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28. 다만 악에서(4)
샛노란 오리 인형을 꼭 안은 채 백하연은 입술을 삐죽였다.
‘……어제도 숙제 다 했는데 안 왔잖아.’
‘어제는 오빠들이 바빠서 그래.’
‘정해준’은 무릎을 굽혀 백하연과 눈높이를 맞추며 말했다. 백하연은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그 전에도 바빴잖아.’
‘하연이가 좋아하는 인형 사주려고 오빠들이 몰래…… 아차, 이거 선배가 말하지 말랬는데.’
‘인형? 나 인형 사 줘?’
백하연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정해준’은 난감하게 웃으며 백하연에게 속삭였다.
‘하연이네 오빠가 하연이 깜짝 놀라게 하려고 몰래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지. 좀 있으면 하연이 생일이잖아?’
‘맞아. 나 생일이야.’
‘열심히 선물 준비했는데 하연이가 알고 있으면 오빠들 기분이 어떨까?’
‘음, 실망할까?’
‘그렇겠지?’
백하연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우리 오빠들은 유치하니까!’
‘맞아. 유치하니까 훨씬 어른스러운 하연이가 맞춰 줘야 해. 그치?’
‘응.’
‘오빠가 알려 줬다고 하면 안 된다? 하연이 오빠들이 선물 주면 깜짝 놀란 척해야 해?’
‘나 연기 잘해!’
‘하연이만 믿을게.’
백하연은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다부졌는지 손안에서 오리 인형이 찌그러졌다.
‘정해준’은 백하연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간식 시간이네. 하연아, 선생님한테 가서 간식 달라고 해.’
‘응! 해준 오빠는? 안 먹어?’
‘오빠는 나중에 먹을게.’
백하연은 오리 인형을 달랑달랑 흔들며 복도를 달려갔다. 어지간히 간식이 기대되는가 보지.
‘정해준’은 몸을 일으켰다. 정해준이 움직이는 대로 시야가 움직였다. 허름한 복도. 어디론가 뛰어가는 아이들.
이곳은 어디지? 언제야? 장례식장은 절대 아니고.
복도에 열려 있는 창문을 통해 바람이 불었다. 창문 너머로 맑은 하늘이 보였다. 덥지 않다. 여름은 아니고. 가을인가.
복도를 따라 아이들이 삐뚤빼뚤 만든 종이접기가 붙어 있다. 그 옆을 작은 아이들이 타닥타닥 뛰어서 지나갔다.
어딘지 알 것 같다.
나는 아이들을 따라 걸어갔다.
계단을 하나 내려갔다. 식당은 1층에 있다. 걸어가면서 교실 몇 개를 지났다. 원래 이곳은 학교였다.
예전에는 책상과 걸상으로 채워졌을 교실은 비워져 있다. 그 빈자리를 이부자리가 채우고 있다.
‘엄마아아!’
어디선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엄마를 찾고 있는 소리다.
여긴.
운동장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보였다. 구석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아이들도 보였다.
여기는.
자원봉사자들이 아이들과 놀아 주고 있다. 백하연이 그 속에서 오리 인형을 꼭 쥔 채 간식을 받고 있었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사 준 인형이라고 했던가.
이곳이 어딘지 알고 있다.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도 안다.
강철이 산암에게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임시생활보호소.
즉, 여기는 고아원이다.
* * *
쾅!
“윽……!”
보호막에 누가 부딪쳤다.
덕분에 정신을 차렸다.
“너, 지금 날 가둔 거야?!”
아무것도 없던 곳이 조금 흐려지더니 퀭한 인상의 남자가 나타났다. 손요운이 뒤따라 뛰쳐나왔다.
“이야기하자더니 도망부터 가잖아.”
“나 잡으러 온 거 맞잖아!”
“아니었으면 너 도망갔을 거잖아. 제발, 이야기 좀 하자.”
“…….”
손요운은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이대로 가면 너 진짜 큰일 나. 난 너 도와주려고 왔어.”
남자가 손요운을 보고 있는 동안 나는 슬쩍 손을 흔들었다. 손요운이 티 나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천천히 능력을 풀고 주머니에 있던 묵주를 손목에 둘렀다.
머릿속이 천천히 맑아졌다.
……‘정해준’이 백조 삼 남매를 왜 그렇게 친근하게 느꼈는지 알겠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야기 좀 하자. 다 듣고 결정해. 그때는 말리지 않을 테니까.”
손요운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주춤거리는 남자가 보였다.
“…….”
저긴 둘이서 알아서 하라고 하고.
나는 백하연과 처음 인사했던 날을 떠올렸다.
엄밀히 말하면 처음은 아니지. 그렇지만 내 입장에서는 처음이었다. 단청 회장실에서 백하연과 두 마리 백조와 인사했었다.
한 명과 두 마리 모두 딱히 날 아는 티를 내진 않았다. 어린 백하연과 하던 말을 보면 꽤 살가운 사이였는데. 백조들이야 박서원에게 말을 전해 들었다 쳐도 백하연은 왜지?
……그야 어릴 때 알던 오빠가 갑자기 말을 높이고 학생, 학생 하면 어색할 만도 하지. 거기다 백하연은 지금 말도 못 하니까.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10년 전 임시생활보호소에 있은 이후로 한 번도 보지 않았다든지.
그때 백하연은 겨우 9살이었다. 어릴 때 기억이 있더라도 충분히 낯을 가릴 수 있는 나이다.
곱씹어 볼수록 ‘정해준’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놈은 대학도 가고, 평범하게 구직 활동도 했다.
구직활동……. 그때 썼던 이력서라도 찾아볼까. 졸업하고 뭔가 다른 활동을 했거나 하면 적혀있을 수도 있다. 자소서가 아니라 자소설이라고 해도 뭔가 건질 게 있을지도 모르고.
묵주를 매만졌다.
* * *
한참을 친구와 실랑이를 하던 손요운은 결국 승리했다. 남자는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손요운은 폐가 안으로 친구를 데리고 들어갔다. 대화할 만한 풍경은 아닌 것 같지만…….
“이때 임 팀장님한테 전화 오면 완전 망하는 거겠죠?”
손요운과 그 친구가 이야기를 끝내길 기다리던 중에 한평원이 중얼거렸다. 옆에서 듣고 있던 김정윤이 기겁했다.
“미친, 그런 소름 끼치는 말 하지 마.”
김정윤은 넌더리를 쳤다.
“서울에서 멀리 나온 건 아니니까 질책받진 않겠지만 왜 나왔냐고 물으면…… 아, 말이 씨가 된다잖아! 하지 마!”
“저 거기까진 말 안 했거든요…….”
“어차피 난 그쪽보다 내 후원사에서 전화 오거든? 얼마나 짜증 나는지 알아?”
김정윤은 땅을 툭툭 걷어차며 투덜거렸다.
“네, 정윤 씨. 어디로 몇 시까지 오세요. 누가 우리 고객님 차 긁고 튀었는데 CCTV 뒤지는 것보다 정윤 씨가 더 빠르게 찾잖아요?”
누굴 따라 하는 건지 말투가 정말 재수 없었다.
성적에 맞춰서든 큰 뜻을 품고서든 경찰이던 사람이 보험사 직원에게서 저런 소리 들으면 마음속에 화가 많을 법도 했다. 전직 경찰이 아니더라도 기분 나빠질 만한데.
김정윤이 언제 각성했는지는 몰라도 몇 년 동안 저런 소리를 들으며 일했다면 드디어 폭발할 때가 된 거다.
“씨발……. 난 초능력자라면 다 정부에서 일하는 줄 알았지.”
“정부에서 홍보도 다 그렇게 했는걸요.”
한평원은 김정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단, 위로의 방향이 좀 잘못되었다.
“그래도 누나, 이번에 CF도 찍었다면서요? 얼마 전에 봤어요.”
김정윤은 인상을 팍 썼다. 보험사 광고인가 보네.
“너 누구 놀리냐?”
“왜요. 아는 사람 TV에 나와서 얼마나 신기했는데.”
김정윤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광복절마다 너희 증조할아버지 다큐 방송되잖아. 그건 안 신기하고?”
“증조할아버지보다는 호랑이 할아버지 쪽이 더……? 집에서는 백수 삼촌인데.”
한평원이 부끄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이는 걸 본 김정윤은 맥없이 웃었다.
“그래, 됐다 됐어. 어린애 데리고 내가 뭔 얘길 하겠냐.”
항복 선언이었다.
김정윤의 다음 타깃은 내가 되었다.
“정해준 씨?”
“네?”
“해준 씨는 어때요?”
김정윤은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용은 날 떠보는 게 분명한데.
“해준 씨 원래는 그냥 회사원이었다면 서요? 비상근무 나가는 거 괜찮아요?”
정부에 비교적 강하게 말할 수 있는 특수 능력자인 나 같은 사람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편이 좋긴 하겠지. 하지만 난 이미 그 제안을 거절한 거나 다름없었다. 이쪽 일에도 깊이 발을 들이기에는 힘들고.
문득 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단순한 초능력자 인권 신장이 아니라 좀 더 세부적인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상근무는 강제적인 조항이니 전투를 원치 않는 이들은 원하는 곳에서 근무할 수 있게 해준다는 등.
“적응 못 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거든요. 솔직히 괴물 상대하는 거잖아요? 잘못하면 다칠 수도 있고.”
“뭐…….”
초능력자 제도 개선을 원하는 걸까? 어쩌면 꽤 구체적인 방안까지 나왔을 수도 있다. 지금 손요운과 이야기 중인 그 친구를 이용하여 일을 크게 만든다고 했으니까.
“최소한 진짜 제대로 된 훈련이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뭐, 박서원은 어디서 뚝 떨어지기라도 했는지 잘 싸웠다곤 하는데.”
박서원 이야기가 나오자 옆에서 한평원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박서원도 강성하고 한훈열에게서 능력 제어 방법을 배웠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겠지.
“사람은 적성에 맞는 일이 있잖아요. 꿈을 이루려고 열심히 노력했는데, 잘 쥐고 있던 걸 빼앗겼다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경찰이 되고 싶으셨나 봐요?”
“……네. 그런데 나라에서 강제로 전직시켰잖아요.”
김정윤은 코웃음 쳤다.
“게다가 초능력자 대응도 봐요. 내가 좋은 소리 하겠어요? 저 경찰에 있었을 때도 매년 건의했었어요. 이번에 손요운 친구도 그렇고 안타까운 사건은 종종 있으니까요.”
전직 경찰인 김정윤은 뉴스에 나오지 않은 사건들을 몇 개 알고 있을 것이다. 한숨을 푹푹 내쉬며 입을 열려던 김정윤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
너무 열심히 듣고 있는 티를 냈나. 아쉽네.
김정윤은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큼, 뭐, 옛날에 테러도 있었으니까 대응이 격한 것도 이해는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잖아요.”
그래도 한마디 덧붙이긴 했지만.
테러라. 어느 세계나 미친놈이 있기 마련이다. 지금 되묻지 말고 나중에 검색해 봐야겠다.
그래도……. 대충 짐작 가긴 했다.
이 세계는 편의성으로 점철된 게임이 아니다.
당연히 초능력자의 능력을 봉인하는 편리한 도구 따위는 없다.
중력을 멋대로 조정하고, 손에서 불을 만들어 내거나 비를 내리고. 신체를 강화시키거나 투명해지는 인간을 가둘 수 있는 교도소가 어디 있겠는가?
어마어마한 벌금이나 실형 따위로 강제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가둘 수 있는 감옥이 없는 데 실형이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하고.
참 멋진 세상이지 않은가.
사실 빌더쓰라는 그 드라마는 장르가 초능력자물이 아니라 디스토피아물이나 그런 게 아니었을까?
정해영은 왜……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을까. 사회에 불만이 있나? 아니지, 걔는 그냥 태어났을 때부터 불만투성이인 애다. 정상인의 감각으로 생각하면 안 되지.
“……손요운 씨는 언제쯤 이야기가 끝날까요?”
어색하게 웃고 있는 김정윤이 안쓰러워서 모르는 척 넘어가 줬다. 지금 입장에서 이 사람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은 다 들은 것 같은데.
대계를 꿈꾸는 사람들이 너무 입이 가벼운 거 아닌가 하는 생각밖에 안 든다.
한평원의 보증 수표 때문인가. 경계심이 없어도 너무 없다. 한평원은 내가 딱 잘라 선을 그었는데도 이상하게 믿음을 보낸다. 한평화의 입김이 있었을까?
그보다는 증조부나 한진열이 뭐라 말했을 수도 있다. 특히 호랑이 쪽은 산주인이니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걸 느꼈을 수도 있고.
……이렇게 들어도 어디 가서 말할 생각은 없으니 결과적으로는 문제가 없나.
“이야기 꽤 오래한 것 같죠?”
“잘 설득하면 좋겠네요.”
“요운 형이라면 잘할 거예요.”
손요운과 그 친구가 있는 곳을 흘긋 보았다. 아직 나올 기미는 없다.
디스토피아물이라 하니 생각났는데, 여기 어차피 나중에 최소 서울은 멸망하잖아. 이 사람들이 아무리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결국 소용없는 거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