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27. 백조의 모험(3)
까치가 훨훨 날아가고 다시 백조와 단둘이 남았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자고요?”
부리로 깃털을 정리하던 백조는 날 흘깃 보며 꽥, 하고 울었다. 깃털 정리하는 폼이 익숙해 보인다. 원래 인간이라며? 조류 생활에 너무 잘 적응한 것 같은데.
하긴 백하연 겨울방학 때 유럽으로 여행 갔다가 그렇게 된 거라고 하니 얼추 반년은 지났다. 적응하기 싫어도 적응할 수밖에 없는 시간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백하연이 안쓰러워졌다. 반년 동안 말 한마디도 못 했던 고등학교 3학년. 죽이라고 할 만하다.
백하연에게 ‘네?’하고 답문을 하긴 했지만 답장은 없다. 순해 보이는 여고생 입에서 험한 말이 나올 정도의 사고를 치고 도망친 거니 저쪽도 정신이 없겠지.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백조를 보았다.
“그냥 서로 갈 길 가는 건 어떻습니까?”
“꽤애액?”
백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하는 표정이다. 작매가 있었다면 슬쩍 목을 잡아 달라고 사주했을 텐데.
“꽥.”
백조는 목을 빳빳하게 들었다. 그리고 날 무시하고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솔직히 여기서 헤어지고 싶긴 하지만……. 백하연이 생각났다. 걔는 무슨 잘못이야. 한숨을 내쉬고 백조의 뒤를 쫓았다.
백조는 주차장을 벗어나 그대로 걸었다. 뒤뚱거리는 뒷모습이 오리, 내지는 닭이랑 비슷해 보였다. 어차피 같은 새니까 영 틀린 감상은 아니겠지.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서울에서 백조 뒤꽁무니를 쫓아가는 사람 보기는 힘들겠지. 아무렴, 힘들고말고.
백주연은 도서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이 백조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다가왔다. 이해한다. 나 같아도 말렸다.
“저기…….”
어쩔 수 없이 지갑 속에서 초능력자 면허증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요.”
사실 초능력자 면허는 공적으로 아무런 증명이 되지 못한다. 운전면허증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등급이 높은 면허면 대접이 좀 다르긴 하다. 요괴 때문에 경찰들과 자주 움직이다 보니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는 공무원 취급을 받곤 한다.
“아, 그러시군요. 혹시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주세요.”
봐라.
하긴 이정도 접대는 받아야 초능력자들이 얌전히 말을 따르겠지.
“감사합니다.”
도서관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백주연은 알아서 걸어갔다. 도서관에 있는 사람들이 백조를 흘깃 바라봤다. 나 같아도 신기해서 볼 거다.
“꽥.”
그래도 도서관이라고 나름 소리를 죽였다.
나는 다시 한숨을 내쉬며 다가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1층으로 내려온 엘리베이터에는 사람 두어 명이 타고 있었다. 백조를 보고서 주춤거리며 엘리베이터를 나오더니 백조의 뒤꽁무니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간 뒤에 백주연에게 물었다.
“갑자기 궁금해졌는데요.”
“꽥?”
“선배, 지금 옷 벗고 있는 겁니까?”
“꽤애액!”
백조는 날개를 퍼덕였다.
“아, 네. 민감한 질문이었군요. 물어서 죄송합니다. 그래서 몇 층이요?”
“꽥.”
백조는 부리를 실룩이며 울었다.
“꽥. 꽥. 꽥. 꽥. 꽤액.”
다섯 번. 5층을 눌렀다.
“여기 뭔지 알고 가는 겁니까?”
백조는 아무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더 불안했다. 내가 하다못해 백조를 믿어야 하는가? 미친 짓이지.
그러나 어쩌겠는가. 아직 백하연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적어도 이 오빠 한 마리를 동생 품에 고이 안겨 줘야 하지 않겠나. 누가 오빠고 동생인지 잘 모르겠지만.
도서관 5층은 조용했다. 백주연은 여전히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고문헌자료실. 굳이 여기 올 이유가 있나? 초능력이나 각국 전설, 아니지. 여기서는 요괴에 대해 기록한 역사기록들은 지하 자료실에 있다.
그러나 백주연은 거침없었다. 문을 열려고 바둥거리는 게 안쓰러워서 별수 없이 열어 주었다. 혹시 문제가 생기면 단청에 연락하지 뭐. 뒤가 구려 보이지만 대기업이니 어떻게 무마해줄 여력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수습하러 따라온 거고, 사고는 백조가 칠 거다. 아마도.
백조는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람은 없었다. 낡은 종이 냄새가 가득했다.
“꽥.”
그리고 마침내 백조가 멈췄다. 짧게 울음소리를 낸 백조는 발을 탁탁 굴렀다.
고문헌자료실 가장 안쪽, 책장과 책장 사이에 서 있는 검은 양복을 입은 노인이 백조 울음소리에 이쪽을 돌아보았다.
“흠?”
키가 크고 깡마른 서양인이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져 있고 툭 튀어나온 매부리코가 아무리 봐도 고문헌자료실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백조는 이 이질적인 노인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꽥꽥거리며 입을 열었다. 마치 말을 거는 것처럼 길게. 더 놀라운 사실은 푸른 눈의 노인이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참. 백조의 저주라니. 요즘 인간들은 똑똑해서 걸리지 않던데……. 최근 여기에 걸린 멍청이가 있다더니 너로구나.”
인자한 말투였지만 내용은 욕에 가깝다.
나는 노인을 다시 보았다. 흰색에 가까운 회색 머리, 푸른 눈, 매부리코. 역시 서양인인데 입에서 나오는 한국말이 너무 자연스러웠다.
“꽥꽤액. 꽥꽥.”
“흠, 그래……. 그렇지만 말이지.”
노인은 손에 쥐고 있는 지팡이로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지팡이를 쥐고 있긴 하지만 딱히 지팡이에 기대고 있진 않았다. 뻔하지. 분명 인간이 아닐 거다.
“사정은 알겠다만……. 힘들 것 같은데.”
“꽤애액…….”
백조는 반쯤 죽어 가는 소리를 냈다.
“예전에 어느 빌어먹을 왕비가 내 이름을 말한 뒤로 방식을 바꿨네. 모든 소원은 선불이야. 후불은 없어.”
노인은 위험하게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지금 자네는 대가를 지불할 형편이 안 되어 보이는군.”
“꽤액.”
노인은 다시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안타깝지만 원칙은 원칙. 그리고 그 저주는 정석대로 푸는 게 제일 좋아. 혹시 옷을 만들어 줄 가족이 없나?”
“꽤액.”
“그럼 기다리게. 어쩌겠는가. 금언(禁言)과 정성이 둘 다 필요한 저주가 몇이나 있겠나? 그만큼 강력한 저주야.”
“꽥!”
“다 저주에 걸린 본인 잘못이지. 이런 걸 표현하는 말이 있었는데……. 그렇지, 카르마(karma)!”
노인은 손가락을 튕기며 유쾌하게 말했다. 백조는 불만 어린 소리를 냈고 나는 영문을 몰랐다.
일단 소원과 대가가 나온 이상 저 노인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건 잘 알겠다. 그리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저기.”
“흠?”
“죄송합니다만, 누구신지?”
“오, 자네가 저 멍청이의 보호자 되는가? 아니지, 말을 하는 걸 보면 혈육은 아닐 테고.”
“직장 동료입니다.”
“흠, 흠. 그렇군. 나는 이런 난쟁이일세.”
난쟁…… 뭐?
노인은 명함을 내밀었다. 검은 종이에 금박이 멋들어지게 박혀 있었다. 적혀 있는 이름이…… 음.
Rumpelstiltskin. 어떻게 읽는 거야, 이거?
뒷면을 보았다. 번호 하나가 달랑 적혀 있었다.
“저기, 그?”
“아, 명함은 독일어겠군. 룸펠슈틸츠킨이라 부르면 되네. 한국인에게는 어려운 발음인가? 그럼 럼이라 불러도 괜찮네.”
스펠링은 낯설지만 그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있다.
룸펠슈틸츠킨.
소원을 들어준다는 난쟁이의 이름이다.
그래. 난쟁이.
“……키가 크신데요.”
“인간은 신기하단 말이지. 그게 중요한가?”
노인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렸다. 호랑이나 곰이 둔갑을 했을 때처럼 아무 전조 없이 노인의 모습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작아졌다.
키는 내 무릎 정도. 눈이 부리부리한 못생긴 인형 같은 게 나타났다.
……난쟁이네. 난쟁이.
난쟁이는 손에 들고 있는 막대기로 바닥을 걷어차더니 다시 키가 큰 할아버지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때, 믿겠는가?”
“네…….”
나는 백주연을 보았다. 이 난쟁이가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안 거지?
다시 명함을 보았다.
“그래. 자네도 내게 볼일이 있는가?”
소원을 이루어 주는 난쟁이.
“……대가가 선불이라고요?”
“그렇네. 예전에는 형편에 맞추어 후불로 해 주기도 했었는데, 어느 계집애가 나에게 망신 줬지 뭔가. 그래서 그 뒤로는 무조건 선불로 하기로 했네.”
“그럼 대가는 어떻게 결정합니까?”
“소원을 들으면 내가 그에 대한 가격을 책정해 주지.”
“불공정거래 되기 십상으로 들리는 방식인데요.”
“독점시장이 다 그렇지. 안 그런가?”
젠장.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악마와는 달리 꽤나 공정하게 요구한다고 자부하고 있네.”
“그래서 뱃속에 있는 아이를…….”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주었으니 당연히 한 사람의 인생이 대가이지 않겠는가?”
노인은 섬뜩하게 웃었다.
눈앞의 난쟁이에게 소원을 빌었던 여인은 왕비가 되었다. 원래라면 그런 고귀한 신분이 될 수 없는 방앗간 집 딸이었다.
“그럼 누군가를 살리는 소원은 다른 사람의 생명이 필요하겠군요.”
“그렇지! 흠, 이렇게 말귀가 밝은 이를 만나는 건 오랜만인데.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기적을 바란다면 그 정도 대가는 내놓을 각오를 해야 하지 않겠나?”
노인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는 악마처럼 대가로 영혼을 요구하거나 하진 않네. 누군가를 살려 달라는 소원을 빌어도 소원을 빈 당사자의 목숨을 빼앗지도 않아. 그건 너무 잔인한 짓 아닌가?”
그러나 난쟁이가 방앗간 집 딸에게 요구한 건 여인의 첫 아이였다. 여인의 새로운 인생의 대가로 요구한 타인의 인생. 눈앞의 난쟁이가 과연 악마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 옷도 시꺼멓잖아. 사람은 시각적인 정보에 약하다. 매부리코에 새까만 양복. 심지어 있는 장소도 수상하게 도서관 고문서자료실이다.
“만약 당신이 이루어 줄 수 없는 소원이면요?”
기분이 좋아 보이던 난쟁이는 내 말에 인상을 썼다.
“세계평화라도 빌려고?”
“그런 평화주의자는 아니지만요.”
“가끔 그런 정신 나간 놈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보통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못 되지.”
난쟁이는 지팡이로 바닥을 긁었다.
“그리고 흠, 소원을 말했다고 내가 다 들어주는 건 아니지. 방금 저 멍청이의 소원을 거절한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소원이라면 거절할 걸세.”
“꽥!”
“아, 그래. 저 멍청이의 소원은 말도 안 되는 건 아니긴 하지. 하지만 지불 능력이 없으니, 쯧.”
백조는 날개를 퍼덕거렸다.
난쟁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 백주연은 난쟁이에게 본인의 저주를 풀어 주길 요구했다. 그래도 나름 양심이 있긴 한 모양이다. 동생이 고생하는 게 안쓰러웠나 보지. 본인 때문이긴 하지만.
“그래서, 소원은?”
“꽥?”
“…….”
백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봤다.
소원.
소원.
소원…….
순간 혹할 만큼 매력적인 단어였다.
그렇지만 그만큼 걸리는 말도 있었다.
대가라.
난쟁이가 어떤 대가를 요구하든 지금 나에게 그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다면 나는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 한순간의 충동에 빠져들기에는 생각할 거리가 너무 많다.
만약 지금 이곳에 나 혼자 있었더라면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옆에 있는 백조를 보았다. 백주연은 부리로 깃털을 다듬었다. 저걸 보면 그냥 새다, 새.
지금 당장 돌아가지 못하고 대가를 구할 시간이 필요하다면 내 소원을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미친놈 취급받게 되면 앞으로 행동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은 딱히.”
지금은 딱히 말할 수 없다.
“그래? 아쉽구만.”
난쟁이는 별로 아쉽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도 그럴 게, 그 말을 하며 나는 난쟁이가 준 명함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으니까.
“보통 사람들은 날 찾기 어렵거든. 하지만 연중무휴니 찾아만 낸다면 언제든 소원을 들어주지.”
난쟁이는 지팡이로 바닥을 툭 두드렸다.