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드라마의 15화-90화 (90/202)

# 90

28. 다만 악에서(2)

의외의 말이었다.

“잡는 걸, 도와달라고요?”

보통 여기서는 도망치는 걸 도와달라는 흐름 아닌가?

혹시 몰라서 다시 물어봐도 손요운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잡아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자수하게 해야죠.”

손요운은 단호하게 말했다.

최대한 감정을 절제한 채 말하긴 했지만 꽤 친한 친구처럼 들렸었는데. 그런데도 도주가 아니라 자수하게 한다라. 하긴 범죄자의 도주를 돕는 건 범죄지. 드라마 주인공으로 낙점된 인물상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다. 특히나 손요운처럼 정의를 좇아야 하는 주인공이라면.

정의로운 주인공은 친구에게도 똑같이 엄격해야 한다. 비록 나중에 현실과 이상에 좌절하는 모습이 나오더라도.

과연 손요운은 현실과 이상에 갈등하고 좌절하는 캐릭터일까?

“아마 해준 씨는 잘 모를 수도 있겠습니다만.”

손요운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북천에는…… 제 친구가 있는데.”

지금 친구 많다고 나한테 자랑하는 건가?

“원래 경찰이었습니다.”

전직 소방관에 전직 경찰, 그리고 독립운동가 후손이란 말이지. 뻔하다면 뻔하고, 개성 있다면 개성 있고 할 수 있는 조합이다. 여기에 서다흰까지 포함시켜서 주인공 파티인가?

“그 친구가 말해 줬는데, 경찰에는 초능력자 범죄자에 대처하는 행동강령이 있습니다.”

손요운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기분이 안 좋은 걸 보면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것 같다.

저쪽에서는 이렇게 감이 좋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기 와서는 이상할 정도로 적중률이 높다.

“기본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초능력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즉시 제압이 원칙입니다.”

21세기 대한민국 경찰을 설명하는데 어색한 단어들이 들렸다.

나는 혹시 농담하는 건가 싶어 손요운을 보았다.

“능력에 따라 대응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위험한 능력으로 간주될 시 즉시 사살까지 가능합니다.”

“……네?”

이번에야말로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높은 등급의 초능력자일수록 잘못 마음먹으면 피해가 커지니까요.”

“…….”

“특히 불 능력자들이 주의를 받죠.”

매년 겨울마다 불조심 문자를 받는다는 백성찬과 최나라가 떠올랐다.

불 능력자들은 비상근무 때도 항상 물 능력자가 파트너로 붙는다. 불 때문에 붙는 거라 생각했는데, 그 경계 대상에는 불 능력자 본인들도 포함되었던 것일까.

“초능력자 범죄자들은 경범죄라도 특별법이 적용되어 형이 커집니다. 제 친구처럼 생활형 범죄여도요. 그러니 사정이 어떻든 자수하는 쪽이 훨씬 낫습니다.”

“그, 저희는요…….”

한평원이 끼어들었다.

“그래서 요운 형 친구를 찾아서 자수하게 돕고……. 기왕이면 허락을 구해 일을 크게 만들 생각이에요. 본격적으로 초능력자 대우에 대해서 알릴 계획이거든요.”

아무리 생각해도 한평원은 입이 너무 가벼운데. 이게 공포영화라면 쟨 분명 제일 먼저 죽을 거다.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계획 막 알려 줘도 됩니까?”

한평원은 되물었다.

“어디 가서 얘기할 건가요?”

“……아뇨.”

몇 번 말했던 것 같은데 딱히 이야기할 곳도 없었다.

잠깐 입을 다물었다. 손요운과 한평화는 내 안색을 살폈다. 팔짱을 낀 채 하나씩 따져 보았다. 내가 저 둘을 도와줘야 하는 이유. 도와주지 않아야 하는 이유.

“그, 물론 거절하셔도 됩니다.”

손요운이 불쑥 말했다.

“마냥 도와주기엔 힘든 일이란 거 알고 있습니다.”

“…….”

그렇게 말해 봤자…….

나에게는 이들을 완전히 외면하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좋아요, 그럼 제가 도와준다고 합시다. 뭘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는 모르겠지만요.”

드라마 주인공이기도 했고, 이 이야기는 드라마에 나왔을 법했다. 박서원과 한배를 탄 지금 주인공 측의 이야기를 챙겨 봤자 뭐 하나 라는 생각이 안 든 것도 아니지만……. 15화에 주인공만 살아남는다고 정해영이 말했으니 어느 정도 행적을 파악하고 있는 편이 나았다.

설마 정해영이 15화에 대한 내용까지 이상하게 꼬아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박서원을 내 새끼라 지칭하는 바람에 주인공으로 착각했었지만 그런 일은 한 번으로 족하다. 그리고 박서원은 내 새끼라며 좋아라 했지만 15화에서 등장인물이 몰살당하는 이야기에는 작가에게 빡쳐서 욕만 퍼부었으니 경우가 좀 다르다. 원래 사람은 욕할 때 좀 더 진정성이 생긴다.

“그래서 그 친구 능력이 뭐기에 제가 필요한 겁니까?”

손요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투명화입니다.”

“투명, 화?”

손요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투명하게 되는…… 그걸 말하는 거 맞습니까?”

“네. 왜, 영화 보면 나오지 않습니까. 투명인간이요.”

머리가 조금 아팠다. 이곳이 평행 세계 같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지만 이럴 때마다 역시 드라마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치고 올라왔다.

“꽤…… 유용한 능력이지 않습니까. 여러 모로요.”

손요운의 친구가 능력을 사용해 물건을 훔쳤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유용하다고 말하는 건 좀 그렇겠군.

다행히 손요운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등급이 낮으니까요. 딱 5초 동안 완전한 투명화가 가능하고 그 외에는 보호색에 가깝습니다. 사람 눈으로 구분이 가거든요. 그러고 다시 투명해지기까지 시간도 좀 걸리고요.”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럼 그 5초를 붙잡아 달라는 겁니까?”

“네. 사실 저희만으로도 괜찮지 않을까 했는데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수배령 떨어지기 전에 어떻게 붙잡아서 설득해야 합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지요.”

물론 제정신이 아닌 세계라지만 손요운도 살짝 엇나가 있는 것 같은데. 소방관이었다며? 저런 사고방식 괜찮은 건가? 오히려 소방관이기에 만전을 기하는 걸까.

뭐……. 내 알 바인가. 자기 친구 일인데 알아서 하겠지.

“나중에 제 이름이 나오는 일은 없도록 해 주셨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 친구는 어떻게 찾습니까? 능력이 투명화라면서요? CCTV?”

“육안으로는 구분해도 CCTV 화질로는 좀 힘듭니다만…… 방법은 있습니다.”

손요운이 믿음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주인공에게 빚을 지게 만들자.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는 이 세상에서 이런 건 중요하다.

이게 나중에 내 목숨을 구해 줄 수 있지도 않은가? 그 빌어먹을 15화에서.

* * *

“이쪽은?”

“김정윤이라고 해요.”

새까만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하얀 면장갑을 낀 손이다. 수상한데. 드라마적으로도 수상하고 길에서 마주친 사람이라 해도 수상하다.

미심쩍은 눈을 숨기지 못한 채로 손을 내밀어 잡았다.

“그렇게 긴장 안 해도 돼요. 이 장갑은 그냥 버릇 같은 거라서.”

김정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이름은 많이 들었어요. 저와는 같이 일한 적이…… 앞으로도 없을 것 같지만.”

김정윤은 손요운의 한때 경찰이었던 초능력자 친구였다. 이른바 손요운의 소식통이라 할 수 있다.

“아하하, 요운이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김정윤은 킬킬거리며 웃었다.

“저는 이것저것 읽어 내는 걸 잘하거든요.”

“읽어 내는, 거요?”

“네. 물건 한정으로, 거기 얽힌 기억을 읽을 수 있어요. 열두 시간 내에만 가능하지만요.”

김정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경찰에 있었을 때 이런 능력이 있었다면 훨씬 좋았을 텐데.”

“…….”

그러나 곧 고개를 든 김정윤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경찰에 있었을 때 각성하긴 했는데 바로 쫓겨났으니까요! 어차피 계속 일은 못 했겠네요! 아하하하!”

말하는 게 좀 뼈가 아픈데.

“아니, 정해준 씨라고 했죠? 생각해 봐요. 이런 능력이 어디에 제일 필요하겠어요? 바로 경찰 아닙니까, 경찰! 범인을 바로 딱! 딱! 잡아낼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해도 여긴 죽어 자빠진 영혼도 사료로 인정되기는커녕 주석 취급받는 곳이다. 본인 좋을 대로 떠들기 때문이라나. 그런 의미라면 김정윤처럼 개인의 초능력 또한 증거로 인정되기는 힘들 것이다. 이런 면에서는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인 곳 아닌가.

단순히 범인 추적 정도라면 다르겠지만.

“개처럼 부려 먹혀도 최소한 지금처럼 보험사한테 팔려 나가진 않았겠죠!”

……처음 본 사람을 붙잡고 성토할 만하네.

“에라이, 더러워서 진짜 씨팔.”

김정윤은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쌓인 게 많아 보였다.

내가 반쯤 넋을 놓고 김정윤에게 붙들려 있자 손요운이 급히 나섰다.

“이 녀석이 제 친구를 찾는 걸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아, 네……. 그럴 것 같군요.”

“경찰에 복귀하려고 했지만 잘 안 돼서…… 그 뒤로 성격이 좀 저렇게 됐습니다.”

“야! 내가 뭐!”

반듯한 모범생처럼 생겼지만 친구한테는 나름대로 험한 소리를 하는 인간이었군. 새삼스러운 눈으로 손요운을 보았다. 모범생이 조금 인간처럼 보였다.

“젠장, 소방관 복귀하려고 했던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김정윤이 손요운의 다리를 걷어찼지만 손요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능력이 능력이니 아프지도 않겠지……. 두 사람이 투덕거리는 걸 한평원과 보고 있다가 이대로는 끝이 안 날 것 같아서 말했다.

“시간이 그리 넉넉하진 않을 텐데. 출발하시죠?”

“아. 네, 죄송합니다.”

손요운이 사과하며 운전석에 올랐다. 김정윤은 조수석에, 나와 한평원은 뒷좌석에 앉았다.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그렇지만 차는 움직였고, 이제 와서 못 하겠다 할 수는 없었다.

일단…….

주인공 파티를 만난 걸로 위안 삼자.

TV 예능에서 몇 번 본 적 있는 여배우 얼굴을 하고 있는 김정윤을 흘깃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저쪽에서는 도대체 이딴 드라마가 무슨 매력이 있어서 몸값 비싼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 거지? 드라마 작가가 약점이라도 잡았나?

* * *

“친구가 전화로 도둑질했다고 고백하더라고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손요운은 어두운 얼굴로 운전했다. 멀리 움직이진 않았다.

“병원이네요?”

한평원이 차가 멈춘 곳을 보며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손요운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 친구 와이프가 여기 병원 다니거든.”

“아…….”

출산하고 아직 몸이 안 좋다고 했던가. 어쩌면 드라마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게 이 에피소드인지도 모르겠다. 15화를 겨울쯤으로 생각하면……. 아직 초반이려나.

“그래도 아직 수배령 떨어지진 않았으니 얼굴 펴. 그 전에 님이 먼저 설득하시면 되잖아요.”

김정윤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마 저녁쯤에 날 거야. 경찰은 잘렸지만 아직 인맥은 남아 있으니 믿어도 돼.”

손요운의 친구가 저지른 범죄 자체는 경범죄이다. 능력을 사용해서 마트에서 생필품을 훔쳤다고 하니까.

그러나 초능력자 범죄자는 특별법에 따라 처우가 결정된다. 초능력자 범죄자는 범죄 종류에 상관없이 형량이 높다. 장발장처럼 빵 한 덩어리를 훔쳐도 인생이 손 쓸 수 없는 절망으로 굴러떨어지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손요운은 그런 사태를 막고 싶은 거겠지.

“저기, 저 앞으로!”

김정윤이 두어 블록 떨어진 골목을 가리켰다. 손요운이 천천히 차를 몰고 골목으로 들어가자 김정윤이 말을 바꿨다.

“좌회전.”

차가 왼쪽으로 꺾었다.

“직진.”

김정윤은 계속 말했다.

“직진.”

“우회전.”

“좌회전.”

“우회…… 아, 일방통행이야? 그럼 알아서 잘 돌아가 봐. 방향은 우회전이야.”

뒷좌석에 앉은 나는 그냥 눈만 깜빡였다. 한평원이 설명했다.

“그, 정윤 누나는 주위 사물로부터 기억을 읽는 거예요. 접촉은 딱히 필요 없거든요.”

블루투스야 뭐야?

“아, 여기서 차에 탔다. 누구 차지? 본인 차는 아닌 것 같은데……. 모르겠네. 어쨌든 차에 탔으니 속도 낼 수 있겠어.”

손요운이 천천히 속도를 높였다. 차는 김정윤의 말에 따라 골목길을 벗어나 큰길로 나왔다.

김정윤은 눈을 감은 채 내비게이션처럼 말했다.

“직진, 우, 직진, 직진, 음, 유턴, 아…… 주유소 들어갔는데. 혹시 기름 떨어졌어?”

“아니.”

“그럼 좌회전.”

그 모습을 보면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왜 김정윤이 경찰로 복귀하려고 했는지도 알겠고, 왜 복귀가 막혀서 좌절했는지도 알겠다.

이거 완전 사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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