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93화 (93/202)

# 93

28. 다만 악에서(5)

서울이 멸망한다는 깨달음은 내가 이 사람들과 더 어울려봤자 얻는 게 없다는 확신을 주었다. 야박한 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사람은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처음 내가 이곳에 오게 되었을 때를 떠올려 볼까?

여기가 단순한 드라마 속 세상이라 생각했을 때 내 목표는 단 하나였다. 15화에서 주인공 빼고 다 죽으니 그 전에 이곳을 탈출하자고.

이곳이 비록 마냥 드라마 속 세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결심이 변하진 않는다. 왜 서울이 멸망하는지 궁금하기는 해도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면 놓치지 않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서 정해영 등짝을 때리며 들어도 될 일이다. 어쨌든 이곳의 이야기가 저쪽에서는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있으니까.

마지막 화가 방영되면 정해영이 또 득달같이 달려와서 시끄럽게 지껄이겠지.

“뭔가 재밌는 거 있어요?”

“네?”

“아니, 휴대폰 보면서 웃고 일길래.”

김정윤이 내가 쥐고 있는 휴대폰을 가리켰다. 나는 슬쩍 액정을 보았다.

전화번호부. 가족. 아빠. 엄마. 정해영.

화면을 내렸다.

“딱히 없어요.”

김정윤은 어깨를 으쓱이며 폐가를 돌아보았다.

“오래 걸리네요.”

“손요운 씨는 달변가 스타일로 안 보이던데요.”

“그건…….”

친구를 위해 항변하려던 김정윤은 얌전히 입을 닫았다. 한평원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신 대답했죠.

“그건 그렇죠.”

“그래도 뭐…….”

폐가 안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이제 끝났나 보네요.”

드라마인 듯 드라마 아닌 괴상한 세계지만 그래도 드라마적으로 생각하면 풀리는 일들이 몇 개 있다.

예를 들면 이번 일.

손요운의 제안을 친구가 거절할 리는 없다. 그래야 드라마 이야기가 전개되니까.

물론 거절해도 안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16부작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쓸데없이 이야기가 꼬이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야 정해영 수준에 맞지.

정해영처럼 좀…… 어디가 많이 모자란 친구 같은 느낌으로. 어디가 모자라면 착하기라도 해야 하는데 정해영은 인성도 글러 먹었으니 밸런스가 딱 맞다.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공 빼고 다 죽는 드라마가 멀쩡할 리는 없으니까.

어쨌든 봐라. 이 세계는 조금 뻔한 구석이 있다.

“…….”

손요운이 친구와 함께 걸어 나왔다.

손요운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하지만 미묘하게 신뢰감을 주는 소방관 같은 느낌으로 우릴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한 사이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 * *

“끄응.”

차에서 내린 김정윤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허리를 뒤틀었다.

올 때처럼 운전석에 앉은 건 손요운이었고 조수석에 앉은 건 그의 범죄자 친구였다. 뭐라고 이름을 들은 것 같은데 관련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기억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내 일 신경 쓰기도 바쁘니까.

누구 차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는 평범한 승용차였고 자연히 남은 인원 세 명은 뒷좌석에 우겨 탔다. 가위바위보를 통하여 가운데 좌석에 앉은 건 김정윤이었다.

“끄으으응…….”

김정윤은 스트레칭을 쭉쭉 하며 몸을 풀었다. 한평원과 나는 김정윤을 모른 척했다. 승부의 세계는 냉혹한 법.

대신 나는 조수석을 흘깃 보았다. 얼핏 보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의자에 굴곡이 져 있는 것이 보였다. 괜히 같이 있는 모습이 보이면 난감해질 테니 손요운의 친구가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이다.

“해준 씨, 오늘 감사했습니다.”

“저는 별로 한 일이 없는데요, 뭐.”

이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사회인 손요운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 안 막아 주셨으면 틀림없이 놓쳤을 겁니다.”

김정윤이 있는 이상 놓치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었지만……. 서울과 거리가 가까워서 움직일 수 있었지 하다못해 대전까지만 가도 친구를 만나긴 힘들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뭐.

고맙다고 하는 사람에게 아니라고 계속 말하는 것도 웃긴 꼴이라 그냥 어깨만 으쓱였다.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갑자기 부탁드려서 놀라셨을 텐데…….”

“아뇨…….”

이들이 주인공 팀이기 때문에 잘 보일까 고민했던 건데 정해영만도 못한 드라마 전개로 인해 다 죽는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그리고 어차피 내 능력이면 정말 최악의 경우…… 그러니까 15화가 될 때까지 이곳에서 나가지 못한다고 해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내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애초에 왜 주인공만 살아남았을까? 손요운의 능력이 신체 강화 쪽이니 그냥 생명력이 질겨서 살았던 건 아닐까? 바퀴벌레처럼?

……이거 진짜 정해영보다 못한 전개 아냐.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하다더니, 이게 이렇게도 적용되는 말이구나.

“손요운 씨가 하려는 일에 아주 공감을 못 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도 괜히 적을 만들 필요는 없지. 난 정해영과 박서원과는 달리 상식적인 인간이다.

슬쩍 웃으며 말하자 손요운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아무래도 다들 알게 모르게 느끼고 있으니까요.”

대충 손요운이 듣기 좋은 말을 읊어 주자 더 밝아졌다. 양심이 조금 아픈데.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서 동참하거나 하진 못하지만…….”

한평원에게 내 이야기는 들었을 테니 대충 알아듣겠지.

“꼭 하려는 일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조별과제에 업혀 가는 말처럼 들리는데.

나는 다급히 덧붙였다.

“좀 치사하게 들리는 말인 거 압니다만…….”

“아, 아닙니다. 저도 이해합니다. 단청 후원 받으시면 아무래도 사적으로 움직이기 힘드시죠.”

“아……. 네, 아무래도 그렇죠.”

박서원 후원할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여태 몇 번이고 느끼긴 했지만 역시 단청도 나쁜 놈인 게 확실하다. 집에 가서 계약서나 한 번 더 읽어 봐야지. 숨겨진 독소 조항이 있을지도 모른다.

성아영도 그렇고 단청도 의심스럽기는 하지. 아니, 그래. 성아영. 사실은 구민석을 조종하는 숨겨진 실세 같은 거라도 되나?

“오늘 있었던 일은 어디 가서 얘기하진 않을 겁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해준 씨가 그런 사람 아닌 거 압니다.”

그러니까 도대체 뭘 보고? 이상한 사람들이야, 진짜…….

손요운은 잠깐 망설이다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 해준 씨가 어떤 사정인지는 평원이에게 듣긴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네? 아뇨, 뭐…….”

“괜한 참견인 거 알고, 해준 씨가 어떤 일을 하던 저는 막을 자격이 없는 것도 압니다만…….”

보통 알면 말을 하지 않았으면 싶다. 이런 식으로 시작하는 말은 대개 본인이 말하는 것처럼 자격이 없고, 주제넘은 말들이다.

“박서원 씨는 조금 조심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합니다.”

그 새끼는 도대체 이곳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걸까?

정해영, 니 새끼가 이렇게 미친놈이라는데 뭔가 느껴지는 게 없냐?

“박서원 씨가 자비는 인간에게만 베풀라고 말했었지요.”

신선비 때의 일이다.

“그 말을 공감은 합니다. 하지만 저항 의지를 잃은, 항복 의사를 보인 지적 생명체를…… 그러니까, 살해하는 건 다른 문제라 생각됩니다. 사람을 죽이고 공격적인 상태라면 저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압해야 한다는 의견입니다만…….”

박서원은 망설임 없이 신선비를 죽였다. 아마 그 외에도 많이 죽였을 것이다. 일정 기간마다 거처를 옮겨 다녀야 할 정도로 수많은 업이 그의 뒤를 따른다.

“그러니까 너무 가까이하지 않는 편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박서원 씨와는 일적인 부분으로 엮여있습니다. 같은 단청 후원 받는 건 아시죠?”

“……네.”

“저는 박서원 씨와는 달리 선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손요운 씨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살짝 웃었다.

“그러니 손요운 씨는 손요운 씨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세요. 어차피 박서원 씨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박서원이 여의주를 손에 쥐고 있는 악당인 이상 서울의 안위는 위험하다. 적어도 서울을 위협할 일을 벌이긴 할 거다.

설마 드라마 작가가 16화 때 ‘사실 그건 예지몽!’ 같은 미친 전개로 하지 않았다면.

씨발, 돌아가서 정해영 등짝과 함께 방송국도 폭파시킬 거다.

“그…….”

내 말에 손요운이 불안해졌는지 눈이 떨렸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되새겨 보자 불안해할 만한 말이었다.

나는 모른 척 차 안을 턱으로 가리켰다.

“친구분 기다리시겠어요.”

“……네.”

“좋은 변호사를 구해 놓으셨길 빌게요.”

손요운은 그제서야 희미하게 웃었다.

“이미 도와주시기로 한 분이 계십니다.”

믿는 구석이 있긴 했구만.

난 어깨를 으쓱이며 손요운과 그 친구들을 보았다. 한평원과 김정윤. 조수석에 앉아 있는 투명한 친구.

그리고 주위를 지나쳐 가는 사람들. 자동차를 모는 사람들. 근처 카페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

결국 여기 있는 사람들도 손요운 빼고 다 죽는다는 거지?

……기분이 이상했다.

무척이나.

* * *

[오늘 새벽, 절도죄로 수배되었던 초능력자 A씨가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A씨는 지난 23일 은평구의 대형마트 창고 절도범으로 수배되었다가 자수하였다.

A씨는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으며…….]

“어떻게 할까요?”

구민석은 보고 있던 태블릿 PC를 성아영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기사 내려.”

“네.”

“아직 너무 이르지.”

구민석은 우아하게 다리를 꼬며 말했다.

반대편에 앉아 있던 박서원이 코웃음 쳤다.

“죽인 건 아니죠?”

“안 죽였는데.”

구민석은 테이블 위에 있는 유리병을 건드렸다. 캔 음료수만 한 크기의 유리병 안에는 새하얗게 빛나는 조그만 쥐 한 마리가 잠들어 있었다.

“걱정 말게. 적당한 때에 육신에 돌려줄 거니까.”

누군가의 몸에서 떼어져 나온 혼(魂)의 조각은 잠깐 눈을 뜨고 주위를 보았다. 구민석이 그 위로 손을 흔들자 쥐는 다시 잠이 들었다.

“잡아먹지 말고요.”

“허, 내가 그렇게 야만적인 짐승으로 보이나?”

“저지른 짓이 있잖아요, 회장님.”

“부회장이라니까.”

구민석은 소파에 등을 기댔다.

“어쨌든 북천의 그 친구가 적당히 좀 들쑤셨으면 좋겠는데. 괜히 시끄러워지면 귀찮은 일만 생긴단 말이지.”

“그러게 너무 해 먹었다니까요.”

“내가 내 재산 불리려고 한 줄 아나? 모두를 위해 열심히 했을 뿐이지.”

“웃기지 말고요.”

“결과적으로 서원 씨에게도 도움이 되었지 않은가.”

구민석은 싱긋 웃었다.

“그놈만 잡고, 인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나도 깨끗하게 손 털고 돌아갈 걸세.”

“회장님보다 어린 인간 어머니요?”

“부회장이라니까.”

“인간 아버지는요?”

“허, 그딴 인간이 알 바인가?”

박서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구민석을 보았다.

“역시 댁이 손 쓴 게…….”

“안 썼다니까?”

“그럼 왜 간암입니까. 수상하게.”

구민석은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간을 빼먹을 거면 굳이 간암에 걸리게 하겠는가? 먹을 간이면 깨끗한 게 좋지! 그리고 내가 아무리 유능해도 질병에 걸리게 하진 못해.”

“뭐…… 그렇다 치고요.”

박서원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정해준 행적에 영 수상쩍은 구석이 많아요. 분명 그 자식 뭐 숨기고 있어요.”

“딱 봐도 그렇잖나.”

구민석은 음흉하게 눈을 빛냈다.

“자네가 조사했다면 인간 쪽의 기록이겠지? 좋네, 그럼 나는 다른 쪽에 흔적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보겠네.”

구민석은 성아영을 불렀다.

“아영아.”

“네, 그럼 정해준도 조사해 볼게요, 삼촌.”

“뭘 숨기고 있을지 기대가 되는걸.”

구민석이 앉아 있는 소파 주위로 검은 그림자가 스멀스멀 나타났다. 꼬리처럼 보이는 그림자였다. 개수는 모두 여덟. 그러나 구민석 주위로 나타난 것은 없었다.

박서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말하면 우리가 너무 악당 같잖습니까, 회장님.”

구민석은 입술을 비죽이며 꿋꿋하게 말했다.

“회장 아니라니까, 서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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