 남자가 사라졌다. 의자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던 여자가 사라졌다.
창문 밖으로 보이던 풍경이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터널에 들어온 것처럼 새까만 풍경만 비쳤다.
모든 것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반대다. 우리가, 나와 난쟁이 쪽이 사라졌을 것이다.
난쟁이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보았다.
“그럼 이야기를 시작…….”
난쟁이는 말을 멈추고 길게 신음했다.
“……하기 전에, 하나 확인할 사항이 있네.”
“네?”
난쟁이는 시간이 멈춘 기차 객실 통로에 우뚝 선 채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 혹시 나에게 이미 소원을 빈 적이 있지 않나?”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야.
“흠.”
난쟁이는 턱을 매만졌다.
“나는 소원 개수에 제한을 두지 않아. 비록 업이 중첩되어 대가가 가중되어 책정되긴 하지만, 그걸 치를 수 있다면 상관없는 이야기지.”
난쟁이는 지팡이로 바닥을 툭툭 쳤다.
“그러니 맘 편히 대답해도 괜찮네. 책하는 게 아냐. 궁금한 점은 있긴 하지만……. 나에게 소원을 빌었지 않나?”
“…….”
멀뚱히 난쟁이를 보았다. 저 난쟁이는 지금 내가 소원을 빈 적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하지만 난 그런 적이 없다.
그럼 답은 하나지 않은가.
이곳의 ‘정해준’이 빌었을 경우.
“……제가 소원을 빌었다며 당신이 더 잘 알지 않겠습니까.”
가까스로 내뱉은 내 말에 난쟁이는 지팡이 장식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보통은 그렇지.”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분명 자네는 나와 거래했을 거야. 그 부분은 확실해. 희미하지만 흔적이 있거든.”
“…….”
“그런데 또 거래를 한 적이 없단 말이지? 아주…… 이상한 경우야.”
난쟁이는 눈을 가늘게 떴다.
“도서관에서 그 멍청이와 봤을 때는 신규 고객인 줄 알았는데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봤던 얼굴이야.”
“…….”
“분명 흔적도 남아 있는데 말이지…….”
오늘의 말이 생각났다. 지금 나는 혼과 백이 분리되어 있는 상황이라고 했지. 혼은 ‘내’ 것이고, 백은 ‘정해준’의 것이다. 혼인 나는 소원을 빈 적이 없지만 백인 ‘정해준’은 소원을 빌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내 혼에는 흔적이 없을 것이고, 백에는 흔적이 있을 것이다.
난쟁이는 연신 고개를 갸웃대고 있었다.
……궁금해하는 건 난쟁이가 해야 할 일이고, 내게 닥친 사실은 이거다.
‘정해준’은 소원을 빌었다.
‘정해준’이 소원을 빌었다고? 무슨 소원을? 어떤 대가를 치른 거지?
도서관에서 들었던 난쟁이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데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대가로 필요하다.’
지금 여기에 ‘정해준’의 혼은 없다. 그게 어디 갔었는지 고민했던 적이 있다. 내가 여기에 끌려오고, ‘정해준’의 혼이 사라졌다면…….
설마 이것 때문에 내가 끌려온 건 아니겠지?
“흠. 모른 척하는 건지, 모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흔적은 있기 때문에 대가는 좀 더 비싸질 것이네.”
난쟁이는 갸우뚱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설명했다.
젠장, ‘정해준’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몇 가지 되지 않아 그럴싸한 추측을 할 수 없었다.
‘정해준’에 대해 알고 있는 거? 10년 전 강철이한테 가족을 모조리 잃었다는 것? 장례식장에서 박서원과 백 쌍둥이와 함께 복수를 결심했다는 것? 그 후 쌍둥이가 부재 시 백하연을 돌볼 만큼 친했다는 것?
모두 10년 전의 이야기다.
그 이후 10년 동안 ‘정해준’이 어떻게,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는 모른다.
……그 10년을 전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알고 있을 존재가 눈앞에 있다.
“제가 언제 소원을 빌었습니까?”
난쟁이는 살짝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곧바로 대답했다.
“8년 전.”
반면 나는 망설이다가 물었다.
“제가 무슨 소원을 빌었습니까?”
정말 ‘정해준’ 때문에 내가 이곳에 오게 된 걸까? 복숭아고 뭐고 간에 가장 최초의 이유. 내가 원망해야 할 상대.
그게 이곳의 ‘정해준’일까?
“흠”
난쟁이는 입을 다물었다.
“소원인가?”
“네?”
“소원이냐고.”
“…….”
숨을 크게 들이켰다. 진정하자. 짜증 내 봤자 안 풀린다. 눈앞에 있는 이는 수백 년 동안 독일 역사에 오르락내리락한 난쟁이다. 살아온 시간만 따지면 최소 미친 신라인들과 동급이다.
“제가 했던 일을 아는 것도 소원입니까?”
난쟁이는 지팡이로 바닥을 툭 치며 말했다.
“기억 못 하지 않나.”
“…….”
“그렇다면 소원이지.”
순 억지 아냐?
내 중얼거림에 난쟁이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독점시장의 폐해지.”
씨발, 개 같은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