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28. 다만 악에서(1)
흠.
이렇게 전화를 한 걸 보면 역시 내게 말하고 싶은 소원이 있었나 보지?
하지만 내가 제대로 봤다면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다고 본인이 느낀 것 같았는데.
그러니 내게 이렇게 따로 연락하는 것 아닌가?
얼마나 대단한 소원을 빌고 싶기에?
아니면 얼마나 떳떳지 못한 소원이기에?
……중요한 대화는 전화로 하는 게 아니지.
조만간 찾아가겠네.
걱정 말게. 상담료는 무료니까.
그대의 소원, 이 룸펠슈틸츠킨이 이루어 주리다.
* * *
이 세계에서 초능력자의 역사는 대충 100년 정도 되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고, 길다면 길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다.
다른 나라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의 역사는 초능력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 전에도 초능력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진 않았다.
“어, 해준아.”
오랜만에 김석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연수원 동기라고는 해도 내가 초능력자로 각성한 이후 딱히 만날 일은 없었다.
“등급 새로 갱신 받아야지.”
“등급?”
“네 능력 그거 두 겹 가능하다며? 보통 1년에 한 번씩 갱신하긴 하는데 이렇게 눈에 띄는 변화가 있으면 바로 갱신이 가능하니까.”
김석준은 곧 어이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원래 등급산정부서였잖아. 왜 처음 듣는 목소리야?”
“너무 옛날이야기인데.”
“그래 봤자 몇 달 안 됐잖아. 어쨌든 등급 새로 갱신이나 해라.”
“따로 뭐 테스트해야 하냐?”
“그건 아니고. 영상만 남기면 돼.”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다 미뤄 봤자 더 귀찮기만 하다. 대충 일정을 잡았다.
그런데 이 능력, 저주나 영혼한테도 통한다고 말을 해 놔야 하나?
그런 연유로 9등급이 되었다.
고등학교 모의고사 때 이 등급이 나왔다면 좀 많이 슬펐을 텐데. 이게 수능 등급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등급이 올라 봤자 나오는 돈은 똑같이 최저임금이다. 기업 후원을 받을 만큼 특출 난 능력이 아닌 이상 그냥 낮은 등급 받고 일반인처럼 사는 게 낫다.
아들 등급 속이기 때문에 게이트 파문까지 갔던 국무총리인지 뭔지가 생각났다. 어정쩡한 등급이 가장 고통받으니 부모 된 입장에서는 안타까울 수도 있다. 근데 그럴 거면 그냥 법 개정해서 초능력자 대우를 바꾸면 되는 거 아닌가? 국무총리라는 양반이. 이래서 기득권이란.
문득 그때 그 아들내미를 못 알아본 턱에 무식한 놈 취급받은 일이 떠올라 잠깐 고통스러워졌다. 젠장, 사람이 좀 못 알아볼 수도 있지!
“오늘 광화문에서 세종대왕님 세수한대요.”
오랜만에 보는 이진혁 대리가 말했다. 맞은편에서 아메리카노를 쪼르르 마시고 있던 이유나가 대답했다.
“와, 드디어 해요?”
“그거 원래 봄맞이로 하는 거 아닙니까? 이제 해요?”
“해태가 대왕님 무릎에서 안 떨어져서 여태 못 했대요. 이번에 방석도 새 걸로 바꿔 주고, 싹 정리한다더라고요.”
역시 신기한 곳이라니까…….
서울에는 랜드마크를 겸하고 있는 영물이 두 명…… 두 마리 있다. 하나는 잠실 타워의 청룡이고, 하나는 광화문 광장의 해태다.
요즘에는 잠실 타워의 그림자도 사라져 있는 터라 그쪽으로 사람이 더 몰리고 있긴 하지만 광화문 광장의 해태도 인기 면에서는 지지 않는다. 늘 세종대왕 동상의 발치에 앉아 있다가 어느 시민단체에서 커다란 방석을 세종대왕 동상 무릎에 올려 준 이후로는 아주 무릎에서 살고 있다. 그 친근함 덕분에 인기가 늘었다나 뭐라나.
“그 방석 귀엽긴 한데 덕분에 대왕님 세수가 힘들어졌잖아요.”
“귀여우면 된 거 아닐까요?”
이유나는 즐겁게 말했다.
“해태 인형은 북천에서 만들었죠? 아깝다, 전 인형은 해태가 더 좋더라고요.”
“그거 실물이랑 좀 다르지 않아요? 좀 더…… 개 같다고 해야 하나.”
“강아지 같은 거죠.”
“그거나 그거나.”
“좀 더 귀여움을 부각시켰다고 말하죠.”
이유나는 반론을 듣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해태고 인형이고 간에 내가 신경 쓰는 건 그쪽이 아니다. 남해안에서 발견된 배가 생각보다 유물이 많았는지 오늘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뉴스를 틀어 보니 배 안에 있는 물건들 대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다나 뭐라나. 이런 유물이 발견되면 바쁜 건 역사학자뿐만이 아니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사실도 확인했다. 그 배는 고려 시대 상선이다.
오래되기는 이쪽도 마찬가지니 방심할 순 없지만 그래도 신라는 아니지 않은가. 고려 사람들이 신라보다 제정신이길 빌어 보자.
제일 최고는 날 부르지 않는 것이지만…….
인생은 원래 원치 않는 곳으로 굴러가는 법이다.
뭐, 일어나지 않은 일을 고민할 바엔 눈앞에 있는 일이나 집중해야지.
“그래서 월차라도 내고 구경 갈까 봐요.”
이진혁 대리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동상 세수시키는 걸요?”
“해태 보러 가는 거죠.”
“그러니까 굳이요? 해태가 없을 수도 있잖아요.”
이유나는 혀를 찼다.
“대리님, 여자 친구가 간다고 하면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거예요. 토 달지 말고.”
“아니, 그게…….”
이진혁은 난감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잘 갔다 와요.”
그리고 나는 감탄했다.
“와…….”
“왜요?”
“아니, 누구는 거대 지네나 잡고 있는데 여긴 청춘이구나 싶어서요.”
이진혁은 멋쩍게 웃었다. 여전히 치아 관리는 잘하고 있는지 미소가 눈부셨다.
“하하,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이유나가 눈을 치켜떴다.
“부족한 제가 귀한 유나 씨를 만나게 되었죠.”
이진혁의 말에 이유나가 쌜쭉 웃었다.
남의 연애 사정에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기분이 묘했다. 이진혁은 둘째 치고 이유나는 확실히 등장인물 아닌가. 저쪽 세계에서는 아이돌인.
이 연애 전선도 드라마에 나오는 걸까?
아니면?
이곳에서만 존재하는 인간관계인 걸까?
다시 생각해 보니 어느 쪽이든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지 않나. 그냥 잊어버리자. 이유나를 좋아하던 내 친구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면 피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내 몫으로 나온 음료수나 마셨다.
아니면 또 모르지. 이유나가 등장인물이니까 드라마 에피소드 0.5개 정도 할당받았을지도.
아니면……. 됐다.
알아낼 방법도 없는데 신경 쓰다간 내 머리만 아프다.
“아.”
테이블 위에 올려 뒀던 휴대폰에 깜빡깜빡 불이 들어왔다.
“일입니까?”
이진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액정 위로 떠오르는 이름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차라리 일이면 이렇게 당황스럽진 않겠지.
진동 때문에 부르르 떨고 휴대폰을 들었다.
한평원.
이 녀석이 왜 전화를 하지?
* * *
지네잡이 때 있었던 일 때문에 한평원과는 강원도 때처럼 마주하기 힘들 거라 생각했다.
딱 보아도 한훈열은 박서원의 복수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고 그걸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증손녀의 의견은 조금 다른 모양이지만 증손자는 할아버지와 같은 뜻이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한평원이 사실 속으로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었나? 그랬을 수도 있지. 어차피 이 세계의 이야기는 드라마로 옮겨져도 15화에 서울이 망한다는 미친 스토리 아닌가. 중간에 그 정도 조미료가 뿌려져도 이상하진 않다.
일단 이야기를 해 보면 무슨 일 때문에 날 불렀는지 알겠지.
“해준 씨.”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손요운 씨도 있군요?”
한평원의 옆에 손요운도 서 있었다.
엄마가 손요운 얼굴을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한 배우는 구민석인데 손요운은 인상이 달라서 의아해했었다. 내가 그 점을 말하자 정해영이 뭐라고 했더라?
‘잘생기면 다 취향이야.’
아, 네…….
“무슨 일이십니까?”
어차피 초능력자 세계는 좁다. 사이가 나빠도 비상근무 인원은 거기서 거기고 계속 얼굴을 볼 수밖에 없다. 싸우고 어색한 사이가 될 바엔 적당히 얼굴만 아는 직장 동료 사이가 적당하다.
따로 불러낼 정도면 중요한 이야기일까.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조금 실례가 될 수 있는 일입니다만.”
사람들은 실례가 되는 일인 줄 알면 왜 부탁하는 걸까?
손요운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급한 일이 있는데, 혹시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조심스럽다고는 해도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서 묘한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짚고 넘어야 할 점은 확실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먼저 들어 봐도 괜찮겠습니까.”
도장 찍기 전에는 계약서를 잘 읽어 봐야 한다고 배웠다. 아무리 드라마 주인공 패거리라고 해도 대뜸 네, 라고 대답할 순 없다. 그렇게 순진하진 않았다.
주인공 측에 빚을 만들어 놓는 건 환영할 일이지만 그게 내 빚이 되면 곤란하니까.
“그게…….”
손요운이 망설였다. 그러나 한평원이 나에 대한 믿음을 보여 줬다.
“해준 씨라면 괜찮을 거예요, 형.”
저 집안 진짜 괜찮은 건가? 저번에도 아무렇지 않게 가족 이야기를 해서 당황시키더니. 착한 건지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이런 말에 늘 뒤따라오는 것처럼 셋 다일 수도 있고.
“다른 곳에서, 특히 임 팀장님이나 특수과 사람들에게는 이야기하시면 안 됩니다.”
손요운은 뭐가 그리 걱정인지 확 내리깐 목소리로 당부했다. 어리둥절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도와주셔도 이해합니다. 다른 곳에 이야기만 안 하시면 됩니다.”
손요운은 거듭 당부했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드라마 에피소드일 것 같은데. 임상규나 특수과 사람들이라 하면 정부 쪽 인사들이고. 그 사람들 눈을 피해서 뭐라도 꾸미려나?
“제, 친구가 있습니다.”
물론 있겠지. 나도 친구는 있었다. 여기선 없지만.
“얼마 전에…… 초능력자로 각성한 친구인데.”
자, 손요운과 한평원은 초능력자의 인권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여기서 얼마 전 각성한 초능력자 친구가 나오면 이야기가 조금 뻔하지 않은가.
“가정형편이 좀 안 좋습니다.”
그렇지.
“아니, 원래 그렇게 나쁜 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좀 편찮으시긴 한데, 아직 정정하시고 친구 벌이도 나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작년에 결혼도 하고 얼마 전에 애도 낳았습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아도 친구의 인생이 수렁에 빠졌다는 건 잘 알겠다.
“그런데 친구 초능력자 등급이 좀 애매합니다. 4등급이거든요.”
“왠지 뒷이야기를 알겠습니다만.”
손요운은 쓰게 웃었다.
“네, 수입이 갑자기 줄었으니까요……. 아기 낳고 나서 몸이 안 좋아져서 아내도 일을 못 하고 있거든요.”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면 기존에 유지하고 있던 환경도 어느 정도 수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활 수준이라면 유지하는 데도 돈이 든다. 게다가 아기가 태어나면 원래 돈이 많이 든다.
그러니까……. 한국 드라마에 나올 만큼 뻔한 이야기라는 거다.
“결국 친구가 능력을 사용해서…… 도둑질을 했습니다.”
그래.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건 인정해 주자.
하지만 내가 꼭 도와줄 만한 일인가 하면 또 모르겠다.
“그래서 친구를 도망치게 해 달라는 겁니까?”
내 말에 손요운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잡는 걸 도와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