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27. 백조의 모험(4)
난쟁이 룸펠슈틸츠킨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서고 사이를 걸었다.
아까 백조 뒤를 쫓아온다고 깨닫지 못했던 사실을 뒤늦게 하나씩 알아차리고 있었다.
첫째, 아무리 낮이라고 해도 자료실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게 말이 되는가? 직원이 제지한 것도 1층에서였지, 고문헌자료실에서는 만나지 못했다.
둘째, 저 난쟁이는 독일인 아닌가? 왜 자연스럽게 서적을 꺼내서 읽고 있는 거지? 한글을 알긴 하는 걸까? 한문은?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난쟁이인데 사람을 물릴 수도 있는 거고 한글을 알 수도 있겠지. 목 없는 말이 복도를 달리기도 하는데. 이 정도야 뭐.
“…….”
솔직히 볼일은 끝났다. 일언지하에 소원을 거절당한 백주연은 말할 것도 없다. 솔직히 여기서 난쟁이가 뭘 하고 있던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 않나.
그런데 백주연이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아직 볼일이 남은 건가? 백조 주제에?
“안 갑니까?”
백조한테 물었다. 백조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얼굴로 울었다.
“꽤액.”
백조가 뭘 말하려고 하는지 대충 눈치껏 알아들었다. 하지만 별로 알아들은 티를 내고 싶지 않았다.
“쉬었다 가겠다고 하는군.”
난쟁이가 말했다. 아까부터 생각하긴 했지만 역시.
“……동물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인간만 소원을 빌 수 있다는 편견은 버리게.”
동물도 소원을 빈단 말인가? 백주연도 지금은 백조긴 한데 이거랑 그건 다르지.
하긴, 이제 와서 더 놀랄 것도 없다. 그렇지만 매번 놀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곳이 그저 정신 나간 드라마 세계였다면 작가보고 어지간히 하라며 욕을 퍼부었을 것이다. 하긴 애초에 정신이 멀쩡한 작가였다면 서울을 날려 버리지도 않았겠지. 정해영은 이딴 내용의 드라마가 뭐가 좋았던 걸까.
“꽥. 꽤액. 꽥꽥.”
말을 전달해 줄 이가 생겨서인지 백주연은 무어라 더 떠들었다. 난쟁이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긴 했지만 의외로 친절하게 말을 전달해 주었다.
“흠. 집에 가기 싫다고 하는군. 이런 걸 보면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인간들은 이상하단 말이지.”
“꽤애애액!”
“허? 난 내가 그간 보아 온 것들을 바탕으로 아주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네. 감정적인 인간과는 다르지.”
“꽥, 꽥꽤액, 꽥꽥!”
난쟁이는 턱을 긁적였다.
“그땐 내가 아직 혈기 넘치던 시절이라 그렇지. 대가를 후불로 받았던 것도 모자라 내기까지 걸었다니. 아무리 젊은 나라지만 멍청했어. 아, 물론 백조의 저주에 걸릴 만큼 멍청하진 않지.”
일단 백주연이 걸린 저 저주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멍청이들이 걸리는 저주라는 건 알겠다.
한숨밖에 안 나왔다. 난 왜 이 멍청이와 엮인 거지? 차라리 아사달을 찾으러 빗속을 뚫고 산을 올랐을 때가 났다. 하다못해 지네잡이는 멀찍이서 바라봐서 괜찮았는데. 이건 뭐, 떨쳐 낼 수도 없는 게 슬펐다.
“도대체 왜 집에 가기 싫은 건데요? 동생한테 무슨 짓 했습니까?”
“끅.”
백조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뭔가 죽을 짓을 저지른 거죠? 지금이라도 그냥 가서 엎드려 비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꾸웨엑…….”
백조는 풀이 죽어 대답했다. 축 늘어진 목이 안타까울 만도 했지만 진짜 백조가 하지 않을 행동이라 안타까움은 없었다. 다 자업자득이지. 저 난쟁이도 말했지 않은가. 카르마라고.
“난 여기 계속 있을 생각도 없고……. 난쟁이분도 뭔가 찾고 계시는 모양인데, 방해하기 그렇잖습니까?”
“끄으우.”
난쟁이처럼 백조 말은 못 알아듣지만 저게 가기 싫다는 말인 건 잘 알아들었다. 솔직히 백주연이 집에 가든 말든 크게 상관은 없지만 여동생은 죄가 없다. 기억하자. 그 가여운 고등학생을. 장례식장에서 울다 지쳐 오빠 품에 안겨 잠들었던 그 아이를.
그리고 때마침 백하연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까 이상한 소리 해서 죄송해요. 좀 화나는 일이 있어서. 오빠 데리러 갈게요. 어디 계세요?]
나는 백주연에게 휴대폰을 보여 주며 말했다.
“동생 말 좀 잘 들어요.”
“꾸엑.”
“이미 잘 듣고 있다는군.”
“이런 것까진…… 아니, 말을 잘 듣고 있다는 백조가 도망쳐서 집에 가기 싫다고요? 지능에 문제는 없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은데.”
“꽤애애액. 꽥!!”
“자긴 똑똑하다고 하는군.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엔 나도 동의하네.”
“꽤액. 꽥. 꽤애액.”
“그럼 잘 좀 해 보든지요.”
“꽥!”
“나 말고 동생한테요.”
“꾸에엑. 꽥…….”
“반년 정도 됐잖아요? 한창 친구들이랑 어울릴 나이인데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끄윽…….”
“…….”
난쟁이는 가만히 있다가 내게 물었다.
“혹시 자네 동물과 대화할 수 있는가?”
“네? 못 합니다.”
“그런 것치곤 대화가 잘 이어지는데…….”
난쟁이는 수상하다는 눈으로 날 봤다.
나는 난쟁이의 눈빛을 무시하고 백주연이 보고 있는 동안 백하연에게 답장을 보냈다.
[중앙도서관에 있습니다. 거리가 멀다면 제가 가도록 하죠.]
이번에는 답장이 금방 왔다.
[아뇨, 저 가까워요! 근처에 살아서. 금방 갈게요. 감사합니다.]
이 근처 집값을 떠올려 봤다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백조지만 저 쌍둥이도 단청의 후원을 받는 초능력자였다. 이 모양이 되었어도 단청에서 직접 쐐기풀까지 기르면서 도와주고 있지 않던가. 금전적으로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일어나세요, 선배.”
백조는 고개를 푹 숙였다. 혼나러 가기 싫어하는 어린아이 같은 몰골이다.
“그래서 진짜 무슨 짓을 저지른 거라고요?”
무슨 잘못을 저질러서 이렇게 집을 나와서 소원을 빌기 위해 난쟁이한테 왔을까.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에이, 설마.
“꾸으으윽…….”
마침내 백조의 입이 열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난쟁이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흠.”
“꽤액.”
“사고였다는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도 여기선 사실이겠지.
처음 백조 쌍둥이에 대해 말을 들었을 때가 떠올랐다. 여동생이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말에 비극의 시작을 예상했던 그 날.
“형제와 잠깐 다툼이 있었는데…….”
“꽤애애애액.”
“쐐기풀 타래가 엉키면서 만들던 옷이 조금 풀어졌다고 하는데.”
“…….”
“내가 알기로 백조가 된다고 해도 지능이 떨어지진 않는데 최근에 저주가 좀 바뀌었던가? 돌아가면 알아봐야겠군.”
백조는 시선을 피했다.
이쯤 되면 나도 한마디 할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게 어떻습니까, 선배.”
“……꽥.”
난쟁이는 단말마 같은 백조의 울음소리도 통역해 주었다.
“그건 싫다는군.”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 * *
“만약 동생이 실패한다면 그때 다시 찾아오게나.”
난쟁이는 그 말을 끝으로 우릴 쫓아냈다.
굳이 쫓아냈다고 말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순식간에 우릴 둘러싼 풍경이 뒤바뀌더니 난쟁이가 사라졌다. 난쟁이의 빈자리를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사람들과 직원들. 그들을 방해하지 않도록 백주연을 데리고 조용히 자료실을 빠져나왔다.
역시 이상하게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었지. 특별수사과 연구소에 나타났던 장군님처럼 난쟁이가 막아 놓거나 다른 요상한 수단을 썼던 게 분명하다.
“곧 동생이 온다잖아요. 어떻게 사과할지 미리 생각해 놓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도서관 건물을 나와 적당한 벤치에 앉아서 백조에게 말을 걸었다. 백조 주제에 심란한 얼굴을 하고 있다.
“꾸으윽.”
“무슨 소리를 하는진 모르겠지만, 대충 그걸 위해서 난쟁이를 찾아왔다는 소리겠죠?”
백조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뻔하죠. 사람으로 돌아가는 소원을 빌었던데.”
“꽥.”
“새가 돼서 더 단순해진 건진 모르겠지만…….”
원래 정해준이라면 백주연이 어떤 인간이었는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완전히 상관없는 인간이었다. 그렇지만 백조가 아닌 백주연도 지금과 크게 다른 성격은 아닐 것 같았다.
“아까 난쟁이가 말했잖습니까.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대가는 다른 사람의 인생이라고.”
만약 그 왕비가 난쟁이와의 내기에서 지고 결국 아이를 대가로 주었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백조 한 마리를 인간으로 되돌릴 경우 누가 무슨 대가를 치를지 모르잖습니까.”
최악의 경우 백하연이 치를 수도 있는 일이다. 백조는 바닥에 철푸덕 앉아서 기가 죽어 시름거렸다.
그래도 난쟁이가 백주연이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다고 처음부터 거절한 걸 보면 다른 사람에게 불똥이 튀는 종류의 대가인 것 같진 않았지만.
그러나 내가 그런 생각을 백주연에게 말해 줄 의리가 있던가? 그래도 난쟁이를 만나게 해 준 건 고맙다.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난쟁이의 명함을 매만졌다. 전화번호가 박혀 있는 난쟁이 명함. ……문명의 발전이란.
백하연은 도서관에 도착했는지 메시지를 보냈다. 무려 반년 동안 그 고등학생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굳센 의지가 필요한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백조가 갑자기 고개를 바짝 들었다. 백조가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여자애 하나가 근심 어린 얼굴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백하연이다.
백하연에게서 한 열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다른 백조 한 마리가 눈치를 보며 뒤뚱뒤뚱 따라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백하연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입술을 움직였다. 저 정도 문장은 알아보는 데 문제없었다.
“안녕하세요, 하연 학생.”
백하연은 무시무시한 눈으로 백조를 보았다. 백주연은 동생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다가갔다. 백하연이 노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백주연은 머뭇거리며 동생의 다리에 머리를 비볐다.
“꽤애액…….”
이번에는 확실히 뭘 말하려는지 알아들은 것 같다.
“꽥.”
그리고 저 뒤에서 꼴값하지 말라는 얼굴로 뭐라 말하는 백주하의 말도.
“오빠 때문에 고생 많네요.”
그래도 애교를 부리는 백조를 본 백하연의 얼굴이 그저 어둡지만은 않았다. 백하연은 휴대폰을 꺼내 톡톡 두드린 후 내밀었다. 메모 어플에 짧게 글이 쓰여 있었다.
[오빠들도 나 키운다고 고생했으니까 미리 효도한다고 생각하는 중이에요.]
백하연은 배시시 웃었다. 피곤해 보이긴 했어도 어둡지는 않은 표정이다.
10년 동안 이 삼 남매가 어떻게 살아왔을지 생각하면 백하연의 마음도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고등학교 3학년의 오빠들과 초등학교 2학년 여동생 아닌가. 쉽지 않은, 아니, 무척이나 고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통 그런 경우 아이들은 일찍 철들기 마련이다.
“꽤애액!”
……물론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경우도 있지만.
서로 쥐어뜯고 있는 백조를 보니 잠깐 뭉클했던 것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비밀인데, 오빠들 비상금 통장 찾았거든요. 위로금 명목으로 다 빼돌렸어요.]
그래도 백하연이 굳세어서 다행이다. 하긴 백조로 변했다고는 해도 오빠들 목에 개목걸이를 만들어서 채워 놓는 애였다. 조금 걱정을 덜었다.
“그 정도면……. 오히려 부족하지 않을까요? 더 받아도 될 것 같은데.”
백하연은 내 말에 즐거운 얼굴로 웃었다.
백하연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아서 손에 쥐고 있던 리드줄 한쪽을 오빠들의 목걸이에 연결했다. 봐라, 역시 강하다니까.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중에 오빠가 원래대로 돌아오면 꼭 감사 인사 드릴게요.]
“괜찮아요. 아주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죠. 오빠한테도 원래대로 돌아오면 꼭 사과하라고 전할게요.]
백하연은 씩 웃었다. 톡톡 휴대폰을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했다.
[그리고 옛날처럼 그냥 하연이라고 불러 주셔도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